19.
발루아 산에 오른다고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반란군이 체제를 정비하고 반격의 태세를 끝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큰 동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쪽도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하산하자마자 그랜트 공작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이은 희소식으로 사기가 단단히 올라간 상태에서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휘관들은 제일 먼저 드래곤을 이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폐하, 드래곤을 전장에 내보내심은 어떠하신지요. 거체를 소유한 드래곤이 적진 가운데로 날아가 발을 몇 번 구르기만 해도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드래곤은 외부에 물리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한다.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경들도 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황금색 드래곤이 아무 기척 없이 막사를 날다가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본래 모습은 수백 미터에 이르지만 편의를 위해 1미터 정도로 크기를 줄인 상태였다.
비슷한 크기의 검은 드래곤이 바로 옆자리에 안착했다. 뭔가 검은 드래곤이 황금색 드래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딴생각을 털어내며 지스카르의 의견에 부연 설명을 했다.
“전쟁에 활용할 방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래곤을 억지로 내세워 공격에 나서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그들과 오랫동안 연을 맺고 싶다면 말이다.”
나는 정보를 완전히 풀지 않고 적당히 말을 골라서 했다. 드래곤과 한 몸이 되고 나서야 알았지만 이들은 극도로 온건한 생물이었다. 위협적인 거체로 다른 생물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물리력을 없앴고 드래곤 브레스라는 강력한 수단을 가졌으나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도 이를 사용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솔직히 나도 드래곤의 무력을 활용해 볼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 난 후 아쉬움이 무척 컸다. 하지만 오랜 세월 쌓아올린 전설과 신화 덕분에 드래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큰 경외심을 심어주었다. 나는 오래 아쉬워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없는 존재로 치고 본격적인 작전 회의가 이루어졌다. 일단 공격 루트는 둘이었다. 듀틸로스라는 작은 성채가 버티고 있으나 주둔 병력은 적은 길로 가느냐, 일만 명 이상의 병력이 집결하여 결전을 각오하고 있는 로탄 평원으로 진격하는가.
“조금 우회하더라도 듀틸로스 성을 공략합시다.”
“그럴 필요 없소! 곧장 로탄 평원으로 진격하여 황제 폐하의 힘을 보여주어야 하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내가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만 택할 필요 없이, 둘 다 점령해 버리는 것은 어떠한가?”
지휘관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주목했다.
“송구합니다만……, 병력을 잘못 나누면 패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설사 둘 다 점령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낭비가 아닙니까.”
“당연히 낭비지. 하지만 한 번쯤은 반란군 놈들 앞에서 아군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직접 듀틸로스 성을 함락시켜 주겠다. 병력 분산을 걱정하는 자가 있는데, 이쪽은 백 명의 별동대만 차출해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동안 황제군 본대는 로탄 평원으로 진격하여 반란군을 친다. 그래, 애초에 과시를 위한 전략이니 연극의 한 장면처럼 동시함락이 좋겠군. 열흘 후 두 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승전보를 올린다.”
내 계획을 전부 들은 지스카르가 흥미로운 듯 말했다.
“성채를 점령하는 것은 네 특기였지. 오랜만에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다.”
사실상 황제의 승인이 떨어지자 지휘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병정 인형을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닐진대 이런 장난 같은 작전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래도 드래곤을 휘하로 거느린 신의 사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나는 개의치 않고 벽에 걸린 지도에 붉은색 핀을 꽂으며 작전을 정리했다.
“내가 지휘하는 일백의 별동대가 듀틸로스 성채를 공격,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로탄 평원으로 진격한다.
듀틸로스 성에 먼저 핀을 꽂았고, 한 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탄 평원에 핀을 던졌다.
퍽!
붉은색 핀이 정확히 로탄 평원이란 글자 위에 꽂혔다.
“그랜트 공작, 그대가 황제군 본대의 지휘를 맡는 것이 가장 좋겠지. 과거 스트라스와의 전쟁에서 몇 번이나 공적을 세우기도 했고.”
내게 지목을 받은 그랜트 공작은 황급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아니, 말도 안 되오.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데 내가 어찌 지휘를 맡을 수가 있겠소.”
“황제께선 부상을 입으셔서 군을 지휘하기 힘든 상태다.”
나는 지스카르의 왼손을 핑계로 댔다. 내가 칼 구멍을 뚫어서 후유증을 남긴 바로 그 손이다.
지스카르는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로탄 평원은 짐이 알아서 평정하겠다.”
녀석이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는 걸 보고 나는 기가 찼다. 말을 돌려서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나는 대놓고 지스카르의 약점을 찔렀다.
“억지 부리지 마시지요. 폐하께선 솔직히 실전 경험도 없지 않습니까?”
지스카르가 냉랭하게 물었다.
“짐이 실전 경험이 없다고 누가 그러더냐.”
“……존엄하신 황제 폐하, 설마 마물을 사냥하고 다닌 것을 실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고 지스카르도 내 시선을 그대로 마주 받았다. 나와 지스카르가 서로 노려보는 동안 지휘관들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놈이 황제를 향해 실전 경험이 없다느니 하며 추궁하는 것은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새파란 애송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 파셔와 스트라스 간의 전쟁이 한창일 때 지스카르는 성인도 안 된 꼬마였고 휴전협정 때까지 결국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나는 먼저 눈에 힘을 빼고 진지하게 지스카르를 설득했다.
“폐하. 마물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천지 차이입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한때 전쟁귀라며 병사들의 두려움을 샀던 적국의 레브노아드 황태자도 첫 출전 시엔 스승인 체르도 경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저는 폐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 말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지스카르는 길게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짐이 친정할 것이다.”
나는 발끈했다. 남이 진심으로 말하는데 오기를 부리기만 하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말도 거칠게 나왔다.
“이는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는 전투입니다. 신의 사자인 제가 선택한 황제군은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승리를 거둬야만 합니다. 패배는 곧 저의 신성을 흔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저를 선택한 폐하의 혜안도 의심을 받게 될 터!”
“신의 사자도 모르는 일이 다 있구나.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짐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으니 앞으로도 그런 줄 알고 있거라.”
더 이상 지스카르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내가 이를 부득 갈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일을 망쳤다간 봐라. 진짜로 죽여버린다!”
황제를 상대로 협박을 하는 나를 보면서 지휘관들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 * *
별동대를 이끌고 듀틸로스 성 부근까지 도착했다. 크리스티안도 나를 호위하기 위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황금색 드래곤이 날개를 털면서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곧 전투가 시작되고 피가 뿌려질 장소에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팔을 내밀어 드래곤에게 되돌아오라고 명했다. 드래곤이 한 줌의 빛이 되어 문신으로 변했다. 뒤따르던 기사들이 신기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다가 내 시선을 받고 퍼뜩 자세를 바로 했다.
동태를 살피기 위해 근처 숲에서 대기를 명했다. 한참 후 정찰을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적들은 성채에 틀어박힌 채 나올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적을 칠 방법이 없습니다.”
별동대는 백 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채를 점령하는데 기병을 왜 데려왔는지 그들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분위기였다. 드래곤을 손에 넣은 이후로 내게 반발하는 자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명령이 계속되자 기사들 사이에서 나를 의심하는 자가 다시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대기 명령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듀틸로스 성과 거리를 가늠하면서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되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발아래에 바람을 일으켰다. 미풍으로 시작된 바람은 순식간에 강력한 회오리바람으로 바뀌어 그대로 내 몸을 상공으로 휩쓸어갔다. 사나운 회오리에 휘말려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나는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 있었다. 저 아래에 내가 데려온 별동부대가 조그맣게 보였고, 듀틸로스 성 내부도 훤히 보였다. 나는 빠르게 성 내부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말이 쉽지, 어지간히 판단력이 빠르지 못하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결코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상공에 도착한 순간부터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어느새 지상과의 거리가 위험 수위까지 다다랐다.
“온!”
나는 서둘러 마법을 발동시켰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내 몸을 휩쓸었다. 나는 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말려 다니다가 간신히 방향을 잡았다. 지상에 거의 근접할 즈음엔 내리막 쪽을 목표로 바람을 일으켜 발부터 바닥에 착지했다.
콰과과곽!
착지하고 멈춰 설 때까지 뒤로 수 미터는 미끄러졌다. 실수로 굴렀다간 다진 고기처럼 몸이 갈려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다리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으려고 땅을 잠깐씩 짚었다. 그 결과 간신히 멈춰 섰을 때, 왼손에 심각한 열상을 입었다. 발과 무릎에도 과도하게 충격이 가해져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크으. 이건 진짜 하기 싫다니까.”
나는 신음을 내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레이!”
크리스티안이 내 부상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치유 마법을 시행했다. 부상이 좀 있었으나 전부 자가 치유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손의 상처는 나중에 신관을 한 번 더 불러야 할 것 같았지만 당장 작전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손에 붕대를 감으면서 즉시 지도를 펼쳤고 성 내의 적이 어디에 얼마나 분포되어 있는지 설명했다. 내가 마치 안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자세하게 이야기하자 기사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방금…… 하늘을 날아갔다 오신 겁니까?”
“정확히는 하늘 위로 나를 집어 던진 거지.”
비슷한 것 같아도 그 차이는 아주 크다. 우아하게 하늘을 유영한 게 아니라, 회오리에 휩쓸려 하늘 위에 내팽개쳐진 거니까.
크리스티안이 지도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마법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군.”
“하아,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마법사들에게 비슷한 짓을 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도 이 마법을 실험하다 아까운 마법사 여럿 죽였으니까. 이 몸도 까딱하면 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이런 짓은 안 해. 알겠느냐? 내가 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무조건 이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대들은 내 지휘하에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 내 명령에 털끝만치도 의문을 품지 마라. 나를 따르면 승리할 것이며, 날 의심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기사들은 숨을 죽인 채, 내 명령에 복종하기로 뜻을 모았다.
석양이 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말없이 손만 전방을 가리키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백 명의 별동대가 말을 몰고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성벽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종을 울리며 적습을 알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적은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의문만 표하고 있었다.
“전부 기병이잖아? 뭘 어쩌겠다고 성문으로 돌진하는 거지?”
“성벽에 머리 박고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서 마법을 증폭시키기 위해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팔찌의 마정석들이 네 번에 걸쳐 크게 울었다. 4중 영창으로 간단한 화염 마법이 단시간에 수천 배 이상 파괴력이 상승했다.
나는 그대로 돌진하면서 마법으로 성의 정문을 냅다 후려갈겼다.
콰과광!!
쿠웅!
두꺼운 성문 한쪽이 박살 나면서 날아가 버렸다. 말을 탄 기사들이 부서진 성문을 통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적병은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다가 뒤늦게야 문이 뚫렸다고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티안이 바로 근접거리에서 뒤를 따르며 말했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아군의 성문이 많이 부서졌지. 모두가 치를 떨었던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4중 영창 마법을 같은 편에서 확인하게 될 줄이야.”
“에브라함 요새 때처럼 성을 통째로 녹여버릴 순 없어도 작은 성문 하나 부수는 건 일도 아니지.”
십여 년 전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의 대전이 벌어졌을 때, 엘 파셔는 어떻게 하면 내 마법을 막을 것인가를 최대의 난제로 삼고 매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엘 파셔의 성채 방어력은 항상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그런데 지금 듀틸로스 성엔 과거와 같은 방어력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4중 영창 마법사인 내가 죽어버린 뒤로 더 이상 성문 방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듀틸로스 성의 적병들이 뒤늦게 아군 기사들을 막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장창을 빼곡히 박은 장애물을 앞세우고 길을 가로막았다.
“주춤대지 마라! 무조건 전속력으로 달려!!”
나는 크게 명령을 내리며 주문 세 개를 동시에 사용했다. 고도로 압축된 공기가 순간적으로 폭발하며 전방을 부채꼴로 휩쓸었다. 무거운 장애물이 종잇장처럼 부서지며 주위 병사들과 함께 구석진 곳에 처박혔다. 별동대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거리를 가로질렀다.
마법사는 말을 몰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파괴력이 낮은 기초 마법 정도면 몰라도 다중 영창은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적들은 이런 방식의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십여 년만 해도 이 몸을 견제하기 위한 많은 방어책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무방비 그 자체였다.
“군막은 바로 앞이다. 가장 먼저 성주의 목을 베라!”
나는 상공에서 확인했던 군막을 목표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했다. 지금쯤이면 적습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고 듀틸로스 성주가 영주관 가까이에 설치된 군막에서 지휘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고 성주는 지금쯤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듀틸로스 성주가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이 뚫리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무작정 감에 따르는 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내 짐작이 옳기 때문이다.
“헉! 저, 적을 막아라!”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적이 들이닥치자 듀틸로스 성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크리스티안이 번개같이 말을 몰아 듀틸로스 성주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렸다.
“성주의 목을 내걸고, 투항하는 자는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알려라!”
지스카르가 실정을 저지른다고 잠시 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백성 사이에서 인망이 높았다. 내가 엘 파셔를 떠돌며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황제를 들먹이며 투항을 요구하자 그러지 않아도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듀틸로스의 병사들이 심하게 동요했다.
일백의 기사들이 듀틸로스 성을 들쑤시고 다니며 지휘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4중 영창이란 사기적인 마법으로 성문을 부쉈다곤 해도, 듀틸로스 성 안에는 여전히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들이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백 명밖에 안 되는 별동대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모래성을 무너뜨려도 이것보다는 쉽겠군. 반란군이 약한 것이냐, 엘 파셔가 약해진 것이냐.”
약간 김이 새버린 내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뒤쪽에서 따라오던 기사가 외쳤다.
“그게 아니라 당신께서 대단히 강력하신 것입니다!”
나는 기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발갛게 들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쾌한 녀석이로군. 네 이름이 무엇이냐?”
“기, 길리언 에셀만이라고 합니다!”
“기억해 두겠다.”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길리언은 몹시 황공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내가 잠시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치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곤 했으니까.
길리언이 뒤로 물러나자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완전히 황태자 시절로 회귀한 것 같은 모습이로군. 널 호위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나는 크게 할 일이 없군.”
“괜히 투덜거리는구나. 호위 대상이 무사했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그보다 나는 먼저 로탄 평원으로 이동해야겠다.”
나는 몸을 일으켜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먼저 가다니……. 레이, 나는 끝까지 널 호위할 의무가 있다.”
“마법을 써서 고속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네가 아닌 어떤 자라도 동행은 불가능하다. 지휘권을 네게 넘길 테니 듀틸로스 성에 남아 마무리를 짓도록 해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라도 생기면 대단히 곤란해진다는 것 알고 있겠지? 네 역할이 매우 중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어째서 그렇게 급히 로탄 평원까지 가려는 거지?”
“지스카르 그 미숙한 놈이 일을 망칠까 봐 그런다.”
“레이! 넌 폐하를 좀 더 신용할 필요가 있어!”
나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크리스티안을 내버려두고 바람을 일으켜 미끄러지듯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로탄 평원에 도착했을 때는 의외로 이쪽도 거의 승기를 잡은 뒤였다.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스카르가 직접 여기까지 행차를 했다.
“네가 이렇게 걱정이 많을 줄은 몰랐구나. 마법을 써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냐? 큰 마법을 장시간 운용하느라 마정석이 거의 다 고갈되어 버렸군. 짐이 실패할 것을 염려하다가 외려 네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
나는 마정석이 없으면 기껏해야 평기사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검이 없으면 일반 양민 수준으로 추락이고. 지스카르가 지체 없이 새로운 마정석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마법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약간 지치고 숨이 가빴다. 그래도 이틀 거리를 반나절 만에 돌파한 것치고는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오는 길에 예의 후유증이 도지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이상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한 번 더 주위 상황을 살폈다.
“흠, 생각보다 빨리 승기를 잡았는걸.”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보시지. 내게 욕먹을까 봐 죽을힘을 다해서 반란군을 밀어붙였지?”
나는 지스카르의 갑옷을 가리켰다. 지스카르는 전신에 적 병사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황제씩이나 되는 인간이 직접 선봉에 나서서 칼을 휘두른 것이다.
“뒤에서 지휘만 하는 것은 짐의 방식이 아니다.”
지스카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 나는 피식 웃었다.
“직접 나서길 좋아하는 건 이 몸도 마찬가지니 할 말이 없군. 덕분에 주위에서 위험하다는 둥, 몸을 좀 사리라는 둥 잔소리를 많이 들었지.”
팔찌에 새로운 마정석을 장착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황제군이 거의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완전히 승패가 갈린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이참에 지스카르와 동행하여 직접 적장을 치기로 했다.
양측 부대가 격돌하고 있는 지역을 피해 길을 크게 우회하여 달려가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적 지휘관들이 분주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스카르가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속력으로 말을 몰렸다. 소드 마스터인 황제와 그의 직속 친위기사들이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적장들은 기겁을 했다. 그들은 호위 기사를 방패막이로 앞세우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똥줄 빠지게 도망치는 놈들을 가리키며 지스카르가 한마디 했다.
“레이, 겁쟁이들이 그냥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것이냐?”
“당연히 내버려두면 안 되지.”
나는 멍청한 지휘관들을 비웃으며 놈들의 발목을 잡을 만한 마법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아아!”
적을 뒤쫓는데 갑자기 우측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군의 증원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마법을 쓰려고 뻗었던 손으로 조금 머쓱하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음……. 어디서 저만큼이나 끌고 왔다지? 반란군도 저력이 있는데?”
“그렇군……. 매복인가…….”
지스카르도 대답이 좀 늦었다. 나도 그렇고 녀석도 그렇고, 연이은 승리로 살짝 들떠서 그만 적을 과소평가해 버리고 말았다.
적의 증원군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황제만 쓰러뜨리면 아군의 승리다! 미치광이 황제의 목을 가져와라!”
지스카르는 순식간에 적의 목표물이 되었다. 적병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검을 들었다.
검신 위로 오라가 모여들면서 하얗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말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며 검을 전력으로 휘두르자 마치 거대한 칼이 허공을 베고 지나간 것처럼 적병 열이 한꺼번에 두 동강이 나서 바닥을 뒹굴었다. 저쯤 되면 검술이 아니고 마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얼마든지 짐에게 도전하라!!”
지스카르가 적을 압박할 요량으로 땅이 쩌렁 울릴 만큼 커다랗게 노성을 질렀다. 과연 그 행동에 주눅이 든 병사들이 조금씩 주춤거렸다. 황제의 활약에 친위기사들도 사기가 올라 적 증원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적과 아군이 뒤엉키며 싸움은 점점 난전으로 변해갔다. 타고 있던 말이 적 병사의 창에 꿰여 쓰러지자 나는 훌쩍 밑으로 뛰어내렸다. 땅을 밟자마자 즉시 화염 마법을 펼쳤다. 개미 떼처럼 꼬여들던 병사들이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불길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적병의 머리 위로 바람으로 만든 칼날과 창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악! 이 괴물 같은 놈!!”
네 가지 마법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내 모습이 적 병사의 눈에 괴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뒤를 덮쳤다.
나는 사방에 깔린 적을 상대하느라 한발 늦게 그자를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내 옷깃도 건드리지 못할 놈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여유가 있으면 욕이라도 뱉었을 것이다. 이래서 쪽수는 무시 못 하는 것이다.
“꺽!”
하지만 그 병사는 날 찌르기도 전에 지스카르의 검에 허리가 잘려나갔다. 지스카르가 피를 뿜으며 비틀대는 병사를 발로 걷어차서 치워버리고 일부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내 뒤쪽에 자리를 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앞만 보지 말고 뒤로도 주의를 기울여라!”
“이렇게 수가 많아서야 아무리 주의를 해도 한계가 있잖아! 반군의 최우선 제거 대상인 주제에 자기 목숨부터 챙기시지!”
등 뒤쪽에서 지스카르가 오라 소드를 휘두르며 적들을 무수히 베고 있었다. 나는 뒤쪽으론 아예 지스카르에게 맡기기로 하고 전방의 적을 베고 마법을 퍼부었다. 지스카르라면 충분히 등 뒤의 적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녀석이 뒤를 맡아준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매우 든든해지는 것이다.
나는 빤히 알고 있던 사실을 지금에서야 피부로 느꼈다. 지스카르가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이며 드래곤도 쉽게 제 것으로 만들 정도의 초월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신없이 싸우다가 문득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쩐지 매우 유쾌해서 나는 웃었다.
“그래. 내 실수를 인정하겠다. 이 몸이 너를 너무 무시했어!”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지스카르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하지만 이내 내가 그랬듯 그도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적에게 포위당해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인지 아마 제삼자의 눈에 꽤나 어이없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난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황제를 구원하기 위해 금방 황제군이 들이닥쳤다. 숨겨두었던 병력을 절호의 순간에 동원함으로써 마지막 반전을 노렸던 반란군이었으나 결국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황제군 본대의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로탄 평원의 전투는 황제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잠시 후 듀틸로스 성에서 정식으로 승전보가 날아왔고, 황제 측 병사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지경이 되었다.
* * *
듀틸로스 성의 함락, 그리고 로탄 평원에서의 대패 이후 반란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갔다. 하지만 반군의 수뇌인 남부 귀족과 구왕국의 잔존 세력이 이미 스트라스와 접촉을 끝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스트라스가 반군의 손을 들어준다면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의 2차 대전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벌써 십 년 이상 휴전을 유지해 온 마당에 스트라트가 쉽게 전쟁을 택하진 않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굳건하던 엘 파셔가 전에 없던 혼란을 겪으며 내전까지 치렀으니, 스트라스의 입장에서 이만한 호기도 없을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얼마간이라도 우위를 점하고자 스트라스가 과감하게 움직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스트라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과연 ‘에디’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