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43)

20.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막사 바깥을 내다보았다. 지스카르가 걸어와 잠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손아래에 드래곤의 문신이 있었다. 온건 성향의 용들은 전쟁터에 머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래서 벌써 몇 주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문신 형태로 잠들어 있었다. 지스카르가 지닌 검은 용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팔에서 손을 떼며 지스카르가 물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에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에디?”

“에드리히. 스트라스의 현 황제.”

“……아직도 그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가.”

지스카르는 자신을 살해한 자를 다정하게 애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에디가 나를 죽였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지 않느냐. 나는 에디가 준 독차를 마시고 죽었으나 에디는 그것이 독차인 줄 몰랐을 수도 있다. 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에디이긴 하지만 그건 정황상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너는 끝까지 그를 믿겠단 말인가?”

“아니, 그건 잘 모르겠군……. 그 일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예전에 죽었고 나는 그냥 엘 파셔의 레이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대해서 파헤쳐 본들 얻는 것도 없고.”

나는 조금 피곤한 기분이 들어 턱을 괴었다. 이유 없이 쓴웃음이 나왔다.

지스카르가 이번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평소였다면 당장에 치우게 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녀석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휴전협정을 성사시키는 것은 내 평생의 숙원이었다. 내가 아는 에디라면 나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 전쟁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문대로 그가 진짜 잔인한 폭군이고 내가 알던 모습이 모두 가면에 불과했다면 휴전협정 따윈 얼마든지 종잇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겠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어차피 곧 결판이 날 것이다.”

지스카르의 말이 옳았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뒤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때 병사가 급히 군막 앞으로 뛰어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스트라스 대군이 남부 국경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친정에 나섰다고 합니다!”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 * *

국경지대에 스트라스와 엘 파셔의 대군이 대치했다. 그새 여름이 되어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이마 위에 손을 얹고 저 멀리 평원 맞은편에 집결해 있는 스트라스군을 살펴보았다. 내가 적 편에 서서 스트라스군을 마주 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게다가 저 너머 어딘가에 스트라스 황제, 에드리히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무척 묘해졌다.

지스카르가 머리 위로 모자 같은 것을 덮어주었다. 펼쳐서 보니 여름용 마법사 로브였다. 나는 마법사이지만 기동력도 중시하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로브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소리 없이 바로 로브를 입고 일부러 후드까지 덮어썼다. 땡볕이 가려져서 시원한 느낌이 좋긴 했다.

“이건 왜 가져온 거냐?”

벌써 옷을 다 입어놓고 뒤늦게 지스카르를 보며 물었다.

“얼굴을 가리는 편이 좋을 듯해서.”

지스카르가 스트라스 대군을 보면서 말했다. 엘 파셔 땅에서 태어나 긴 시간이 흘렀으나 나는 여전히 엘 파셔보다 스트라스를 고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스카르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스트라스와 연관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기에 지스카르의 불순한 의도에 동참해 주기로 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스트라스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지스카르는 잠시 날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좋을 대로 해라.”

양측이 서로 대치를 한 상태로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스카르는 처음부터 전쟁을 원치 않았고, 스트라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스트라스 쪽에서 사신을 한 명 보냈다.

지스카르는 사신을 불러들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나는 황제의 바로 아래, 두 번째로 높은 상석에 앉았다. 엘 파셔 측에 앉아 스트라스인을 만나는 것이 어쩐지 굉장히 껄끄러웠다. 무슨 배반 행위라도 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일부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코끝까지 끌어당겼다.

사신이 묵직한 궤짝을 하나 들고 군막으로 들어왔다. 그는 엘 파셔의 황제를 알현하고도 제대로 된 예도 취하지 않고 대충 허리만 숙여 인사치레했다. 사신은 대뜸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주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혹시 저자가 엘 파셔 황제께서 몹시 아낀다고 알려진 그 신의 사자입니까? 최근에는 드래곤을 수하로 들이기도 하셨다는데 세상에 이토록 희귀한 일이 며칠 사이에 연속으로 벌어지는 수도 있군요!”

아무리 스트라스와 엘 파셔가 서로 적대관계라도 일개 사신이 황제의 앞에서 이러한 무례를 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스카르는 사신의 발칙한 작태를 지켜보다가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화를 낼 줄 몰라서가 아니라 저 무도한 놈이 어디까지 가려고 저러는 것인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를 둘러싼 공기는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사신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것인지 언동에 점점 수위를 더해갔다.

“하하하! 이거 자리 배치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브뤼셀 황후도 내쫓긴 마당에 신의 사자분께 황제 폐하의 바로 옆자리를 내주고 황후로서 대접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노예 출신에 사내가 일국의 황후가 되다니, 대제국 엘 파셔의 기상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저, 저런 쳐죽일 놈이!!”

사신이 아예 대놓고 조소까지 터뜨렸고 장내의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조롱의 대상이 된 나는 내심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트라스 측에서 신의 사자니 드래곤이니 하는 허황한 말을 믿을 리가 없다. 미친 짓 한다고 비웃지 않으면 오히려 그편이 더 이상한 것이다.

사실 스트라스에서 나를 조롱하지 못하게 만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엘 파셔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드래곤을 이용했듯이 스트라스 쪽에도 대군이 보는 앞에서 드래곤을 불러내 이 몸의 권위를 과시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나는 지금 스트라스인이 아니라 엘 파셔인이었다. 내가 보여주는 능력은 엘 파셔에 힘이 될 것이며 역으로 스트라스에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건 결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한 터럭이라도 스트라스에 해가 되는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였다. 한참 조롱을 늘어놓던 사신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엘 파셔가 구린내 나는 노예를 황후로 삼든, 황제로 삼든, 그건 우리 스트라스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도저히 묵과하기 힘든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더군요. 하찮은 노예가 4중 영창을 쓰는 마법사라니! 엘 파셔의 황제시여, 4중 영창에 성공했던 사람은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오직 한 사람, 레브노아드 황태자 전하뿐이었습니다. 감히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이따위 시답잖은 수작에 갖다 붙이다니 지금 스트라스를 상대로 시비라도 걸겠다는 것입니까!!”

사신의 입에서 레브노아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나는 크게 인상을 썼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튀어나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4중 영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레브노아드 황태자다. 오직 스트라스의 황족만이 가능했다고 알려진 능력이 엘 파셔 쪽에서 연이어 언급되니 스트라스에서 크게 분개할 만도 했다.

쾅!!

지스카르가 침묵을 깨고 팔걸이를 부숴버릴 것처럼 강하게 내려쳤다. 사신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황제에게 주목했다.

“사설이 길군! 그래서 스트라스 황제는 어찌하겠단 말인가!”

그가 흔치 않게 언성을 높이며 진심으로 노기를 드러냈다. 그의 분노가 나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이름이 언급되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신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을 열었다.

“……엘 파셔의 천박한 수작은 도저히 보아 넘기지 못할 수준이지만, 스트라스의 만인지상 황제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그 만행을 용서하기로 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엘 파셔 황제와 노예 출신 황후의 백년해로를 기원하며 폐하께서 이렇게 선물까지 보내셨지요!”

그가 커다란 궤짝을 가리켰다. 저런 식으로 빈정대며 말을 하고 있는데 누가 선물상자를 열어보고 싶겠는가. 사람들이 궤짝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자 지스카르가 짧게 명령했다.

“열어라!”

기사들이 무거운 궤짝 뚜껑을 열었다.

쿠웅.

그 순간 지독한 피비린내가 밖으로 확 쏟아져 나왔다. 궤짝 안을 본 사람들은 신음을 터뜨렸다. 사신이 열 개가 넘는 인간의 머리를 억지로 궤짝 안에 구겨 넣고 그걸 선물이라고 여기까지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잘린 머리들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것들은 모두 반란군 수괴의 머리였다.

사신이 입을 비틀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주군께서 보내신 선물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

“천한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제안이니 뭐니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기에 황제 폐하께서 친히 한 놈씩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잘라버렸습니다. 엘 파셔 황제께서 총애하는 노예를 챙기느라 밤낮으로 정신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나, 조금은 내정에 힘을 쏟으셔야 할 것 같군요!”

지스카르는 궤짝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스트라스 황제의 뜻은 잘 알았다. 짐도 그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으니 똑똑히 들어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신이 몹시 불손한 태도로 되물었다.

지스카르는 상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장내가 고요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던 사신마저 입을 다물고 그를 기다렸다.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녀석의 특기였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지스카르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손끝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천막을 꽉 채울 정도의 크기로 현신했다. 드래곤은 단지 이 공간에 고고하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신은 기겁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스카르는 검은 용을 거느린 채 엄숙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짐이 아끼는 이는 드래곤의 선택을 받고 신성을 확인받은 자로 엘 파셔에서 대공 위를 수여할 것이다. 봉토와 작은 세습을 승인하며 대대로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약속한다.”

“드, 드래곤? 말도 안 돼!!”

바로 코앞에서 드래곤을 보며 사신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드래곤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확신을 내린 상태였기에 충격이 몇 배나 더 심했다.

드래곤이 지스카르의 감정에 동조해 사신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 소리를 냈다. 잠시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던 드래곤은 다시 한 줌의 빛으로 화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지스카르의 오른쪽 목 위로 용 형태의 문신이 생겼다. 사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네놈의 무도함이 도를 넘은 것으로 보아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을 찾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군. 그러나 짐은 너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무례를 용서할 것이다. 지금 당장 스트라스 황제에게 돌아가 이 자리에서 본 것, 들은 것을 한 치도 빠짐없이 고하도록 하라!”

사신은 도망치듯이 군막을 허둥지둥 빠져나갔다. 지스카르가 사신의 뒷모습을 보며 냉담한 목소리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네 주인의 손에 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사신은 돌아가자마자 황제 앞에서 진짜로 드래곤이 있었다며 횡설수설할 것이다. 신의 사자를 부정하고 드래곤을 부정하는 스트라스 황제가 미친 사신 놈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사신 업무를 수행하고 왔는데 그 공을 치하받진 못할망정 배덕자가 되어 황제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사신을 처리해 버리는군. 그렇게 수완이 좋으신 줄 내가 미처 몰랐어.”

나는 입을 비틀었다. 사신은 엘 파셔 황제의 앞에서 큰 무례를 범했고 당장 목이 잘린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죄를 지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모두 스트라스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사신의 비참한 죽음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내 얼굴에 손등을 대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내 심기가 불편한 것을 읽은 듯 그는 날 지켜보기만 할 뿐 한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바깥 상황을 보러 나갈 생각이다. 어찌하겠는가?”

한참 만에 지스카르가 물었다.

“……좋아.”

나는 막사를 빠져나와 스트라스군이 보이는 장소까지 걸어 나왔다.

스트라스 쪽은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잠시 후 우람한 덩치를 가진 기사가 검은 덩어리를 들고 와서 공놀이하듯 뻥 걷어찼다.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서 형태가 보이는 거리에서 멈추었다. 방금 전에 허겁지겁 도망을 쳤던 그 사신의 머리였다.

“…….”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처리할 것은 없지 않나.

스트라스 측 병사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 파셔를 비웃고 조롱하던 그들은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군세를 돌려 국경지대를 떠났다.

나는 스트라스 대군이 떠나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어쨌거나 스트라스도 처음부터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로군.”

“그래. 양 대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지스카르가 먼저 입을 열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다른 뜻이 더 있었던 것 같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그래도 최악의 수를 택하지는 않았구나. 그가 소문대로 포악하기만 한 자였다면 지금처럼 쉽게 물러나진 않았겠지.”

“에디에게 속았다고 잠시 우울해했더니 위로라도 하려는 속셈이냐? 괜히 입에 발린 말 말거라. 최악의 수만 택하지 않았다 뿐이지 저 녀석 하는 짓을 보면 포악한 게 맞지 않는가. 에디 놈, 내 앞에서 내숭을 떨고 있었던 게 분명해.”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신의 머리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스카르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의미도 없는 과거 일을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고 막사로 향했다. 엘 파셔도 철수할 시간이다.

* * *

스트라스와 엘 파셔 대군이 국경지대에서 대치하며 심상치 않은 기류를 조성했으나 다행히 아무런 마찰도 없이 사흘 만에 서로 군을 해산시켰다. 엘 파셔 내의 내란도 완전히 평정되었고, 대륙 전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국내 사정이 호전되었을 즈음 나는 정식으로 대공 위를 받았다. 내가 작위를 받은 날 엄청난 수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황제가 죽고 못 산다던 소문의 주인공이라 특히 가십을 좋아하는 이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거리로 몰려나왔다. 나는 군중의 머리 위로 드래곤을 불러내는 것으로 재미 삼아 나온 이들을 기함하게 만들어주었다.

엘 파셔는 과거에도 드래곤을 휘하에 거느린 자가 존재했다고 한다. 물론 정사는 아니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 비슷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전설 속의 그 인간도 황제로부터 대공 위를 받았다. 그자의 이름은 엘 이그나츠 그레이언 대공이었다.

나도 그 전설에 착안하여 그레이언이라는 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대공 위에 걸맞은 성과 영지도 하사받았다. 몰락한 남부 귀족들의 영지 절반이 내 손에 굴러들어왔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날 놓아줄 리가 없다는 점을 상기할 때 영지로 내려갈 일은 많지 않을 듯했다.

황금색 드래곤이 허공을 높이 날다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나는 팔을 톡톡 쳐서 이만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요구했다. 드래곤은 바로 한 줌 빛으로 변해 문신으로 되돌아왔다.

“이름을 정식으로 개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드래곤이 모습을 감추기를 기다리다가 지스카르가 뜬금없이 제안을 했다. 그레이언이란 성을 받으면서 내 풀 네임은 ‘엘 레이 그레이언’이 되었다. 레이라는 이름은 노예나 옆집 똥강아지에게나 어울린다는 느낌이고, 솔직히 준 황족으로 예우받는 귀족의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엘 파셔 황족 식으로 풀 네임을 만들었을 때 어감도 웃긴다.

“네 말에 공감은 한다만 그래도 개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레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지스카르는 더 이상 개명을 권하지 않았다. 녀석도 내가 이름을 바꾸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비슷하지 않은가?”

“응? 뭐가 말이냐?”

“레브노아드의 아명이 레비라고 들었다. 레이라는 지금 이름과 굉장히 흡사하지 않나.”

“아, 그거.”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슬쩍 웃자 지스카르가 의문을 표했다.

“역시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가?”

“음, 나도 갓 태어났을 때는 칭얼거리는 것밖에 못 하는 아기에 불과했다. 분명히 전생의 기억이 있는데도 머리가 덜 자라서 활용을 못 한다고 하면 이해할까? 어쨌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갓 태어난 나를 위해 몇 가지 이름을 준비했는데 그중에서 레이라는 이름에 유난히 반응했다고 하더군. 덕분에 내 이름이 레이가 되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나의 원래 이름이 레브노아드, 그러니까 레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이라고 불릴 때마다 본래 이름을 부르는 줄 알고 반응했던 것이 틀림없어.”

“결국 그 이름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애칭과 다름이 없군. 그래서 굳이 레브노아드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인가.”

지스카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뿐이고 ‘레이’는 이번 생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어준 나의 단 하나뿐인 이름이다. 나는 지금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황제궁을 가로질러 걸었다. 황제궁 내원에 준비된 티 테이블에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힐끔거리다가 괜히 제풀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츠리긴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완전히 촌놈 그 자체였다. 아무리 때 빼고 광내서 좋은 옷을 입혀도 그들의 천한 출신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나는 반갑게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간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가 턱을 가늘게 떨다가 간신히 마른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레이. 정말로 레이가 맞니?”

“어머니, 너무하시는군요. 그새 제 얼굴을 잊어버리셨습니까?”

어머니가 허둥거리며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이!!”

“아…….”

나도 사랑하는 그녀를 강하게 마주 안았다. 너무나 따뜻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음에도 퀴퀴한 구린내가 났다. 유난히 땀이 많은 체질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을 해서 식은땀을 흘려서 그런 것인지. 어쨌건 이 땀 냄새도 내게 있어 매우 그리운 것이었다.

“이 녀석아! 다시는 널 못 보는 줄 알았다. 어떻게 그동안 거의 크질 않았어! 이게 다 엄마를 닮아서 그래. 날 닮았으면 아주 듬직한 장정이 됐을 텐데.”

아버지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오랜만에 애 취급 받는 것이 머쓱했다. 지스카르가 근방에 있을 것을 알기에 더욱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보며 그 어떤 때보다 기쁘게 웃었다.

당신들은 알고 있을까? 내가 당신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마음껏 해후를 나누고 격한 감정이 가라앉자 부모님은 또다시 조금씩 주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황제궁 내원의 화려함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 실은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단다. 좀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이상한 소문이요?”

그들이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빤히 알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스러운 태도를 고수했다. 아버지가 비밀 이야기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네가 무슨 귀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누가 그러던가요? 제가 무슨 재주로 갑자기 귀족이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노예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귀족이 돼?”

“여보, 넙죽 납득하지 말아요! 우리 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했으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여편네야말로 정신 좀 차려! 레이가 우리 사이에서나 천재 소리 들었지, 바깥에 나가면 다 똑같은 노예 자식일 뿐이라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소처럼 아옹다옹하는 것을 보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부모님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싸움하던 부모님이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지스카르는 굉장히 차갑고 엄격한 인상이라 귀족들조차 그의 앞에서 얼어붙을 때가 있었다. 노예 출신인 부모님이 고양이 앞의 쥐라도 된 것처럼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스카르를 가리키며 대충 소개를 했다.

“저와 부모님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좋은 집을 선물해 주신 것도 이분이십니다. 갑자기 많은 것이 바뀌어서 놀라셨지요?”

“아! 이분께서……!”

“저희에게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나리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장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절을 올렸다.

“됐으니 그만 일어나거라.”

지스카르는 일부러 손까지 내밀어주며 그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나리. 저희가 어찌…….”

하지만 부모님은 감히 그 손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지스카르의 앞에서 연방 고개를 숙이고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부모님을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 아버지. 폐하께서 일어나도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두 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더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구나.”

그제야 두 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부모님의 안색이 다시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 보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 그런데 방금 폐하라고 했니? 어, 어명이라고도 그런 거 같은데.”

“아아…….”

나는 머리를 뒤적거렸다. 욱한 김에 그만 말실수를 해버렸다.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나는 마지못해서 지스카르를 제대로 소개했다.

“그러니까 이분이 엘 파셔의 황제 폐하십니다.”

“허억.”

어머니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빈첸시오 자작을 상대로도 하늘 같은 영주님이라며 고개도 못 드는 이들인데 눈앞의 귀족 나리가 다름 아닌 황제라고 하니 새하얗게 질려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사람을 불러 충격을 받은 두 분을 안으로 모셔가게 했다. 근방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해 둔 상태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부모님을 보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주의하라는 지시도 추가로 내려두었다.

부모님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네 부탁대로 그들에게 작은 시골집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하사했다. 대공저에 머무르게 하며 좀 더 윤택한 생활을 보장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는 않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그분들은 나랑 달리 진짜로 평범한 노예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줄만 알지, 그에 걸맞은 품위는 평생 가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무례한 부모님을 비웃고 그들과 함께 날 비웃을 것이며, 내게 대공 위를 수여한 너까지 손가락질하겠지.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마. 주제에 맞지도 않는 부귀영화 따윈 애초에 손에 쥐여 주지 않는 편이 낫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내가 대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두 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몰라야 한다.”

“두 사람이 네 말을 듣는다면 섭섭하게 여길 것이다.”

“어차피 두 분은 내 말을 듣지 못할 테니 상관없지 않으냐? 게다가 이리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한 걸음 걸어가서 지스카르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나와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설혹 내가 이 자리에 없다 해도, 네가 반드시 그분들을 지켜드려야만 한다.”

“…….”

지스카르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마구 헤집었다.

“무슨 짓 하는 거야?”

“네 아비가 할 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더냐.”

“그분이랑 네놈이랑 같으냐?”

“네 아비가 그분이고 짐이 네놈인가?”

그래서 불만이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지스카르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 위로 가만히 미소 같은 것을 띠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네 양친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네가 어떤 얼굴로 그들을 대하는지 보았는데 약속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

지스카르의 진심을 느끼고 나는 솔직히 크게 안도했다. 부모님 일을 지스카르에게 너무 떠맡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분들은 나와 다르게 몸도 마음도 엘 파셔인이고 평생 엘 파셔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엘 파셔의 황제인 지스카르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지스카르는 머리 위에 두었던 손을 미끄러뜨려 내 뺨을 만졌다. 그대로 자세를 낮추어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로 살짝 혀가 닿았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이를 갈았다.

“이놈이 계속 그냥 넘어가니까……. 뭔데 당연한 일인 것처럼 자꾸 키스하는 거냐.”

“계속하면 네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넘어가 줄까 싶어서 그랬다만.”

지스카르가 시커먼 속내를 털어내면서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감싸고 다시 한번 키스를 시도했다. 축축한 혀가 불쑥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이를 세워 놈의 혀를 깨물었다.

지스카르는 움찔했지만 죽어도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달래듯 얼굴과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나는 지스카르의 혀를 잘근잘근 물다가 결국 턱에 힘을 빼고 말았다. 짜증 나지만 수가 없다. 엘 파셔 황제의 혀를 잘라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마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놓아주자마자 지스카르가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 어색하게 굳어 있는 내 혀를 집요하게 찾아내서 핥고 빨아 당겼다. 강하게 입술을 누르며 밀어붙이는 바람에 몸이 뒤로 넘어가려고 하자 녀석이 허리에 두었던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상반신을 으스러뜨릴 듯 꽉 안고 그는 계속 입술을 덮쳤다.

“음, 우.”

얼굴을 더듬던 손이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셔츠를 걷고 아랫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맨살에 손길이 닿자 반사적으로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저항할 것을 예상한 지스카르가 내 어깨와 팔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거의 묶어놓듯 나를 끌어안고 지스카르는 키스를 계속했다. 그의 손이 윗배를 어루만지고 좀 더 위의 유두에까지 손을 댔다.

“핫. 아! 잠깐.”

나는 얼굴을 비틀어 키스를 멈추었다. 그러나 아직 어깨가 단단히 붙들린 채였다. 지스카르는 검지와 중지로 민감한 유두를 살짝 쥐고 굴리듯이 만졌다. 그러다 엄지손톱 끝으로 첨단을 쿡쿡 눌렀다.

“흑. 으…….”

더 이상 키스가 불가능할 것 같자 지스카르가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완전히 묻고 혀로 깊이 핥았다. 나는 목덜미와 가슴, 온몸을 울리는 고양감에 서서히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굉장하군. 전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해진 것 같구나.”

“네놈이……!”

“모욕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자극을 즐길 수는 없는가?”

유두를 만지고 가슴을 쓰다듬으며 손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아랫배와 배꼽 부근을 만지는데 벌써부터 사타구니가 찌르르했다. 지스카르는 점점 손을 아래로 내리다가 갑자기 바지 안쪽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내가 새파랗게 질려 언성을 높였다.

“아니 지금 어디까지 가려고……!”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지스카르는 이미 사타구니 사이에서 내 성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약간 발기해 있던 음경이 녀석의 손아귀 안에 잡히자 단숨에 최대치까지 부피를 키웠고, 동시에 사타구니에 땀이 스미며 후끈 열기가 달아올랐다. 목덜미에 키스하고 있던 지스카르가 내 반응에 크게 탄성을 터뜨렸다.

녀석이 내 중심을 완전히 제 손 안에 넣고 거칠게 당기고 자극했다. 허벅지 안쪽이 흥분으로 경련했고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다.

“읏, 흐……. 미친놈이, 진짜 이런 데서…….”

일부러 사람을 전부 물렸기 때문에 주위에 아무도 없긴 하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어느 정도 받아준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더 이상은 진짜, 절대로 사양이다.

“적당히 안 하면 진심으로 죽여버린다. 할 거면 들어가서 하든가!”

내가 이를 바득 갈면서 말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바로 나를 풀어주더니 의뭉스럽게 물었다.

“들어가서 하는 건 좋다는 말이지?”

“아……?”

저놈이 처음부터 내 입에서 먼저 하자는 소리를 들으려고 수작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굴색을 싹 가라앉히고 놈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나를 희롱하던 지스카르가 내 표정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어차피 내가 진심으로 화가 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지스카르 쪽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나를 속박하지 못한다. 이 팔에 있는 마정석이 그 증거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놈에게 수차례 경고를 한 바 있다. 지스카르는 틀림없이 그 경고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손쉽게 그 속내를 읽어내며 나는 실소를 지었다. 멱살을 잡아당기자 지스카르가 일부러 힘을 빼고 내가 하는 대로 끌려왔다. 나는 그대로 놈의 입술에 키스했다. 지스카르는 아주 뜻밖이었는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어차피 뒹굴게 될 텐데 나만 당하는 듯한 모양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지스카르의 턱 끝을 잡고 말했다.

“들어가서 마저 하자.”

“…….”

지스카르는 한숨을 쉬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짐은 계속 이렇게 안달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감히 이 몸을 손에 넣으려고 들었으니 그 정도 고생은 당연하게 여겨야지.”

내가 각오하라고 경고하자 지스카르는 공감한다는 투로 쓴웃음을 지었다.

여름의 강렬한 태양이 녹색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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