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대체로 조용한 분위기였던 엘 파셔 황궁 마탑이 근 십 년 만에 크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황제가 근황을 살피기 위해 직접 마탑에 걸음을 했다. 마탑의 책임자인 드와이트 후작이 정중히 황제를 맞이했다.
“폐하,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더 바빠 보이는군.”
“대공 전하와 합작 연구를 일곱 건까지 늘린 까닭에 마탑이 조금 어수선할 것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근황을 살피러 온 것이니 평소대로 일에 집중하라고 이르시오.”
마탑이 변화한 것은 레이가 황궁 마탑을 드나들면서부터였다. 그는 작위를 얻고 위치가 공고해지자 그 즉시 황궁 마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적당히 명예직을 한자리 얻고 각종 마법 연구를 시작했다. 마탑의 총책임자인 드와이트 후작이 그의 열렬한 숭배자라 모든 과정에서 전폭적인 도움을 주었다.
레이는 마탑 내의 마법사 중에서 자신의 연구를 도울 사람을 선발하여 실험의 규모와 종류를 계속 키워나갔다. 그의 실험에서 얻는 신지식이 대단해서 연구에 동참하길 원하는 마법사들이 아주 많았다.
시간이 흘러 현재 마탑에 소속된 인원 중 절반이 직간접적으로 그가 진행하는 연구실험에 투입되고 있었다. 황궁 마탑이 그레이언 대공의 개인 연구실처럼 변했다고 숙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각종 논문과 성과물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를 통해서 엘 파셔의 마학은 일보 크게 전진할 것이 분명했다.
지스카르는 잠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드와이트 후작이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 전하께서 요즘 특별히 몰두하고 있는 연구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지금 3층 연구실에 계시는데 폐하의 방문을 알렸으니 곧 내려오실 것입니다.”
“어련할까.”
지스카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이라면 황제의 방문을 전해 듣고도 들은 척 만 척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앞에서 이토록 무도하게 구는 자는 엘 파셔에서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굳이 그를 불러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마탑을 조금 더 둘러본 다음 본인의 집무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레이가 보조 마법사 둘을 동행한 채 계단을 내려왔다. 지스카르의 모습을 보고 레이는 싱긋 웃었다.
“지스카르. 그러잖아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가지 말고 잠깐 기다려봐.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 테니.”
레이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마탑 밖의 마법 실험용 너른 공터로 향했다. 목을 주무르고 팔을 움직이면서 잠시 동안 몸을 풀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실험을 앞둔 날이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참 공교롭게도 때를 맞춰서 마탑을 찾았다.
“중요한 실험이 있다 했느냐?”
“그래, 지금 시작할 테니까 거기서 지켜보면 될 것이다.”
레이는 지스카르에게 바깥쪽을 가리키고, 자신은 공터 안으로 걸어갔다.
“폐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드와이트 후작이 황제와 그의 친위기사들을 공터 바깥쪽 경계선까지 안내했다.
레이가 새로운 마법을 실험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공터로 모여들었다. 레이는 숨을 크게 쉬었고 바로 마법 시연에 들어갔다.
우웅.
그의 팔찌에 박힌 마정석들이 얕게 울기 시작했다.
레이는 일단 손을 내밀어 허공에 손바닥만 한 빛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한 번의 추가 주문으로 빛의 크기를 두 배로 키웠다. 두 번째의 추가 주문에 빛 덩어리가 부피를 키워 전보다 열 배 이상이 되었다. 레이는 세 번째 주문을 시행했다. 4중 영창에 이르자 손바닥만 했던 빛 덩어리가 마치 또 다른 태양처럼 허공에서 거대하게 위용을 뽐냈다. 광도가 너무 강해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다.
“오.”
사람들이 경탄하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스카르도 겉으로 큰 반응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마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4중 영창 마법의 위력은 언제 봐도 대단한 것이다.
레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4중 영창을 유지하면서 잠시 주변을 걸었다. 여기까지는 매우 여유로웠다.
그는 머리로 네 가지 마법을 동시에 구현하면서, 한편으로 또 걷고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그가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가 움직이거나 행동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다중영창을 하는 데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면 어떨까.
아주 옛날부터 레이는 그 가능성에 집중해 왔다.
한 번에 다섯 개의 주문을 사용하는 일. 5중 영창.
‘몸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겨서 마법을 추가로 하나 더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그런 단순 셈법으로 일이 풀리진 않았다. 하지만 5중 영창을 향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4중 영창을 하는 동안 그는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이 여유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도 틀림없이 가능할 것이다.
막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성공의 가능성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는 깊이 심호흡하고 눈을 감았다. 네 개의 마법을 유지하며 그는 다섯 번째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천천히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허공에 맺힌 거대한 빛 덩어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격하게 일렁거렸다. 사람들이 그 변화에 주목했다. 지스카르는 레이가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허공에 맺힌 빛이 요동치는 것을 보면서 이내 그가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곁에 있던 드와이트 후작이 몸을 부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5중 영창……! 저, 정말로 5중 영창을 성공하시려는 건가. 정말로 그런 일이…….”
후작은 곧 입을 다물었다. 옆 사람이나 간신히 들을 중얼거림이었지만 그것조차 레이가 정신 집중하는 데 방해라도 될까 싶어서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레이가 집중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수십 개의 마법을 금방금방 구현해 내는 그가 벌써 10분 넘게 눈을 감고 주문 하나를 실체화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빛 덩어리가 더욱 요란하게 일렁거렸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더욱 숨을 죽였다. 빛을 계속 쳐다보느라 눈이 아프다. 그래도 찰나의 광경도 놓치지 않으려고 다들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계속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핏.
그때 온 세상에 거대한 천이라도 덮어버린 것처럼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두 번째 태양인 양 위용을 자랑하던 빛 덩어리가 일순간 꺼져 버린 탓이었다.
레이가 느리게 눈을 떴다. 입술을 조금 열자 안에서 핏물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이내 양쪽 코에서도 피가 흘렀고 두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레이의 신형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지스카르는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가 쓰러지는 레이를 팔로 안았다. 귀에서도 피가 흘렀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레이는 흐리게 눈을 뜬 채로 입술을 잠시 움찔거렸다. 목소리 대신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바르르 떨리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마법사!!”
지스카르는 당장 소리를 질렀다. 어지간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그가 목에 핏대까지 세웠다. 신관이 필요했지만 한시가 급하여 옆에 있는 마법사의 힘이라도 빌려야 했다.
지스카르는 즉시 레이의 코 아래에 손을 댔다. 레이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손에 숨결이 닿지 않았다. 레이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
지스카르는 눈을 크게 떴다. 레이처럼 그도 숨을 멈췄다.
지스카르는 핏기 없이 차게 식은 손으로 레이의 얼굴을 만졌다. 레이는 정말로 아무 미동도 없었다. 심장이 완전하게 멎어버렸다.
마법사들이 급히 레이의 가슴을 압박하고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몇 분간 마법사들이 분투했을 때였다.
“커헉!”
레이가 피를 왈칵 한 번 더 토하며 몸을 펄쩍 퉁겼다. 응급조치가 적절히 취해져 잠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전하! 그레이언 전하!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십니까!!”
레이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드와이트 후작이 소리쳤다.
“쿨럭, 컥. 으…….”
레이는 몇 번 얕은 기침을 하고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흐린 시선을 들었다. 지스카르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잖아도 흰 피부가 완전히 혈색이 사라져서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지스카르가 확인하듯이 얼굴을 만졌다. 레이는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이 시체처럼 차다는 것을 깨달았다.
“쿨럭. 지스카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뜨렸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실신한 것뿐이다. 지스카르는 여태 멈추고 있었던 숨을 간신히 느리게 뱉었다. 정신을 잃긴 했지만 잠깐 동안 딱딱해졌던 몸에 따뜻하게 피가 돌고 있었다. 손끝에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이 닿았다.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지스카르는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아득하게 멀어졌던 신경이 겨우 제자리를 잡아왔다. 잠깐이라 해도 레이가 숨이 멎었다.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신관을…… 당장 데려와라…….”
그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황급하게 뛰어나갔다.
* * *
레이는 꼬박 하루 동안 기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스카르가 침대맡 의자에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계속 그가 자리를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우…….”
레이는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스카르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레이, 아직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
“아니, 내 몸에 대해서는 내가 안다. 이젠 괜찮아.”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순간 지스카르는 강하게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에 대해 안다고? 아는 자가 이런 짓을 해!!”
지스카르가 방 안이 울릴 정도로 크게 언성을 높였다. 그가 소리를 지르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레이는 살짝 놀랐다. 지스카르는 무시무시하게 화가 나 있었다. 레이는 쉽게 이유를 짐작하고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내가 놀라게 만들었구나.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고 시작할 것을. 실수했군. 제대로 설명을 할 테니 일단 이거부터 놓아라.”
“…….”
지스카르는 크게 노해 있었으나 천천히 팔을 놓고 평정을 찾았다. 그가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자 레이는 곧 가벼운 분위기로 웃었다.
“너처럼 몸만 쓰는 기사들은 모르겠지만 원래 다중영창은 심력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일이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고도로 집중하기 위해서 머릿속 신경다발을 모조리 끌어당기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달고 사는 지병이 편두통이지.”
“…….”
“대충 짐작했겠지만 지금 나는 5중 영창을 시도하는 중이다. 정신을 집중하다가 그 한계를 넘어버리면 신경이 가닥가닥 전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전신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 4중 영창을 시도할 때도 지금과 같은 일을 많이 겪었지. 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조치를 취하면 된다. 원래 다음 단계에 성공할 때까지 피도 몇 번 토하고 기절하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니까.”
지스카르는 주먹을 빠득 쥐었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려는가 싶어서 억지로 평정을 가장하면서 들었더니.
그는 낮게 노기가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기절한다고? 너는 잠깐 동안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
“음?”
그의 말을 듣고 레이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낮게 탄사를 냈다.
“하아, 이거 내가 죽다 살았군. 다음에 시도할 땐 신관을 데려다 놓고 해야겠어,”
“다음?”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다음이라고 했느냐.”
“다시 자리에 앉아. 하아, 애초에 네 반응이 아주 하찮구나. 말이 쉬워 5중 영창이지, 그 경지라면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데 5중 영창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느냐.”
레이는 깃털 베개에 태연하게 팔을 올렸다. 이래서 문외한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지스카르는 표정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말도 안 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레이 쪽이다. 레이는 실제로 심장이 멎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고작 5중 영창을 위해서였다고? 신의 영역에 이르기 위해서 그 정도는 당연히 각오해야 한다고? 정녕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주장에 납득하고 동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오늘부로 5중 영창과 관련된 모든 연구를 금지한다. 연구 자료는 내일 중으로 전량 소각하고 두 번 다시는 해당 연구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겠다.”
지스카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금지 명령을 내렸다.
레이는 순간 눈을 들어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녹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노기가 서렸다.
“누구 마음대로? 지금 누구 앞에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 몸은 명실상부한 마학의 일인자이며, 내가 마법을 다루는 데 감히 입을 놀릴 자격이 있는 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 같은 칼 쪼가리나 휘두르는 놈이 이래라저래라 할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4중 영창만으로도 너는 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다. 목숨을 걸고 그 이상을 추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유가 없기는 왜 없어. 3중 영창을 달성했을 때도 대륙에 이 몸을 능가하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 이상을 추구했기에 마침내 최초의 4중 영창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무한히 욕망하는 것은 선지자의 본질인 것이다. 아니, 이 몸이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돼?”
“너의 본질이 결국 너를 죽음으로 이끌겠구나. 짐은 결코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네 손에서 마법을 뺏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네가 죽음에 목을 들이미는 꼴을 지켜보지 않겠다. 알았느냐!”
“너……!”
레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지스카르는 등을 돌리고 출입구로 향했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에 잠시 돌아서서 레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쉬어라. 당장은 몸에 이상이 없음을 신관을 통해 확인했다. 며칠 방 안에서 안정만 취하면 될 것이다.”
“거기 안 서?!”
레이가 벌컥 소리를 질렀으나 지스카르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 *
일단 죽다 살아났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 레이는 하루 정도는 방 안에서 푹 쉬어주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출입문을 막고 서 있는 황제 친위기사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서 쓰러뜨리고 곧장 황궁 마탑으로 향했다.
마정석을 뺏기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친위기사들 따위 잘 쳐줘봤자 연습용 목각인형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스카르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굳이 친위기사들을 문지기로 세운 것은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레이!”
크리스티안이 급히 레이를 쫓아왔다. 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도 지스카르의 명령을 받고 이 몸을 막으려고 온 것이냐? 너라고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저께 마법 실험을 하다가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 심장이 멎었다고……!”
“그래서?”
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크리스티안이 희게 탈색된 얼굴로 외쳤다.
“그래서라니!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인가!”
“원래 이 정도 연구를 하다 보면 얼마간의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네놈들에게 잔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군.”
“레이. 얼마간의 위험이 아니지 않은가. 네 목숨이 위험한데 그것을 어떻게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지켜보지 않으면? 내가 목숨을 걸겠다고 결정했다면 너는 입 다물고 따르면 될 일이다. 질 좋은 마정석이나 갖다 바치며 이 몸의 연구가 성공하게끔 기도나 하는 것이 네놈이 갖춰야 할 태도란 말이다. 알았느냐?”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독선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지만 최종 결정은 항상 독단으로 했다. 그가 위험한 적진에 뛰어들겠다고 결정하면 측근과 수하들은 염려는 하되 절대로 이견은 달지 않았다. 대신 주인이 뜻하는 바를 성공시킬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위험물을 제거했다. 그가 선호하는 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지, 충언이랍시고 이미 결정을 내린 일에 이견을 다는 자가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많지만 레이도 본질적으로 레브노아드 황태자와 같은 성향을 가졌다.
다시 마탑으로 향하려던 레이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와서 마탑에 가면 뭘 할 것인가. 이 나라의 황제께서 실험 금지 명령을 내렸는데 뒤늦게 가서 고함이나 지르고 돌아오라고?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조소를 지었다.
“죽여버릴 놈. 감히 이런 식으로 내가 하는 일에 엿을 먹여?”
레이는 크리스티안을 불러들여 지스카르에게 간단히 자신의 말을 전하라고 일렀다.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티안이 당황했지만 레이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황궁을 나섰다.
* * *
“폐하. 저라도 따르겠습니다.”
크리스티안의 말에 지스카르는 손을 올려 그를 물렸다. 그는 간단한 복장을 하고 혼자서 황성 뒤쪽으로 펼쳐진 사냥터로 향했다.
크리스티안을 통해 전해온 레이의 요구는 간단했다. 실험 금지 명령을 취소하지 않을 시에 바로 엘 파셔를 뜨겠다는 이야기였다. 너그럽게도 생각할 시간을 5일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스카르는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한다면 레이는 작위고 영지고 다 집어치우고 떠나버릴 것이다. 비소를 머금고, 아마도 떠나는 얼굴에 미련 따위는 한 톨도 없을 터였다.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지나치게 강하고 혼자서도 완벽했다. 그 손에서 마정석을 빼앗아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린다면. 시커먼 충동이 머리를 느릿느릿 덮어갔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숲 으슥한 곳에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있었다. 언젠가 레이가 게으름 피우기 좋게 생겼다고 말했던 나무다.
아래로 늘어진 굵은 나뭇가지에 레이가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연구 자료 같은 것을 읽고 있다가 지스카르의 인기척을 느끼고 반응했다.
“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레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금발이 사락거리며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지스카르는 눈높이에 있는 레이의 머리카락 끝에 손을 댔다. 자신은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데 그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도가 가벼웠다. 지스카르는 머리끝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네가 이 장소를 발견하고 꽤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났다.”
“겨우 그런 걸로?”
그와는 달리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을 항상 주시하고 있으니까.
레이는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음침한 녀석, 안달이 나서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내가 닷새 후에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을 텐데?”
“네가 떠나겠다고 경고하는데 짐이 어떻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겨우 이런 일로 떠나겠다고? 너는 앞으로 수틀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짐을 협박하겠구나.”
레이는 연구 자료를 팔랑팔랑 흔들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면 너를 곱게 앉혀놓고 정식으로 설득을 하려고 했겠지. 네놈이 하찮은 이유로 내 일생일대의 연구를 방해하려 드니 나도 똑같이 막무가내로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하찮은 이유라고? 네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것이 어떻게 하찮은 이유인가.”
“누가 죽는다는 것이냐. 네놈이 죽으라고 하늘에 제를 올려도 죽어줄 마음 같은 건 없다. 그때 일은 사고에 불과해!”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것보다 위험한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일찍이 전쟁터를 돌아다닐 땐 뱃가죽이 터져 내장을 다 쏟아낸 적도 있다. 내 명성의 절반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서 쌓은 것이거늘. 이 몸에게 오백 년간 무패였던 에브라함 요새를 공략해 보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위험해?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마탑에 눌러앉아 연구에 골몰하는 것이 안전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네놈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란 말이다.”
“…….”
“이제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겠느냐?”
레이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짐은 네가 숨이 멎는 것을 실제로 봤다. 짐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보느냐?”
“그러니까 네놈이 과잉반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잖아. 네놈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화를 내던 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쟁이 너무 길군. 그냥 너에게 간단하게 선택지를 주마. 얌전하게 내가 연구에 전념하는 것을 지켜보든가, 아니면 이 몸이 떠나는 걸 구경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
지스카르는 레이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쓸어내렸다. 레이는 힐끗 그의 손을 불쾌하게 쳐다보았지만 그에게 바른 판단을 하라며 잠시 참아주었다.
“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면, 네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이 손을 놓겠다.”
그가 얼굴에 올려두었던 손을 뗐다. 순간 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자신을 놓치기 싫어서 연구를 그대로 하라고 말할 줄 알았기 때문에.
레이는 지스카르의 손을 낚아챘다. 한숨이 푹 나왔다. 자신이 진짜로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참 어지간하다. 그가 얼마나 암울한 심정으로 저러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되어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5중 영창과 관련한 연구를 계속하되 당분간은 자료를 모으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사실 다음 단계를 넘보기는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해서. 어떠냐. 이래도 내 연구를 계속 훼방을 놓을 참이냐?”
지스카르는 표정을 굳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쯧. 마학은 내 영역이고 네놈이 참견할 영역이 못 되는데, 어째서 내가 먼저 양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레이는 혀를 차면서 네놈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에 딱 한 발자국만 양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심정을 짐작한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없는 늪에 빠진 듯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그를 시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까이 당겼다. 레이는 반사적으로 질색하며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했다.
“잠깐, 뭐……!”
지스카르는 저항하는 레이의 팔을 억지로 붙들고 입술에 키스했다. 레이는 이를 빠득 깨물었지만 결국 입술을 열었다. 싫어하지만 그래도 키스를 받아주었다. 계속 입을 맞추자 팔 아래 안겨 있는 몸이 조금씩 떨리고 열이 올랐다. 레이가 뻣뻣하게 굳히고 있던 몸을 늘어뜨렸다. 열기에 느리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 남아서 손길을 허락한 것만으로도 레이가 아주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당연한 듯이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다.
살짝 떨어져 나온 입술을 다시 겹치려 했다. 그때 레이가 손으로 입술을 가로막았다. 그가 흐트러진 숨을 삼키며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하아,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다시는 내 연구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당장은 자료수집만 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5중 영창 시험을 재개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이 몸이 한발 물러서기까지 했는데 또 토를 달아?”
레이의 얼굴에 진심으로 분노가 서렸다.
“……그래, 맹세하마.”
어차피 레이를 완전히 제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속 5중 영창 실험을 금지하겠다고 말한다면 분노 어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당장 등을 돌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든 자기 발 닿는 대로 떠나버릴 테지.
지스카르는 레이의 팔을 당겨 손등에 키스했다. 이 손에서 마정석을 빼앗아 다시 한번 힘없는 노예로 전락시킬 수만 있다면. 계속 그런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분위기 그만 잡고 움직이자. 마탑이 엉망일 테니 먼저 확인부터 해야겠군.”
레이는 손을 확 잡아 이끌며 산에서 내려가자고 말했다. 이미 문제 따윈 다 해결되었다는 듯 걸음이 가뿐했다.
지스카르는 속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레이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