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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23/43)

외전 2

처음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그레이언 대공은 노예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태생부터 노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발목에 족쇄까지 찬 상태로 제3 황실 근위기사대 소속 기사인 론돌레스와 검으로 대련을 해서 압승을 거뒀다. 평범한 노예가 근위기사를 압도할 정도의 검술을 가질 수 있을 턱이 없어 그때부터 그의 출신이나 배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가 은근히 나돌았다.

황실 연회에 참석했을 당시에 보여주었던 모습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번듯한 것이 아니라 지벌을 자랑하는 중앙 귀족을 상대로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눴고 언동도 무척 세련되었다. 그 때문에 어딘가의 귀족이었다가 집안이 몰락했거나 어떤 사정으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며 추측성의 이야기가 오가곤 했다.

그의 예전 신분이 어떠했는지는 대공 작위를 받은 현재에도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4중 영창 마법사임이 확실해지고, 신의 힘을 빌려 철옹성 같던 에브라함 요새를 무너뜨리며, 전설에서나 등장하던 드래곤까지 거느림으로써 자신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강렬하게 증명했다. 황제가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손에 넣으려 한 이유가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서둘러. 이제 곧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께서 오실 거다.”

“진짜 오늘 하루만 당번 좀 바꿔주면 안 되겠냐?”

오늘 제3근위대 연병장에서 황제와 그레이언 대공 간의 대련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렇게 귀한 관전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 비번인 근위기사들은 일찍부터 일어나서 연병장으로 달려 나갔다.

“다들 비위도 좋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예였던 기억이 생생한데 솔직히 대공 전하 소리가 나와?”

근위대 숙소에 있던 동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자 론돌레스는 혼잣말인 척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그레이언 대공과의 대련에서 추태를 보인 직후 바로 상관에게 불려가 크게 불호령을 들었다.

제3근위대의 대장은 평소 1, 2근위대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며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휘하 기사가 낯 뜨거운 사고까지 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노스랜드의 동향을 살피고 오라며 아주 북방으로 쫓아버렸다. 거의 1년 넘게 장기근무를 나갔다가 최근에야 황궁에 복귀한 론돌레스는 그레이언 대공에게 여전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론돌레스 경, 그런 말 해봤자 그레이언 대공이 밑바닥 출신이 아닐 거라는 건 경도 예상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숙소를 나가던 제3근위대 소속 기사가 한마디 했다.

“어쨌든 그때 노예였던 것이 사실이잖아.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옛날 출신이 어쩌니 하는 소리도 나오는 거지. 건방진 노예라고 다들 한마디씩 했던 주제에.”

“…….”

“그리고 말이다. 폐하의 신상에 해를 끼친 적도 있는 자인데 좀 경계를 해야 하지 않나?”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시 일은 금기니까.”

근위기사는 즉시 표정을 굳히며 등을 돌렸다. 그레이언 대공이 황제를 시해하려 했던 일은 금기였다. 론돌레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황제와 그레이언 대공이 연병장에 행차했다. 대공의 어깨에 있던 황금색 드래곤이 소리 없이 높이 날아올랐다. 드래곤은 신비하게도 자신의 몸집을 자유자재로 키웠다가 줄였다가 할 수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드래곤이 갑자기 5미터 가까이 크기를 키웠다. 바닥에 커다랗게 그림자가 졌고 사람들이 놀라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어……? 뭐, 뭐…….”

론돌레스는 대련을 관전하기 위해 슬그머니 연병장에 들어왔다가 거대한 드래곤을 보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근위대에 갓 복귀해서 드래곤을 오늘 처음으로 보았다.

동료들이 완전히 넋을 놓은 론돌레스를 보면서 실소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설로만 접하던 드래곤이 눈앞에서 홰를 치고 있으니 볼 때마다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황금용이 한 바퀴 허공을 날다가 근처의 단층건물 지붕에 자리 잡았다. 저 거대한 생물이 지붕에 앉았다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드래곤은 무게가 전혀 없어서 건물에 충격을 줄 일은 없었다.

잠시 후 황제가 거느린 것으로 알려진 검은 용도 순식간에 비슷한 크기로 몸집을 키워 같은 지붕에 앉았다. 높은 곳에 거대한 두 마리 드래곤이 자리 잡은 광경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내 주위가 조용해졌다. 황제가 연병장 가운데에 도착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무신으로 칭송받는 황제의 검을 직접 볼 기회였다. 그의 대련 상대는 이 대륙의 유일한 4중 영창 마법사이고 수준급의 기사이기도 한 그레이언 대공이었다.

“검은 쓰지 않을 것인가.”

“흐음. 검을…… 역시 드는 편이 낫겠지. 이것 참 애매하군. 마법을 쓸 때는 무겁고 방해만 되는데 접근전이 되면 한 방을 막을 무기가 되니.”

“과거와 달리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까마득한 애송이 놈이 어디서 충고를. 나는 4중 영창 마법사가 된 이래로 일대일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다. 너는 대련을 할 때만큼은 이 몸에게 존경을 표해야 돼.”

그레이언 대공이 검을 뽑았다.

드래곤을 보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던 론돌레스는 멀리서 황제와 대공이 대화하는 것을 주워들었다. 그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동료 기사들을 쳐다봤다.

“아, 아니, 다들 못 들었어? 저자가 황제 폐하께 저런 말도 안 되는 무례를!”

“…….”

다들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레이언 대공이 대단히 무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소드 마스터에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은 황제를 자주 애송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그레이언 대공은 사석에서 대화할 때는 황제를 상대로 서슴없이 말이 놓았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황제가 그 모든 무례를 용납한다는 사실이었다. 관례를 중시하고 예외를 좋아하지 않는 황제가 항상 그에게만 많은 예외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의 마법을 지켜보다 보면 왜 그만을 예외로 두는지 아주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콰앙!!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지축을 울릴 만큼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레이언 대공이 시작부터 불덩이를 내리꽂아서 연무장의 3할을 박살 내버렸다. 저 정도 파괴력이면 최소 3중 영창이다.

기사들은 볼 때마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3중 영창 마법이 저렇게 금방금방 완성되는 것이던가.

황제는 폭발 영역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곧장 그레이언 대공을 향해 돌진했다. 딛고 있던 땅이 쩍 갈라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레이언 대공은 네 개의 주문을 초 단위로 동원해 마법을 쏟아부었다.

우우우웅.

콰과과과광!

마정석에서 나는 소리에 바닥이 부서지는 굉음이 요란하게 섞였다. 엄청난 수의 마법이 황제의 전방으로 쏟아졌다. 무슨 마법을 저렇게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지, 아무리 기본 마법이라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모든 마법사가 저런 식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기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쿠쿵! 쾅!

물론 상대 기사가 소드 마스터라면 이야기는 당연히 달라진다. 황제가 전신에 뿌득 힘을 가하며 오라 소드를 크게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백색 오라가 기존보다 수십 배 이상 휘몰아치며 전방의 모든 마법을 단칼에 갈랐다. 무수한 마법과 시야를 방해하던 흙모래까지 번쩍하는 빛 한 번에 싹 증발하고 일순 전방이 깨끗하게 드러났다.

“하아, 아까운 내 마법.”

모든 마법이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그레이언 대공이 한탄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그가 다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순간 손끝에서 벼락이 뻗어나갔다. 동시에 불기둥이 굉음을 내며 휘몰아쳤고 시간차를 두고 빼곡한 십여 개의 얼음가시가 쏘아졌다.

황제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오라 소드가 다시 타올랐다.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대응하지 못할 벼락을 찰나에 검으로 가르고, 다음 검격으로 불기둥을 내려쳐 쪼개며, 무수한 얼음가시를 오라를 폭발시켜 부채꼴로 뿜어내서 산산이 날려버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빠르다. 그 모든 공방이 눈을 몇 번 깜빡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실력 미달의 기사들은 오라가 번쩍거리는 광경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희게 비산하는 얼음조각 사이로 황제가 말했다.

“결국 이건가. 어차피 마법사, 접근전에선 한계가 올 수밖에.”

“닥치는 대로 베는 것밖에 못 하는 족속들이 항상 같은 소릴 지껄이던데.”

황제가 순식간에 그레이언 대공의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그레이언 대공은 가소롭다고 조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캉!

번뜩 허공에서 떨어지는 황제의 검을 그레이언 대공이 검으로 맞받았다. 연속해서 큰 마법을 베느라 황제의 검에 실린 오라가 사라져 있었다. 그 덕분에 소드 마스터의 검을 맞받아칠 수 있었다. 물론 온전히 맨몸은 아니었고 마법으로 근력을 강화한 상태였다. 마정석이 박힌 팔찌에서 계속 소리가 나는 것이 증거다.

“무슨 생각이지? 무모하군!”

황제가 약간 눈을 좁히며 말했다. 그레이언 대공이 아무리 보통 마법사와 다르다 해도 거리를 벌리며 마법을 난사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존 방식을 버리고 일부러 황제가 접근하기를 기다려 검을 들고 대응했다.

캉! 카캉!

두 번 검이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황제의 검은 대단히 무겁고 빠르다. 그레이언 대공이 두 번 합을 맞춘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런데 세 번째 합이 있는 순간,

탕!

황제의 검이 허공에서 무언가에 부딪혀 일순간 정지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막이 찰나의 순간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허술한 차단막 따위 금방 황제의 오라 소드에 깨져 버렸지만 흐름이 흐트러졌다. 그레이언 대공이 짧은 순간을 이용해 검을 쳐올렸다.

핏.

얕게 핏물이 튀었다. 검이 황제의 턱 끝을 베고 지나갔다. 마법도 아닌 검에 베이다니. 지켜보던 기사들이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자랑하던 검에 베인 기분이 어떠냐, 애송이 놈.”

그레이언 대공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곧장 바람을 일으켜 옆으로 몸을 뺀 다음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가 물러나는 것보다 한발 빠르게 황제가 뒤를 따라잡았다. 그의 검에서 다시 오라가 크게 휘몰아쳤다. 누가 봐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레이언 대공은 공격에 방어를 하지 않고 공격으로 대응했다.

대공이 바닥을 후려치자 지하부터 폭발하며 땅이 융기했다. 황제가 검을 세워 막으며 한 걸음 물러섰고, 그레이언 대공은 폭발에 휘말리며 뒤로 길게 밀려났다. 그가 균형을 잃고 손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손에 익지도 않은 검으로 무리한 탓이다!”

황제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이닥치며 대공의 실수를 지적했다. 초 단위로 무수히 공방이 오가는 상황이니 찰나의 빈틈조차 승패를 좌우하는 큰 차이가 된다.

“건방진 놈이……!”

그레이언 대공은 살짝 이를 드러내며 땅을 박차고 바람을 일으켜 좌로 날듯이 거리를 벌렸다.

“우왓!”

길게 미끄러지며 그레이언 대공이 연병장 경계에 서 있던 기사들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거의 충돌하기 직전이라 기사들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때 대공이 바람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홱 90도 급선회하여 움직였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으나 몇 번이나 비슷한 방식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황제는 상대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같은 방식이 통할 것 같은가!”

거의 따라잡히기 직전, 그레이언 대공은 다시 한번 땅을 짚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알면서도 따라오질 못하고 있잖느냐!”

관성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움직임 때문에 황제는 목표물을 일순 놓쳤다. 그의 말대로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기동력이다.

콰직!!

오라 소드가 그레이언 대공을 비껴 지나갔다. 목표를 잃었지만 무섭게 뻗어 나온 오라 때문에 연병장 바닥이 깨지고 수 미터 깊이의 고랑이 생겼다. 황제가 헛손질하고 낭패인 얼굴을 했다. 반대로 주문이 세 개나 남아 있는 그레이언 대공은 웃었다. 주위 온도가 확 올라가며 그의 좌우로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콰과광.

“우왓!”

“크!”

가까운 곳에 있던 기사들이 폭발의 여파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황제의 전용 연무장이 좁다고 해서 일부러 근위대 연병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조차도 그들의 대련에는 턱없이 좁게 느껴졌다.

그레이언 대공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4∼5미터를 움직였고, 소드 마스터인 황제도 인간 같지 않은 탄력과 폭발력으로 한 번의 도약에 수 미터를 뛰었다. 단순한 대련인데 연병장이 다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로써 세 번째로 황제와 대공의 대련을 참관하는 것이지만 근위기사들은 볼 때마다 놀라고 다시 감탄했다. 혹자는 단순히 감상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대련에서 무엇이라도 얻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변칙적이고 애초에 마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도저히 흉내도 못 낼 것이었다. 그나마 같은 기사로서 배울 점이라도 얻을까 싶어 황제의 움직임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의 움직임 또한 인간 같지 않아 똑같이 참고가 되질 않았다.

“억……, 어어…….”

대련이 계속될수록 론돌레스는 입을 벌리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솔직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자신과 대련했던 그레이언 대공이 저런 인간이었다고?

“론돌레스 경, 북부로 장기 파견을 나갔다더니 드디어 복귀했나 보군. 4중 영창 마법사로 소문이 자자한 그레이언 대공과 대련을 했었다면서? 좀 비겁했지만 심지어 이겼다던데.”

제1근위대의 소속인 게오르크가 비소를 머금으며 나타났다. 론돌레스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대답을 못 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제3근위대의 기사들이 게오르크를 예우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게오르크는 수십 년 전 스트라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선황제로부터 영웅 훈장까지 받은 적이 있는 강력한 대기사였다.

게오르크와 제1근위대의 기사들은 이번 내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궁을 지킬 믿을 수 있는 병력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서 게오르크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레이언 대공의 마법을 직접 볼 기회를 얻었다.

무려 소드 마스터인 황제를 애먹이는 마법사라 했던가. 게오르크는 존경받는 대기사였으나 그래도 소드 마스터인 황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오랜 연륜과 노련함을 무기로 제법 버티긴 하겠지만, 소드 마스터와는 기본적으로 가진 무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는 연병장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레이언 대공이 손바닥 위로 불길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옆으로 팔을 뻗자 세 번의 추가 영창으로 순식간에 초고온의 불덩어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젠장. 진짜로 4중 영창이군!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죽은 뒤로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레이언 대공의 마법을 보면서 게오르크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4중 영창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귀로 불렸던 4중 영창 마법사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진정 규격 밖의 존재로 기존의 공격법이나 방어조치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으면 멀쩡한 성문까지 한 방에 뚫어버리니, 혹시라도 황태자가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당시 게오르크는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저런 악몽 같은 마법을 또 보게 된다니.”

게오르크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댔다. 다른 근위기사들도 ‘악몽 같은 마법’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레이언 대공이 진심이 되어 황제를 잠시 공격했을 때, 일백의 기사들이 손도 못 쓰고 바람 앞의 낙엽처럼 쓰러지면서 그들도 진정 악몽을 꾸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보니 굉장히 닮았군…….”

게오르크는 문득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레이언 대공이 마법으로 공격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쿠구궁!!

한차례 폭음이 터지고 그레이언 대공이 게오르크가 서 있는 곳 바로 지척까지 당도했다. 우연히 게오르크를 발견한 대공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짧은 사이 황제가 벼락같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레이언 대공은 크게 놀라며 황급히 네 겹으로 장막을 쳤다. 오라 소드에 부딪혀 장막이 부서지는 순간 그 반동에 비틀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한 끗 차이로 간신히 공격을 피하며 그레이언 대공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윽! 네놈이, 한눈파는데 이러기 있느냐!”

“한눈파는 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구는군.”

“그냥 대련인데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마라.”

그레이언 대공은 다시 게오르크를 응시했다. 황제도 대공의 시선을 따라 잠시 그를 보았다. 얼결이었으나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게오르크는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레이언 대공이 흐음 콧소리를 냈다.

“연륜이 있어 보이는 자로군.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기사일 테지. 막판까지 사람 발목을 잡으며 다 성공한 계획에 재를 뿌리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줄 테고 말이다.”

대공이 갑자기 게오르크를 보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뒷말이 좋은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게오르크 본인은 그레이언 대공의 말을 듣고 불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동요하는 낯빛을 보였다.

“뭐, 곧 죽어도 끈질기게 저항하는 게 엘 파셔 근위대의 신조라 하니 어쩌겠는가.”

그레이언 대공은 손사래를 휘휘 치며 다시 연병장 가운데로 향했다. 게오르크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대공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황제가 등을 돌리기 직전 게오르크가 입을 열었다.

“폐하.”

“…….”

“혹시…….”

당장에 떠오르는 이가 있어 게오르크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낼지 망설였다.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을 스트라스와 연관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다. 대공이 한때 스트라스의 첩자로 몰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애초에 첩자로 몰았을 때 사람들이 왜 스트라스와 그를 엮어서 이야기했던 것일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게오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냉엄한 시선에 게오르크는 한기를 느꼈다. 게오르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레이언 대공이며 더 이상의 사족은 필요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황제의 뜻이었다.

황제와 그레이언 대공의 대련이 다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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