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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24/43)

외전 3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뒤적거렸다. 다른 손으로는 소파 테이블을 더듬거려 그 위에 놓인 견과류를 집었다.

“그레이언 전하. 재작년 기관지도 가져왔습니다. 어디에 둘까요?”

나태한 자세로 간식을 집어 먹고 있자니 시종이 새로운 책자를 산더미처럼 더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탁상 빈자리를 가리키며 저기 대충 놓아두라고 말했다.

엘 파셔에서 각부에서 국가 기관지를 출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최근 3년 치 분량을 전부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정리도 안 된 기관지가 탁상 위에 꾸역꾸역 쌓였다. 어차피 제대로 읽으려고 시작한 건 아니라서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엘 파셔가 상상보다 체계적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고, 기관지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구경하려고 했을 뿐.

책을 읽으며 견과를 집으려고 다시 옆으로 손을 뻗는데 머리 위로 인기척이 느꼈다.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지스카르가 도착한 모양이다.

“그런 자세로 책을 읽으면 몸에 좋지 않다.”

“네놈 가끔씩 자식한테 잔소리하는 아버지처럼 말하는데 소름 끼치니까 그만둬라. 인생을 젊게 살란 말이다.”

“그게 젊게 살기 위해 택한 자세인가?”

사실 지스카르가 지적하는 말이 틀리진 않았다. 책을 읽기에 좋은 자세도 아니고, 이대로 계속 있다간 목에 무리가 올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괜히 움직이기 싫을 때가 있다. 나는 기관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리를 척 꼬았다.

“음……. 내버려둬. 오늘 하루 동안 빈둥거릴 예정이니.”

“빈둥거리기 위해서 집어 든 책치곤 지루해 보인다만.”

“너 이거 읽어봤느냐? 예산부와 감사부에서 같은 정책을 두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있는데 아주 웃겨. 원래 국가 기관지라는 게 이렇게 과격한 물건이냐?”

내 말을 듣고 지스카르가 미간에 살짝 세로줄을 세우며 바로 예산부의 기관지를 펼쳐 들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글줄을 읽는 데 집중했다.

책을 살피던 지스카르가 소파를 두고 굳이 근처에서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내 머리맡에 자리를 잡은 녀석이 이마를 덮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만지작대는 손이 성가셔서 머리를 흔들었다. 지스카르는 잠시 손을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아까 집어 들었던 책은 아예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귀찮게……. 그래, 만지니까 좋으냐?”

“아주 마음에 든다. 겉은 차고 안쪽은 체온 때문에 따뜻하군.”

“거참 좋겠구나.”

나는 기관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충 대꾸했다. 한 권을 다 읽고 옆으로 홱 던진 다음 손을 더듬거려 집히는 기관지를 아무거나 펼쳐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국가정책이 실린 책자를 제대로 읽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생각은 아니고, 나는 아무거나 읽으며 정말로 빈둥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도 잠시 빈둥거리기로 했는지 내 머리맡에 앉아 계속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뭘 하는지 머리카락이 약간씩 당긴다. 나는 인상을 썼지만 놈의 손을 애써 뿌리치는 편이 더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짐은 먼저 가보마. 종일 방에서 쉴 예정인가?”

“음…….”

잠시 뒤 지스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책을 읽느라 멍하게 소리만 냈다. 지스카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내 앞머리를 마지막으로 쓸어 넘기고 방을 나갔다.

지스카르가 떠난 뒤로 두어 시간 정도 시간이 더 지났다. 지스카르가 말한 대로 정말 목과 어깨가 뻐근해져서 같은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아까부터 하나씩 주워 먹던 견과도 빈 그릇만 남은 상태다. 나는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빈둥거리는 것도 어쩐지 지겨워져서 마탑에나 들르기로 했다. 제도에 따로 그레이언 대공저가 마련되어 있으나 지스카르가 매일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나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황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량의 마정석을 조달받아 여러 실험을 하기에 황궁 마탑만 한 장소가 없기도 해서 일단은 놈의 불순한 요구에 따라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팔뚝 위의 문신을 톡톡 치자 황금색 드래곤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그동안 지겨웠다는 듯 날개를 펴더니 슬슬 날아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바로 마탑으로 향했다. 내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탑의 총책임자인 드와이트 후작이 입구까지 뛰어나왔다.

“대공 전하, 오셨습니까! 전에 맡겨주셨던…….”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던 드와이트 후작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가 내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그때 어깨에 앉아 있던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면서 위로 떠올랐다. 후작이 반사적으로 드래곤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새삼 드래곤이 신기했던 것인가. 잠시 딴 곳을 보던 드와이트 후작은 금방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전에 맡겨주셨던 37차 실험에 관한 것인데 생각보다 일찍 결과가 나왔습니다. 잠시 기다리셨다가 확인하고 가시겠습니까?”

“그리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와이트 후작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는 날로 세련되어지시는군요.”

드와이트 후작이 앞장서서 가다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실소했다.

“방에서 굴러다니다가 바로 나왔는데 괜한 아부로군.”

“아부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됐으니 이참에 30회차부터 최근 회차까지 연구지를 전부 가져오게.”

나는 마탑에서 연구지를 살펴보다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황제궁으로 돌아왔다. 가는 길에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드래곤을 대동하는 동안에는 어딜 가든 항상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드래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사실 내게는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나는 반년 전만 해도 노예 취급을 받았다. 황궁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노예였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곁에 붙어 있는 드래곤이 모든 과거를 세탁시키며 이 몸을 신비한 존재로 격상시켜 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반응이 굉장히 유난한 것 같다. 이거 내 기분 탓?

황제궁에 도착해서 계단을 오르려다가 친위대 업무 중인 크리스티안을 만났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인상을 썼다.

또다.

마탑에서 드와이트 후작이 그랬고, 크리스티안까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길을 가던 다른 자도 은근히 내 얼굴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나는 반사적으로 뺨에 손을 얹었다. 설마 얼굴에 뭐가 묻은 건 아니겠지.

“대공 전하, 마탑에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오늘은 일정 없이 쉬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잠시 날 쳐다봤으나 크리스티안은 다시 반듯한 태도로 돌아왔다. 얼굴에 뭐가 묻은 거라면 크리스티안이 저런 식으로 반응할 리 없다.

“시간이 남아서 잠깐 마탑에 들렀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크리스티안에게 뭣 때문에 날 쳐다보았냐고 물으려 했다. 그때 갑자기 모퉁이 쪽에서 검은 드래곤이 확 날아들었다. 검은 용은 황금용을 뒤쫓으며 허공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이 몸과 한 몸이라 그런지 황금용의 감정이 가볍게 흘러들었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역시 황금용은 자길 졸졸 쫓아다니는 검은 용을 귀찮아하고 있었다. 그나마 싫어하지는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나는 측은한 감정을 담아 검은 용을 건성으로 응원해 주었다.

검은색 드래곤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의 주인도 나타날 때가 되었다. 방금까지 집무실에 있다가 나왔는지 지스카르가 행정관 둘을 이끌고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왔다.

내 모습을 발견한 지스카르는 갑자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래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아 크게 티가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편인 나는 확실하게 놈의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

지스카르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며 내 머리 위로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놈이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나는 머리를 만지는 지스카르의 손을 끌어내리고 창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마침 안은 밝고 밖은 어두워 유리창에 얼굴이 잘 비쳤다.

처음으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나는 퍼렇게 질려서 입을 딱 벌렸다. 지스카르가 내 팔을 이끌었다.

“일단 들어가지.”

“…….”

놈의 말마따나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를 차려오겠다는 시종들에게 부를 때까지 절대 출입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방문을 거칠게 닫았다. 지스카르는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켕기는 일이 있으니까 입을 못 여는 것일 테지!

나는 거울로 가서 다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꼬마 계집애처럼 옆머리와 뒷머리가 가늘게 몇 가닥 땋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에 이런 괴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자는 딱 한 놈밖에 없다.

몸을 홱 돌려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저 커다란 놈이 내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사색이 돼서 놈을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네놈이 변탠 줄은 진작 알고 있었다만. 대체 머리 땋는 건 어떻게 알고 이런 짓을!”

침묵을 지키던 지스카르가 내 발언에 뭔가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그리 정색할 일인가.”

“남자 새끼가 계집애처럼 머리를 총총히 땋아놓고 뭐가 이렇게 당당해!”

“연인을 위해 머리를 만져줄 수도 있지. 짐이 당당하지 못할 것은 없다. 네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여기서 문화 차이를 감지했다. 그러니까 엘 파셔 놈들은 금실이 좋을 경우 자기 연인이나 부인의 머리카락을 직접 빗겨주거나 손질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연 엘 파셔, 스트라스 남자들이 들으면 기절할 짓을 잘도 뻔뻔스럽게 해낸다.

“좋다. 문화적 차이를 수용하겠다. 네놈이 변태가 아니라는 것까지는 인정해 주마.”

“…….”

“그런데 남의 머리를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나가? 내가 오늘 반나절 동안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닌 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목덜미를 잡았다. 너무 열 받아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저놈이 나를 치욕사시킬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는 거다.

“네가 밖에 나갈 일이 없다고 해서 그냥 두고 간 것이다만.”

지스카르가 변명이랍시고 주둥이를 놀렸다. 내가 죽일 듯이 노려보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으니 그만 화 풀거라.”

“네놈이 진짜 뒈지고 싶지!”

“네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해서, 그것이 유일하게 문제일 뿐. 누가 네 모습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던가?”

“…….”

생각해 보면 다들 조금 색다르게 바라봤을 뿐 딱히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드와이트 후작은 오늘따라 세련되다며 칭찬까지 했었다.

나는 웃었다. 목에 핏줄이 솟는 것을 살짝 누르면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딴 칭찬 하나도 기껍지 않았다.

“네놈을 진작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결국 버럭 고함이 터져 나왔다.

* * *

보름 넘게 제도의 대공저에 머물다가 오랜만에 황궁을 방문했다. 당분간 황궁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으나 오늘 연회가 열려 제 발로 황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능한 한 제도에서 열리는 모든 연회에 참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한때 황제의 노예였기 때문에 아직도 멋모르고 이 몸을 함부로 얕보는 자들이 있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나를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

여론을 내 편으로 돌리는 일은 솔직히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이다.

나는 외모가 제법 훌륭하고 귀족적인 편에 속하므로 겉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품위 있게 행동하고 다양한 화제에서 높은 식견을 드러내도 좋았다. 이 몸과 대화를 나누면서 천박한 노예를 떠올릴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수단은 그뿐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과감한 화법은 나의 가장 큰 무기다. 내 주위를 맴도는 신비로운 황금색 드래곤이 다시 한번 사람들을 현혹해 끝내 내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마지막까지 이 몸을 인정하지 않고 악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들도 있겠지. 모든 사람을 다 납득시킬 순 없는 법이니까. 나는 시간을 들여 악성 분자들을 골라내서 따로 처리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이름뿐인 대공이 아니라, 권력과 명성을 가진 진짜 대공이 되기 위해서 이 정도는 최소한의 조치다.

연회장에 입장해 보니 이미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내 어깨에 있던 드래곤이 연회장을 한 바퀴 날다가 돌출된 창틀에 앉았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탄사를 터뜨렸다.

“대공 전하!”

드와이트 후작이 반가운 얼굴로 가장 먼저 접근해 왔다. 그는 내란을 거치는 동안 완벽한 나의 숭배자가 되어 있었다. 엘 파셔에서 첫째로 꼽히는 대마법사의 호의를 거절할 필요가 없어 나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머리에 시선이 갔다.

그가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서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평소엔 깔끔하게 정리하여 뒤로 넘기기만 하는데 저런 스타일은 처음 보았다. 단정해서 나쁘진 않다만. 내가 눈길을 주자 그가 마치 자랑하듯이 자기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

나는 그의 행동이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아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고 적당히 드와이트 후작과 담소를 나눈 뒤 자리를 옮겨 다른 귀족들과도 대화를 했다.

연회장을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기이한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 중에 머리카락을 땋은 인간들이 한두 명씩 눈에 띄었다. 특히 긴 머리 남자들이 머리를 많이 땋았다. 머리카락이 짧은 자들도 옆머리를 한두 가닥 멋 내기로 땋고 있었다. 머리치장은 여성의 전유물이고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옆이나 뒤로 넘겨서 멋을 부리는 정도에서 그쳤는데, 이건 대체?

마침 위대하신 엘 파셔의 황제 폐하께서 연회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검은 드래곤이 연회장 천장 위로 기척 없이 날아올라 황금색 드래곤 곁에 안착했다. 사람들이 크게 감탄하며 드래곤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나는 지스카르에게 곧장 다가갔다. 긴말은 하지 않고 연회장을 좀 둘러보라고 눈짓을 했다.

지스카르는 연회장을 두루 한 바퀴 보았고 다시 나를 보았다. 남성 귀족들의 머리 모양이 오늘따라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그는 눈치 좋게 깨달았다.

“폐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마 이 사태가 저와 관계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

지스카르는 침묵하면서 괜히 연회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기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이제 화를 풀 때도 되지 않았는가.”

어차피 근처에 사람도 없겠다, 나는 예의를 던지고 반말로 대꾸했다. 대신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중인데 화를 풀 때가 됐다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만.”

“사내놈들이 머리에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디가 좋은 쪽이란 말이냐.”

“머리카락에 치장을 조금 한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란 말인가. 귀족들이 네가 했던 머리 모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네가 그만큼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화만 낼 것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필 이런 걸로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거든!”

“스트라스인은 이상한 데서 고집스럽지.”

“엘 파셔 놈들이 쓸데없이 파격적인 거다.”

“작위까지 얻었으니 너도 엘 파셔의 관습에 적응할 시기도 되었다.”

“이런, 이 몸은 뼛속까지 스트라스인이라 엘 파셔의 관습이 몸에 영 안 맞아서 말이다. 1년이나 지켜봤으니 너도 이 몸의 행동 양식에 적응할 시기도 되었지?”

자기 말투를 따라 했더니 지스카르가 지그시 날 쳐다봤다.

귀족들이 황제를 배알하길 원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언쟁을 중단하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도 이쯤에서 지스카르를 붙잡고 화풀이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황제와 대화하는 고위 귀족 중에도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인간이 보였다. 이건 완전히 쏟아져 버린 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물을 쏟았는지 철저하게 숨기는 수밖에.

결국 모종의 사건 이후로 엘 파셔에는 남자들 사이에 머리카락을 땋는 것이 완전히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정작 그 사건이 무엇인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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