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몰이꾼들이 시끄럽게 종을 울려대자 덩치 큰 멧돼지 한 마리가 수풀 밖으로 튀어나왔다. 금발 청년이 말고삐를 당겨서 멧돼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가 말 위에서 노련하게 중심을 잡으며 화살을 한 발 날렸다. 쐐액, 매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지른 화살이 멧돼지의 등줄기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청년은 서두르지 않고 화살을 다시 꺼냈다. 연이어 날린 다섯 발의 화살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사냥감의 몸에 박혔다. 고슴도치처럼 변한 멧돼지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근처 나무로 돌진하여 머리를 처박았다. 그는 손쉽게 사냥감을 잡고 다른 이들과 웃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사냥터에는 사냥을 즐기는 귀족 남성들도 있으나, 사냥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나선 여성들도 많았다. 색색의 양산을 쓰고 담소를 나누던 귀족 영애 중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는 금발 청년을 오래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저분이 어느 가문의 공자님인지 알고 계시나요? 활솜씨가 대단하시군요.”
“그렇지요? 저분께서 활까지 잘 쓰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질 정도예요.”
함께 담소를 주고받던 루일러스 백작 영애가 후후 미소 지었다. 스칼렛 영애는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차분한 흰 얼굴 위로 붉은색 머리카락이 사락 떨어졌다.
“스칼렛 영애는 제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요? 저분은 공자님이 아니라 그레이언 대공 전하세요. 소문대로 정말 젊으시지요?”
“아. 저분이 그 유명한…….”
스칼렛 영애는 낮게 탄사를 터뜨렸다. 온 나라가 떠들썩했으니 그녀도 당연히 신의 사자이며 황금색 드래곤을 휘하로 거둔 그레이언 대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늘따라 사람이 북적거린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그게 다 대공 전하께서 사냥제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온 사람들 때문이랍니다. 운이 좋으면 전하께서 거느린 황금 드래곤을 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통 드래곤을 보여주지 않으시네요.”
“루일러스 영애는 드래곤을 직접 본 적이 있나요?”
“그럼요. 일전의 연회에서도 보았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황궁에만 오면 쉽게 볼 수 있었지요.”
“굉장하군요.”
스칼렛 영애는 감탄했다. 하지만 그녀는 딴 세상 이야기 같은 드래곤보다는 대공의 외모에 더 관심이 갔다.
“대공 전하의 소문은 오래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훌륭한 분이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군요.”
“실제로 드래곤보다 전하의 얼굴을 뵈러 온 영애들이 아주 많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냥제에 참석한 모양인데 운이 좋으시네요.”
스칼렛 영애는 눈으로 대공을 좇았다. 제도의 공자들은 확실히 지방의 귀족 자제들과는 달리 귀태가 흘렀다.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은 그런 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여태 저렇게 세련되고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대공은 말을 타고서도 자세가 일절 흐트러짐 없이 여유가 있었고 회색 코트가 몸에 잘 맞아 멋진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로 자주 웃었는데 거침없고 외향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는지 곁에 있던 루일러스 영애가 허리를 콕 찌르며 속삭였다.
“영애. 너무 그렇게 바라보시면 실례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를 했군요.”
“후후, 너무 마음을 뺏기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무리 멋진 분이면 뭘 해요. 대공 전하는 황제 폐하와 밀월 관계이신 걸요.”
“그 소문이 참말이었습니까?”
스칼렛 영애는 낭패인 표정을 했다. 파트너가 없다 해도 넘보기 어려운 사람인데 거기에 황제까지 버티고 있다면 그녀에게 승산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지만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작다고 해서 그와 친분을 나누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루일러스 영애에게 부탁했다.
“영애. 괜찮으시다면 저를 대공 전하께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루일러스 백작 영애는 명문가의 사랑받는 따님으로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라면 그레이언 대공과 잠시 인사 정도는 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요. 먼 길을 오셨는데 대공 전하께 인사라도 한 번 드려야죠.”
루일러스 영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사랑에 빠진 영애가 무작정 대공에게 돌진해 버리는 것은 아닐지, 솔직히 지금 상황이 무척 흥미로웠다.
사냥을 끝낸 그레이언 대공과 일행이 귀족 영애들이 쉬고 있는 막사 쪽으로 말을 몰아왔다. 대공이 말에서 내려와 시종에게 고삐를 넘겼다. 스칼렛은 대공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단순히 말에서 내리고 있을 뿐인데도 동작이 대단히 매끄럽고 우아해 보였다.
젊은 영애들이 그레이언 대공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루일러스 백작 영애는 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해 자연스럽게 인파를 가르고 그레이언 대공에게 접근했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일러스 백작 영애로군요.”
그레이언 대공도 그녀를 알아보고 화답해 주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루일러스 영애는 곁에 서 있던 스칼렛을 소개했다.
“이쪽은 북부의 거부로 소문난 맥클라한 자작가의 스칼렛 영애세요. 얼마 전에 중앙 사교계에 데뷔하셨답니다.”
스칼렛은 품위 있게 묵례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레이언 대공과 눈을 맞추었다. 그레이언 대공이 신사적으로 답했다.
“반갑군요, 스칼렛 영애. 영애의 이름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붉은 머리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대륙의 유일한 4중 영창 마법사이신 그레이언 대공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겠어요.”
“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처음 만나면 드래곤에 대한 것을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데, 영애는 마법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는군요.”
그레이언 대공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4중 영창 마법을 먼저 강조한 것은 의도한 일이었다. 역시 마법사들은 언제 어디서건 마법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좋은 반응이라 스칼렛은 좀 더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공 전하 정도 되시는 대마법사분들은 다양한 실험연구 등을 이유로 항상 대량의 마정석을 필요로 하시더군요. 혹시 전하께서도 마정석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마정석은 언제나 부족해서 문제이지요. 특히 본인은 연구 하나에 수천 갈론 단위로 마정석을 소모하는지라.”
의례적인 태도이던 대공이 그녀와의 대화에 조금 집중하고 있었다. 스칼렛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관련 이야기를 더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곳에서 꺼내기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언제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은 무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대공 전하. 저희 맥클라한 가문은 채산성이 높은 마정석 광맥을 두 군데 소유하고 있답니다. 채굴한 마정석 중 7할은 반드시 국가에 매도해야 하지만 남은 3할은 저희 가문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가 있어요.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가문과 거래를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어린 영애에게 갑자기 마정석 거래를 제안받을 줄은 몰랐군요.”
그레이언 대공이 새삼 스칼렛 영애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는 사라졌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아직 성인도 안 된 영애가 가문의 중요한 상품인 마정석을 거래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 전하와 인연을 만들 특별한 기회인데 아버지께서 전하와의 거래를 마다하시겠습니까.”
스칼렛은 막힘없이 바로 대답했다. 대공에게 치기 어린 마음으로 가문의 중요 재산을 함부로 취급하는 철없는 영애로 보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정석은 희소성이 강한 주요 물품이라 맥클라한 가문은 항상 재고의 1할을 남겨둔답니다. 기존의 거래처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바로 거래를 진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애가 평소 마정석 사업에 꽤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
그레이언 대공이 굳은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띠었다.
사실 스칼렛은 마정석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가문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적당히 중심을 잡고 있으려면 집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 단순하고 본능적인 판단으로 스칼렛이 습득해 둔 정보가 실무진의 지식 수준에 근접했다.
곁에서 대화를 듣던 영애들은 낯설다는 표정이었다. 루일러스 백작 영애가 특히 당황했다. 사랑에 빠져 달콤한 말이나 떠들 것 같았던 스칼렛이 현장에 나온 관리처럼 대공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레이언 대공은 그 대화를 제법 즐기는 모습이었다.
“스칼렛 영애. 각 영지는 보유 가능한 마정석의 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마치 사병의 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레이언 대공령은 이미 한도를 꽉 채워 마정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마정석이 아쉽지만 더 이상의 추가 매입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본인의 관심을 끌 만한 재미있는 제안이었는데 안타깝게 되었군요.”
스칼렛은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맥클라한에서 구입한 마정석은 맥클라한 내에서 사용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저희 맥클라한 영지에 작은 실험실을 마련하고 마정석이 소모되는 연구를 그곳에서 진행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연구의 기본 뼈대를 잡아주시고 마법사를 고용하여 실험을 추진하시면서 가끔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맥클라한에 들러주시는 것이죠.”
그레이언 대공이 주기적으로 맥클라한 영지를 방문해 주다니, 단순히 안면만 트는 것 이상의 성과가 될 것이다. 자신만 좋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맥클라한 자작도 크게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이미 황궁 마탑과 그레이언 대공령 두 군데를 거점으로 연구실을 만들어둔 상태라서 맥클라한까지 드나들며 연구를 관리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대공과 대화를 이어가던 스칼렛은 결국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레이언 대공은 그녀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마정석 유출을 막는 규정 때문에 가끔 타 지역에 머물며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애가 그것을 알고 한 이야기 같지는 않고 순발력이 아주 좋으시군요. 스칼렛 영애, 며칠 내로 자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곳은 번잡하니 제대로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하죠.”
스칼렛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붉은 입술로 호선을 만들어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레이언 대공도 그에 화답하여 웃었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대공 전하.”
그때 친위대 제복을 입은 기사가 다가왔다. 귀족 영애들이 술렁거렸다. 그레이언 대공이 아직 파릇한 느낌이 남은 잘생긴 귀공자라면, 방금 도착한 기사는 완벽한 얼굴선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조각상 같은 30대의 미남자였다.
“크리스티안 경.”
그레이언 대공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황제의 친위대장인 크리스티안 울펜가모트, 그 또한 엘 파셔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신분과 직책이 대단한데 인물까지 훤칠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그를 선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레이언 대공은 스칼렛 영애에게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훌륭한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에 영애들은 또 한 번 감탄했다.
* * *
“레이.”
시종에게 활을 넘기고 간단히 목을 축일 만한 것을 가져오라 말하는 중에 크리스티안이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화살통이 달린 어깨띠를 풀어내며 건성으로 그의 부름에 대꾸해 주었다.
“무슨 일이냐, 크리스티안.”
“또 그렇게 귀족 영애와 어울리는군.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그 탓에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
시종이 활과 화살통을 모두 챙겨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크리스티안의 추궁에 손사래를 쳤다.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손등에 키스를 하는 것도 으레 하는 인사가 아닌가.”
“그 영애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만.”
“뭐야. 둔한 주제에, 이상한 데서는 눈치가 빠르군.”
나는 뒤에 선 크리스티안을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아직 어린데도 머리가 아주 비상해 보이더군. 조금만 갈고닦으면 찬란한 보석이 될 여성이다. 아름답고 영리한 여자는 언제나 아주 매력적이지.”
영민하게 눈을 반짝거리던 붉은 머리 소녀를 떠올렸다. 내 앞에서 어떻게든 호감을 사보겠다고 열심히 머리 굴리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그 행동이 새삼 귀엽게 여겨져서 웃음이 나왔다.
“레이……. 폐하의 앞에서는 절대 그런 표정을 보이지 마라.”
크리스티안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다.
“그녀와 어찌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간섭이 심하구나.”
솔직히 크리스티안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면 이 몸이 여자와 대화를 할 때마다 일일이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단 말이냐.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시종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술을 가져왔다. 나는 시종에게서 잔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중간에 술잔을 가로채며 또다시 내 행동을 방해했다.
“음주를 금하라는 폐하의 명령을 잊었나?”
“크리스티안, 나는 지금 목이 마른다만.”
“바로 찬물을 가져오라 하지.”
크리스티안은 술잔을 넘기고 차가운 물을 요구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시종에게 술잔을 도로 빼앗아 단숨에 비워버렸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말리지 못하고 결국 손을 내렸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 나는 고개를 돌려 불쾌하게 크리스티안을 보았다.
“크리스티안, 네가 황제의 기사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계속 내 뜻을 무시한다면 너를 가까이 두고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다. 알아들었느냐?”
나는 크리스티안에게 짧게 경고했다. 그를 뒤에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 * *
사냥제를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도에 따로 마련된 그레이언 대공저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황궁 마탑에 벌여놓은 연구가 너무 많아서 편의를 위해 그냥 황궁에 눌러앉았다.
“그레이언 대공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게다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스카르의 호출이 날아들었다. 저놈 때문에 내가 멀쩡한 집을 두고도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황제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지스카르는 마지막 서류에 결재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빠르게 사인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너는 어딜 나갈 때마다 여성과 추문을 하나씩 안고 들어오는구나.”
녀석이 첫마디부터 어이없는 소리를 꺼냈다.
“그거 대단하군. 세 시간 전에 5분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벌써 추문이 돌았어?”
“너는 현재 엘 파셔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니까.”
하긴 유명인의 사생활에 대해 쑥덕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긴 하지.
나는 다시 지스카르를 보았다. 놈에게 온갖 사소한 것까지 다 간섭받고 있는 현 상황이 아주 기가 막혔다.
“이 몸이 진짜 여자와 놀아나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겨우 대화 조금 한 것 가지고 날을 세우지 마라. 게다가 술은 왜 못 마시게 하는 거야?”
지스카르가 책상에서 일어나서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일단 놈과 동행했다.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아침부터 줄곧 집무를 봐왔던 지스카르가 숨을 돌리며 불편한 겉옷을 벗었다. 나는 근처 소파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 술을 못 마시게 하는지 물었느냐. 네 술버릇 때문이다.”
“술버릇?”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던필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그거 진짜인가? 내가 술을 마시면 아무나 끌어안고 스킨십을 한다고 그러던데.”
“정확히는, 너는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찾는 버릇이 있다. 아무에게나 안겨서 어머니의 품속에 있다고 착각하며 그자의 체취를 맡는 것을 좋아하지.”
“으윽! 그런 주정이 있다고?”
나는 크게 신음을 지르며 죽상을 했다. 다 큰 사내놈에게 너무 낯 뜨거운 주정이었다. 차라리 그냥 헤프게 스킨십을 하는 것이었으면 나았을 뻔했다. 이거 당분간 술을 끊어야 하나.
“단순히 어머니를 찾는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네가 다른 자와 접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앞으로 술은 금하도록 하라. 어명이다.”
일순 살짝 짜증이 치밀어 눈을 들고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이 몸이 명령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그새 잊은 모양이로군. 술을 끊고 싶던 마음을 싹 날아가 버리게 만드는 말투가 아닌가.”
“…….”
“요즘 들어 쓸데없는 통제가 많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느냐? 집착도 정도껏 하고 그만 정신 차려. 내가 후일 부인이라도 들이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냐.”
“부인?”
내가 부인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순간 지스카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지스카르는 천성이 무뚝뚝해서 표정 변화가 크지 않다. 저렇게 크게 반응하는 것은 나도 꽤 오랜만에 보았다.
지스카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대놓고 여자를 만나겠다고 말하다니 믿을 수 없다 이거지. 하지만 나는 그 생각 자체가 몹시 못마땅했다.
“뭐야? 나도 자식을 봐야 할 것 아니냐. 아니면 네놈이 내 아이를 낳아줄 것이냐? 아니면 내가 낳아?”
“레이!”
지스카르가 내 팔을 붙잡으며 언성을 높였다. 나도 짜증이 나서 같이 언성을 높였다.
“이거 놓으시지. 네놈은 시라크를 제해도 왕자 둘에 공주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지 않으냐! 너는 자식을 봤으면서 내 혈통은 끊어버리겠다는 거냐?”
지스카르가 그대로 나를 침대 쪽으로 끌고 가서 넘어뜨렸다. 이 자식이 내가 아직도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노예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죽여버리기 전에 그 손 치워.”
내 경고와 함께 팔찌에 빼곡히 박힌 마정석이 일제히 공명을 시작했다. 마법이 있는 한 지스카르는 절대 나를 제 마음대로 억압할 수 없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아예 마정석 팔찌를 벗겨내려고 했다.
“내가 지금 장난으로 이러는 줄 알아?”
“장난이 아님을 안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짐을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택일해라. 이대로 짐을 죽이든가, 아니면 짐에게 안기든가.”
이놈이 이젠 하다 하다 자기 자신을 인질로 삼기까지 한다.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지스카르가 내게서 완전히 마정석을 빼앗아갔다. 어차피 침실까지 와서 일을 치르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었다. 나는 그냥 한숨을 토하고 마정석이 놓인 자리를 눈으로만 봐두었다.
녀석은 완전히 무방비가 된 나를 짓누르고 셔츠를 벗겨냈다. 맨살이 완전히 노출되자 가볍게 수치심이 들었다.
“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너는 그렇게 매번 짐과 관계하는 것을 싫어하지.”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렸다.
“네 말마따나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것이냐?”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지스카르가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떨어지며 지스카르가 말했다.
“하루도 괜찮고 이틀째도 괜찮으나, 사흘째엔 마음에 걸리고, 나흘째엔 불안이 쌓이기 시작하지. 세월이 쌓이는 만큼 불안이 쌓인다. 너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한자리에 안주하려는 기색이 없고, 오히려 언제든 짐의 곁을 떠날 수 있을 만큼 강해졌으니까. 그러니 감히 짐의 앞에서 부인을 가지겠다는 망언까지 하는 거겠지!”
끝이 없는 심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이 나를 꿰뚫어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기분이 가히 좋지는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지스카르가 어깨를 쓸어내리고 목덜미를 물었다. 살짝 놀라는 나를 지켜보며 그는 아래로 내려와 유두를 혀로 지그시 핥았다. 기분 더럽고 좀 간지러웠다.
그가 유두를 완전히 머금고 빨았다. 기분이 진짜 더러운데 그게 한편으로 또 사타구니가 찌릿할 만큼 자극적인 것이다. 지스카르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다리를 약간 움츠렸더니 어느새 귀신같이 알아챈 녀석의 왼손이 바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지스카르는 내가 언제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좀 묘한 버릇이 있어서 잠자리를 해도 자기 욕망을 푸는 일은 뒷전이고, 날 느끼게 하는 데 엄청나게 공을 쏟아붓곤 했다. 그 덕분인지 날 흥분시키는 기술 하나만큼은 진짜 장인의 경지에 들게 된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바지 아래로 내 음경을 움켜쥐었다. 다리를 움츠리고 비틀었으나 녀석은 능숙하게 허벅지 사이에 손을 끼우고 계속 음경을 주물러댔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이를 세워 유두를 잘근 깨물었다. 내가 놀라서 아파하면 혀로 굴리고 빨면서 애무하고, 조금 진정한다 싶으면 다시 집요하게 이로 깨물어댔다.
“으, 우…….”
자라목을 하며 억눌린 소리를 냈다. 지스카르가 내 음경을 완전히 틀어쥐고 강하게 쳐올리며 말했다.
“참지 말거라. 소리를 내봐.”
“읏……. 시……끄러…….”
“아니면 이걸로는 모자라던가.”
지스카르가 위쪽으로 올라와 내 입술을 덮쳤다. 내 입을 틀어막고 허리가 들썩일 만큼 음경을 꽉 쥐고 난폭하게 주물러댔다. 이대로 가버리라고 다그치는 느낌이었다.
“우우움!”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거칠어져서 키스를 멈추고 싶었으나 지스카르가 강하게 입을 틀어막고 짓누르며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뻗어 성기를 자극하고 있는 지스카르의 팔을 붙잡았다. 격렬한 움직임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허리를 경직시키고 발가락 끝을 움츠리며, 결국 놈이 원하는 대로 사정하고 말았다. 순간 지스카르가 키스를 멈추고 갑자기 뒤로 떨어져 나갔다. 간신히 입이 해방되는 순간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허윽! 아. 지스, 지스카르!”
내가 완전히 사정을 끝낼 때까지 지스카르는 계속 내 것을 쥐고 자극하고 있었다. 녀석이 힘이 빠져서 헐떡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굉장히 만족해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름까지 부르고.”
“…….”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처음엔 꺼져라, 죽여버리겠다는 느낌으로 이름을 부른 것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탄사 같은 느낌으로 변해버린 것이 사실이었다.
“옷을 벗어야겠군.”
지스카르가 축축하게 젖어버린 바지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뭐 싼 애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아주 더러웠기에 나는 순순히 지스카르에게 몸을 맡기고 바지까지 전부 벗어버렸다. 내가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지스카르도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놈의 탈의 장면을 보니까 또다시 슬슬 엉덩이가 뒤로 빠진다.
“이제 와서 어딜 가겠다는 거지?”
지스카르가 뒤로 물러나는 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겨 무릎 위에다가 앉혔다. 바로 삽입을 할 생각인지 녀석이 침대맡 서랍장에서 향유를 꺼냈다. 오른손에 듬뿍 향유를 부은 뒤 엉덩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차피 시작된 일이다. 윤활유가 있어야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허리를 약간 들어 녀석이 쉽게 손을 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었다.
지스카르가 잠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욱하는 마음에 놈을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냐.”
“네 행동이 마음에 들어서.”
놈의 대꾸에 나는 두 배로 더 발끈하고 말았다. 그사이 지스카르가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욕이라도 해주려던 나는 움찔하면서 놈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중지가 깊숙이 들어갔다가 안쪽에서 내벽을 꼼꼼히 문질렀다. 나는 입을 약간 벌리고 더운 숨을 토해냈다.
좀 더 하면 다시 살짝 흥분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손가락은 예상보다 빨리 빠져나왔다. 입구에도 미끈거리는 향유를 듬뿍 칠하고 겨우 준비가 끝났다. 지스카르는 앉은 채로 성기를 내 입구에 맞추고 가볍게 문질렀다. 녀석의 것은 그사이에 뻣뻣하게 부풀어서 흉기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천천히 가마.”
지스카르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하며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놈의 것은 지나치게 굵고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물건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녀석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좁은 구멍을 넓혀서 내 안쪽을 점령해 갔다.
“흐…….”
한참 만에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가 다 들어찼다. 놈의 것이 너무 거대해서 좁은 입구로 물고 있기가 힘들었다. 몸이 지끈거렸다. 이게 고통인지 쾌락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열이 올라 뜨거워지는 몸을 뒤로 젖혔다.
지스카르는 그대로 날 침대에 완전히 눕혔다. 그리고 양쪽 무릎을 단단히 쥐고 양옆으로 크게 벌렸다.
“읏! 그만둬!”
그만두란다고 그만둘 녀석이 아닌지라 나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매번 보이는데도 매번 부끄럽고 죽을 것 같다. 내가 다리를 움츠리려 할수록 지스카르는 더욱 손에 힘을 줘 다리를 열어냈다. 그러고는 비부를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감상했다.
좌우로 팽팽하게 당겨진 구멍에 여전히 성기가 박혀 있었다. 지스카르는 성기를 아주 천천히 넣었다가 귀두가 걸릴 때까지 빼내기를 반복했다.
“흐으……, 하아…….”
느릿한 움직임에도 나는 충분히 흥분했다. 녀석의 손에 잡힌 허벅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한번 사정을 하고 힘없이 늘어져 있던 음경에 뻐근하게 다시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위로할 생각으로 내 성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중간에서 날 제지했다.
“좀 더 참아봐라.”
“왜…….”
“참는 만큼 극치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
“그렇게까진 필요 없어!”
지스카르는 내 외침을 무시했다. 자위를 시도하던 양손을 강제로 모아서 한 손으로 짓누르고, 다른 손으로 한쪽 허벅지를 든 채 허리의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속을 그득 채우고 있는 성기가 느끼는 부분만 골라서 짓눌러댔다.
나는 소리를 내기 싫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문득 그래야 할 이유가 특별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입을 열어 느끼는 대로 소리를 냈다.
“아, 흐으, 읏, 흐……!”
내가 흥분해 있는 만큼 지스카르도 몹시 흥분해 있었다. 녀석의 피부에 땀이 스민 것이 느껴졌다. 살짝 이성을 잃은 듯한 놈이 평소보다 한층 힘을 가해서 성기를 콱 찔러 넣었다.
“윽!”
구멍 깊은 곳을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아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속살은 묵직한 통증을 반기며 멋대로 울렁거렸다. 숨이 탁 막히는, 배 속을 꽉 죄어드는 쾌감에 저도 모르게 뒷구멍으로 놈의 성기를 빨아먹을 듯이 조여댔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 한 행동이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면서 허둥거렸다.
“흐. 아, 아니. 이거……. 흣.”
“하……, 레이.”
지스카르는 낮게 탄사를 내며 뒷구멍을 연이어 강하게 쑤셨다. 달아오른 점막에 자극이 더해지자 허리가, 전신이 짜릿했다. 나는 쾌락에 자지러지며 신음을 터뜨렸다.
“하으읏……! 아아!”
“레이……. 좀 더…… 소리를 내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는 온전히 짐의 것이다…….”
열 받게도 나는 정말 놈의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지스카르와 관계하는 것은 정말 쾌락 하나만큼은 극상의 수준이었다.
“하, 흐으으. 더, 더는……. 아. 흐흑!”
뒷구멍을 쑤실 때마다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허공에서 홀로 꺼떡거렸다. 그 꼴을 보기가 너무나 민망했다. 지스카르도 같은 광경을 봤는지 고의로 성기를 더 거칠게 박아 올렸다. 허리가 크게 들썩이자 터질 듯 팽창한 성기가 아랫배에 턱턱 부딪혔다.
“지, 지스카르! 하으, 아! 흐으, 진짜 그만……. 그만.”
내가 거의 애원하듯 지스카르의 이름을 부르자 드디어 녀석이 내 양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나더러 자위하라고 풀어준 것은 아니다. 지스카르는 직접 허리 아래로 손을 뻗어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놈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을 고스란히 내주고 나는 고개를 바짝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지스카르가 내 행동을 보고 으름장을 놓았다.
“참지 말라 했을 텐데……!”
지스카르의 손길에서 배려가 사라졌다. 녀석은 내 성기를 난폭하게 비틀어 당기고, 커다란 손을 더 밑으로 넣어 고환까지 같이 쥐고 세게 압박했다. 지스카르가 음경을 위아래로 빠르게 쳐올리며 한계까지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악! 아윽, 흐, 아아!”
두꺼운 성기가 약한 점막을 찌를 때마다 뒷구멍이 희열에 경련했고, 아프게 자극당하는 앞쪽은 선액을 줄줄 흘려댔다. 놈에게 짓눌린 채 쾌락을 받아내는 것이 빌어먹게도 너무 좋았다. 나는 거의 정신을 놓고 신음을 흘렸다. 진짜로 절정 직전까지 다다랐다. 지스카르가 와락 덮쳐 오며 내 어깨와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레이……!”
“지스카르, 지스, 흐으, 으읏……!”
지스카르가 강하게 허리를 찍어 박았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의 거친 강요에 결국 아찔한 절정이 찾아왔다.
“지스카르, 아!”
내가 짧게 신음을 지르는 순간 지스카르도 자신의 것을 전부 쏟아냈다. 사정을 끝내고 헐떡거리면서 힘들게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스카르가 아직도 움찔거리며 내 몸속에 사정하고 있었다. 나는 좀 전에 한 번 했지만 녀석은 처음이라고 그럴 것이다.
지스카르도 힘이 다해서 내 위로 자세가 무너졌다. 내가 무거워할 것을 생각했는지 녀석이 성기를 빼내고 곧 물러났다. 힘없이 늘어져서 한참 동안 숨만 몰아쉬고 있자 지스카르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소 염려스럽게 물었다.
“몸이 안 좋은가……?”
“죽겠다……. 좀 한 번만 해…….”
인상을 잔뜩 쓰면서 대꾸했다. 한참을 쉬고 나서야 거친 숨이 가라앉았다.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지스카르는 희미하게 미소 비슷한 걸 보이더니 몸을 바로 해서 누웠다. 겨우 한 번 한 것 정도로 지칠 녀석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에 팔을 올렸다.
“두 번 다시 부인을 들이겠다느니 그런 소리는 마라. 이번 일은 네가 저지른 돌발행동 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이없다니, 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언젠가는 집안에 안주인을 들여야 한다. 대공가에 대공 부인이 있고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네놈이 얼마나 이기적인 소리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이기적이라?”
지스카르의 표정이 다시 안 좋아진다. 나는 바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건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거니와 지금 상태에서 도발해 봤자 나만 괴롭힘당할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수로 공사의 책임자 말이다. 이스트우드 남작을 기용하는 것은 어떤가.”
“이스트우드 남작? 그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쪽에서 먼저 날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더군. 이야기를 나눠보니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서 이렇게 천거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지스카르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값비싼 물건을 잔뜩 싸 들고 제도의 대공저를 드나들었다는 정보를 첩보부로부터 입수하기는 했다. 설마 그에게 뇌물이라도 받은 것이냐?”
지스카르가 설마 하는 식으로 꺼낸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스트우드 남작은 확실히 안목이 남다른 자인 것 같다. 하나같이 내 취향에 부합하는 물건들만 싸 들고 왔지 뭔가.”
“……레이, 지금 뭘 하는 건가?”
“뭘 하긴. 지금 베갯머리송사 하고 있잖아.”
내가 아래쪽 깃털 베개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스카르는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짐과 관계하는 건 그렇게 싫어하면서 이런 일은 전부 챙기는군. 일전엔 애인에게 선물 공세 좀 하라며 마정석 1만 갈론이나 요구한 적도 있었지. 그리고 이제는 베갯머리송사라?”
“그렇다고 내가 뇌물을 받으면서 허튼짓을 할 것도 아닌데 걱정할 필요 없잖느냐. 받을 건 받아 챙긴 다음 싹수가 노란 놈은 버리고 쓸 만한 놈들은 골라 기용하면 되지. 내 배도 불리고 나라에 인재도 확충하고 일거양득이라고 할까. 지스카르, 그만 인상 좀 펴라.”
녀석이 미간에 잔뜩 골을 세우고 있기에 손가락을 뻗어 주름이 진 곳을 꾹꾹 눌러주었다. 지스카르가 내 손을 옆으로 밀어내며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게 사람 보는 안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스트우드 남작도 틀림없이 쓸 만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한들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그 행위가 언젠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딱딱한 녀석 같으니. 가끔은 융통성을 발휘해 봐라.”
“융통성도 필요할 때나 발휘할 일이다. 네가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다른 자들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가?”
“뭘 당연한 소릴 하는 거야? 이 몸은 얼마든지 뇌물을 받아도 되지만 다른 놈들은 당연히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돼. 범법의 기준을 다르게 잡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지스카르가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지나치게 오만방자한 면이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 말고 베갯머리송사를 읊을 일이 더 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놈이 뇌물을 바쳤지?!”
지스카르가 진심으로 정색하는 것을 보고 나는 혀를 찼다.
“그만 정색해. 그보다 이번에 시라크의 뒤를 봐줄 귀족을 아베크 중립국에 보내기로 했다면서?”
내전이 정리된 뒤 브뤼셀 황후를 포함해 마크시 공작 가문의 삼대가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시라크만 유일하게 목숨을 구한 채 아베크 중립국으로 추방당했다. 시라크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두 번 다시 엘 파셔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아들인데도 뒤를 봐줄 생각이 드는 것이냐?”
“네 말대로 그 아이는 짐의 아들이니까. 가능하다면 브뤼셀 황후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리한 일이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그녀가 얌전히 숨을 죽이고 살 리도 없으니…….”
녀석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기에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더니 시라크 이야기는 왜 꺼낸 것이지?”
“시라크의 임시 후견인으로 나를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시라크와는 나름대로 안면이 있으니 혹시 그가 낯선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불허한다.”
지르카르가 1초의 틈도 안 주고 바로 대답했다. 나는 인상을 썼다.
“생각이라도 좀 하고 대답해.”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짐이 그런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부인을 얻겠다고 하질 않나!”
“부인 얻는 문제와 같은 급으로 두면 안 되지! 기껏해야 1년 정도 아베크 중립국에 출장 가는 것뿐이다. 나도 슬슬 정계에 참여할 때도 되었고, 국무를 보다 보면 가끔 외국에 나갈 일도 생길 것이다. 그때마다 날 못 보내겠다고 이 난리를 피울 것이냐? 솔직히 내가 평생 황궁에 처박혀 너랑 뒹굴며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엘 파셔의 대공이지, 네놈의 황후가 아니야!”
순간 지스카르가 우악스레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짓누르고는 위로 올라탔다.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았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눈이 흉흉하게 빛을 뿜었다.
“그때 억지를 부려서라도 널 황후로 만들 것을 그랬나! 노예 신분이었던 너에게 대공위를 수여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일이 가능했는데 황후로 만들지 못하란 법도 없지!”
녀석의 강압적인 태도에 나는 발끈했다.
“이거 치우지 못해?”
지스카르는 더 이상 내가 말을 하지 못하게 강제로 키스를 했다. 짧고 난폭한 키스 뒤에 지스카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베갯머리송사를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앞으로 기억해 두는 편이 좋겠구나.”
녀석이 한 번 더 키스를 하고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내가 더는 못 한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놈은 나를 거의 죽일 듯한 기세로 무섭게 탐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지스카르에게 시달리며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 * *
조의도 거르고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집무실에 나타난 지스카르는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하는 중간에도 자꾸 레이의 일이 걸렸다. 아무래도 일찍 일을 마치고 그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간밤에 너무 무리를 시켜 몸 상태도 걱정이거니와, 그 성격이라면 지금쯤 그를 죽이겠다고 칼을 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사무관을 모조리 불러들여 업무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으니 집무실이 북적거린다. 매사에 차분한 황제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일이 밀려서 그러려니 하고 다들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무관의 도움으로 묵직하던 서류들이 거의 끝이 보일 무렵이었다.
벌컥.
누군가 허락도 없이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친우로 지내왔던 던필뿐이다. 지스카르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버릇을 고쳐 놓기 위해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크리스티안이었다.
“다들 밖에서 대기하라.”
지스카르는 사무관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크리스티안이 어지간해선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은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말을 꺼내기 직전 크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로부터 전언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본인 마음에 드는 답을 가져오지 않으면 엘 파셔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
“이번이 두 번째로군요.”
지스카르는 낮게 한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떠나겠다고? 그는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것인가. 시커먼 구렁텅이 아래로 처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단 말인가. 아니 레이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겨우 이런 일로 떠나겠다는 말을 입에 담고 협박을 했다. 그의 행동이 정말 장난 같고 가벼웠다. 그럼에도 장난 같은 말 한마디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가 레이의 앞에서 얼마나 약자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입니까?”
“……시라크의 뒤를 봐줄 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레이가 그 역할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하더군. 짐이 그 뜻을 받아주어야 했느냐?”
“…….”
시라크 폐황자의 후원자가 되려면 아베크 중립국으로 떠나야 한다. 중립국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크리스티안도 이야기를 들었다면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라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간은 길어야 1년이다. 길어야 1년이기는 하다만…….”
지스카르도 크리스티안도 말이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레이는 제 발로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하루 정도 머리 식힐 시간을 줬으니 됐겠지. 공문은 언제 보내줄 것이냐?”
“…….”
레이는 당연히 자신을 아베크 중립국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레이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는 이참에 지스카르를 보며 설교를 늘어놓았다.
“너는 이 몸을 두고 지나치게 안달하고 있다. 내가 아베크 중립국에 간다고 네가 난리를 칠 이유 따윈 하등 존재하지 않아. 나는 엘 파셔의 대공으로 아베크 중립국을 방문할 것이니 돌아올 장소도 당연히 엘 파셔밖에 없다. 이 몸을 놓칠까 봐 염려할 필요 따윈 전혀 없다는 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법한 일 아닌가?”
“짐이 냉정하지 못하다?”
레이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1년. 내가 자리에 없는 시간 동안 머리를 좀 식혀라. 냉철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참을성을 기르도록 해. 애초에 시라크를 후원하는 일에 눈길을 준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짐을 길들기 위해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단 말이로군.”
“너는 긴말하지 않아도 금방 뜻이 통해서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어.”
레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반면 지스카르는 표정을 더 굳혔다.
레이가 그에게 냉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했으나 지스카르는 스스로가 충분히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냉정한 눈으로 레이의 모든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자신에 비하여 레이에게는 절실함이라는 것이 한 톨도 보이질 않았다. 언제든 툭 털어버릴 수 있는 당당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는 유쾌하고 오만하기에, 완벽하게 홀로 설 수 있는 존재였다.
지스카르는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그 아래에 희고 부드러운 목에서 손을 멈췄다. 시커먼 충동이 고개를 든다. 이 목에 개처럼 굴레를 채우고 영원히 곁에 묶어두고 싶은 그런 충동.
“때때로 너의 발목에 족쇄를 계속 채워놓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순간 레이가 인상을 확 찡그리며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 목에 닿은 손을 툭 쳤다.
“너는 절대로 그런 짓을 못 해.”
“…….”
“네놈은 내가 정말로 싫어할 짓은 하지 못한다. 냉정함을 가장해 봤자 내 앞에서 항상 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
지스카르는 어렵게 충동을 억누르고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다. 시라크를 돌봐주는 일은 네가 맡도록 해라. 그리고 네 말대로 앞으로는 짐도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하겠다. 우선 네게 매달 제공되던 실험용 마정석을 2백 갈론으로 줄이도록 하지. 그간 대공령에만 기준치 이상의 마정석을 유출한다고 은근히 항의가 많았다.”
“뭐?”
순간 레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없으면 당장 다음 달 연구부터 차질이 생긴다.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계속 실험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세부 계획서까지 다 작성해 놓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그레이언 대공령만 예외적으로 통행세를 징수하지 않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매달 꼬박꼬박 세금을 바쳐야 할 것이다. 또한 사금채굴권도 영구히 회수하겠다.”
“마정석도 줄이고 영지 수입까지 줄이면 연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아니, 연구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품위 유지비는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작은 영지가 1년 동안 사용할 금액을 한 달 품위 유지비로 탕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네가 보기보다 대단히 사치스럽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짐에게 참을성이 필요하다면 너는 검소함을 배울 필요가 있어.”
레이는 물건을 보는 안목이 대단히 높아서 식사용 포크 하나를 사들일 때도 최고급품만을 고집했고 최근엔 특별한 사연이 담긴 초고가의 보석을 수집하는 취미까지 생겨 어마어마한 돈을 물 쓰듯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검소하게 살자면 끝없이 검소할 수도 있으나, 마음을 먹으면 마치 자기가 황제라도 된 것처럼 무한정 돈을 쓸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생에 황제가 될 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네놈,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것이냐.”
“네 입으로 냉정해지라 하지 않았느냐? 오직 네게만 허락되었던 과한 일들, 그 모두가 짐이 네 앞에서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몸에게만 예외를 허용했기 때문에 네가 얻은 것들도 있을 텐데? 마법 연구의 성과로 나온 다수의 논문, 상업 도시로 형태를 갖춰가는 중인 대공령, 이 몸이 천거한 인재들!”
“규정 위반, 도를 넘은 사치, 뇌물 수수. 다른 놈이었다면 짐이 잠깐이라도 용납했을 것 같더냐?”
“일반적인 투입물로는 무난한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 통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항상 변칙적인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레브노아드가 어떻게 나라 안팎으로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가르쳐 주랴?”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엘 파셔가 그간 안정을 유지한 것은 틀림없이 신뢰의 힘이 컸다.”
“융통성이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지!”
“네가 지나치게 변칙적인 것이다.”
레이가 인상을 썼고 지스카르도 표정을 굳혔다. 잠깐의 눈싸움 끝에 레이는 먼저 고개를 돌리며 손을 털었다.
“좋다. 엘 파셔는 네 나라인데 내가 뭐라 더 하겠느냐. 그런데 혹시 이런 말 들어봤느냐? 자고로 잘 먹고 있는 밥그릇 뺏는 것보다 더 약 오르는 일이 없다는 말! 내가 지금 가진 것 다 털리고 약이 올라 죽겠는데 말이다.”
지스카르는 레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의문을 표했다. 레이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이 몸이 당한 것 이상으로 네놈을 약 오르게 할 아주 치사한 방도가 지금 생각났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아베크 중립국으로 떠나도록 하겠다. 이후 1년 동안, 서로 얼굴도 보지 말도록 하자!”
아베크 중립국으로 떠난다 해도 1년 동안 정말 얼굴도 못 보고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몇 번 정도는 휴가 형식으로 본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통신 마법도 있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레이가 그 모든 것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나온 것이다.
“아베크 중립국까지는 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해라.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러나 지스카르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대기하던 관리들을 다시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뭐지? 평소의 반응이 아닌데?”
레이는 지스카르의 속셈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