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되자 미첼 아카데미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첼 아카데미는 아베크 중립국의 유일한 학술기관으로, 중립국에 위치해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엘 파셔와 스트라스 양대 제국의 학자들에게 교류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학문, 예술 분야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진 단체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미첼에서는 대학과 연구소 아래에 일반 교육기관을 두어 상류층 자제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시라크가 바로 이곳에서 학생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미첼 아카데미 정문에 멈춰 섰다. 본국에서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라크가 정문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엇! 너는!”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라크는 깜짝 놀랐다. 녀석은 일 년 사이에 부쩍 성장해서 내 키를 살짝 추월하고 있었다. 나는 시라크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사이 많이 컸구나. 한창 성장기이긴 하지…….”
쑥쑥 성장하는 시라크에 반해 나는 최근 1년간 간신히 2센티가 성장해서 175라는 어중간한 키에 머물고 있었다. 전생에도 키가 갑자기 컸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방심하는 사이에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 늦게까지 성장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나는 성장기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레브노아드와 레이는 결국 별개의 사람이라 전생과 똑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란 말인가.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엘프 소녀의 언령 때문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저주가 풀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대로는 평생 지스카르를 머리 위로 올려다보면서 살아야 한다.
“믿기지 않는군. 본국에서 나온다는 사람이 너였다니.”
시라크는 입가에 손을 올린 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라니, 법도가 엉망이로군.”
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시라크의 말투에 대해 지적했다. 나는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엘 파셔의 대공이며, 더 이상 시라크가 함부로 대할 신분이 아니었다.
“아, 대공…… 전하…….”
그제야 시라크가 말을 바꾸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시라크는 노예일 때의 나와 인연이 있으니 갑자기 대공으로 대접하라면 어려울 수 있었다. 아는 사이라 뒤를 봐주기 쉬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시라크를 괴롭히는 격이 되는가?
“내 앞에서 예를 지키기가 어려우냐?”
“아니, 대공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시라크는 뜻밖에 쉽게 망설임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대공 전하. 미첼 아카데미 측에서 제공해 준 숙소가 있는데 일단은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최근 아카데미가 증축을 마쳐서 숙소로 이용할 새 건물이 많습니다. 깨끗하고 넓어서 아마 지내실 만할 것입니다.”
시라크는 먼저 앞장서며 나를 아카데미 안으로 안내했다. 일 년 만에 재회한 시라크는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 * *
짐을 풀고 여독을 푼 다음, 둘째 날엔 미첼 아카데미의 학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 지긋한 학장은 나를 처음 본 순간 잠깐이었지만 멈칫거렸다. 그는 웃으면서 젊은 대공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내 나이에 대해 듣긴 했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엔 느낌이 달랐던 모양이다.
오찬을 마친 뒤엔 학장과 함께 미첼 아카데미 내의 대학을 돌아보면서 지도교수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서는 내가 본래 노예였음을 알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티를 내는 자도 있었다. 즉각 눈앞에 드래곤을 들이밀어 압박할 수도 있었으나 평화로운 학문의 장에서 그런 무식한 방식은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그 교수를 지목해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공을 들여서 특정 주제에 관해서 토론을 좀 했더니 꼬박 하루가 지난 뒤 그는 매우 호의적인 쪽으로 태도가 돌변했다.
“이렇게 보람 있는 대화는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본인과는 지향하는 노선이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전하의 고견에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군요. 엘 파셔의 황제께서도 실로 대단하신 것이, 잘도 대공 전하와 같은 귀인을 알아보셨습니다. 과연 대국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날 잡아먹을 듯 굴더니, 이제라도 생각이 바뀌었다니 다행이로군.”
“하하하, 부디 그 일은 잊어주시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대공 전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볼 생각입니다. 누가 전하에 대해 미심쩍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제가 앞장서서 그자의 볼기짝을 두들겨주겠습니다.”
“수사학(修辭學)의 대가인 풀런스 교수가 내 추종자가 되겠단 말인가. 그거 듣기만 해도 마음 든든한 이야기로군. 그래도 사람의 볼기짝을 때릴 생각은 말게.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폭력보다는 설득이 훨씬 유용한 수단이 되거든.”
“전하께서 저를 상대로 사용하신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풀런스 교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기분 좋게 그와 헤어졌다.
그날 이후 풀런스 교수가 진짜로 내 추종자로 활동을 개시한 것인지 갑자기 수많은 지도교수가 내 고견을 듣고 싶다며 면담을 요청하거나 토론회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나도 근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첼 아카데미의 수준을 가늠해 보고 싶었기에 어지간하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미첼의 지도교수와 아베크 중립국 내의 유명인사들을 만나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순식간에 보름이나 시간이 흘렀다. 시라크를 후원해 주러 온 것치고 솔직히 그에게 너무 소홀하게 대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맥스라는 이름의 호위 기사를 하나 대동하고 시라크가 수업을 듣고 있는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통해 강의실을 들여다보니 시라크는 한참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서 시라크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라크가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사담은 나중에 하자고 표시를 보냈다.
이십 분 후, 수업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시라크는 필기도구를 정리하다가 슬그머니 내게 시선을 주었다.
“소문을 듣자니 매일 유명인사들을 만나며 바쁘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던데, 여기까진 왜 오신 겁니까?”
“저런, 내가 며칠 소홀하게 굴었더니 그새 토라져 버렸군.”
“토라지다니…….”
“나는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더는 한눈팔지 않고 매일 네 상황을 봐줄 테니 그간 섭섭한 점이 있었더라도 마음 풀어라.”
나는 책 사이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서 보여주었다. 정규 학생은 아니지만 해당 기간 청강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증서였다.
“자, 이게 그 증거다. 나도 당분간 청강생 신분으로 너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될 것이다.”
시라크는 깜짝 놀란 얼굴로 증서에 적힌 내 이름을 거듭 확인했다.
“아니, 이거 진짜잖아? 교수님들과 토론회까지 다니는 사람이 청강은 왜 한다는 겁니까?”
시라크의 질문에 나는 시선을 약간 옆으로 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라, 나는 음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사실은 토론회를 다니면서 깨달았는데 내 지식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져 있더구나. 기술의존논증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였고, 에버리지 보고서는 또 뭐였는지 도통 기억이……. 생각해 보면 내가 마지막으로 이론서에 손을 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군. 토론회 도중에 자칫 밑천이 드러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던지.”
“그게 뭔……. 대공은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도 배운 지 오래된 것은 까먹기도 한다. 이참에 네 뒤를 봐주면서 기초 지식이나 다시 쌓아야겠어.”
나는 그쯤에서 암울한 기운을 모두 털어내고 각종 이론서를 꺼내 들었다. 하나같이 두껍고 묵직한 책들뿐이라 책상에 내려놓는 순간 쿵 하고 소리가 났다.
시라크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흠, 대공도 인간이긴 한 모양입니다.”
“내가 인간이 아니면 또 뭐라는 말이냐.”
“신의 사자라면서요?”
시라크의 대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라크는 놀림이라도 당한 기분인지 약간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시라크를 관찰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있는 것에 반해 시라크는 항상 혼자였다. 아무래도 시라크는 학우들 사이에서 약간 경원시되고 있는 듯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추방당한 황태자라는 사실이 학생들 사이에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종일 동태를 지켜보고 있자니 시라크에게 말을 거는 학생들도 한두 명씩 있었다. 그들은 주로 학업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좋은 분위기로 헤어지곤 했다.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시라크는 나름대로 이곳 미첼 아카데미에서 충실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시라크와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가장 마지막에 강의실에서 나온 덕분에 근처 복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앞서가고 있는 시라크의 등을 툭 떠밀었다.
“일국의 황태자로 살다가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했는데도 꿋꿋하게 잘 적응해 나가고 있구나. 나는 솔직히 네가 좀 더 어두침침한 성격이 되어 세상을 저주하고 있을 줄 알았다.”
아까 놀림을 당한 뒤로 줄곧 내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있던 시라크가 약간 머뭇거리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사실 평민이 되었다곤 해도 대우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닙니다. 넓은 저택에 하인도 주어졌고, 무엇보다도…… 폐하께서는 반란을 일으킨 저를 처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시라크의 대답은 꽤나 이채로운 것이었다. 실제로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살려둔 것만으로도 지스카르는 매우 큰 아량을 베풀었다. 하지만 시라크의 입장에서 그리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태자의 직위도 박탈당하고 낯선 나라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누군가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지스카르를 원망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시라크의 생각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목숨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여기고 있느냐? 진심으로 지스카르에게 한 점 원망도 없단 말인가?”
“원망이라니, 그런 건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그때 대공의 말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을 뿐입니다. 그랬다면 폐하를 거역하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은…… 어머니도 그렇게 되시지 않고 무사하게 살아계셨을 텐데……라고…….”
시라크는 말꼬리를 흐리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라크는 살아남았으나 브뤼셀 황후는 결국 극형에 처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본 아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나로서도 정확하게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섣불리 시라크를 위로할 수 없었다.
서로 입을 다문 채 걷다 보니 중앙 계단과 연결된 널찍한 복도가 나타났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도착하기 전에 시라크에게 이것만은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시라크. 가끔씩 원망이 생기려고 하면 그날 일을 떠올려봐라. 이 년 전 내가 이성을 잃고 지스카르를 공격했을 때가 있었지? 그때 지스카르는 널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라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너를 염려하고 있다. 그 사실만 기억하면 될 것이다.”
아버지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라크를 단단히 지탱시켜 줄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으나, 시라크는 삐뚤어지지 않고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잔한 이야기는 그쯤하고 인파가 많은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 분위기가 급변했다. 시라크 또래의 금발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수많은 학생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관심을 표했다.
“누구지?”
내가 소년의 신분을 묻자 시라크가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아젤로스 반 스트라스, 스트라스의 3황자입니다. 유학을 왔다고 하더군요.”
사라크의 대답을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살짝 굳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아젤로스 3황자를 주시했다. 스트라스의 3황자라면 에드리히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말을 듣고 보니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이 에드리히의 머리칼과 흡사했다. 사실 머리 색 외엔 에드리히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3황자를 볼수록 자꾸 에드리히가 생각나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때 아젤로스 3황자 쪽에서도 나와 시라크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들이 이쪽으로 접근해 왔다. 분위기로 보아 좋은 용건으로 다가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스트라스인이 엘 파셔 놈에게 무슨 좋은 용건이 있겠느냐마는.
“오랜만에 보는군, 시라크.”
아젤로스 3황자가 시라크의 이름을 강조해서 불렀다. 평민으로 몰락한 시라크를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 시라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젤로스 전하…….”
그래도 지켜봤던 세월이 있어서인지 시라크가 안쓰럽긴 하다. 나는 시라크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눈짓했다. 아젤로스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일부러 들으라고 비웃음을 날렸다.
“소문의 그레이언 대공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엘 파셔 황제에게 엉덩이를 대주고 대공이 되었다던 그분이 아니십니까?”
순간 나보다 시라크가 먼저 시뻘겋게 분노해서 튀어나가려 했다. 그의 말은 나뿐만이 아니라 엘 파셔와 엘 파셔의 황제까지 모욕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시라크의 팔을 꽉 잡아당겨 뒤로 밀어놓고 다시 아젤로스를 보았다. 삐뚤게 내민 입, 치기 어린 얼굴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스트라스 황족다운 품위를 기대했는데 이건 좀 아쉽군.”
내가 반말을 하자 아젤로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에드리히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을 높여주기가 참 고역이었다. 아젤로스가 바로 항의했다.
“대공! 이 몸은 황자이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하십시오!”
“여긴 사석이고 나는 연장자이니 말을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런 무례를!”
“황자도 타국의 대공 앞에서 예를 갖추는 것이 좋지 않겠나. 첫마디부터 치기 어린 소리나 뱉어서는 본인의 기품을 깎아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젤로스는 잔뜩 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용케 맞먹고 하대하진 않고 예의를 지켜가며 내 말에 반박했다.
“무엇이 치기 어린 소리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노예에게 대공 작위를 수여하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에서 가능할 일입니까? 흥! 내 확신하는데 조만간 엘 파셔에 망조가 들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할 것입니다!”
스트라스 출신으로 보이는 아젤로스의 친구들이 맞는 소리라고 맞장구를 치고 좋아했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돌연 미소를 거두고 얼굴을 굳혔다. 날 조롱한 건 그냥 넘긴다 해도 뒤로 갈수록 아젤로스의 입에서 들어주기 힘든 말들이 나왔다. 엘 파셔에 망조가 든다고?
“아젤로스 3황자. 엘 파셔는 뜻밖에 기반이 아주 잘 잡힌 나라다. 칼질밖에 못 할 것처럼 생긴 황제는 희한하게도 내정을 돌보는 데 소질이 있고, 최근엔 외척 세력까지 몰아내어 나라 안팎으로 내실을 다지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망조는커녕,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엘 파셔는 지금 황금기에 접어들고 있어. 그러니까 한가하게 시비나 걸고 다니지 말고 무슨 대책을 좀 세워봐라. 어리더라도 스트라스의 황자가 아닌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진심이 되어서 아젤로스를 노려보며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가 부아가 치민 이유는 엘 파셔가 모욕을 당해서가 아니고, 저렇게 엘 파셔를 얕보다가 스트라스가 타격을 입을까 봐 걱정되어서다.
스트라스와의 2차 대전으로까지 번질 뻔했던 엘 파셔의 내란은 오히려 나라를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치고 올라가는 엘 파셔를 보노라면 불안감이 스멀스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스트라스의 황자라는 놈이 엘 파셔가 곧 망하니 마니 이딴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하지만 엘 파셔의 대공인 내가 이런 소리 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지.”
나는 이마를 짚고 깊이 탄식했다.
“뭐, 뭐 하자는 겁니까.”
아젤로스가 이상한 놈 쳐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대공이라는 인간이 은근슬쩍 엘 파셔를 까내리고 있으니 저런 눈으로 쳐다봐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젤로스에게 말했다.
“아젤로스 3황자. 여기서는 계속 대화하기 곤란할 것 같은데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
좀 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젤로스는 예상과 달리 내 권유에 반발하지 않고 일부러 친구들을 따로 돌려보내고 나와 동행을 자처했다. 첫 마디부터 조롱 섞인 말을 한 것치고 이 몸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일부러 먼 곳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근처의 빈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먼저 의자를 꺼내서 앉았고 시라크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아젤로스는 조금 늦게 내 맞은편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래서 저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까?”
“특별히 할 말이 있다기보다도…….”
사실 특별한 용건 같은 것은 없고, 에드리히의 아들인 그에게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느껴서 이야기나 나눠보려고 한 것이다. 나는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얼버무린 다음 신변잡기를 묻기 시작했다.
“아베크 중립국까지 유학을 온 이유가 무엇이지?”
“미첼 아카데미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어 식견을 넓힐 목적이었습니다.”
아젤로스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첫인상에서 조금 실망했지만 그 대답은 꽤 마음에 들었다.
“황위 계승권이 높은 3황자 신분에도 본국에 남아 유력 가문의 자제들과 교분을 나누는 것보다 타국에서 경험을 쌓는 것에 더 무게를 주었단 말인가?”
“황태자이신 콘라드 형님께서 건재하시니 아무리 계승권이 높다 한들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형님에 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으니 친목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부터 갖추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고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견문을 넓히고자 하는 자들은 많으나 타국에 유학을 보낼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는데, 로셀라 후궁의 강단이 보통을 넘는구나. 혹시 황제가 그 의견에 반대 같은 건 하지 않았고?”
“…….”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하던 아젤로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스트라스의 내부 사정을 탐색한다고 생각하여 경계하는 것일까. 아젤로스가 예상보다 아주 영리해 보여서 나는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엘 파셔의 대공이라 해서 그렇게 일일이 경계할 필요는 없다.”
“폐하께서는 황자들의 교육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으십니다.”
갑자기 아젤로스가 입을 열었다. 순간 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에드리히의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그곳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아젤로스의 입을 통해서 듣는 에드리히의 이야기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는 자식들에게 무심한 편인가? 아니면 반대로 자식들의 의지를 존중해 주는 편?”
영원히 어린아이일 것 같던 에드리히가 어느새 훌쩍 성장하여 이렇게 영리한 자식까지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 녀석은 과연 자식들에게 어떤 부모로 비치고 있을까. 나는 전에 없는 강한 흥미를 느끼며 아젤로스의 다음 말을 주목했다.
아젤로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일하게 에드리히를 닮은 적금발이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두려운 분이십니다.”
“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질문과는 조금 동떨어진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젤로스는 딱 그 말만 하고 에드리히에 대해서는 일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쩐지 강의실 내의 공기가 무겁다.
스트라스의 황제는 자기 자식에게도 두렵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인간인가.
나는 더 이상 에드리히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아젤로스는 처음부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위기였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 그가 본론을 꺼냈다.
“대공께서 교수들의 초청을 받아 유명 토론회를 두루 섭렵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와 대공은 나이 차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대공은 어떤 식으로 학식을 쌓아 그 수준까지 오르신 것입니까?”
아젤로스의 질문을 받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몸이나 팔아서 대공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도 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어도 엘 파셔와 스트라스는 원수 사이다. 처음 나를 조롱한 것은 스트라스 출신인 친구들 앞에서 엘 파셔에 적대감을 드러내기 위한 과한 행동이었을 뿐.
스트라스에 내 소문이 안 좋게 퍼져 있을 텐데, 뜬소문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안됐지만 그런 일은 아무나 가능한 게 아니다. 아무나 엘 파셔의 대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가 놀리듯이 대꾸하자 아젤로스는 살짝 욱했다.
“하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면학에 힘쓰는 자세가 훌륭하구나.”
“…….”
아젤로스는 칭찬을 들은 것이 싫진 않은 얼굴이었다. 간단히 대화를 더 나누고 아젤로스와 일별했다. 그가 먼저 강의실에서 나간 뒤 나는 시라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시라크, 첫인상과 달리 말이 통하는 황자로구나. 너도 기회를 봐서 그와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틀림없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시라크는 부루퉁하게 바로 대답했다.
“말만 많은 스트라스 놈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만.”
“무식한 엘 파셔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시라크가 엘 파셔 입장에서 말하기에 나도 지극히 스트라스인의 입장에서 대답해 주었다.
“대공?”
시라크가 왜 이러냐며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인상을 썼다.
“그러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빵이 떨어질 것이다. 이미 겪어봐서 알 텐데?”
“으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착한 아이로 성장한 시라크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 * *
시종이 향로를 갖다 두었는지 방 안에서 이름 모를 나무 향이 났다. 차분하면서도 깔끔한 향기……. 지스카르에게서도 그것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시중인들이 황제의 의복을 정리할 때나 목욕물을 준비할 때 비슷한 향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지스카르가 그 향을 좋아해서 시중을 들 때 항시 애용하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차분한 분위기가 지스카르와 잘 어울렸다. 지스카르는 조용하고 항상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한 인간이었다. 그건 내게 있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매일 밤 녀석과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처지니까.
“레이.”
지스카르는 특유의 저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몸을 숙였다. 그가 가만히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금발이 흘러나왔다.
“너도 크리스티안처럼 머리를 땋아보는 것은 어떤가.”
엘 파셔엔 어떤 모종의 사건 이후로 남자들 사이에서 머리카락을 땋는 유행이 생겼다. 머리가 긴 자들은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서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짧은 자들도 옆머리 중 일부를 장식처럼 땋곤 했다. 크리스티안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빼내서 땋은 모습은 솔직히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 머리 스타일을 거부하고 있었다.
“여자도 아니고 머리에 장식을 올리는 건 거절이다.”
“그럼 짐이 땋아볼까?”
“절대로 안 돼! 어디 그 꼴로 돌아다니기만 해봐라. 다시는 얼굴도 안 볼 테니.”
지스카르가 입꼬리를 당기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키스를 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가끔 저놈이 웃는 것을 보면 예전에 표정이 거의 없던 시절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진짜로 닭살이 돋아서 쳐다볼 수가 없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지스카르가 그러지 말라며 얼굴을 손으로 당겨 다시 자신을 보게 했다. 지스카르가 앙다물고 있는 내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한참을 그렇게 입술 끝만 댄 채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스카르가 천천히 혀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나는 순순히 입을 열어서 녀석을 받아들였다.
따뜻한 혀가 내 혀를 휘감았다. 나도 혓바닥으로 녀석을 느껴보았다. 따뜻하다. 아니, 뜨거웠다.
지스카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뒷머리에 손을 넣고 바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능숙하게 고개를 비틀며 입 안을 깊숙이 핥고 뿌리까지 빨아당겼다. 나는 먹잇감이라도 된 것처럼 그에게 매달려서 입술과 혀를 고스란히 내주고 있었다.
한참 만에 지스카르가 떨어져 나가자 입술이 얼얼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뜨거운 숨을 토했다. 키스만으로도 전신이 녹아버릴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지스카르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내가 다 벗은 뒤엔 그도 금방 탈의했다.
“레이.”
지스카르가 갑자기 여길 보라는 듯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손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지스카르는 내 얼굴을 쓸어내렸고, 이어서 천천히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녀석의 손끝을 따라 시선이, 그리고 모든 신경이 아래쪽으로 쏠렸다. 나는 이상한 열기를 느끼며 몸을 살짝 떨었다.
이윽고 손끝이 반쯤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에 닿았다. 톡, 하고 귀두를 건드리는 순간 나는 입을 벌리고 바르르 숨을 들이켰다.
“레이, 기분이 좋은가.”
“아아……!”
“이제 겨우 시작이다. 좀 더 소리를 내게 해주마.”
지스카르가 내 중심을 움켜쥐었다. 찌릿한 기분에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렸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내가 숨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를 전부 그 눈 안에 담아야만 만족하는 것이다. 그건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라며, 녀석은 종종 독점욕에 가득 찬 말을 꺼내곤 했다.
우악스러운 손이 한쪽 다리를 강제로 잡아서 벌렸다. 내가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 되자 지스카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날 진정시키기 위해 손길이 유난히 더 부드러워졌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에게 전부 맡기라며,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다독거리며 성기를 빠르게 쳐올렸다.
“흐으, 아. 흑.”
나는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녀석은 성기를 애무하는 방법이 조금 거친 편인데, 사실 아프게 비틀어주는 것이 굉장히 자극적이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짜릿한 흥분에 몸부림치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하아, 좋아. 그거…… 너무 좋아.”
지스카르는 내 반응에 만족하며 한동안 성기를 짓누르고 비벼대다가 이내 손을 놓고 물러났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스카르가 향유를 꺼내서 통째로 다리 사이에 쏟아부었다.
“으…….”
사타구니가 번들거리는 것이 굉장히 야해 보였다. 지스카르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시간을 두더니 갑자기 발목을 단단히 잡고는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직각으로 치켜들었다. 엉덩이가 완전히 하늘을 향해서 치부가 완전히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더는 못 참겠군.”
지스카르가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도 좀 전의 전희를 통해 몹시 흥분해 있었다. 지스카르는 자세를 낮추며 입구에 자신의 성기를 맞추었다. 엉덩이가 크게 들려 있었기에 누운 자세로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녀석의 물건이 밀려들어 가는 것을 보다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량의 향유는 허벅지만 잔뜩 더럽혔을 뿐 내부는 거의 적시지 못하고 있었다. 쉽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지스카르가 결국 억지로 비집듯이 성기를 끝까지 박아버렸다. 나는 통증을 느끼며 으윽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항상 내 위주로 행동하던 지스카르가 갑자기 자기 욕심만 채우면서 커다란 성기를 거칠게 박아대기 시작했다.
“아! 으윽!”
둔중한 통증이 구멍을 꿰뚫고 허리까지 전해졌다. 제대로 젖지도 않은 내벽이 거친 강요에 바짝 긴장하여 꿈틀거렸다.
“아파, 아프……!”
“레이. 아직도 아픈가. 아니, 틀림없이 기분이 좋을 것이다.”
“큭. 하……, 흐, 읏.”
아파하는 목소리가 어느새 젖은 신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칠게 찍어 박는 행위는 통증이 따랐지만 그래도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약한 통증이 쾌락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 그렇게 따라오면 된다.”
지스카르가 칭찬을 하며 거꾸로 치켜든 종아리에 키스를 하고 춥 빨아당겼다. 다리에 뽀뽀를 한 것뿐인데 나는 과하게 흥분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아래 구멍이 파르르 경련하면서 성기를 강하게 조여댔다.
“하아! 레이…….”
지스카르가 감탄하며 내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귀여운 장난감만 만지듯 손끝으로만 살짝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이었다. 자기는 내 엉덩이를 이용해서 마음껏 즐기고 있는 주제에 정작 내 것은 제대로 애무해 주지 않는다. 나를 애태울 속셈인 것이다.
“흑, 흐! 그러지 말고 거칠게 만져줘. 하읏, 으, 더 세게……!”
아플 만큼 거기를 쥐어짜이고 싶었다. 나는 애가 달아서 아까처럼 사정 봐주지 말고 희롱하라고 애원했다. 한참 나를 애타게 하던 지스카르가 내 성기를 쥐고 손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본격적인 자극이 시작될 것을 깨닫고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숨도 못 쉴 만큼 황홀하게 만들어주마.”
지스카르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엄청난 정력을 자랑하는 녀석이 하는 말이니만큼 절대로 허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입을 열고 달뜬 숨을 토해냈다. 지스카르가 천천히 내 몸을 짓눌러왔다.
지스카르에게 안긴 채 까무룩 빠져들려는 순간,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끔뻑거리다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뭐야……. 꿈?”
뒤늦게 그 정사가 전부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애무받으며 제 입으로 너무 좋다고 그러질 않나, 더 거칠게 희롱해 달라고 독촉까지 하는 것이 도무지 나답지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남성의 상징이 자기 혼자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윽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더니 이번에는 구멍이 쿡쿡 쑤셔왔다. 아직도 지스카르의 것이 뒤에 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혼자서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미친 거냐.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꿈을 꿀 수는 없다! 이런 개 같은……! 나는 이불에 머리를 처박고 속으로 온갖 욕을 쏟아냈다.
한참 후에야 이를 득득 갈면서 얼굴을 들었다. 아무리 부정해 봤자 내가 그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째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는지 심각하게 고뇌에 잠겼다.
“……매일 밤 그 짓을 하고 살다가 갑자기 안 하게 되니까 그런 건가.”
원인을 찾아내는 건 간단했다. 지난 2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지스카르와 관계를 가져왔다. 그걸 하루아침에 갑자기 끊어버렸으니 욕구불만 상태가 될 만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평범하게 이성과 관계하는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왜 하필 그놈과 뒹구는 꿈을!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을 하려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자.
지스카르에게 깔리는 것은 정말 싫지만, 그 자식의 기술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몸이 조금 근질거린다 싶으면 귀신같이 원하는 부위로 손을 뻗질 않나, 애태웠다가 몰아붙였다가 하는 솜씨는 흉내도 못 낼 수준이었다.
그 녀석의 전희가 너무 자극적이라서 가끔씩 지스카르의 희고 긴 손가락이 아주 유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손가락 끝이 민감한 부위를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상상을 했더니 진심으로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현재 아베크 중립국에 있고 지스카르는 멀리 떨어진 엘 파셔 제도에 있었다. 설혹 가까이 있다 해도 놈에게 하고 싶다는 말 따윈 절대로 못 할 테지만.
“…….”
어떻게 할까, 입을 꾹 다물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나는 근처 유곽을 찾아서 욕구불만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지스카르가 없는 틈을 타서 이번에야말로 내 취향대로 여자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퍼뜩 죄책감 비슷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있는 기분이랄까. 애인이라는 단어가 괜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사실상 지스카르를 용서하고 받아준 상황에서 애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만약 이번 일을 알게 되면 지스카르는 뭐라고 할까. 잘은 몰라도 전례가 없을 만큼 크게 화를 내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지스카르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다. 녀석에겐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나는 여성과 잠자리하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하는 남자였다. 2세를 만드는 문제도 있고 솔직히 죽을 때까지 여자에게 손도 대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심을 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외출 준비를 했다. 방을 빠져나오니 대기 중이던 호위기사 맥스 경이 바로 뒤를 쫓아왔다. 나는 오늘 하루 단독행동을 하겠다며 그를 떼어내고 혼자서 미첼 아카데미를 나섰다.
마차를 이용해서 번화가가 밀집해 있는 거리까지 이동했다. 늙수그레한 마부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사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를 열어 동화를 열 닢 정도 넉넉히 던져 주었다.
“어이쿠. 고맙습니다, 나리. 왜 이렇게 많이 주시는지…….”
“네게 물을 것이 있다. 이 근방에 유곽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나리께서 찾으실 만한 고급 창관이라면 여기서 좀 더 북쪽으로 가셔야 있습니다. 소인이 거기까지 모셔드릴까요?”
“그럴 필요까진 없고. 거리 구경도 할 겸 나온 것이니까.”
늙은 마부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다가 한참 만에 마차를 끌고 떠나갔다. 그를 보낸 다음 혼자서 거리를 거닐었다. 사람 사는 모습도 구경하고 산책을 좀 하다가 번화가 북쪽에 있다는 유곽에 들를 생각이었다.
유곽의 위치를 가늠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기세 좋게 여기까지 나오긴 했는데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처럼 지스카르가 자꾸 걸렸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놈 생각을 해줘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생각에 잠겨서 길을 걷던 중이었다.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가다가 지나가던 행인과 어깨가 부딪쳤다.
“부주의한 놈이로군.”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상대 쪽에서 먼저 한소리 했다. 어깨를 부딪친 자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30대의 사내였다. 190센티에 육박하는 훤칠한 장신에 근육으로 꽉 짜인 강인한 신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얼굴 생김도 제법 준수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이 비틀려 있고, 전체적으로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잘생긴 외모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뺨에서 입술을 거쳐 목덜미에 이르기까지 아주 큰 상처가 있었는데, 그 흉이 사내를 더욱 살벌하게 보이도록 했다.
나는 실례를 했다고 간단히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예의 사내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확인을 위해서 길거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자도 똑같이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왜 따라오는 것이냐?”
내가 사내를 돌아보며 추궁했다.
“따라가? 나도 그쪽 길에 볼일이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내는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날리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길을 걸으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사내를 탐색했다. 장신에 어울리는 길고 강인한 팔다리는 차돌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것은 오랜 단련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몸으로, 나는 틀림없이 그자가 실력 있는 기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내는 혼자가 아니었고 호위로 보이는 기사와 동행을 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는 빨간 머리 사내에 비하면 뭔가 부실한 느낌이었고 인상도 강렬하지 못했다. 이래서야 사내가 호위를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랄까. 하긴 누가 옆을 지켜도 저 사내보다 위협적인 분위기는 만들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뒤편의 사내도 역시 걸음을 멈췄다.
“나는 여기서 좀 쉬다 가야겠다. 이쪽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먼저 지나가거라.”
“아니, 나도 천천히 가겠다.”
사내가 팔짱을 끼는 것을 보며 나는 실소했다.
“그래? 가만 보니 방향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목적지가 똑같은 것 같은데 차라리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괜히 뒤나 쫓아다니지 말고 그냥 내 옆으로 오너라.”
나는 손가락을 까딱하며 사내를 옆으로 불렀다. 순간 사내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살벌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 길게 미소가 떠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갑자기 사내의 태도가 돌변했다. 살벌한 것은 여전하지만 위협적인 태도를 버리고 조금 유들유들하게 말투를 바꾸었다.
“동행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는 성큼 내 곁으로 걸어왔다. 확신하건대 이자는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흥미 본위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직접 나를 보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자, 어딜 가려던 중이었지?”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사내가 대놓고 나의 목적지를 물어봤다.
“유곽.”
처음 보는 인간 앞에서 뻔뻔하게 유곽을 찾아 나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느긋하게 대꾸해 왔다.
“여자가 고팠단 말인가. 마침 잘됐군. 내가 막 창관에서 나오던 길이었으니까.”
“대낮부터 그런 곳에 있었다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즐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시간이 낮이든, 밤이든.”
나는 그 대답에서 사내가 꽤나 방탕한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 좋은 곳을 알고 있지. 따라오너라.”
사내가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고 나도 일단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번화가 북쪽에는 언뜻 술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도록 꾸며놓은 고급 창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일반 매음굴과 달리 이쪽 거리는 대낮에도 한창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매춘만 하는 곳이 아니라 고급 주점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머리의 사내는 여러 창관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며 고급스러운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이곳 창관은 내부가 매우 조용했다.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곳을 통째로 전세를 낸 분위기였다.
이자가 창관을 빌린 것인가 싶어 나는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내가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신으로 보이는 자들이 모두 나와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가신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중년인이 대표로 인사를 했다. 그는 재빨리 주인의 동태를 확인하고 그와 동행 중인 내게도 시선을 주었다. 이내 주인의 뜻을 짐작했다는 듯 그가 고개를 숙였다.
“바로 위층에 방을 마련하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사내가 갑자기 충직한 가신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그대로 부숴버릴 것처럼 벽에다 메다꽂았다.
콰앙!
“뭐라고? 뭘 네놈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사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가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손아귀에서 뿌드득 하며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위 기사들도 소드 마스터 정도는 아니지만 오라를 이용해 상당 수준 육체적인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사내가 지금 오라까지 써서 가신의 머리를 그대로 으깨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
흉측한 꼴을 보기 전에 내가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주위 가신들이 주인의 난폭한 행동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주인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어렵게 눈치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사내가 얼마나 난폭한 주인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붉은 머리 사내가 여전히 제 가신의 머리를 움켜쥔 채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만두라고? 이놈이 방금 널 무슨 취급 했는지 알고는 있느냐? 넌 남창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래도 이걸 예쁘게 봐주라는 말이냐?”
“미친놈! 남 생각 해주는 척 말고, 그냥 놔주기나 해!”
나는 이를 으득 갈며 날카롭게 놈의 말을 받아쳤다. 내 욕설에 주위 가신들이 숨을 헉 들이켜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한층 더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경고로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사람, 안 놔줄 것이냐?”
나의 독촉에 사내는 피식 입을 비틀어 웃더니 가신의 머리를 벽면에 세게 짓누른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 머리 가죽이 갈리면서 벽면에 시뻘겋게 끔찍한 흔적이 남았다. 사내는 몇 걸음 걷다가 쓰레기 버리듯 가신을 바닥에 내던졌다.
“자, 이제 됐느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가신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먼저 술상부터 보고, 여기서 가장 예쁘장한 계집들을 내와라!!”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의 가신들뿐만 아니라, 창관의 모든 일꾼까지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불쾌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일단 사내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대로 휙 떠나버리면 그 불똥이 하인들에게 튈 것 같아서 잠시만 더 사내와 행동을 같이해 주기로 했다.
2층 방은 특이하게도 좌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언제든지 정사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는지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를 깔고 커다란 쿠션들을 곳곳에 비치해 두었다.
잠시 방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일꾼들이 커다란 술상을 내왔다. 필요한 준비가 끝난 뒤에는 성숙한 미모의 여성들이 사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방 귀퉁이 쪽에는 사내의 가신들로 보이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자, 마음껏 즐기거라.”
사내가 선심 쓰는 척 말하고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제 무릎 위로 끌어와서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그의 무절제한 태도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랫사람을 난폭하게 다루는군.”
“뭐, 그런 편이지.”
사내는 히죽 웃으며 대답하다가 여자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좋게 대해주면 자꾸 기어오르려고 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찍소리도 못 하게 밟아주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다.”
“글쎄다. 네놈이 매사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굳이 공포를 휘두르지 않아도 자연히 휘하의 신하들이 네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바칠 것이다. 피를 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네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그건 네놈이 무능하고 덜떨어진 놈이라는 증거밖에 안 돼!”
나는 작정하고 사내를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주위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가신들이 기겁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며 전신을 벌벌 떨었다.
“하하하하!!”
그런데 갑자기 사내가 커다랗게 폭소를 터뜨렸다.
“맞다! 네 말이 모두 정답이다!”
그는 유쾌하게 대답하며 어서 술을 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찜찜함을 누르고 일단 술상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도수가 낮은 과실주만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 누구 먹으라고 이런 애들 술을 갖다 놓은 것이냐?”
“흠? 마음에 들지 않는가? 네 구미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낯이던 사내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하여튼 감정 변화가 아주 극적인 인간이다.
“어린애 취향이 아니라 미안하군그래. 혼자서만 퍼마시지 말고 내 잔에도 그 술 좀 따라보거라.”
내가 혀를 차면서 사내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던 사내는 입꼬리를 올리며 직접 내 잔에다 술을 부어주었다. 나는 독한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탁.
빈 잔을 상 위에 내려놓은 뒤 나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 불공평한 관계는 딱 질색이다. 넌 누구냐?”
“그런 건 됐고, 그보다 네 이야기를 해봐라.”
사내는 자기 신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마법에 능하다고 들었다.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아무래도 저 사내의 입에서 신분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는 짓을 보면 대단히 높은 지위의 인간이 분명한데, 엘 파셔의 고위 귀족은 내가 대부분 얼굴을 아는 편이니 아베크 중립국 출신이거나 스트라스인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놈의 질문에 대꾸해 주었다.
“글쎄다. 내 마법이 어느 수준인가 하면, 역사서를 다 뒤져 봐도 날 능가할 자가 없을 정도?”
“하하하하!”
사내가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과연 그렇구나. 다중 영창은 어디까지 가능하지?”
“요즘 5중 영창을 시험 중인데 생각처럼 잘 안 되더군. 게다가 어떤 녀석이 위험하다며 자꾸 방해를 하는 바람에 당분간은 연구를 재개하기 어려울 것 같다.”
“큭큭큭. 크흐흐!”
사내는 아주 땅을 치면서 웃고 있었다. 3중 영창만 가능해도 나라 안에서 손꼽는 대마법사로 통하는데 5중 영창을 운운했으니 웃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한 번도 거짓을 말한 것이 없다.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다시 느긋하게 술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그런데 저놈이 따라준 술이 독하긴 독하다. 아까부터 목구멍이 계속 화끈거렸다.
“네 녀석, 볼수록 마음에 들어!”
혼자서 신나게 웃던 사내가 기분 좋게 소리쳤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안 든다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사내가 싱긋 눈웃음을 보내더니 무릎에 앉혀두었던 여자의 옷가지 안으로 불쑥 손을 넣었다. 사람이 빤히 보는 앞에서 저런 짓까지 하는 것도 아주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여자의 입에서 흥분한 숨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질색하며 당장 술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작작 좀 해! 정도껏 하란 말이다!”
“원래 이렇게 다루라고 있는 계집이다. 너도 즐기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어째서 계집들에게 손도 대지 않지? 옆에 앉아 있는 계집들의 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니면 몸매가 취향이 아니야?”
사내의 살기 어린 눈길이 맞은편에 앉은 여자들의 몸을 훑어 내렸다. 여자들이 잔뜩 겁에 질려서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여자들이 아니라 네놈이다. 입맛 떨어져서 더 이상 여기 못 앉아 있겠군!”
웬 미친놈을 만나서는 기분을 완전히 잡치고 말았다. 이래서야 도저히 여자를 안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이를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내가 낮게 음성으로 명령했다.
“거기 서. 나는 떠나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
나는 바로 팔을 들어 사내를 가리켰다.
우우웅.
수십 개의 마정석이 동시에 진동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당장 손끝만 까딱해도 사내를 포함한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한 줌의 가루가 될 것이다.
“막고 싶으면 어디 한번 막아봐라. 네놈의 주제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
사내는 마정석이 박힌 팔찌를 보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래도 아주 멍청이는 아닌지 내가 준비하는 마법의 위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듯했다. 나는 마법을 거둔 뒤 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떠났다. 그때 등 뒤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오늘만 날도 아니니까……. 나는 이 부근에 있을 것이다. 생각이 나면 보러 오너라.”
“꿈도 꾸지 마라.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 따윈 없을 테니.”
나는 냉소를 날려준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창관을 떠났다.
가까운 곳에서 마차를 잡아타고 곧장 미첼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제대로 똥 밟았다고 투덜거리면서 숙소로 향하고 있는데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시라크와 마주쳤다.
“대공, 호위기사까지 떼어놓고 어딜 가셨던 겁니까?”
자리를 비운 동안 시라크가 나를 찾았던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근처 유곽에 좀 다녀왔다.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좀 멋쩍어서 혼자 행동했던 것뿐이니 걱정 말거라.”
“예? 유곽?”
순간 시라크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되물었다. 나는 시라크의 등을 툭툭 쳐주고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