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9/43)

4.

어디서 스며든 것인지 모를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쉽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허리 아래로 둔중한 통증이 느껴져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틀림없이 거기가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몇 번을 했는지 중간부턴 반쯤 정신을 놓아서 세지도 못했다. 이놈이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지.

“우으…….”

작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툭 떨어뜨렸는데 차갑게 식은 시트의 감촉이 전해졌다. 나는 눈을 떴다. 당연히 옆자리에 누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지스카르가 보이지 않았다.

통증이고 뭐고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정말로 지스카르가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정사의 흔적이 남은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 순간 목구멍 저 안쪽에서 불덩어리 같은 화가 왈칵 치밀었다.

“이 개자식이 감히! 자기 내킬 때까지 화풀이하고는 그냥 가버려?”

상상도 못 할 취급을 받고 나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지스카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컵을 두 개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수건을 들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왜 그러고 있는 것인가?”

“아? 아니…….”

나는 어색한 표정을 하고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다가 일단 내게 우유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받거라.”

나는 우유 잔을 받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유를 들여다보다가 조금 마셔보았다. 배 속이 따뜻해져서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심하게 허기가 졌다. 지스카르가 왜 하필 우유를 가져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꿀꺽꿀꺽 우유를 마시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잔을 싹 비워버렸다.

침대맡에 서 있던 지스카르가 그 모습을 보더니 자기가 마시던 우유 잔을 내게 내밀었다.

“아니, 난 됐다. 너도 마셔.”

지스카르가 그냥 마시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잔을 받아서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었다.

“하인을 부르지 어째서 직접 나간 것이냐?”

안 그랬으면 혼자서 그 난리를 피웠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지스카르는 침대 위에 걸터앉으면서 대답했다.

“황궁이었다면 시종장이 알아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놓았을 테지만 이곳은 아베크 중립국이 아닌가. 하인에게 자세히 지시할 겸 나갔다가 직접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따뜻하게 덥힌 수건을 눈 위에 얹었다. 따끈한 기운이 눈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자 온몸의 피곤이 가시는 듯하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기분 좋게 하, 숨을 토했다. 잠시 뒤 지스카르가 수건을 내려서 얼굴을 닦아주었다. 왠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서 피식 웃었다.

“우유에다가 이젠 세수까지 시켜주는 것이냐. 애 취급은 그쯤 해라.”

“애 취급이 아니다.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지.”

“…….”

“네가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지스카르가 이런 놈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오해나 하고 나도 경솔한 짓을 자주 하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녀석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지스카르가 내 몸을 닦아주며 화제를 바꾸었다.

“어제 다른 일 때문에 이야기가 엇나가버렸는데, 사실 너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있다.”

“뭐지?”

“스트라스 측에서 평화회담을 제안해 왔다. 휴전한 지 이십 년 가까이 되었고 공식적인 경로로 교류를 가질 때도 되었다고 판단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크게 흥미가 동해서 수건을 치우고 물었다.

“평화회담? 그건 좋은 소식이군. 회담이 잘 성사되어 이후에 종전 협정으로 이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되겠지.”

스트라스와 엘 파셔는 따지고 보면 휴전 협정을 통해 전쟁을 쉬고 있는 상태이다. 양국 간의 합의를 통해서 종전 협정을 맺어야만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평화회담을 기회로 종전 협정까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고 지스카르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회담 일자는 앞으로 약 한 달 후, 4월 초순이다.”

“한 달이라고? 평화회담이 열리는 것까진 좋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은가. 뭐가 그리 급하다고?”

“스트라스 황제의 요구였다. 그의 속내를 짐이 어찌 알겠는가.”

지스카르가 대충 내 질문을 넘기려 했다. 이 몸 앞에서 그런 어쭙잖은 태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눈을 지그시 떴다. 지스카르는 하는 수 없이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했다.

“스트라스 내정이 어수선한 것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짐은 보고 있다. 평화회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회담을 이용해서 내부의 눈을 돌리고 새로운 국면을 만들 목적이 아닌가 싶군.”

순간 나는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스트라스 내정이 어수선하다고?”

“더 듣고 싶은가? 너는 그동안 고의적으로 스트라스와 관련된 정보에서 귀를 닫고 있었지.”

“아니……. 나는 스트라스에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스트라스에 대한 것은 됐어. 스트라스가 당장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지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한 달 후, 아베크 중립국에서 양국 정상이 모여 평화회담을 나눌 것이다. 너는 그 기간 동안 엘 파셔 제도에 돌아가 있도록 해라.”

“에드리히가 오겠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다. 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엘 파셔로 귀환하겠다.”

“겨우 짐의 말을 들어주는군.”

“네가 쓸데없는 소리만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수건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지스카르가 수건을 내려놓고 내 몸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쓰라리지는 않으냐?”

그제야 시선을 내리고 내 몸을 들여다보았다. 아랫배부터 시작해서 다리 사이에 빈틈없이 자국이 찍혀 있었다.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그곳이 시뻘겠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황급히 이불을 끌어와서 몸을 가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건! 이래서야 사람들 앞에서 볼일도 못 보겠어!”

“그거 잘되었군. 짐이 바라는 바이다.”

개자식이 좋다고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거시기를 꺼내서 볼일을 보는 것까지 집착의 영역에 포함되는 거냐.

지스카르가 새 수건을 들어서 정사로 더러워진 몸과 다리를 닦아주었다. 내가 민망함에 스스로 하겠다고 했더니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뒤로 밀어냈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뜨린 뒤 기어이 자기 손으로 뒤처리를 해주었다.

“오늘 내로 준비를 마치고 내일 바로 엘 파셔로 귀환하도록 해라.”

“내일? 평화회담까지 한 달은 남았는데 그렇게 급하게 돌아갈 건 없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둬.”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내 턱을 잡아 다시 자기를 보게 했다. 손길이 조금 거칠었다.

“짐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거라. 너는 항상 짐의 명령을 쉽게 듣고 흘려버리는군.”

지스카르의 말에 나는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아,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황제 폐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이 말이냐?”

“짐이 어려운 요구를 한 것이 아닐 텐데?”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네놈이 이 몸에게 복종을 요구한 것 자체가 문제인 거다.”

“레이, 그저 귀환을 서두르라 했을 뿐이다.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진짜 그 목에 개목걸이라도 씌워서 제도로 끌고 가야겠는가!”

언제는 발에 족쇄를 채우고 싶다더니 이번엔 개목걸이다. 이따위 개소리를 웃어넘기는 것도 한 번이지, 두 번째엔 확 노기가 치밀었다.

사실 지스카르가 엘 파셔로 돌아가라며 무리하게 강요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도 스트라스와 접촉을 꺼리고 있지만, 지스카르도 내가 스트라스와 정확히는 에드리히를 비롯한 과거의 인연과 접촉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고향을 그리며 향수에 젖은 것이 그의 입장에서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놈의 고압적인 태도를 참아줄 이유가 되진 않는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노예 신분이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시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네가 황제라 하여 마음대로 이 몸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으냐?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든가.”

나는 침대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키며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와락 몸을 낮추고 키스를 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놈에게 밀려서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좀 전과는 다르게 난폭하게 입 안을 헤집는 키스였다.

잠시 뒤 지스카르가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스카르는 등을 돌려 말없이 방을 떠났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나는 엄지 끝으로 입술을 만지며 한숨을 토했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 * *

잠시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까무룩 잠이 들어서 날이 거의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창밖에 노을이 지는 광경을 쳐다봤다. 결과적으로 오전 수업만이 아니라 하루 수업을 모조리 건너뛰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루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는 없었기에 시라크와 아젤로스가 방과 후 따로 공부하기로 약속했던 제2합동 강의실에 한번 들러보았다.

“대공. 오셨습니까.”

시라크가 일부러 일어나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그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물었다.

“저기……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알겠느냐.”

지스카르에 대한 질문이라 반사적으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렇습니까? 처음 오셨을 때처럼 말없이 다시 떠나버리신 모양이군요.”

시라크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괜히 죄 없는 아이를 괴롭힌 격이 되어 나는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

“아니, 그럴 녀석은 아니다. 떠나더라도 네게 말은 하고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나와 시라크가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 아젤로스가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내가 이야기를 끝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주자 아젤로스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지 바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제 친구들도 같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던데, 혹시 인원을 늘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쁠 것 없지.”

나는 선뜻 호의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시라크도 인간관계가 넓어질 좋은 기회였다. 내 동의를 얻은 아젤로스는 만족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모임이 제대로 정착되면 나중에 가볍게 사냥도 다니고 할 생각입니다. 대공께서도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갑자기 시라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끼어들었다.

“애들끼리 놀러 가는데 대공을 끼워 넣을 생각입니까? 그가 지루해할 모습이 눈에 아주 선하군요.”

“네게 말한 게 아니니 끼어들지 마시지!”

“그가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고 해서 똑같이 생각하면 큰코다친다는 말입니다.”

“같다고 생각지는 않아. 보통 사람이라면 대공 작위 같은 것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 봤자 뛰어난 또래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닌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인 거지. 너는 지도교수에게 같이 놀러 가자는 말을 합니까?”

“너 은근히 반말을 좀 섞는다?”

시라크와 아젤로스는 툭하면 말싸움을 하곤 했다. 나는 적당히 하라고 인상을 써서 둘의 싸움을 중지시켰다.

드르륵.

그때 갑자기 강의실 문이 열렸다. 서덜랜드 교수가 반가운 얼굴로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이며 미첼 아카데미에서 신학대학장을 맡은 인물이었다.

“대공 전하, 지나가는 길에 낯익은 모습이 보이기에 들어왔는데 역시 전하가 맞으시군요. 엘 파셔에서 손님이 한 분 더 오셔서 제가 안내를 해드리던 참이었습니다. 아니, 아젤로스 전하와 시라크 님도 계셨군요.”

서덜랜드 교수의 뒤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지스카르도 강의실 안쪽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시선을 주었다.

“…….”

“…….”

분위기가 어쩐지 떨떠름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지스카르도 특유의 무표정을 고수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아젤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스카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 파셔에서 또 손님이 왔단 말인가. 그대는 출신이 어찌 되는가?”

스트라스의 3황자답게 아주 위엄 넘치는 말투였다. 하지만 시라크는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할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뒤쪽에서 아젤로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지스카르가 아젤로스에게 시선을 주며 짧게 신분을 밝혔다.

“글렌 백작이라 한다.”

서덜랜드 교수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맞장구를 쳤다. 황제라고 할 순 없으니 서덜랜드 교수에게도 아젤로스에게도 대충 백작이라고 둘러대고 있는 모양이다. 대답을 들은 아젤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개 백작 주제에 무례하군. 나는 스트라스의 3황자이니 예를 갖춰라.”

“아, 아젤로스! 그만둬!”

시라크가 더 이상 이 촌극을 보지 못하고 등 뒤에서 아젤로스의 팔을 와락 붙들었다.

“뭐야, 왜 이래?”

“됐으니까 그 입 좀 다물지?”

“또 반말이냐? 너 자꾸 은근슬쩍 이 몸한테 말을 놓는데 말이지!”

꼬맹이들끼리 아옹다옹 싸우게 내버려두고 나는 지스카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글렌 백작님이라?”

실제 글렌 백작은 엘 파셔에서 제법 큰 권세를 가진 대귀족이었다. 하지만 지스카르의 직함으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느낌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광대 옷을 걸친 것처럼 우스꽝스럽다고 할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겠지. 그보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내 앞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스카르가 그제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근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첼 아카데미가 정말 소문만큼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지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할 좋은 기회이니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스카르가 왜 그렇게 웃는 것인지 의문을 표했다.

“이 몸도 미첼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똑같은 짓을 했지. 하는 행동이 같은 것이 우습지 않은가. 묘하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군.”

확실히 지스카르와는 생각하는 것이나 관심사가 비슷한 경향이 있었다. 물론 방법론에서 의견이 갈리는 일도 많았지만.

서덜랜드 교수가 계속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눌 순 없지 않으냐며 신학 대학장실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시라크와 아젤로스에게 남은 공부를 하라고 말해놓고 서덜랜드 교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서덜랜드 교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날 시험이라도 하듯 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화제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세간의 소문을 듣고 나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지스카르에게도 호감을 보였다. 미첼 아카데미의 현황에 관심을 보였던 엘 파셔의 고위 귀족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싶은 것 같았다.

“두 분 모두 평소 신학에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서평론까지 독파하신 분은 또 처음 뵙는군요. 최근 신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서평론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대화를 하다가 말이 제법 잘 통한다 싶자 서덜랜드 교수는 신이 나서 자기 관심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에 대해서 주절주절 지껄이는 것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것만이 신학의 전부는 아니며, 윤리와 철학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학문이지만 그냥 내 취향이 이렇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신학 토론회 비슷한 곳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나는 테이블에 놓인 연구 자료를 쓸데없이 뒤적거리다 길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실례가 아닌가.”

지스카르가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눈치를 보니 서덜랜드 교수도 그리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내 잘못이 분명했기 때문에 일단 교수에게 사과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또다시 잔소리를 해왔다.

“어려운 이론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외면하려 들지 말고 기초부터 다시 익힌다는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옳다. 서덜랜드 교수는 신학의 일인자이니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두면 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뭐라? 내가 서평론을 뗀 것이 열 살 무렵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에 이미 준학자 수준까지 올랐던 이 몸에게 지금 기초부터 다시 익히라고 충고했어? 이런 취급은 또 난생처음 받아보는 것 같군.”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자 지스카르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좀 전부터 지적하려 했다만, 보커스 논증과 보일 논증을 반대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윽.”

나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이야기하던 중에 그 두 가지가 헷갈려서 은근슬쩍 얼버무리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내가 서평론을 뗀 것이 열 살 무렵. 아무리 나라도 열 살 때의 기억은 살짝 가물가물하다. 지스카르가 엄중하게 충고를 했다.

“독서를 할 때도 흥미가 있는 분야의 책만 탐독하고, 신학이나 보수적인 이론이 적힌 고서들은 눈대중으로 보고 넘겨버리지. 실용주의도 좋지만 기본을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이다.”

“그래. 내 지식이 다소 부족했다는 걸 인정하마. 하지만 어차피 신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어떤 이론이 존재하는지 대충 아는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몰라도 얼마든지 실전에 응용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기본기를 무시하다가 언젠가 허를 찔리는 일이 있을 것이다.”

중간에 끼어 있던 서덜랜드 교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서로 조금도 지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확실히 지스카르는 만만치 않은 놈이다. 신분이나 지위도 그렇고, 실력을 따져도 그렇다. 나는 지스카르를 가리키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뛰어난 인간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지. 나도 솔직히, 네 녀석이 적잖이 마음에 든다.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오늘 신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처럼 때로는 날 앞서 나갈 때도 있는데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해 왔던 이 몸에게 있어 그건 매우 색다른 체험이다. 이것 외에도 네게 호감이 가는 점이 많은데, 이처럼 잘난 네놈이 결국엔 내게 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중에서도 최고로 마음에 들어!”

나는 대놓고 지스카르의 약점을 들먹이며 도발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놈이 지는 법이다. 그게 진리다. 지스카르가 내게 목을 매고 있는 한 나를 진짜로 거스를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2년 전 내 부모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던 것처럼.

“네가 얌전히 짐의 곁에 앉아 있기만 한다면 네게 져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지스카르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연구 자료들을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뭉치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 나는 더 이상 네 옆에 앉아 있지 않은데, 이제는 어찌하겠느냐?”

“…….”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까지 보고 나는 코웃음을 치며 학장실을 나와버렸다.

* * *

홧김에 미첼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번화가를 거닐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솔직히 후회하고 있었다. 도발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기 싸움에서 이긴다고 무슨 금덩어리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조금 눌렀다 해서 용수철처럼 바로 튀어 오르다니, 나도 어지간히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다.

날이 저무는 것을 보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호위 기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호위의 이름은 맥스라고 하며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가진 조용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실력도 출중하고 진중한 성격으로, 내가 직접 선발한 그레이언 대공가의 기사였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내가 술을 마셨다는 건 황제 놈에게 비밀이다. 귀찮게 굴 것이 빤하니.”

“알겠습니다.”

말귀를 알아듣고 단정하게 대답하는 것이 흡족했다. 내가 먼저 명령하기 전까지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많은 수의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다.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응시했다. 주위 시선 따윈 무시하고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하기 위해 종업원을 부르자 술집 주인이 직접 뛰어나왔다.

“값은 신경 쓰지 말고 여기서 가장 쓸 만한 술을 내와라. 안주도 두어 가지 내오고.”

“알겠습니다, 나리.”

비싼 술을 마시겠다는 이야기에 술집 주인의 얼굴이 훤해졌다. 그동안 맥스 경은 내 등 뒤에서 시립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말고 앞자리에 가서 앉아.”

“전하를 호위하는 중에 술을 마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경은 원칙과 내 명령 중에 어느 걸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느릿하게 턱을 괴고 물었다. 맥스 경은 즉각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때마침 술집 주인이 술을 먼저 내왔다. 맥스 경이 술병을 들고 양손으로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나도 그의 잔에 반절쯤 채워주었다.

“심심하니 내 술친구나 되어다오. 실연당한 것도 아닌데 혼자서 술을 홀짝이긴 싫어서 말이다.”

맥스 경은 말이 많은 자가 아니라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술친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내 요구에 맞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실연입니까. 전하께서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선 남녀불문하고 인기가 좋으시지 않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실연을 당하는 그림이 상상이 안 되긴 해. 그런데 지금 남녀불문이라 했겠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맥스 경이 갑자기 정색하면서 대꾸했다. 그냥 한 소린데 그렇게 정색할 거 없지 않아? 저리 나오니 오히려 의미가 있어 보이잖아.

나는 피식 웃으며 술을 쭉 마셨다.

잠시 맥스 경과 잡담을 나누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덜컹.

낡아빠진 술집 문이 거칠게 열렸다. 요란하던 주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일전에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붉은 머리 사내가 문을 열고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만 봐도 지체 높은 귀족임이 분명하고 분위기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주점 내에 있던 모든 평민이 기가 죽어서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주점을 가로질러 내 앞에 섰다. 그는 얼어붙을 듯 서늘한 눈빛으로 깔아보면서 맥스 경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밟았다.

“꺼져라.”

맥스 경은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사내를 경계하며 검에 손을 올렸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일단 맥스 경에게 자리를 비켜주라고 눈짓을 했다. 맥스 경은 내 명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사내를 주시했다.

“중립국 내에 정보원을 깔아둔 덕이지. 두 번 다시 얼굴도 보기 싫다고 했는데 네 마음대로 안 돼서 이를 어쩐다?”

사내는 뻔뻔하게 맥스 경의 자리를 뺏어서 앉았다.

그때 주점 주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주문해 두었던 안주를 들고 왔다. 사내가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인간이라 혹시라도 무슨 꼬투리라도 잡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분위기였다. 주인의 염려와 달리 그가 안주를 내려놓고 사라질 때까지 사내는 거만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귀족 나리들이 평범하게 술을 즐기는 듯하자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 고개를 돌리고 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주점이 금방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나는 혀를 차면서 사내를 향해 빈 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 따라보거라. 네놈이 영 마뜩잖지만 내가 좋다고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이대로 내쫓아버릴 수도 없고, 그냥 오늘 하루 내 술 시중이나 들든가 해라.”

“술 시중이라?”

사내는 큭큭 비틀린 웃음을 흘리더니 선뜻 술병을 들었다.

“좋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어쩌다 보니 술친구가 이 무례한 사내로 바뀌었다. 맥스 경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눈앞에 있는 살벌한 놈이 호위 기사와 동석 같은 걸 용인할 리가 없으니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면 이럴 수밖에 없다.

술을 한 잔 비워내고 사내의 출신을 물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이 사내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래서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신분과 출생지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알게 될 것이다.”

사내는 이번에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나는 혀를 찼다.

“쓸데없이 비싸게 구는군. 이놈 저놈 하고 불리는 것이 좋은 모양이지?”

오오오오!!

문득 식당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손님들 사이에서 팔씨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서 시작된 내기가 술집 전체로 판이 커진 모양이었다.

테이블을 두 개 붙이고 덩치 좋은 사내 둘이 막 힘겨루기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자니 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잔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조금 머뭇거렸다. 내가 굳어 있는 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왜? 나는 여기에 끼면 안 되느냐?”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얼른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돈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탁자에 내려놓고 피부가 검은 사내를 가리켰다.

“나는 저자에게 걸겠다.”

내 말에 상대편 사내가 콧김을 뿜으며 한마디 했다.

“귀족 나리. 돈을 잘못 거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내기에서 지고 화내지 마시고 제게 돈을 거시지요?”

“내가 돈을 건 자가 분명히 이길 테니 네놈이야말로 패배하고 울지나 말거라. 다들 언제까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셈이지? 팔씨름은 언제쯤 시작할 것이냐?”

“어이! 귀족 나리께서 화내시기 전에 빨리 시작하세!”

심판을 보고 있던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두 사내의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시작 신호를 보내며 손을 떼어냈다. 드디어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둘의 승패가 쉽게 갈리지 않고 매우 팽팽했다. 사람들은 점점 흥이 올라서 자기가 돈을 건 사내를 응원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도 큰소리쳐 놓은 것이 있어서 살짝 흥분해 버렸다.

“크으, 저렇게 좋은 근육을 놔두고 쓰지도 못하고!”

내가 바짝 약이 올라 있자 근처에 있던 중년인이 한마디 했다.

“흐흐. 귀족 나리. 마음 푸십시오. 세상일이 어디 맘대로 됩니까?”

“하늘 같은 귀족 나리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해야지, 안 되긴 뭐가 안 된단 말이냐?”

자꾸 귀족 나리, 귀족 나리 하는 것을 보고 그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더니 중년 사내가 낄낄 웃기 시작했다.

내가 끼어든 탓에 팔씨름하는 당사자들이 얼굴에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만들고 서로 이기기 위해 용을 썼다. 세 번 이상 엎치락뒤치락하는 접전 끝에 결국에는 내가 지목했던 자가 승리를 거뒀다. 딴 돈이 제법 되는 것을 보고 나는 기분 좋게 소리쳤다.

“내가 오늘 이 돈으로 네놈들에게 거하게 한잔 사겠다! 봤느냐? 귀족 나리의 말을 잘 들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오오! 귀족 나리 만세!!”

“우오오오!”

공짜를 싫어하는 인간은 적어도 이 술집 안에는 없었다. 내 선언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던 손님들이 굵직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나는 목돈을 따게 해준 검은 피부의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룩스라고 합니다.”

그가 뭔가 인정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지 뿌듯하게 대답했다. 나는 룩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람들을 보고 외쳤다.

“자, 또 다른 도전자는 없는가? 나는 이번에도 여기에 있는 룩스에게 걸겠다!”

“어이, 누가 좀 나서봐!”

“귀족 나리, 제가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술집 손님들과 어울려서 한바탕 즐기고 있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팔씨름의 판이 커져서 주점 내의 모든 손님이 내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붉은 머리의 사내만이 본래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렇게 대놓고 귀족티를 내고 있는데 누구와 어울릴 수 있을까.

나는 주위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홀로 앉아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혼자 궁상떨지 말고 이리 와라.”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붉은 머리 사내에게 쏠렸다.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며 그를 부르지 말라고 소리 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똑같은 귀족이라도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사내와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다시 그자를 불렀다.

“오라고 할 때 냉큼 오시지? 거기서 무게 잡고 있어봤자 손해 보는 것은 네놈뿐이다.”

“…….”

사내는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날 쳐다보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등장한 것뿐인데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나는 연전연승 중인 룩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자가 이 주점 내에서 가장 팔심이 센 자인데 한 판 붙어보는 것은 어떤가? 미리 말해두겠는데 순수한 악력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해선 안 된다.”

사내는 룩스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조소를 던졌다.

“오라를 사용하면 저놈의 팔뚝 뼈까지 꺾어버릴 수 있는데 내가 뭣 때문에 힘을 억눌러가며 그런 장난질을 쳐야 하지?”

사람들은 모두 오싹한 얼굴을 했다. 사내가 범인의 영역을 넘어선 고위 기사임을 깨달은 것이다.

“장난이니까 장난으로 하라는 말이다. 그 정도 말귀는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사내에게 한소리 한 뒤, 룩스에게도 충고를 해주었다.

“너도 귀족이라고 어려워할 필요 없이 전력을 다해서 승부를 내도록 해라. 저놈이 흉악범처럼 생겨서 도통 믿음이 안 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저놈을 믿지 말고 나를 믿으면 된다.”

일부 손님들이 흉악범처럼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킥킥 웃었다. 물론 사내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반쯤 흉악범으로 몰린 붉은 머리 사내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팔씨름을 시켰다. 화를 내며 판을 엎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사내는 계속 얌전하게 내 말을 따라주고 있었다.

주점 내 모든 사람의 관심이 한꺼번에 집중된 상태로 드디어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사내는 룩스의 팔을 옆으로 넘겨버렸다.

“…….”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했다. 결과가 지나치게 빨리 나오니 다른 사람들도 조용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사내를 가리켰다.

“아주 시시한 한판이었군. 이런 식으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부어버릴 수도 있는 게지. 너는 재미없는 경기를 보여준 대가를 치러야겠다.”

“뭘 어찌하라는 거지?”

“사람들한테 한 턱씩 쏘라 이 말이다.”

“저런 천것들에게 술을 제공하라고?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지.”

사내가 경멸 어린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기 전에 목덜미를 쥐고 뒤로 잡아당겨 그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단순 힘으로는 그에게 상대가 안 되지만 무게 중심이 불안정할 때를 노리면 나도 한 번 정도는 그의 자세를 무너뜨릴 수 있다.

“네놈이 흉악한 주제에 이젠 구두쇠 짓까지 하는군. 그깟 푼돈 때문에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좋으냐?”

사내가 전에 없이 살벌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특유의 잔인한 성격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동안 천천히 눈에서 분노가 사라져 갔다. 그리고 희미하게 뒤틀린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내는 내 손을 밀어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주점에서 보유 중인 술을 모조리 꺼내서 돌리도록 하라. 재료가 동날 때까지 안주도 쉬지 말고 계속 만들어서 내와라!”

순간 주점 주인의 얼굴색이 날아갈 듯 환해졌다. 손님들도 당연히 좋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누군가는 친구와 가족들까지 불러와야겠다며 얼른 주점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했다.

“무섭게 생긴 나리. 나도 속으로 쩨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취소하겠습니다!”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내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저걸 보라며 턱짓을 했다.

“눈에서 독기를 조금만 빼라. 보다시피 인심을 얻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저들은 네게 마음을 연 것이지, 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내가 시끌벅적한 주점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독선적으로 생겨서는, 의외로 소심하구나.”

“네가 없었다면 저것들이 내 근처에나 다가왔겠느냐.”

솔직히 사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나는 혀를 찼다.

“뭐, 좋다. 이거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사교성부터 길러줘야겠군.”

“며칠 전만 해도 두 번 다시 얼굴도 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가 오늘처럼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매일같이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닐 수도 있지.”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내가 숨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사내의 표정이 강렬했다. 그가 숨 쉬는 것을 멈추는 순간 주위의 시간까지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내가 고개를 삐뚤게 들어 날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냐?”

사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는 다소 기괴할 정도로 입꼬리를 한껏 위로 끌어올렸다.

“기가 막혀서 그랬다.”

틀림없이 신분이 높은 자일 텐데 강아지처럼 데리고 다니겠다는 말이 기가 막힌다는 뜻일까.

“죽어라 쫓아다닐 땐 언제고, 나는 전혀 강요할 생각이 없다.”

나는 손사래를 치고 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앉았다. 주점 주인이 내온 술병을 통째로 들고 목구멍이 화끈거릴 때까지 쭉 마셨다. 조금 품위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동안 술을 즐기다가 문득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거 양심에 좀 찔리는걸.”

지스카르가 생각나서 푸른색 술병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에 오기 직전에 놈의 약점을 긁어서 아주 복장을 확 뒤집어놓고 왔다. 그래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떠들었더니 괜히 양심의 가책이 생겼다.

“무슨 이야기지?”

사내가 내 말에 관심을 표했다. 나는 실없이 웃으면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사실은 어떤 놈과 대판 싸우고 나왔는데 그게 마음에 좀 걸려서.”

“누가 널 거슬리게 하느냐? 내가 죽여줄까? 누구인지 이야기해 보아라.”

사내가 바 테이블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말했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살기가 느껴진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내는 지금 진심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처벌을 받지 않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을까. 새삼 그의 신분이 더욱 궁금해졌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말싸움을 좀 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술병을 들어 병째로 한 모금 마셨다. 근래 들어 지스카르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것이 전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다 미운 정이 들어 곁을 내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 그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다 보면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 녀석 쓸데없이 진지하고 우중충해서는…….”

멍하니 지스카르의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뚫을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유난히 서늘했다. 사내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녀석이라는 건, 누구냐?”

“왜? 질투라도 나서?”

사내는 감정의 변화가 극적인 자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그의 질문을 넘겼다.

사람들이 귀족 나리 하면서 주위로 몰려들어 자기들이 술을 따를 테니 한잔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한동안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맥스 경과 함께 미첼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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