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31/43)

6.

스트라스의 황제, 에드리히가 나타나면서 사실상 연회는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찜찜한 기분으로 미첼 아카데미를 떠나갔다.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회장에 남았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지스카르와 에드리히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아젤로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레이언 대공 전하!”

“무슨 일이냐?”

아젤로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추라고 눈치를 주었다. 중요한 용건이라면 자리를 옮길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벼운 혼란 상태에 빠진 아젤로스는 내 생각을 전혀 읽지 못했다.

“당신이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 전하의 친자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순간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경직시켰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냐!”

“폐하의 친위기사들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한두 명이 그리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당신이 전 황태자 전하의 핏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

아젤로스의 경악에 찬 외침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주위 반응에 신경 쓰며 쉬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리히나 체르도와 직접 맞부딪친 이상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 차치하고 일단 얼굴이 똑같이 생겼으니까.

“폐하께서는 당신이 스트라스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건 또 무슨…….”

“당신이 스트라스의 황족이라면 스트라스로 복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대공 전하! 당신은 정말로 스트라스인입니까?”

그때 시라크가 나타났다. 그는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노예 따위일 리가 없다고요.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의심이 들기는커녕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는군요. 스트라스의 황족이었단 말입니까?”

시라크는 엘 파셔의 폐황태자다. 그의 말은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젤로스가 제기한 가능성을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젤로스와 시라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해서 주위에 상당수의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그때 에드리히가 나타났다. 뒤늦게 그의 등장을 알아챈 사람들이 황급히 물러서다가 서로 부딪쳐 넘어지기도 했다.

에드리히는 사람들이 뒤엉키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내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폐, 폐하.”

아젤로스도 뒤늦게 에드리히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에드리히는 그를 아예 없는 인간 취급하며 지나쳐 버렸다. 무시당한 아젤로스는 익숙한 일인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 시라크가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도 아비에게 홀대받은 적이 있었기에 시선이 떨렸다.

가까이 다가온 에드리히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불편한 기분에 휩싸여 있다가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아젤로스를 가리켰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네 아들이 바로 옆에 있다만.”

에드리히가 그제야 자신의 아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젤로스로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게냐?”

그는 애초에 아젤로스가 미첼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투였다. 지스카르도 시라크를 홀대했으나 그건 외척을 축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살려주고 뒷배까지 봐준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반해 에드리히는 정말로 자기 아들에게 관심조차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내 아젤로스에게 흥미를 잃고 다시 날 보았다.

“짐이 황제임을 알고도 여전히 거리낌이 없구나.”

에드리히는 내 말투를 지적하고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눈앞의 사내는 스트라스의 황제이며 에드리히였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제가 미처 황제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사죄를 청하려는데 에드리히가 내 턱을 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해라. 짐은 네가 건방진 것이 마음에 들어.”

그는 장난감 굴리듯 손끝으로 내 턱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순간 에드리히의 뒤쪽에 서 있던 체르도가 정색을 하며 외쳤다.

“폐하! 그만두십시오!”

“뭘 그만둬?”

에드리히가 눈동자만 돌려 체르도를 노려보면서 낮게 물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

체르도는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결국엔 어금니만 빠득 깨물었다. 에드리히가 잠시 체르도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동안 턱 끝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옆으로 뿌리쳤다.

“건방진 것이 좋다 하니 최소 사석에서는 그쪽 바람대로 해주지. 특이한 취향을 가졌군, 고맙게도.”

주위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황제가 그리하라고 허락했다지만 내 행동은 허용 기준을 한참 넘어 있었다. 특히 아젤로스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날 만류했다.

“그, 그만두십시오, 대공 전하!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결코, 폐하께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아젤로스가 같은 단어를 거듭 사용하며 경고를 했다. 공포에 서린 목소리가 에드리히가 얼마나 두려운 아비였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에드리히는 뿌리쳐진 손을 털면서 웃기만 했다. 그의 너그러운 반응에 아젤로스는 뒤늦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에드리히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내게만 대우가 다른지 대강의 이유는 좀 알 것 같았다. 내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에드리히를 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엔 목구멍 언저리까지 올라온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내가 알기로…… 스트라스 황제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내 말을 들은 에드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옆에 있는 아젤로스의 머리채를 쥐고 난폭하게 위로 잡아당겼다. 아젤로스가 에드리히의 손에 끌려오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금발이었지. 이것처럼 뿌리 쪽에 붉은 기가 있는.”

“무슨 짓을……!”

그의 난폭한 행동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지만 지금 그가 머리채를 잡은 사람은 그냥 지나가던 타인이 아니라 친아들인 아젤로스였다. 에드리히는 느긋하게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아젤로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것을 시라크가 다급히 부축해 주었다.

“어린 시절에 금색을 띠던 머리카락이 커가면서 갈색,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진짜 금발이 아니지. 너와는 다르게 말이다.”

에드리히가 눈짓으로 내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데 등줄기로 조용히 소름이 돋았다. 스스로 담대한 편이라고 자신하는 내가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에드리히는 두렵고도 위협적이었다.

에드리히는 조그마한 강아지처럼 귀엽고 수줍은 아이였다. 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정말로 에드리히란 말인가?

“아침에 거울을 봤다가 턱 끝에 수염이 자라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나?”

에드리히가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서 답을 미루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은 그랬던 적이 있다. 수염이 자란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의미이다. 너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만, 레브노아드 형님은 황위 계승에 방해가 되는 황족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짐이 나이를 먹고 키가 커서 어른이 되어버리면 레브노아드 형님이 이놈도 위협이 되겠구나 하고 판단해서 짐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수염을 없애버리고 제발 어른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곤 했었지.”

그는 마지막에 피식 실소를 덧붙였다.

“아침에 일어났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셀 수도 없다. 혹시 키가 컸을까 봐. 이 팔에 근육이라도 생겼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지, 그 기분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지.”

“…….”

에드리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이를 드러내 희게 웃었고 나는 경직되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으나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그때 기사들이 길을 열고 그 사이로 지스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뭘 하다가 온 것인지 그는 에드리히보다 조금 늦게 연회장에 당도했다. 양측 황제가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그 긴장감이 대단했다.

“기껏해야 이런 이야기나 듣자고 끝까지 중립국에 남아 있었던 것인가?”

지스카르가 나를 보며 나지막하게, 노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몇 번이나 엘 파셔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내가 그 요구를 무시하고 이곳에 남았다. 이것이 그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스카르는 시선을 돌려 에드리히를 보았다.

“그쪽도 이해 불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 자신이 겁쟁이였다는 이야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가.”

“까마득한 옛날 일인데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느냐. 네놈도 똥오줌을 가리지 못해 엉덩이에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에드리히는 웃는 낯으로 마치 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레브노아드 형님이 죽자마자 단숨에 수십 센티나 키가 컸다. 뼈대도 굵어지고 얼굴 골격까지 변하더군. 짐이 무의식중에 오라의 힘으로 전신의 뼈를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짐은 그때 이미 오라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거든.”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옛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어린아이 같기만 한 에드리히가 언제쯤 어엿한 어른이 될지 궁금해했다. 그 답을 지금 에드리히가 알려주고 있었다.

정체불명이던 사내가 에드리히임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제대로 그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내가 알던 유약한 에디와 어딘가가 닮아 있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무의식중에 그에게서 에드리히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러했다. 그래서 갑자기 에드리히가 나오는 옛날 꿈을 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마치 짐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에드리히가 날 내려다보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충 대꾸했다.

“……그냥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누구에게?”

“그쪽이 알 것 없을 텐데!”

더 참지 못하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궁지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에드리히는 무척 여유작작했다.

“형님에게, 네 아버지에게 들었느냐? 아니다, 네가 태어날 무렵엔 이미 형님은 사망한 상태였을 텐데. 형님이 남긴 문서라도 있는 것인가?”

“그쯤 하시지. 나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그럼 뭐냐.”

에드리히가 고개를 모로 들며 물었다.

“그럼 대체 너는 뭐냐, 이 말이다.”

뭐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것인가?

곁에서 지스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꼴이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 같지 않은가.

“에드리히 반 스트라스. 너는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를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를 만나서 반드시 오해를 풀겠다고 큰소리를 쳤지. 무슨 수로 오해를 풀겠다는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지스카르는 지금 내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겼거나, 또는 안타깝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다. 나를 수렁에서 꺼내주기 위한 목적 외에는, 지스카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오해를 풀어보라는 말을 꺼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에드리히의 대답에 주목했다. 오해였다는 것이 진실이기를 나는 분명히 기대하고 있었다. 에드리히는 당당하게 바로 대답했다.

“물론 오해를 풀어야지. 형님을 독살한 것은 짐이 아니라 캘러웨이 대공이었다. 형님이 죽으면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스카르는 잠시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더는 할 말이 없는가?”

“그런데?”

“그쪽이 좀 더 성의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결백을 증명할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다.”

“이게 전부인데 무슨 성의를 더 보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리고 성의를 보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스트라스의 황족이라고 판명된 이상 그는 스트라스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곳에 모인 모든 구경꾼이 그를 형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핏줄이라는 증거를 계속 흘리고 다니면서, 뭐가 ‘그의 아들이 아니다’냐?”

에드리히가 당장이라도 내 팔을 낚아챌 기세로 다가왔다. 그를 뿌리치는 것은 너무 간단하다. 나는 최초로 4중 영창에 성공한 마법사이며 이 손 안에 마정석이 있는 한 단신으로 날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단언하겠다.

하지만 에드리히를 보고 있노라면 허탈함 때문에 자꾸 힘이 빠졌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오며 에드리히의 팔을 옆으로 쳐냈다. 그의 방해로 에드리히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거기서 비켜!”

에드리히가 여과 없이 살기를 뿜어내며 크게 소리 질렀다. 상대가 엘 파셔의 황제든 뭐든 전혀 상관치 않는 모습이었다.

“평생을 그따위 천박한 태도로 일관해 왔느냐! 그런 식으로는 그가 실제로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핏줄이라 해도 결코 네 요구에 따라줄 일이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도 언성을 높이고 크게 분노를 드러냈다. 어느 쪽도 쉽사리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둘은 모두 대제국의 황제였고 대륙의 반절을 지배하는 절대자로 단 한 치도 먼저 양보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스카르를 노려보던 에드리히가 불현듯 크게 깨달은 얼굴로 목을 울리며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바로 네놈이었군! 전에 말하던 ‘그 녀석’이라는 것이!”

그때였다.

체르도가 주먹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전하!!”

그의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애절했다. 그가 날 통해서 십수 년 전에 죽어버린 레브노아드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음성이 심장을 크게 흔들었다.

“전하! 당신께서 계실 곳은 엘 파셔가 아닙니다! 당신은 스트라스로 돌아오셔야만 합니다!”

“엘 파셔의 대공이 어째서 스트라스에 가야 한단 말인가!”

체르도의 외침에 대응한 자는 크리스티안이었다. 체르도가 그를 노려보며 크게 노성을 질렀다.

“그 입 닥쳐! 네놈이 뭘 안다고 끼어든단 말이냐!”

“적어도 그쪽보다는 많은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는 그 헛소리를 들어주지 못하겠군!”

크리스티안과 체르도가 거의 동시에 검집 위에 손을 올렸다. 황제를 보호하고 상황을 수습해야 할 친위대장들이 먼저 칼부림을 시작할 기세이다. 그들을 주축으로 양측의 기사들이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입술 사이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스카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대소동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이 크구나. 그만 돌아가자.”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로군.”

다행이라는 말과 달리 지스카르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에드리히와 체르도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 숙소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애먼 머리카락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중요한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에디가 제일 먼저 내 양친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절대로 두 분이 이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해! 이대로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레브노아드 황태자’와 외도를 한 것이 된다. 하아, 나랑 눈이 맞아서 날 낳았다는 소리가 되는 건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억울하실 테고, 아버지도 충격을 받으실 테지.”

생각해 보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래서야 웃어야 할지 인상을 써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그때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스트라스의 황제와 이야기를 나눈 직후에 바로 사람을 보내서 조치를 취해놓았다. 네가 유일하게 취약한 부분이 양친에 대한 것이니까.”

“…….”

멍하니 지스카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회장에 늦게 도착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가. 신중한 성격의 지스카르는 때때로 놀랄 만큼 배려가 깊었다. 판단력도 좋아서 내가 지적할 것도 없이 알아서 문제를 찾아서 해결해 버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며칠 더 중립국에 머무르겠다…….”

쾅!!

지스카르가 허리춤에서 풀어내던 검을 거칠게 구석에 집어 던졌다. 녀석이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분노가 뒤섞여 얼굴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두려우냐? 내가 에드리히를 쫓아서 스트라스로 떠나버릴까 봐?”

지스카르는 차갑게 대꾸했다.

“네가 스트라스로 돌아가겠다고 할 리가 없다. 레브노아드의 아들이라는 말이 거창해 보이지만 너는 사실 전대 황태자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어중간하게 ‘전 황태자의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현 황제의 자식들이 너를 위협으로 판단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단순히 스트라스로 넘어가는 일조차도 번거로울 것이다. 엘 파셔에서 작위까지 받았던 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러워질 테니. 네 존재는 스트라스에 분란밖에 되지 않는다. 네가 스트라스에 해가 되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나는 스트라스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리할 수가 없어.”

“돌아가고 싶어도?”

지스카르가 이를 꾹 깨물었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스트라스로 떠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스카르가 이리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당장 중립국을 떠나라. 사태가 더 복잡해지기 전에!”

지스카르가 언성을 높였다. 서둘러 엘 파셔로 돌아가라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가 에드리히와 마주치고 레브노아드의 아들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지스카르의 귀환 요구를 거부했다.

“에드리히가 정말로 날 죽였는지, 예전에 온순했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는지, 전부 다 알아야겠다. 의문을 풀기 전까지 중립국을 떠날 수 없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일을 파헤쳐서 무엇하느냐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따위 말, 진심일 리가 없지 않으냐?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냥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겠다.”

지스카르가 거칠게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자의 앞에서 제대로 대꾸도 못 한 주제에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것이냐. 너는 친족의 문제가 걸리면 한도 끝도 없이 약해진다. 네 양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자의 앞에서도 어수룩하게 굴 것이냐? 그자는 네 양친과는 달라!”

“아까는 그저 당황했을 뿐이다. 더는 그렇게 간단히 허점을 보이진 않아. 그리고 혹여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그렇더라도 나는 전부 알아야겠다. 너도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지 않으냐. 내게도 그런 것이 있다. 내게는 혈육이 바로 그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에디가……!”

에드리히!

그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심장이 꽉 죄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지스카르는 어깨를 놓고 날 밀어냈다. 내가 에드리히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립국을 떠나라, 레이!”

“당분간 중립국에 머물겠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눈을 퍼렇게 뜨고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멋대로 들끓는 감정을 수습할 수가 없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잠시 딴 곳을 보았다. 바깥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태양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시간이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치며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할 거지? 빨리 끝내.”

순간 지스카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끔찍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고통스러운 기색이 완연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하고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스카르!”

일부러 소리를 질러 떠나려고 하는 그를 붙잡았다.

“도망치지 마라. 어차피 내가 없으면 잠시도 못 견디는 주제에!”

떠나려고 하던 지스카르가 거칠게 되돌아와서 내 팔을 쥐었다.

“그래, 짐은 너 없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네 말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아라……!”

지스카르가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곧장 나를 침대까지 끌고 가서 내동댕이쳤다. 그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침대가 충분히 푹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베개 위에 머리를 파묻고 끙, 하고 한숨을 토하고 있는데 침대 위로 올라온 지스카르가 다시 팔을 잡아당겨 날 일으켰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다가 그냥 힘으로 뜯어서 그대로 옷을 벗겨냈다. 이어서 허리를 붙들고 바지까지 벗기기 시작했다. 혼자만 헐벗은 것이 부끄러워서 그의 가슴팍을 붙들었다.

“너도 벗어.”

지스카르는 알몸이 된 나를 그냥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허리춤을 풀어서 성기를 끄집어냈다. 만지거나 자극해 주지 않아도 저 묵직한 살덩어리는 잘도 내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스카르는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입구에 맞추었다.

“잠깐, 향유를…….”

나는 몸을 비틀며 침대맡 서랍을 쳐다봤다. 그곳에 밤일을 위한 윤활유가 상비되어 있었다. 지스카르가 양쪽 팔목을 잡아 침대에 짓눌렀다. 향유도 없이 애무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성기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저항이 심해서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지스카르는 잠시 자세를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힘으로 성기를 끝까지 박아버렸다.

“으윽!”

나는 신음을 흘리며 팔에 힘을 주어 저항했다. 지스카르는 팔목을 꺾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허리를 강하게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섭게 화가 나 있었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나를 범하는 데 쏟아부었다. 놈이 억지로 성기를 쑤실 때마다 마른 구멍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고통을 호소했다.

이래서야 충분히 전희 단계를 거친 다음에 시작해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을 뻑뻑한 상태로 감당하자니 숨이 턱턱 막힌다. 거친 마찰감과 고통으로 인해 등줄기와 사타구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를 악물고 좀 더 참아보다가 결국엔 통증을 호소했다.

“헉, 죽겠어! 그만……!”

“겨우 이 정도로 죽는다는 소리를 하느냐. 너는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해!”

지스카르는 나를 위한 배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한 성교가 어떤 것인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성기를 완전히 바깥으로 쑥 빼냈다가 단숨에 구멍 끝까지 찍어 넣었다. 퍽 찍힐 때마다 흉기에 찔린 것처럼 등허리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크윽! 으!”

과격한 행위에 전신이 크게 튕겨 올랐다. 손끝 발끝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두 팔이 붙들려 있었기에 발로 아등바등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그때 갑자기 움직임이 멈추었다.

“레이…….”

지스카르가 쥐어짜듯 날 부르며 이를 악물었다. 크게 지친 표정이었다. 매번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덤벼들고 있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녀석은 날 괴롭히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날 짓밟고 자기 욕심만 채워봤자 하나도 좋지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그가 아프게 움켜쥐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놈이 또다시 나를 두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자유롭게 된 손으로 지스카르의 옷깃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나도 모르게 에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에드리히는……, 에디는 수많은 황족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죽이지 않았던 아이다.”

하지만 그 아이조차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매일 아침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나는 정말로 어렵사리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형제들을 너무 많이 죽였어…….”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반대로 내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싶지만, 실은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여버린 형제들의 흔적을 보면 가끔 아찔해질 때가 있었다.

그때로부터 벌써 몇 년이나 시간이 흘렀던가. 그런데도 그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다. 가슴이 아프다. 이러다 눈물이라도 쏟아버릴 것 같았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전에 지스카르가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등 뒤로 손을 넣어 목덜미를 감싸고 허리를 바짝 당겨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 어린애 대하듯 눈과 뺨에 뽀뽀해 준 뒤에 입술을 뜨겁게 겹쳤다. 혓바닥이 뒤엉키자 바짝 마른 입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언제부터 녀석과 키스하는데 이렇게 익숙해진 것인지 상냥한 입맞춤이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다. 지스카르라면 이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무뚝뚝한 겉모습과 달리 다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키스가 끝나자마자 나는 봇물이 터진 듯 스트라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녹색 들판이 펼쳐진 스트라스가 그립다. 체르도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시간이 얼마나 오래 흘렀는지, 그를 보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겠구나. 나는 그분의 임종도 지키질 못했다.”

“레이,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라.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너에게 이야기할 테니.”

나는 지스카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스카르가 웅크리고 있는 내게 키스를 했다. 귓가에다가, 이마 위와 눈가에다가. 그다음엔 입술에.

지스카르가 입술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아래로 짓누르는 만큼 강하게 입술을 빨아당겼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그에게 잡아먹히는 상상을 했다. 목덜미부터 점차 전신의 힘이 빠져나갔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만지던 손으로 구멍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가락 두 개가 살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좀 전에 지독하게 당한 탓에 구멍이 쓰라렸다. 그는 아파하는 나를 위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천천히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수치심과 묘한 흥분이 몸을 적셨다.

“흐…….”

키스를 끝내고 달뜬 숨을 흘렸다. 지스카르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아주 가까운 곳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안을 훑고 있었다.

“아.”

엉덩이를 찌르는 자그마한 자극에 살짝 소리를 냈다. 지스카르가 귀신같이 그 반응을 알아채고 거칠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구멍을 쑤시며 내가 반응했던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해 갔다.

녀석이 손가락으로 즐기는 법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순식간에 흥분해 버렸다. 쾌락에 허덕이며 허리를 비틀고 몸부림을 쳤다. 지스카르는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끌어안고 자기 체중으로 짓눌러서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개를 가로젓는 것뿐이다.

손가락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다시 내벽을 어루만졌다. 속살이 그의 손가락을 꽉 물고 흠칫거리며 죄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마치 독촉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지스카르는 달래듯이 혀를 내서 눈꺼풀을 핥았다. 약한 살을 쪽 빨아주는데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야해졌다.

지스카르는 서두르지 않고 안쪽을 더듬으며 약한 부분을 찾아냈다. 내가 반응해 주기만을 신중하게 기다리다가, 때가 되자 다시 손가락을 사납게 찔러 넣었다. 너무 흥분이 되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주 정신을 놓고 느끼고 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지스카르에게서 이길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전신에 힘을 바짝 주고 발버둥을 치려 했다.

지스카르는 끝까지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온몸을 속박하고 손가락으로 내벽을 거칠게 쑤셔대며 사람을 숨도 못 쉬게 수치와 쾌락의 늪으로 완전히 집어넣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만 비틀며 가끔 늪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

새된 음성으로 지스카르의 이름을 불렀다. 지스카르에게 가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사타구니의 살이 팽팽하게 땅기는 것으로 짐작건대 거기가 완전히 발기했음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하면 그대로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지스카르가 등 뒤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물러났다. 녀석이 이제야 옷을 전부 벗기 시작했다. 탈의를 끝낸 다음엔 양쪽 팔목을 하나씩 잡아서 침대 위에 강하게 짓눌렀다. 아까 거칠게 당할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입구에 뜨거운 살덩어리가 닿았다. 지스카르의 성기가 직접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 아아…….”

크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구멍으로 성기를 한계까지 삼켰다. 나는 엄청나게 큰 성과라도 낸 것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때 지스카르가 약간 몸을 세웠다. 그의 전신이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온몸에 힘을 주고 몸뚱이 가장 깊숙한 곳에 가해지는 쾌감에 반응했다.

“하아, 레이…….”

지스카르가 쾌락에 잠긴 목소리로 한숨을 토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여러 가지 뜻을 담아서 내 이름을 부른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낯간지러운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빡빡하게 들어찬 성기가 구멍 가장 안쪽을 계속 찍어댔다. 내벽과 사타구니가 뜨겁다. 허리까지 같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점점 더 기분이 고양되어 갔다. 급기야는 좀 더 강하게 찍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스카르. 아, 지스카르…… 으읏!”

지스카르가 손목을 놓고 손가락을 교차해서 손을 붙잡았다. 나는 어색해서 잠시 그의 손을 마주 잡을지 망설였다. 하지만 온갖 못 볼 꼴까지 다 보여줬는데 손을 잡는 것 정도야 어떤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윽고 절정에 도달했다. 팽팽하게 발기해 있던 성기가 그간 참았던 정염을 전부 터뜨렸다. 지스카르도 성기를 가장 안쪽까지 바싹 밀어 넣고 정액을 쏟아냈다. 나는 바짝 엉덩이를 조이며 그가 마지막까지 사정하는 것을 느꼈다.

“흐윽.”

사정의 여운이 남아서 구멍과 아랫배가 저릿하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성기를 건드리지도 않고 구멍을 자극한 것만으로 방금 사정을 해버린 것이다.

지스카르가 바로 누워 있던 날 엎드리게 한 뒤 자기 무릎 위에다가 앉혔다. 성기는 여전히 몸에 박힌 채였다. 두꺼운 기둥이 배 속을 꽉 짓누르는 기분이라 몸을 약간 비틀고 있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등 뒤에서 내 뺨에 키스를 하면서 양손으로 내 성기를 움켜쥐고 조물조물 주물렀다. 이번엔 구멍보다 성기를 집중적으로 자극해 줄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좀 전의 아쉬움을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음, 으으.”

슬그머니 쾌감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지스카르의 다리를 꼭 붙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몽롱한 시야로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스카르……. 네가 생긴 것과 다르게 다감한 것이 좋다. 네가 정말로 싫었다면 내전이 잠잠해지자마자 어디론가 떠나버렸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내 말이 갑작스러운 모양이었다. 성기를 자극하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잠시 뒤, 다시 내 것을 만져주며 그가 대답했다.

“그래, 그나마 기분전환은 되었다.”

대답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몸을 일으켜서 뒤쪽으로 팔을 뻗어 지스카르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뒤를 돌아보고 그에게 키스를 했다. 혓바닥을 살짝 빨아서 내 쪽으로 끌어온 다음 이로 세워서 말캉한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입술을 핥으면서 떨어져 나오니 지스카르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러지?”

“최근 네 쪽에서 먼저 해주는 일이 잦다고 생각되어서.”

“네가 자꾸 투정을 부리니 그걸 달래주자면 어쩔 수가 없지.”

“……때로는 투정을 부려볼 만도 하구나.”

지스카르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채 어린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네가 원래 잘 웃는 녀석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게 얼마 만에 웃는 것이냐.”

“그걸 바란다면 짐의 명령을 하나라도 따르는 것이 어떤가. 오늘 당장 중립국에서 떠나거라.”

“네 명령 같은 걸 이 몸이 따를 것 같으냐.”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지스카르도 낮게 한숨만 쉬는 정도로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그가 코끝과 입술로 뺨을 살짝 비볐다. 한편으론 농밀한 손길로 성기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벌리며 뜨겁게 한숨을 토하자 자기 입으로 내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더 지스카르와 뒤엉켜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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