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일어나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고요한 분위기가 머리를 식혀주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지스카르가 잠에서 깼는지 내게 손을 뻗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좀 더 쉬지 않고.”
고개를 돌려 지스카르를 내려다보았다.
“오전에 예술학과에 개설된 과목을 청강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 수업을 듣겠다는 것인가.”
에드리히가 나를 레브노아드의 친자로 단정하고 스트라스로 데려가겠다는 뜻을 대놓고 표명했다. 그 파장이 적지 않을 텐데 중요하지도 않은 수업을 들으러 가겠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기색이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부리는 게 내 방식이지. 너야말로 쉬었다가 나오너라.”
하인을 불러 따뜻하게 덥힌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지스카르의 어깨를 꾹 눌러 못 일어나게 하고 수건을 들어 그의 눈가에 올려주었다.
“나도 가끔씩은 널 애 취급해 주고 싶어서 말이다. 네 녀석 따지고 보면 나보다 여덟 살이나 연하인 주제에.”
내가 말해놓고도 웃음이 나왔다.
“하긴 이런 꼴로 너보다 연상이라 하기는 무리가 있지. 나도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군.”
황태자로 살다가 독살당한 뒤 노예 신분으로 또다시 긴 시간을 살았다. 하지만 환생 후에 보냈던 세월을 그대로 나이로 더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갓 태어나서 손가락을 쪽쪽 빨 때, 옆집에 사는 베티와 어울려 산과 들을 뛰어다닐 때 성숙한 성인으로서 정상적인 시간을 보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를 보면 나이를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려진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진짜로 10대 청년이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이들은 도저히 또래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스카르나 크리스티안처럼 나이가 있는 자들이 훨씬 더 친숙하고 대화하기 편했다.
뭐, 그런 것이야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나는 수건 위에 손을 올리고 지스카르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지스카르는 노곤한 분위기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나도 한 번 겪어봐서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안다.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바닥에 발을 대자마자 아랫배에 손을 올리며 끙 신음을 흘렸다.
기척을 느낀 지스카르가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있어. 그냥 어젯밤에 너무 해서 그런지 좀.”
지스카르가 수건을 옆으로 치우며 날 바라보았다. 간밤에 날 짓누르고 괴롭힌 것이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다.
“많이 아팠나.”
“당연히 아프지!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폭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아니면 좋았는가?”
내가 살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지스카르 이놈이 뻔뻔하게도 질문을 바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에 했던 것 중에 가장 좋았다. 항상 관계하는 도중에 박차고 나가고 싶은 기분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할까. 하지만 내 입으로 도저히 그런 소리는 못 하겠다. 나는 괜히 인상 한번 써주며 말했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하인이 준비해 놓은 옷을 직접 몸에 걸쳤다. 지스카르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좀 더 쉬라는 내 말을 따르는 것일까. 녀석이 잠시도 미적거리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행동이 걸렸다.
“기어코 나갈 셈인가.”
지스카르가 불쑥 말했다. 셔츠 깃을 바로 세우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이라면 충분히 내 뜻을 알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스트라스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나를 향한 가벼운 불신, 그리고 초조함이 전해졌다.
나는 침대 쪽으로 되돌아가서 지스카르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푸른색 눈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와 입을 맞춘다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중간에 잠시 망설였으나, 그대로 몸을 낮춰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살짝 머금자 지스카르가 침대를 짚고 상반신을 일으키며 적극적으로 키스를 해왔다.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강하게 입을 빨아당겼다. 금방 목구멍까지 뜨겁게 달아올라서 숨을 몰아쉬며 키스에 열중했다. 이젠 진짜로 키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지스카르가 평소에 하던 짓을 흉내 내서 그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 정도에서 풀이 죽으면 곤란하지. 이 몸을 가지려고 한 이상 앞으로도 고생길이 훤할 테니까.”
지스카르는 부정하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바로 방을 나섰다.
* * *
대공가의 기사 맥스 경이 평소처럼 묵묵히 고개를 숙여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아도 아마도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난데없이 내가 스트라스 황족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테니까.
어제 막 중립국에 도착한 엘 파셔의 기사들도 나를 보며 어색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숙소 입구까지 나갔다. 지스카르가 말한 대로 체르도 경을 비롯하여 스트라스의 기사들이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체르도는 우비를 벗고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기사들도 우비를 벗고 일제히 예를 표했다. 금방 머리와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버렸지만 누구도 그런 일엔 상관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주위는 유난히도 조용했다. 스트라스에서 도착한 기사들의 수는 모두 다섯. 그들 모두가 입을 꽉 다물고 한참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구성이 묘하군.”
한참 만에 체르도가 이끌고 온 기사들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체르도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쪽은 가유트 백작 가문의 모시스 경이고, 다들 과거에 황태자 친위대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 아닌가. 황제께서 일부러 인원을 그렇게 뽑아서 내게 보낸 것이냐.”
눈이 마주친 모시스 경이 흠칫거렸다. 다른 기사들도 내가 시선을 줄 때마다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레브노아드를 빼닮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평정을 지키기가 어려운 듯하다. 체르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그런 건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금방 알 수 있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두 시간 안에 멈출 비가 아니었다. 우산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뒤늦게 나타났다. 체르도가 와 있다는 것을 빤히 알 텐데 크리스티안은 일부러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내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사죄를 청했다.
“대공 전하, 오늘 엘 파셔로 귀환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지스카르와는 이야기를 끝냈다. 평화회담이 제대로 끝나는 것까지 보고 중립국을 떠날 생각이다.”
“평화회담 때까지?”
“보다시피 분위기가 뒤숭숭하지 않은가. 이러다 회담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다.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봐야지.”
크리스티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체르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많이 피로해 보이십니다.”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체르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어쨌거나 피로해 보인다는 말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별문제는 아니고 어젯밤에 너무 뒹굴었더니, 조금 그렇군.”
“예……?”
“내가 대공이 된 배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중에 반 정도는 진실이다. 실제로 엘 파셔의 황제와 통정하는 사이니까.”
체르도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왜? 남색을 한다니까 충격이 큰가 보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전하의 사사로운 일까지 왈가왈부하겠습니까. 그렇게 주제넘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충직했던 그가 전생의 나를 대할 때처럼 정확히 선을 그었다. 황태자 신분이었던 나는 다소 독선적인 면이 있어서 신하들의 충언을 허용하긴 했지만 결국엔 내 뜻대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한창 일을 추진하는 와중에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던가.
“다만…… 그자는 적국의 황제입니다.”
체르도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의 입에서 나왔기에 ‘적국’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았다. 나는 엘 파셔와 스트라스 간의 대전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이다. 내가 손수 목을 날려버린 엘 파셔의 지휘관이 정확히 열셋이고, 한참 전장을 누비고 다닐 때는 엘 파셔 놈들을 산 채로 갈아 마셔 버리겠다며 이를 간 적도 있었다.
“적국인가. 그러나 체르도 경……, 나는 평생을 엘 파셔에서 살아왔다.”
크리스티안이 우산을 펼쳤다. 나는 그의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체르도도 우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티안이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나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체르도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떠돌 때도, 유흥을 위해 몰래 황성을 빠져나갈 때도, 언제나 한 몸처럼 나를 수행해 왔다. 그랬던 그가 나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체르도는 빗속에 우두커니 선 채 무용지물이 된 우산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때 지금까지 체르도를 무시하고 있던 크리스티안이 굳이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는 제가 보필할 것이니 경께서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비를 맞고 계시다가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경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그나마 이번에는 크리스티안과 체르도 둘 다 예를 지키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연장자이며 선배격 기사인 그에게 말을 높였고, 체르도도 직급이 같은 크리스티안을 존중했다. 하지만 날 두고 경쟁이라도 하는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나는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아니라고, 진짜로 둘을 불러놓고 한소리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강의실이 위치한 대학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체르도와 스트라스의 기사 넷이 따라오고 있었다. 던필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스트라스 황제 일행은 어떻게 이리 일찍 도착한 걸까요? 틀림없이 어제 출발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아베크 중립국 국경지대에 초대형 마법진이 숨겨져 있다. 아마 그걸 이용해서 단시간에 이동했을 것이다.”
그냥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꺼냈던 던필은 뜻밖에 내게서 대답이 나오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이내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스트라스 제도에서부터 아베크 중립국까지 거리가 얼만데,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마법으로 이동한단 말입니까? 스트라스가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겁니까?”
“전에 에브라함 요새를 무너뜨릴 때 이용했던 마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건설 조건도 까다로워서 평상시엔 효용성이 없는 물건이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식으로 사용해야 그나마 쓸모가 있지만, 마법진의 존재를 들킨 이상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군. 지스카르는 바보가 아니니까.”
이동 마법진은 내가 황태자 시절에 직접 고안한 비장의 한 수로, 언젠가 엘 파셔의 뒤통수를 칠 목적이었다. 아베크 왕국이 중립지대로 결정된 즈음에 신전을 지어주겠다는 명목으로 세간의 눈을 가리고 두 달여에 걸쳐 대대적인 공사에 착수하여 4중첩 이동 마법진을 완성했다.
황실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돈이 들었고, 공사현장을 숨긴다고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그걸 이렇게 날려먹을 거라곤 당시엔 상상도 못 했지.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고물로 전락해 버린 마법진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때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체르도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마법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이야기까지 해주셨단 말입니까?”
나는 고개만 돌려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쪽에 드래곤이라는 변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답은 마법밖에 없다. 대충 상상력만 동원해도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게 되어 있어. 실제로 엘 파셔 황제가 눈앞의 정황만으로 사태 파악을 끝내고 스트라스의 입김이 닿았던 국경 신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 뭐, 어차피 마법진을 쓰라고 명령한 사람은 에드리히일 테지만.”
에드리히가 아베크 중립국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 마법진 덕분인 것이 틀림없다. 그 행동에 거창한 목적 같은 것은 없고, 그냥 소문이 무성한 엘 파셔의 대공을 직접 확인하러 온 듯했다. 내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얼마나 닮았는지, 그런 것이 궁금했을 테지.
쏴아아.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목적지인 대학건물에 도착했다. 낯설기도 하고, 낯이 익기도 한 얼굴이 입구 근처 기둥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 에드리히가 날 보더니 살벌한 얼굴 위로 미소를 띠었다. 대제국의 황제답게 그의 뒤로 수십 명의 시종과 신하들이 따르고 있었다.
에드리히가 기다리고 있는 입구까지 바로 몇 걸음을 남겨두고 잠시 멈춰 섰다. 건물 출입구 앞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에드리히가 그 모습을 보더니 뒤편에 서 있는 시종에게 대뜸 명령을 내렸다.
“길을 만들어라.”
“예, 아…….”
“신통한 재주가 없으면 그 몸뚱이라도 사용해서 길을 만들란 말이다.”
우왕좌왕하던 시종이 황급히 앞으로 뛰어나와 물웅덩이 위에 넙죽 엎드렸다. 에드리히가 내게 손짓을 했다.
“건너오너라.”
“…….”
에드리히가 하는 짓이 매우 눈에 거슬렸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에드리히가 내게로 걸어왔다. 시종들이 황제의 머리카락에 물 한 방울이라도 묻을세라 커다란 우산을 세 개나 겹쳐서 폈다.
에드리히는 물웅덩이 위에 엎드려 있는 시종의 등을 짓밟고 섰다.
“건너오라고 말했다. 뭘 하고 있느냐?”
“사람을 밟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다.”
내 대답에 에드리히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하얗게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다리를 들어 시종의 뒤통수를 발로 짓밟았다. 물웅덩이 속에 머리가 처박힌 시종이 양팔을 버둥거렸다.
나는 확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팔을 떨쳤다. 얇게 벼려진 마력이 에드리히를 노리고 날아갔다. 에드리히는 몸을 젖혀 가뿐히 내 공격을 피하며 왼쪽 땅을 밟고 섰다.
“폐하!!”
“황제 폐하!”
황제가 대낮에 공격을 당하자 호위 기사들이 기겁하여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에드리히가 손을 들어서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그동안 시종들이 뒤늦게 황제를 쫓아가서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나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물웅덩이 위에 엎드려 있는 시종을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숨통이 트인 그가 연신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꼴 보기 싫으니 거기서 일어나라.”
시종은 웅덩이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야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 명령 따위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어나라.”
에드리히가 내 명령을 그대로 읊었다. 그제야 시종이 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물웅덩이를 걸어서 건물 안에 도착했다. 웅덩이가 제법 깊어서 바짓자락이 흠뻑 젖어버렸다. 에드리히가 젖은 부분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게 하라는 대로 하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시종을 보내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라.”
“음? 아직 시종 이야기냐. 얼마나 곱게 자랐기에 그렇게 마음이 여린 것이지?”
“네놈이 막돼먹은 거라곤 생각을 못 하는 게냐?”
나의 폭언에 주변에 서 있던 신하와 시종들이 몸을 흠칫거리며 굳혔다. 다들 거북이처럼 목을 웅크리며 황제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리히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내가 요구한 대로 시종을 보내주었다.
“이제 만족하느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위로 통하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이 3층에 위치해 있었다. 에드리히가 당연하다는 듯 나와 같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그가 갑자기 입가의 상처를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문득 궁금해지는군. 저 시종의 목을 잘라서 깜짝 선물로 보내주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날부로 나와 완전히 인연이 끊어진 것으로 알면 될 것이다.”
3층에 도착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에드리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랫사람을 개돼지 다루듯 하는 건 그만둬라. 살기를 죽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해! 역사상 폭군이 나라를 번영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시한 이야기로군. 짐은 나라가 대충 굴러가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이니까.”
에드리히가 다들 듣고 있는 앞에서 대놓고 태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포악함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이런 소리를 하고 다녀서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리가 없다.
“그런 것보다도, 네가 짐의 스승이라도 될 기세로구나. 짐이 뭣 때문에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네가 레비 형님의 아들이니까?”
에드리히가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짐이 언제까지 널 귀엽게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입매를 일그러뜨리자 입술 위를 가로지르는 큰 상처가 유난히 더 흉측하게 도드라졌다. 살벌한 분위기가 짧은 순간 극에 달했다. 나는 실소를 흘리며 살기등등한 그를 지나쳐서 먼저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내 사정을 봐주길 바라마. 내가 제법 귀엽게 생기지 않았느냐.”
뒤에 남은 에드리히가 문득 탄성을 흘렸다.
“대단하구나.”
그가 크게 감탄을 하기에 나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뭐, 내가 원체 겁이 없는 편이라.”
“아니, 기가 막힐 정도로 그와 똑같다는 이야기이다. 그 얼굴도, 말투도, 교만한 것까지도. 대단해! 정말로……!”
에드리히는 몇 번이나 거듭해서 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앞장서 가고 있는 나를 긴 다리로 따라잡았다. 에드리히의 기척에 신경을 쓰고 있다가 그의 곁을 바짝 뒤따르고 있는 젊은 기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평범한 체구에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그는 유곽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에드리히를 보필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에게 시선이 간 것은 그에게서 미세하게 마법적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계속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군.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냐?”
기사에게 관심을 보이며 손을 뻗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이가 내 행동을 막았다.
“전하! 신경 쓰시지 마십시오!”
체르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제지에 오히려 더욱 궁금증이 생겨서 다시금 예의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모시스 경이 나섰다.
“실력이 없어 마법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관심을 줄 만한 자가 아닙니다.”
“음.”
분위기로 보아 평범하게 진급을 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에드리히의 개인적인 결정으로 측근이 된 자인 모양이다. 에드리히는 뜻 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의실 앞까지 도착했다. 여태 묵묵히 뒤를 따르던 크리스티안이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강의실 안까지 호위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이신 에드리히가 문밖에서 기다릴 리 만무하고, 체르도를 비롯한 기사들도 호위 명목으로 그를 뒤따를 것이 뻔하다. 크리스티안이 스트라스 측 기사들을 경계하며 자신들도 함께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평소대로 시라크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바로 뒤편에 시립했다. 에드리히는 뒤쪽의 남은 의자에 다리를 모로 꼬고 앉았다. 그 뒤로 이십여 명의 기사들과 신하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시라크가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뻥끗거렸다. 그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이게 무슨……. 이런 곳까지 저 사람을 데려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자꾸 따라오는데 나라고 별수 있느냐.”
“자꾸 따라온다고요? 스트라스 황제가?”
시라크가 질렸다는 표정을 하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지도교수가 강의실에 도착했다. 오렌지색 곱슬머리를 엉덩이까지 기른 여교수는 스트라스 황제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에드리히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강단 위에서는 학생과 수업이 우선이라는 신념이라도 가진 모양이다.
그녀가 지난 시간에 들려주었던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직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악은 품위를 높이기 위해 귀족 계급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 중 하나다.
그렇다고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건 아니고, 사적인 자리에서 우아하게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즐기는 수준이다. 근래엔 집안에 아예 예인극단을 상주시켜두고 매일 음악을 듣는 일도 많다고 들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마친 그녀가 학생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서 노래를 시켰다. 에드리히의 시선을 의식한 학생들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악기를 배우던 학생들은 가장 자신하는 악기를 집어 들고 연주를 했다.
시라크도 예외 없이 교수의 지적을 받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한때 엘 파셔의 황태자이기도 했던 그는 스트라스 황제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 전하께서도 한 번쯤 노래를 불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여교수는 청강을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내게 노래를 시키지 않았는데, 하필 에드리히가 구경을 왔을 때 날 지목했다. 그녀는 그저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악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노래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드리히가 자세를 바꾸었다. 다리를 반대로 다시 꼬고 손깍지를 낀다. 몹시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에드리히가 흥미로워할수록 나는 얼굴이 찌그러졌다. 갑자기 시라크의 기분이 뼈저리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은 나긋하게…….”
나는 억지로 찜찜함을 털면서 여교수의 지도에 따라 노래를 시작했다. 에드리히뿐만 아니라 강의실 내 모든 사람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아주 따갑다. 노래를 반 정도 부르고 간주가 시작될 부분에서 손을 들어서 그만하겠다는 표시를 보냈다.
강의실이 아주 조용했다. 분위기만으로도 주위 반응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식상의 칭찬이라도 할 법한데 내가 시선을 주자 사람들이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나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기분이 더 나쁘다는 거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나의 불만에 던필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 그러니까 아주 못 부르는 건 아닌데, 이건 뭐랄까, 잘 부르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티안이 대답했다.
“사실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서툰 것이 있으시군요.”
“그분께서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본 모양이군.”
체르도가 크리스티안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크리스티안이나 던필과는 달리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 황태자 전하께서도 노래엔 영 소질이 없으셨네. 목소리는 다시없을 미성인데 말이야. 차라리 목소리도 별로였으면 사람들이 기대라도 하지 않았을 것을.”
곁에 서 있는 모시스 경까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목소리로 그렇게밖에 노래를 못 부르냐고 무안을 당하신 적도 있으셨지요.”
“그게 게일 교수가 했던 말이던가? 그날 이후로 꼬박 일 년을 음악 관련 책자만 봐도 성질을 부리곤 하셨지, 아마.”
“잠깐! 거기 네놈들, 어색하게 입 다물고 있지 말라고 했지, 이 몸 놀려도 좋다고는 하지 않았다.”
체르도와 모시스 경의 발칙한 태도를 지적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외에도 미소를 띠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에드리히를 수행하는 자들 중에서 나에 대해, 레브노아드 황태자에 대하여 아는 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기존의 학생들, 그리고 크리스티안과 던필만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유난히 좋지 않았다.
그때 에드리히가 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훌륭한 노래 아주 잘 들었다.”
“시끄럽군. 노래를 듣고 싶다면 궁정 가인이라도 부르든지 해라. 애초에 이 몸이 왜 네놈들을 위해서 꾀꼬리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큭, 그것도 그렇군.”
에드리히가 낮게 웃으며 내 말에 수긍하더니 앉은 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불렀던 곡을 직접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그를 주목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황제가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그가 의외로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르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깊이 울리던 목소리가 고음부에 이르러 시원하게 뻗어 올라갔다. 몇몇 이들은 가볍게 전율을 느끼며 몸을 떨기도 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체르도가 하프를 들고 있던 여학생에게 다가가서 다른 악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소형 치터를 집어 들었다. 그는 에드리히의 노래에 맞춰서 치터를 잠시 치다가 중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에드리히는 힐끗 체르도를 보았으나 이내 개의치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 미리 준비하고 온 것처럼 둘의 노래와 연주가 잘 어울렸다.
내가 한참 전쟁터를 돌아다닐 때였을 것이다. 황태자 친위대는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두드리며 낮 동안의 피로를 잊곤 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한 곡 뽑아보라고 명령하면 에디가 조심스럽게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는 수줍은 얼굴을 한 주제에 폭발적인 성량을 자랑하며 시원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체르도를 비롯한 기사들은 부피가 작은 악기들을 준비했다가 에디의 노래에 맞춰서 간단하게 연주를 했다. 이들과 어울려 그렇게 웃고 떠들던 날도 있었다. 나는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에드리히가 노래를 마쳤다. 여교수가 크게 감격한 얼굴로 열렬하게 손뼉을 쳤다.
“대단하십니다! 영혼까지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황제 폐하의 노래를 듣게 될 줄이야! 기사님께서도 연주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학생들과 강의실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과 다른 평가를 내렸다.
“중간에 몇 번이나 목소리가 갈라지더군. 영혼까지 울리기엔 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짐작건대 아주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것이지?”
에드리히에게 내 말이 맞지 않느냐며 눈짓을 보냈다. 혹평을 받고도 에드리히는 삐딱하게 웃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짐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만 노래하는데 그 사람이 오래전에 죽어버렸으니까.”
‘형님, 노래를 업으로 삼는 가인이 되고 싶습니다.’
갑자기 과거에 에드리히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괜히 생각이 복잡해져서 나는 애먼 머리카락을 조금 뒤적거렸다.
“뭐, 그쪽도 사정이 있을 테지. 그보다 한 곡 더 불러보겠는가?”
“노래는 뭣 하러? 목소리가 갈라져서 듣기 괴롭다며?”
“그렇게까지 말한 적 없다. 내가 언제 듣기 괴롭다고 했느냐?”
“그랬던가.”
에드리히가 입가에 손등을 대고 킥킥 웃었다. 그는 항상 삐뚤게 웃거나 조소만 지었는데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밝았다. 개구쟁이 소년과 같다고 할까. 에디도 아직 이렇게 웃을 수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반주를 해드리겠습니다.”
체르도가 먼저 연주를 시작했다.
“송구하오나 동참해도 되겠습니까.”
모시스 경이 양해를 구하면서 피리를 집어 들었다. 그를 시작해서 낯이 익은 기사 몇 명이 저마다 악기를 들었다. 시종 딱딱하게 기립해 있던 기사들이 갑자기 연주를 자청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이 왜 이러나 싶어 눈을 끔뻑거렸다.
에드리히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가끔 튀거나 갈라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목소리였다.
한 곡이 끝난 직후 나는 손가락으로 모시스 경을 가리켰다.
“모시스 경, 안됐지만 그쪽 연주는 진짜로 듣기 괴로울 수준이로군. 그만두는 게 어떤가?”
“으음……. 대공 전하, 저도 매우 오랜만에 하는 연주라 그렇습니다. 조금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걸 감안해도 도저히 못 들어줄 수준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때 에드리히까지 모시스 경을 타박하고 나섰다.
“옛날부터 한소리 해주고 싶었는데 경은 연주를 너무 못해. 앞으로 두 번 다시 악기를 들지도 마라. 어명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했다.
“옛날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는 차마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이제야 밝히는 것이고?”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 노래하는 것은 짐이란 말이다. 그가 끼어들어서 연주랍시고 훼방을 놓는데 짜증이 치밀어 죽는 줄 알았다.”
한때 친위대에 몸담았던 기사들이 그의 말을 듣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에드리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들 웃는 와중에 모시스 경만 죽을상을 하고 슬그머니 악기를 내렸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는 것인지…….”
체르도 경이 회한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수업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여교수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야 황제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녀는 진심으로 에드리히의 노래를 격찬한 뒤 강의실을 나섰다.
나도 책을 챙겨서 일어났다. 시라크에겐 오늘 하루 따로 움직이자고 언질을 해두었다. 시라크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스트라스 황제를 피해 얼른 강의실을 떠나버렸다.
“그만 가자.”
에드리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에드리히가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물었다.
“어딜 가자는 것이냐.”
“잠시 쉬었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 청강할 것이다.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날 쫓아다닐 생각일 테지?”
에드리히는 살벌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조소를 지었으나 결국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뜻에 따랐다.
* * *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에드리히는 늑장을 부리며 한참 떨어진 곳에서 느긋하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길가에 서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기분이 좋아 보시는군요.”
크리스티안이 날 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다. 오랜만에 그들을 만났음에도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유쾌했다. 하지만 엘 파셔에 적을 둔 주제에 스트라스인을 만나 즐겁다는 소리를 대놓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귀를 의식해서 적당히 대답했다.
“대충.”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크리스티안은 금방 내 말의 속뜻을 이해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며 시종에게 겉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내 뒤를 따를 때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시종이 바로 긴 옷을 꺼내서 대령했다. 크리스티안이 정중히 내 어깨에 옷을 걸쳐주었다. 체르도가 그 모습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크게 쌀쌀한 날씨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하께서는 추위를 싫어하십니다.”
크리스티안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고문을 당한 뒤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발작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열이 올라서 길바닥에서 실신을 해버리거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이 퉁퉁 부어오르는 식이었다. 어쨌거나 나 자신을 위해서도 후유증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진 어지간하면 몸을 사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체르도를 보며 당부의 말을 했다.
“전하께서 추위를 꺼리시는 데는 우리 쪽의 책임이 큽니다. 긴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날이 추워지면 주의를 기울이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전하에 대해서 충고를 들을 이유가 없소.”
체르도는 단호하게 그의 충고를 거절했다. 애초에 체르도에게 감정이 안 좋은 크리스티안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때 에드리히가 도착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그가 실소를 지었다.
“체르도 경, 그러다가 눈에서 불똥이라도 튀겠군.”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날 가리켰다.
“하긴 저렇게 똑같은데 흥분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가.”
“폐하! 물건을 가리키듯 전하를 지칭하지 마십시오!”
체르도가 감히 황제의 면전에서 크게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다. 체르도의 행동이 지나치게 무례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에드리히는 체르도를 내려다보며 삐뚤게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는 일단 별말을 하지 않고 갑자기 주위 사람들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다들 물러나라. 그레이언 대공과 할 이야기가 있다.”
“신이 함께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까. 방해되지 않도록 뒤를 따르겠습니다.”
체르도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경은 말이 너무 많아. 그걸 아는가?”
에드리히가 느슨하게 고개를 들고 살기를 흘렸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체르도의 언동이 과했다. 솔직히 이 중에서 가장 무례한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표정을 굳히며 체르도의 무례를 지적했다.
“체르도 경. 황제 폐하의 안전에서 무례가 지나치다.”
“…….”
체르도는 몸을 낮추며 물러섰다. 에드리히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나는 크리스티안과 던필에게도 먼저 물러나 있으라고 명했다. 크리스티안은 당연히 내 지시에 반발했다.
“대공 전하, 하지만…….”
“크리스티안, 난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걸 안 좋아한다.”
사람들을 전부 물린 다음 에드리히와 인적이 드문 오르막길을 걸었다. 바람이 의외로 쌀쌀했다. 나는 겉옷을 바짝 당겨서 입었다.
에드리히가 걸음을 멈추고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대학건물과 연구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든 호위와 시종이 길 아래쪽에 남았지만 그자만큼은 소리 없이 에드리히를 뒤따르고 있었다.
“체르도 경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저 기사는 들어도 된단 말인가? 어지간히도 그를 신뢰하는 모양이지?”
에드리히가 힐끗 기사를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아, 저 녀석은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밤에 날벌레가 자주 날아다니지 않는가. 거슬리거든 저것도 날벌레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라.”
“…….”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에드리히가 갑자기 딴 이야기를 꺼냈다.
“그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널 이렇게 내버려두다니 여유가 넘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그자’라는 말에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지스카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스카르가 에드리히를 경계하듯, 에드리히도 지스카르를 의식하고 있는 걸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본 화제를 꺼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그 팔찌, 형님이 가지고 다니시던 것과 형태나 구조가 거의 똑같군.”
에드리히가 왼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가리켰다. 나는 팔찌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팔찌를 참고했으니 당연히 똑같을 수밖에. 나는 4중 영창을 쓰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대량의 마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팔찌에 마정석을 수십 개씩 박아서 사용하고 있지.”
“보여줄 수 있겠느냐?”
에드리히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내게서 마정석을 빼앗아볼 심산인가 본데 네 생각 따윈 눈에 훤히 보이니 관두시지.”
“흐음, 역시 그렇게 쉽게는 안 되나.”
에드리히는 뻔뻔하게 중얼거리면서 갑자기 검이 달려 있는 허리띠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허리띠째로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보다시피 짐은 무기를 버렸다. 이 사실을 감안해 주었으면 좋겠군.”
“뭐?”
옆에 서 있던 에드리히가 난데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뭐라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쾅!
주먹에 타격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드리히의 기습을 막긴 했지만 그 여파로 몸을 크게 휘청댔다.
“막았구나. 제법이로군.”
에드리히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느긋하게 말했다.
“대체…….”
에드리히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팔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에드리히가 여봐란듯이 내 팔을 가리켰다.
“하지만 팔뚝에 타격이 크게 들어갔지? 형님이라면 이 정도 기습은 눈 감고도 피해버렸을 것이다. 마법은 쓸 만한 것 같은데, 신체 능력은 많이 약해 보이는군. 몸집도 작고, 완전히 땅꼬마잖아.”
“딱 평균 키다만!”
내심 키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터라 에드리히의 말에 살짝 혈압이 솟았다. 왜 175센티의 평범한 성인 남자에게 다들 땅꼬마라는 거냐. 내가 발끈한 것을 보고 에드리히가 고소를 터뜨렸다.
“평균이라? 형님은 그 나이 때에 너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컸다.”
에드리히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몸에 회전력을 부여하며 옆차기로 상반신을 공격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엄청나다. 너무 빨라서 도저히 발차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른팔을 내밀고 왼손으로 지지하며 다시 공격을 막았다.
쾅!!
공격이 강타하는 순간 팔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으으윽!”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에드리히가 그 모습을 보며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약해빠졌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에 나는 마법보다 검을 먼저 배웠다. 기사 수련을 하면서 오라를 운용하기 직전까지 성취를 이루었다가, 뒤늦게 마법에 흥미를 느끼고 전공을 그쪽으로 바꾸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마법 및 마학 분야에만 집중하고 검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 결과 전생의 기억 덕분에 기술적인 면에서는 수준이 높으나 단련을 하지 않아서 도통 몸이 따라주질 않고 있었다.
재차 공격이 들어왔다. 상대의 힘을 못 이겨 꼴사납게 넘어지기 전에 무게중심을 더 낮추고, 다시금 팔로 그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빠악.
“그러다간 팔이 부러질 텐데?”
에드리히가 놀리듯이 말하며 연이어 발을 날렸다. 그가 세 번째, 네 번째로 팔을 타격하는 순간 왼팔을 뻗어 그의 다리를 붙잡고 전신의 무게를 실어 아래쪽으로 밀어붙였다. 일순 에드리히의 자세가 무너졌다. 몸의 좌측이 무방비로 드러났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갈비뼈를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옆으로 무너질 것 같던 에디가 뒤로 크게 한 발을 밟으며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했다. 그는 느긋하게 뒤로 몇 걸음 걸어 바로 섰다. 결국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다. 나는 불쾌하게 손을 털며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놈! 네놈이 감히 내 앞에서 힘자랑을 해? 마법 외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마음만 먹으면 당장 며칠 내로 오라를 뿜어줄 수도 있다!”
에드리히의 얼굴이 기이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그도 스스로 원하여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소름이 끼친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온몸이 떨리는구나. 눈을 뜨고 꿈이라도 꾸는 것만 같다!”
그가 양팔을 크게 펼치면서 외쳤다. 희곡 배우처럼 동작이 컸고 목소리도 본래 성량이 좋은 덕분에 쩌렁쩌렁 땅을 울렸다.
다시금 에드리히가 성큼 접근해 왔다. 어차피 현 상태에서 육탄전으로 에드리히를 이길 리 만무하기에 나는 그냥 그가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드리히가 무슨 짓을 하든 사실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는 마정석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에드리히가 상처 입은 오른팔을 낚아채서 나를 그대로 근처 나무에 밀어붙였다. 오른팔의 통증 때문에 나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에드리히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하며 입을 열었다.
“짐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다. 그래서 레비 형님에게 노래를 업으로 삼는 가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 그러자 형님이 이리 말했다. 정 가인이 되고 싶거든 조만간 내가 황제가 될 것이니 나를 위해서만 노래하는 가인이 되어라. 황제의 가인이 되었으니 스트라스 최고의 가인이 된 것이 아니냐.”
나도 기억난다. 에드리히는 일찍부터 검에 자질을 보였다. 이대로 기사가 되면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 분명한데 난데없이 광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당시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나는 팔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에디를 보며 물었다. 지금이라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가인이 되고 싶다고 했느냐?”
“사실 짐은 가인 따윈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괄시받는 11황자라 해도, 황족으로 태어난 몸인데 비천한 광대가 되고 싶었을 리가 있겠느냐? 짐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형님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을 뿐이다.”
“…….”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에드리히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에드리히가 키득거리며 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네 덕분에 정말로 오랜만에 노래를 불렀다. 네게서 정말 그리운 냄새가 나.”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냄새를 맡았다. 에드리히를 보고 있자면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럽다. 그 말은 과거의 공포를 일깨워준 내가 증오스럽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왜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네가 어째서 ‘레브노아드의 아들’인 내게만 이리 관대한 것이지?
“크윽.”
그때 에드리히가 갑자기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다리에 힘이 빠진 것처럼 아래로 주룩 미끄러져 무릎을 꿇었다. 낯빛이 창백해지면서 순식간에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상세를 보려고 손을 뻗었다.
“에디!”
손이 닿기도 전에 에드리히가 난폭하게 날 옆으로 밀쳐냈다. 옆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섰다. 에드리히는 머리를 쥔 채 한참 통증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젠장, 지긋지긋한 두통.”
그는 짜증스레 혼잣말을 남기며 휘적휘적 걸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뒤에 덩그러니 선 채로 에드리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리히. 그 두통은 어떻게 된 것이냐?”
“얼굴에 흉터가 남은 뒤부터 생긴 것이지.”
에드리히가 등을 돌린 상태로 얼굴 위의 상처를 손으로 죽 그었다.
“상처는 어쩌다가…….”
“짐이 일일이 대답을 해줘야 하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에드리히가 씹어뱉듯 말했다.
쌀쌀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다. 더 이상 에드리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떠나버렸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새삼스럽게 오른팔에 통증이 올라와서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옷의 먼지를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것을 보고 크리스티안이 크게 안도하여 한숨을 쉬었다.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서재가 어느새 황제의 집무실로 변해 있었다. 지스카르는 관료들의 보고를 받으며 한참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바쁘구나.”
지스카르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널 엘 파셔로 돌려보내겠다고 입씨름을 하다가 중립국에 너무 오랫동안 체류하고 말았다. 일이 얼마나 밀렸을지는 말 안 해도 알 테지.”
나는 사람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들 나간 것을 확인한 뒤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말했다.
“네 대역을 했던 드래곤이 업무까진 대신해 주지 못했나 보지?”
“짐이 할 수 있는 일은 용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에게 모든 국정을 맡긴다면 그것은 용이 지배하는 나라이지, 짐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짐은 엘 파셔를 용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고지식한 녀석.”
나는 혀를 잠깐 차다가 이내 눈을 반짝거렸다. 지스카르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드래곤에 대해 흥미가 솟았다.
“드래곤은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인가?”
“용이 짐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짐과 한 몸이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로는 변하지 못해.”
황제인 지스카르가 소리소문없이 중립국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했다. 일단 지스카르는 본국에 남아 있고 용을 따로 불러내서 중립국으로 보낸다. 그런데 지스카르와 검은 용은 원래 하나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지스카르는 언제든지 중립국에 당도해 있는 검은 용에 자신의 의식을 옮길 수 있다.
지스카르와 똑같은 형태의 육신에 그의 정신이 옮겨졌으니 그것은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며 지스카르 본인이었다. 그리고 본국에 있는 지스카르는 검은 용이 되는 것이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장거리 이동에 대단히 유용하겠는데?”
지스카르가 갑자기 펜을 내려놓았다. 서류 더미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그때야 날 쳐다보았다.
“너도 드래곤을 거느리고 있지 않으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일 텐데?”
“…….”
“너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 드래곤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황금색 용을 못 본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를 설명하면 지스카르가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나는 엘 파셔에만 드래곤이 두 마리나 있다는 사실이 아주 못마땅하다. 내가 용을 가능한 한 불러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한소리 했다.
“그래서 가능만 하다면 네가 가진 용을 스트라스에 넘기기라도 할 참인가.”
“솔직히 그런 마음도 없지 않다. 대공위를 얻은 것으로 용은 제 역할을 다했으니까.”
“레이.”
“그럼 역으로 네게 묻겠다. 너라면 엘 파셔가 스트라스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네 손 아래에서 이십 년 가까이 번영해 온 엘 파셔가 무너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겠느냐는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스트라스의 제도와 법령을 일일이 손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내 나라의 국격이 상하는 것을 어찌 보겠는가.”
지스카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만. 지스카르, 이 화제는 여기까지만 하자. 난 더 이상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지스카르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잠시 후 지스카르는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만 나가보아라. 업무가 밀렸다.”
말투가 무뚝뚝하다. 이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축객령인가.
“에디가 눈을 벌겋게 뜨고 날 노리고 있는데도 이런 데 박혀서 일이나 하고, 네가 아주 여유가 넘치는구나.”
에드리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지스카르에게 핀잔을 날렸다.
“여유라?”
지스카르가 눈을 내리떴다. 살짝 화가 난 느낌이다.
“레이.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목에 사슬을 둘러 골방에 가둬놓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니 당장 방에서 나가라.”
한 번만 더 도발했다간 진짜로 묶여서 갇혀버릴 것 같다. 나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뭐, 좋아. 나도 아픈 것은 싫으니까.”
책상 위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런데 내가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지스카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책상 앞으로 돌아와서 내 팔을 붙들었고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지스카르가 분노를 담아 낮게 물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저쪽 놈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두들겨 패고, 이쪽 놈은 묶어서 가두겠다는 소리나 하니.”
“그자의 짓이냐!”
지스카르는 단숨에 범인을 에드리히로 좁혔다. 일순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엄청나다. 나는 당장 지스카르를 붙잡고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화내지 말아라. 별일은 아니고, 에디가 갑자기 한 판 붙어보자면서 싸움을 청하더군. 내가 ‘레브노아드 황태자’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거 골방에 앉아서 마법만 팔 게 아니라 체력 단련을 좀 해야 할 거 같다. 그동안 내 키가 크지 않았던 것을 꼬마 엘프의 저주 탓으로만 돌리고 있었는데 실은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해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스카르는 날 소파로 데려가서 앉히고 웃옷을 모두 벗겼다. 오른쪽 팔뚝 전체가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충격이 심했는지 갈비뼈가 있는 쪽도 욱신거렸다. 그는 다시 옷을 어깨 위에 걸쳐서 몸을 가려준 다음, 사람을 불러 당장 신관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동안 나 혼자 슬쩍 셔츠를 들춰서 다시금 팔뚝과 허리 부근을 살펴보았다. 에드리히에게 얻어터진 부분을 보니 힘이 쭉 빠지고 기분도 영 별로다. 나는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지스카르가 되돌아와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는 입술에 키스를 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눈가에다가 입을 맞추었다. 눈두덩 아래로 따뜻한 기운이 스며든다.
그는 다시 이마에 키스를 했다. 입술에 하는 키스를 멈췄던 것은 성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단지 나를 진정시켜 주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지. 그의 행동을 하나씩 해석해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지?”
“그래……. 전부 이야기해 다오. 네가 사랑하고 있는 스트라스와 네가 아끼는 그 나라의 사람들. 네게서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 너와 스트라스는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음에도, 네가 한때 그랬듯이 짐도 외면하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지.”
지스카르가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허리를 끌어안고 드디어 입술에 키스를 했다. 키스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이거 알고 있느냐? 너와 키스하고 관계하는 것은 여전히 좀 징그러운데, 그래도 너라는 인간은 안심이 된다. 네가 여자였다면 정말 거리낄 것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위치로 볼 때 네가 여자가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만.”
“네가 지금 내 손에 죽고 싶은 게지!”
“그래, 짐이 여자가 되었다고 치자.”
나의 서슬 퍼런 협박에 지스카르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사 체념한 듯한 분위기에 나는 키득 웃었다.
“넌 차분한 분위기의 미인이고, 키가 크면서 아주 늘씬할 것 같다. 가슴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수준인데, 대신 모양이 예쁠 거 같아. 아, 만져보고 싶어.”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왜? 마음에 안 드는가 보지?”
눈에 장난기를 담아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건 보지 않아도 내가 여자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네 녀석 상상하지 마! 지금 쪼끄맣고 깜찍한 계집아이를 떠올리고 있지?”
“그건 잘 모르겠고, 너는 가슴이 클 거 같구나.”
“너 말이다…….”
지스카르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철벽같은 얼굴이 무너지고 우스워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미소가 퍼져 나간다.
“웃어? 웃었겠다……!”
지스카르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술을 겹쳤다. 지스카르도 좀 더 허리를 꽉 끌어당기며 내 혀를 찾아내어 휘감았다. 지스카르가 짓눌러서 몸이 점점 뒤로 넘어갔다. 나는 소파 팔걸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동안 어깨에 대충 얹어두었던 셔츠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맨살이 드러나자 살갗 위로 살짝 소름이 돋았다. 키스를 끝내고 조금 머뭇거리며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지스카르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큰 손으로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하고 싶어도 좀 참거라. 잘못 했다가 네 상처를 건드릴까 봐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곧 신관도 올 것이다.”
“뭐라? 누가 하고 싶다고 했느냐?”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항의했다. 지스카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전부 쓸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대신하지.”
지스카르가 다시 키스를 했다. 천천히 입술을 핥다가 점차 강하게 입을 물고 빨았다. 그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내가 허덕이는 것을 알면서 지스카르는 일부러 숨을 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목구멍 저 안쪽에서 우음, 하고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숨통이 막힐 정도로 격렬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스카르는 내 목소리에 무척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등허리에 두르고 있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똑똑.
그때 시종이 조심스럽게 방문에 노크를 했다. 신관이 도착했다는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지스카르가 키스를 멈추고 물러났다. 나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그는 대기 명령을 내리고 내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겨우 숨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지스카르는 신관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명령을 내렸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지스카르의 뺨을 손등으로 만졌다.
“에디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지스카르의 움직임이 잠깐 멎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부 이야기해 주마.”
“…….”
지스카르는 내 손을 잡고 손바닥에 키스를 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권에서 계속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4권
지은이: 레브노아드
발행처: 대원씨아이(주)
ⓒ 2021 레브노아드 / 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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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of Destiny, MoD(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