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34/43)

9.

애초에 양국 정상 간의 평화회담은 스트라스 측에서 먼저 요구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회담 날짜가 임박하자 스트라스는 돌변하여 대화 재개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트라스가 실무접촉을 전면 불허하는 상황 속에 엘 파셔 측은 주어진 정보만으로 두 정상이 만나 최종적으로 내놓을 타협점을 구상했다.

지스카르는 사무관이 제출한 서류를 최종적으로 검토했다. 하지만 실무진이 머리를 싸매서 만든 이 서류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도 감안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양국 황제가 이미 회담지에 도착한 상태에서 말을 뒤집다니, 무도함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오랜만에 서재 밖으로 나와 근처를 잠시 걸었다. 타국에서 황제를 경호하는 데 기사들의 노고가 크다. 호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그는 멀리까지 나가지 않고 강의동 건물과 너른 공터가 보이는 즈음에서 걸음을 멈추고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학생들이 황제가 행차하였음을 알고 크게 놀라며 몸을 낮췄다.

“얼마나 귀하신 몸인지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보는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지스카르는 고개를 돌렸다. 스트라스 황제 에드리히가 호위를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레이의 입장을 고려해 최대한 접촉을 피해왔으나 어차피 양측 모두 미첼 아카데미 내에 머무는 중이니 한 번쯤은 마주칠 수밖에 없다. 지스카르는 말없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학생들은 양 대국 황제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고 술렁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두 황제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에드리히가 호위에게 물러나서 대기하라고 손짓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지스카르도 수행원들에게 거리를 벌리라고 명했다.

“할 말이 있는가?”

“형님에 대한 것 외에 짐이 네게 할 말이 뭐가 있겠느냐.”

“그쪽이 먼저 요구했던 평화회담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느냐.”

“짐이 전에 말했지 않나. 개나 주라고.”

“…….”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떴고 에드리히는 그 반응을 즐기듯이 비소를 머금었다.

“그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형님이 네놈을 예뻐해 주고 있다던데?”

에드리히가 새끼손가락만 들어 까딱거리며 물었다. 레이를 레브노아드 황태자로 단정하는 말이었다. 지스카르는 일단 그에 대응하지 않았다. 저열한 대화에도 참여할 용의가 없었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항상 그랬듯 상대의 반응에 관계치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는 지스카르를 위에서 아래까지 노골적으로 쭉 훑었다.

“너 같은 덩치를 벗겨놓고 쑤실 생각을 하다니 그동안 형님도 취향이 굉장히 다채로워지셨어. 예전에는 잘해봐야 예쁘장한 소년 정도가 최선이셨는데.”

“…….”

지스카르는 무뚝뚝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의 무심한 반응을 보고 에드리히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지스카르는 호위가 기다리고 있는 공터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순간이었다. 지스카르는 목덜미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등 뒤에 있던 에드리히가 단칼에 그의 목을 날려버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뒤돌면서 간발의 차로 공격을 막았다.

카캉.

“꺄악!”

“폐하!!”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스카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스트라스 황제가 법 없이 사는 자라 해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에드리히는 물러설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검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가 고개를 기이하게 옆으로 꺾고 물었다.

“기다려봐라. 설마, 형님이 받아주는 쪽은 아니겠지?”

“지금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

에드리히는 힘을 주어 대치 상태를 풀고 거칠게 검을 내질렀다. 지스카르는 뒤로 물러서며 일단 방어 위주로 그의 공격을 막았다. 에드리히가 중앙으로 크게 밀고 들어오며 한층 더 공격적인 태도로 물었다.

“하! 그분이, 형님이 분명 그런 취향은 아니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 뭘 어찌한 거야?”

“…….”

스트라스 황제가 사납게 추궁하는데 지스카르는 일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에드리히가 크게 내지른 검이 옷깃을 얕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스카르는 다시 검을 다잡았다. 지금은 스트라스 황제와 상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에드리히는 무섭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살기를 완전히 쏟아내며 이를 갈았다.

“이거 아주 흥미롭구나! 매일 상상만 했지,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 줄은 몰랐잖은가!”

물러설 기회만 보던 지스카르는 순간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무표정이 깨지며 얼굴에 크게 노기가 깃들었다.

“상상을 해? 네놈이 왜 그를 상대로 그따위 추잡한 상상을 하지?”

검신이 희게 빛을 뿜었다. 계속 막기만 하던 지스카르가 자세를 바꾸고 에드리히를 공격했다.

쾅!!

검과 검끼리 마주쳤는데 금속음이 아닌 굉음이 터졌다. 두 황제가 쥐고 있는 검이 각기 백색 오라를 뿜어내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에드리히의 검에 주목했다. 세상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알려진 소드 마스터의 일검을 스트라스 황제가 완벽하게 막았다. 상대의 손아귀에 들린 검에서부터 팔과 어깨, 전신으로 오라가 흘러들어 강대한 힘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이 있었다. 지스카르는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가 사실임을 지금 확인했다.

“짐이 몇 번이나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지적하기는커녕 발끈하면서 반응을 해오는구나. 너는 그를 레브노아드 황태자라고 믿고 있군.”

검을 맞대고 대치하면서 에드리히가 낮게 말했다.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믿고 있구나’의 말뜻은 ‘자신은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에드리히는 이내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형님을 손에 넣고 아주 좋아 죽을 지경인가 보구나. 그가 스트라스로 떠나버리면 허리가 시려서 어찌한다?”

그의 조롱에 지스카르는 침묵을 고수했다.

잠깐의 정적 직후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자루의 오라 소드가 폭발적으로 기세를 높였다. 무서운 힘이 격돌하여 서로 자웅을 겨루었다. 한계치까지 뻗어나갔던 두 오라 소드는 굉음을 내며 서로 튕겨 나갔다.

뒤로 밀려난 에드리히가 무게 중심을 앞으로 기울고 땅을 디뎠다. 강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가 딛고 있는 땅이 한 뼘 정도 깊이 파였다. 일순 그의 신형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지스카르도 반대로 밀려났다가 어느새 벼락처럼 에드리히를 향해 돌진했다.

사람들은 억 소리를 내며 놀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뒤늦게 그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일반인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했다.

쾅! 쩡!

두 사람의 검이 마주칠 때마다 바위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무시무시한 힘이 격돌하며 땅이 파이고 돌풍이 휘몰아쳤다.

몇 차례 공방을 주고받다가 지스카르는 검에 힘을 실어 에드리히를 크게 밀어냈다.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적국 황제와 칼부림을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의 가당찮은 헛소리도 더 이상 들어주기 고역이었다.

지스카르는 싸늘하게 에드리히를 보며 충고했다.

“어리석은 소리는 적당히 해라. 대공위까지 받은 마당에 훌쩍 떠나겠다는 소리를 할 만큼 그가 무책임해 보이나?”

“네놈이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스트라스 황족이 적국에 주저앉는 행동에 어디가 책임감이 있단 말이냐?”

지스카르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일순 빠드득 소리가 날 만큼 손아귀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의 칼날에 옅게 맺혀 있던 오라가 몇 배 이상으로 거대하게 타올랐다. 불시에 크게 검을 뿌리자 오라가 반원 형태로 땅을 베며 뻗어나갔다.

콰과광!

길게 뻗어나간 오라가 이백 미터 뒤에 있던 건물에 부딪혔고 충격을 받은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근방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자칫 인명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으나 지스카르는 사고 지역을 살피는 대신 차가운 얼굴로 왼편에 시선을 주었다. 간발의 차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에드리히가 균형을 잃고 땅을 짚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툭툭 털고 몸을 바로 일으켰다.

“발끈하기는. 네놈이 생각하기에도 짐의 의견이 매우 타당하다 싶지? 그가 정말 레브노아드 황태자라면 적국의 작위 같은 건 지금에라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지.”

“넌 그를 레브노아드 황태자라고 믿고 있지 않군.”

에드리히는 ‘형님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덧붙였다. 그가 레이의 전생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지스카르는 이번에 확실하게 읽어냈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짐은 그가 레비 형님임을 믿는다. 이 정도까지 형님과 모든 것이 똑같다면 그자는 이미 형님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형님의 아들이든, 실은 스트라스와는 피 한 줌 안 섞인 엘 파셔의 귀족 나부랭이이든, 혹은 더럽게 굴러먹던 노예이든, 그런 건 짐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런 걸 믿는다고 할 수 있나?”

그의 지적에도 에드리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얼굴의 비틀린 미소가 그대로였다.

“그레이언 대공이 잘 꾸며진 거짓말을 했고 진실은 레비 형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여기까지 그와 같을 수 있다면 그냥 그를 레브노아드 황태자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래, 그는 짐이 경애하는 형님임이 분명하다.”

에드리히는 나른하게 양팔을 펼쳤고 즐겁게 웃었다.

“녹색의 평원이 펼쳐진 스트라스로, 형님은 결국 귀환을 결단할 것이다. 너 같은 엘 파셔 놈이 이해할 리가 없지!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스트라스를 외면하는 일이 애당초에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지스카르는 아주 깊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레이의 정체를 믿는지 어떤지 그런 것은 어느새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적국의 황제이기 때문에 레브노아드 황태자에 대해서 모를 거라고 했던가? 유감스럽게도 그는 지나칠 정도로 레이의 진심을 너무 잘 알았다. 레이가 직접 그에게 자신의 속내에 대해 숨김없이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스트라스 황제를 노려보았다. 스트라스의 모든 것이, 녹색 평원의 풀 한 포기, 흙모래 한 줌까지도 실로 눈엣가시였다. 그는 항상 표정이 거의 없었으나 어느새 상대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섬뜩한 살기가 얼굴 위로 드리웠다.

“드디어 볼만한 얼굴이 되었잖느냐?”

에드리히가 크게 조소를 터뜨렸다.

* * *

지스카르와 에드리히가 칼을 뽑아 들고 서로 죽일 것처럼 싸우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수업을 듣겠다고 태평하게 강의실 건물에 들어가려던 때였다. 나를 호위 중이던 크리스티안이 황급히 달려온 친위기사에게 보고를 듣고 믿기 어렵다는 듯 반문했다.

“폐하께서?”

“뭔 큰일 날 소리를 하는 거냐. 폐하가 그럴 분이 아니시잖아?”

던필도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체르도도 내가 청강 중일 때는 호위 명목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에게도 스트라스의 기사가 도착했고 비슷한 소식을 알려왔다. 크리스티안이나 던필과 달리, 그는 입을 꽉 다물고 표정을 굳혔다.

나는 양측에서 동시에 같은 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들으며 인상을 썼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처럼 나도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길바닥에서 스트라스 황제를 죽이겠다고 칼부림 중이라고?

놈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자기 행동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아주 잘 알았다. 설혹 에드리히와 어떤 식으로 시비가 붙었다 해도 적당히 물러서는 편을 택하지 맞붙어서 실랑이할 놈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고를 하러 온 친위기사는 절대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 나는 둘이 대치하고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수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기사들이 통행을 막고 있었지만 워낙 탁 트인 곳이다 보니 건물 2층이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콰광. 구구궁!

“헉!”

“어어…….”

커다랗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음을 흘렀다. 하지만 다들 두려운 표정을 하고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눈앞의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시선을 좇아 공터 쪽을 보았다.

지스카르는 소드 마스터이고, 에드리히도 예상대로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범인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소드 마스터 간의 격돌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중이었다.

에드리히가 무서운 기세로 검을 내리찍었고 지스카르는 역으로 검을 쳐올렸다. 두 사람의 오라 소드가 굉음을 내며 맞부딪치고 튕겨 나갔다. 그 순간 불똥처럼 백색 오라가 튀어 허공에 화려하게 흩날렸다.

저 황홀한 광경 속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힘이 녹아 있었다. 검신에 오라를 얇게 덧씌우기만 해도 강철 정도는 종이처럼 베어버릴 수가 있는데, 그들의 검에서는 오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닿는 것은 모조리 폭사시켜버렸다.

막대한 오라로 무장한 육신은 인간의 것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강력했다. 지스카르와 에드리히가 각기 땅을 밟고 박찰 때마다 돌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두꺼운 파편이 튀어 올랐다. 평범한 사람은 저 발길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다.

“진심이냐……!”

두 사람이 오라까지 뿜어내며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창백하게 질렸다. 지스카르까지 저러고 있다는 것이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짜 이건 미친 짓이다. 보는 눈이 이 정도로 많은데 황제의 신체에 상처가 나면 대제국의 체면 때문에라도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다. 잘못하다 치명상이라도 입어 한 놈이 사망 내지는 불구가 되면 그날로 2차 대전 발발이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그만둬!”

내가 소리를 지르자 지스카르가 아주 정신 줄을 놓은 것은 아닌지, 이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고 내 말에 따라 움직임을 조금 늦추었다. 그러나 에드리히는 검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지스카르가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검을 깊게 찔러 대각선으로 쳐올렸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젖혀 크게 물러나며 에드리히의 오라 소드를 피했다. 충분히 간격을 벌렸으나 오라가 스치면서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나갔다.

“지스카르……!!”

위험천만한 광경에 심장이 다 철렁했다. 지스카르가 다칠 뻔해서 철렁한 것이 아니라 두 황제 놈 중 어떤 놈도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에드리히가 틈을 주지 않고 맹공했고, 검을 물리려다가 공격을 당한 지스카르도 눈에 띄게 노기를 드러내며 오라에 힘을 더했다.

이거 말로는 놈들을 말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주위를 보니 엘 파셔와 스트라스 양측 호위들이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발만 구르고 있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들은 소드 마스터 간의 싸움에 끼어들 만한 재주가 없었다.

“대공 전하……!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티안이 굳은 얼굴로 내게 중재를 요청했다. 엘 파셔의 다른 친위기사들도 내게 도움을 요청하며 급히 물러서서 길을 내주었다.

“무슨 소린가! 전하, 그냥 계십시오.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반대로 체르도는 나를 걱정하며 만류했다. 한편 스트라스의 젊은 기사들은 황제에게 해가 갈까 봐 내가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엘 파셔의 기사들이 이 몸을 전적으로 믿고 길을 터주는데, 체르도와 스트라스 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새삼 옛날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폐하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그 자리에서 대기해라. 금방 끝내겠다.”

체르도가 대장으로 있으니 스트라스 쪽 기사 몇몇이 반발해도 알아서 저지해 주겠지.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공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문을 두 개씩 할애해 두 놈을 동시에 공격했다. 순간 에드리히가 보지도 않고 좌측으로 검을 내려쳐 마법을 쩍 갈랐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휘두르던 검에 다른 쪽 손을 더 얹고 무섭게 속도를 더하여 지스카르의 허리를 아주 두 동강 낼 기세로 크게 베었다.

지스카르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내 마법을 반 토막 내버리고 아래로 내려쳤던 검을 벼락같이 대각선 위로 휘둘러 에드리히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에드리히의 팔을 날려버릴 기세로 역공했다.

“이 자식들이!!”

사람을 아예 없는 취급해?

이중 영창이 애들 장난 같다고 하니 제대로 한 방 먹여주기로 했다. 앞으로 팔을 뻗자 손 안으로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세 개의 주문을 끌어와 약간 시간을 들여 눈앞의 작은 공터 정도는 통째로 뒤엎어버릴 만한 대형 마법을 구현시켰다.

나는 지체 없이 마력 덩어리를 내쏘았다. 이 정도쯤 되면 놈들도 아까처럼 싹둑싹둑 마법을 가를 수는 없다. 힘을 더하면 마법을 두 동강 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소리다.

내 마법을 막는 동안 상대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에 두 놈은 마법을 베는 대신 피하면서 크게 물러났다. 놈들이 서로 떨어지며 물러서는 것을 보며 나는 손을 즉시 아래로 꺾어 땅을 가리켰다. 건물을 향해 날아가던 마력 덩어리가 내 손짓에 따라 바닥에 꽂혔다.

콰앙.

쿠과과과광!!

“꺄아아악!”

“우아악! 사람, 사람 살려!”

마력구가 박히자마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에 금이 가고 일부는 치솟고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파괴력이 대부분 바닥 아래로 흡수되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여파가 미치진 않았다.

둘을 떼어놨으니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에드리히가 다시 폐허가 된 바닥을 박차며 지스카르를 노리고 돌진했다. 지스카르도 아주 죽여버리겠다는 얼굴로 검을 들었다. 이 몸과 거리를 벌리면서 자기들끼리 다시 공방이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좋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멀리 떨어졌던 두 놈이 다시 맞붙기 전에 나는 몸을 낮춰 손끝으로 땅을 짚었다. 그곳부터 폐허가 된 바닥이 크게 융기했고, 큰 벽이 지스카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나는 바닥을 퉁기며 바람을 일으켜 거의 날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이어지는 지스카르의 행동은 예상대로였다. 아니, 소드 마스터라는 놈들은 하는 짓이 전부 똑같다. 뭐든 다 벨 수 있으니 앞에 무슨 장애물이 있든 일단 다 작살을 내고 보는 것이다.

지스카르가 거대하게 일렁이는 오라 소드로 시야를 가리는 장벽을 단칼에 갈랐다. 검을 휘두른 직후에야 장벽 바로 앞으로 내가 뛰어든 것을 깨달았다. 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검을 거두거나 멈추기는 너무 늦었다.

놈의 오라 소드에 어깨부터 몸통이 두 동강 나기 직전, 이중 영창으로 보호 마법을 만들었다. 고작 이중 영창 방어로 막을 만한 일격이 아니다. 당연히 오라 소드에 부딪히자마자 방어막은 부서졌다. 하지만 아주 찰나 간 저지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그 찰나의 틈을 비집고, 허공에서 바로 직선 아래로 낙뢰가 떨어졌다. 이중 영창으로 가속이 더해진 번개가 번쩍 낙하해 지스카르의 검을 내리쳐 아래로 꺾었다.

“다시 칼 들면 진짜 죽여버린다!”

내가 이를 갈며 외쳤다. 설마 날 죽일 뻔해놓고 다시 개짓을 하진 않겠지!

일단 지스카르에 대한 것은 잊고 뒤로 신경을 집중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왔음에도 에드리히라면 절대로 검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드리히는 내게 관대하게 굴지만 결정적일 때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 그만두라고 외쳤을 때 에드리히는 오히려 빈틈을 노려 지스카르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들었다.

“방해다, 거기서 비켜!”

에드리히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에드리히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지스카르다. 녀석이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내 등을 찌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피하고, 내가 선 자리 바로 너머에 있는 지스카르를 공격하자면 이동 경로가 매우 제한적이다. 내 등 바로 뒤에 도착한 에드리히가 발을 반원으로 크게 딛고 한 바퀴 돌면서 나를 피해 지스카르의 좌측을 점거한 뒤 검을 휘둘렀다. 몇 가지 경로 중에 에드리히가 정확히 내가 예상한 위치로 이동했다.

“네놈이 많이 컸구나. 이 몸에게 큰소리까지 치고.”

에드리히가 예상 위치에 발을 딛는 순간, 지스카르를 무력화한 직후부터 빠르게 구현해 두었던 두 개의 화염구, 바람창, 바람 화살, 이렇게 네 개의 마법을 놈의 머리 위로 때려 박았다.

“……!!”

에드리히는 틀림없이 이를 예상치 못했다. 에드리히는 흠칫 위를 보더니 즉각 방어로 태세 변환하여 자신을 덮치는 마법을 막고 베었다. 번쩍거리는 검격이 어찌나 빠른지 내 눈으로도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우우우우웅.

짧은 감탄은 뒤로하고, 나는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오며 팔찌에 박힌 마정석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에드리히가 방어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동안,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에, 4중 영창으로 거대한 불덩어리를 허공에 만들어냈다. 막대한 화력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다.

“이 뿔난 망아지 같은 놈!”

에드리히가 마법을 베고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불덩이를 그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에드리히는 즉각 검을 높이 바로 세웠다. 오라 소드가 폭발적으로 불타올랐다. 머리 위로 마법이 낙하했고 에드리히가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콰드드드드득!

콰구구구.

에드리히의 오라 소드가 불덩어리를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덩어리는 여태 경험해 왔던 마법과 달리 쉽게 반 토막이 나지 않고 묵직하게 에드리히의 머리 위를 짓눌렀다. 에드리히는 이를 뿌득 갈며 팔뚝과 전신에 힘을 가했다. 검신 위의 오라가 기존보다 수십 배 이상 무섭게 치솟았다.

콰츠츠츠.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그는 기어이 내 마법을 반 토막 내버리고 말았다. 불길의 반은 오라에 먹혀 사라졌고, 나머지는 반으로 쪼개지며 에드리히의 좌우 공간을 무섭게 휩쓸면서 불태워갔다.

이대로 두면 불길이 주위를 덮쳐 최소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올 상황이다. 평원 같은 개활지도 아닌 장소에서 4중 영창은 역시 좀 지나쳤을지도.

나는 즉시 바람을 일으켜 사방으로 뻗어가는 잔불을 손 위로 끌어 모았다. 구경꾼들이 마법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치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에드리히를 쳐다보았다.

“끝까지 해볼 것이냐?”

두 놈이 조용한 것이 드디어 싸움질을 멈출 모양이다.

주위가 유난히 조용하다.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치던 구경꾼들이 멍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둘을 동시에 제압한 것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분위기다. 사실 두 놈 다 나를 공격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자세한 내막 같은 건 그들이 알 리가 없고.

“황제 폐하!”

엘 파셔의 기사들이 급히 달려와 황제를 보호했다. 스트라스의 기사들도 에드리히를 지키기 위해 달려 나왔다. 양국의 기사들이 서로 경계하며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사달이 날 것 같은 팽팽한 공기.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양국 황제가 칼부림할 때는 멋지다고 구경하다가 이제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깨달은 것이다.

“하하…….”

그때 에드리히가 적막을 깨며 웃음을 흘렸다.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쏠렸다.

에드리히는 느슨히 검을 아래로 든 채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불길의 파편이 어지러이 날리고 있었다.

“후, 흐하하하하하!!”

이내 그는 커다랗게 광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기이한 광기가 묻어 있어 몸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주위의 구경꾼과 기사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4중 영창! 짐이 이걸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는군! 이게 전부 현실이다 이 말이지!”

그가 희열에 물든 얼굴로 양팔을 크게 펼치며 외쳤다. 생각해 보면 에드리히가 내 마법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에드리히가 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과연 레브노아드 형님의 혈통은 속일 수가 없구나! 그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하나도 밀리지 않아!”

에드리히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나를 레브노아드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듯했으나 그 발언은 다분히 계획된 것으로 보였다.

그때 지스카르가 검을 집어넣으며 걸어 나왔다.

“짐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여 대공위를 하사할 때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말로 조롱을 퍼붓더니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겠다고?”

순간 에드리히는 노기 띤 얼굴로 지스카르를 홱 노려보았다.

“네놈은 그 입 닥쳐! 그가 스트라스 황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디서 감히 스트라스의 혈통을 훔치고서 큰소리를 쳐!”

“그 자랑스러운 혈통을 지금까지 스트라스에서 뭐라고 모욕했는지 다 잊은 모양이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시겠다? 수치를 안다면 그리 못 할 것이다!!”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지스카르와 에드리히의 중간에 낀 나는 솔직히 크게 당황했다.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는지, 가능하다면 둘 다 뒤통수를 후려갈겨 저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국의 황제가 검을 들고 겨루기를 한 것은 그래도 멋진 한판 대결이었다며 감탄할 거리라도 있다. 하지만 나를 가운데 두고 입씨름하는 것은 정녕 꼴사납다는 소리밖엔 나올 것이 없었다.

“둘 다 입 좀 닥쳐……!”

나는 낮게 이를 갈며 그들의 말싸움을 중지시키려 했다.

그때였다. 체르도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전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가 진심으로 내 안위를 걱정하면서 외쳤다. 공터가 다 부서질 정도로 한판 했으니 내가 혹시 다친 곳이라도 있을까 염려가 된 모양이다.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다. 나는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전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고맙지만 거절하지. 엘 파셔에도 신관은 있으니까.”

나는 거절 의사를 표하고 지스카르의 팔을 붙잡았다. 지스카르가 흠칫하면서 내 손을 응시했다. 체르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사심을 다 배제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서 한 행동이었다.

“경의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엘 파셔인이다.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내가 체르도 경에게 하는 말을 듣더니 에드리히가 물었다.

“엘 파셔인이라? 진심으로 엘 파셔 놈들 쪽에 서서, 스트라스의 적이 되겠단 말인가?”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 생각할 시간은 있어야겠지.”

“…….”

잠시 에드리히를 응시하고 체르도에게도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스카르에게 이만 움직이자고 요청했다. 어쨌든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막아서 다행이었다.

* * *

체르도가 예민하게 군 탓에 숙소로 복귀하자마자 진짜로 신관을 불러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 이상도 없다고 확인을 해주고 신관은 정중히 물러났다. 시종까지 모두 방에서 나간 뒤 크리스티안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간 헛소문으로 일축해 왔는데 스트라스 황제도 진짜로 소드 마스터가 맞는 모양이군.”

예전에 이와 관련한 이야기로 잡담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못 했던 이야기를 지금 그들에게 해주었다.

“에디는 어릴 적부터 검에 재능이 대단했다. 내게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검을 멀리하고 훈련을 소홀히 하였음에도 그 재능을 숨기기 어려울 정도였지. 아마 내가 죽고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던필은 혀를 찼다.

“거참, 세상엔 엄청난 인간들이 정말 많군. 레이, 진짜로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혹시 모르니까 방에서 쉬면서 몸조리 좀 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지스카르를 지그시 보며 말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 이게 무슨 짓이냐고 꼭 한마디 좀 해줬으면 좋겠네.”

“던필, 그만 나와라.”

크리스티안이 던필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밖으로 끌고 가기만 하고 던필에게 닥치라고 하지 않는 것은 보면 그도 말만 안 하지 그와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는 나가기 전에 몸을 낮춰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방 안에 지스카르와 단둘만 남게 되었다. 녀석은 침대 근처에 서서 계속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던필의 요청대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정신을 놓고 다니는 모양이군. 무슨 생각으로 길바닥에서 스트라스 황제와 칼부림을 벌인 거지?”

“…….”

지스카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와중에 나는 순식간에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군……. 네가 미친 짓을 할 이유는 나 하나밖에 없지.”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스카르는 과할 만큼 성실하고 자기 책무에 충실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 내가 관련된 일에서는 종종 이성을 잃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에디가 날 두고 무슨 소리를 하더냐?”

지스카르가 침대맡에 앉으며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널 스트라스로 돌려보내라는,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매번 하는 소리인데 거기에 발끈하셨다?”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미는 말도 있지…….”

지스카르가 혼잣말을 하듯 가만히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 화내지 말거라. 어차피 진심으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내 마법을 두 동강 내가며 오라 소드를 휘둘러놓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간 4중 영창 마법사인 너와 수차례 대련을 하지 않았는가. 그 경험이 검술 실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같은 마스터라도 짐이 진심이었다면 그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과연? 길고 짧은 건 끝까지 대봐야지?”

나는 코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무뚝뚝한 성격의 지스카르는 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씩 저렇게 자신감을 드러내곤 했다. 잠깐 농담 비슷한 소리를 하다가 그는 다시 무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트라스 황제도 진심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끝으로 지스카르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에드리히의 기습에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곳이었다. 지스카르가 피하는 것이 딱 한 박자만 느렸어도 잘려나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였을 것이다.

“진심으로 널 죽여버릴 태세던데?”

“진심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지스카르는 쓰게 말했다.

“엘 파셔에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도 반란군의 머리를 보내고 결국 전쟁을 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도 최소한의 선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하아,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군. 에디는 굉장히 불안하다. 네 말대로 지금은 선을 지키고 있지만 언제라도 넘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턱을 괸 채 에드리히에 대해서 떠올렸다. 잠깐 그러고 있었는데 지스카르가 내 뺨에 손을 올리고 살짝 끌어올려 자기 쪽으로 주의를 끌었다.

“짐과 대화 중이니 그 눈으로 다른 곳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

나는 지스카르의 속을 읽듯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체르도 경이 그리 절박하게 소리치는데도 결국 네 손을 잡았는데 뭐가 그렇게 초조하지?”

지스카르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초조하고…… 불안하지……. 아주 오랫동안. 항상 그래 왔다.”

입술 위로 입김이 닿았다.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가 끝나고 지스카르가 입을 맞춰왔다. 불안해하는 감정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어린애 달래듯 지스카르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며 날 끌어안고 진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좀 더 열자 잡아먹을 듯 혀뿌리까지 물고 빨아당겼다.

지스카르가 몸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지스카르는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번엔 혀를 넣어 한참 입 안을 헤집었다. 서로의 타액이 뒤섞이면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 안이 너무 흥건해져 턱으로 침이 흘렀다.

그대로 흘러내리는 게 아깝다는 것처럼 지스카르는 입술을 완전히 덮고 강하게 빨았다. 잡아먹을 듯 키스하고도 지스카르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을 단단히 틀어막고, 가능하다면 숨 쉴 틈조차 주고 싶지 않아 하는 느낌이었다.

지스카르는 팔로 침대를 짚고 자세를 조금 바꾸면서 계속 입 맞췄다. 나는 숨이 모자라 허덕이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더 젖히고 그와 입맞춤에 열중했다. 입술을 빈틈없이 꽉 맞출 때마다 몸이 지끈거렸다. 뭉근하고 뜨끈한 고양감에 빠져 제법 오래 키스했는데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시간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정말 오랫동안 키스했다. 지스카르가 떨어져 나왔을 때 나는 벌겋게 달아올라 얕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지스카르도 몸이 달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맞댄 채로 내 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딱 거기까지만 하고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하아, 왜…… 하아, 그러고 있는 거냐……?”

가쁘게 숨을 쉬며 물었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약간 들고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너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 짐이 너를 겁간하지 않았다면, 네가 이런 짓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겠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난데없이 고대적 이야기이냐.”

“그렇지 않나?”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지스카르의 머리채를 거칠게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옛일은 묻기로 했고 묻어버리기로 한 일엔 관심 없다. 내가 하고 싶어졌으니까 하는 거다. 내가 이미 결정했는데 네놈이 뭐라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할 태세지? 어디서 감히 음울한 눈빛을 하고 이 몸을 내려다봐?”

지스카르는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입술을 열어 숨을 토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노려보는 내 눈에 낮게 감탄했고 크게 흥분했다.

“그래, 지루한 이야기는 그만하마.”

지스카르가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옆으로 당기며 희게 드러난 목을 깊게 핥았다. 침을 묻히고는 한 입에 물어 바짝 빨아서 표식을 남겼다. 겨우 목을 애무할 뿐인데 몸이 살짝 저릿했다.

나는 머리를 꽉 붙잡아 목으로 더 끌어당겼다. 지스카르도 더 깊이 목을 핥았다. 손을 아래로 내려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를 먼저 헐벗기고 자신도 옷을 벗었다.

지스카르가 바로 덮쳐 왔다. 이렇게 몸이 노곤하게 녹고 이성이 반쯤 마비되면 맨살이 닿아도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스카르가 유난히 벗은 몸의 여기저기를 핥았다. 성감대인 유두는 살짝 빨고 바로 내려와 배와 옆구리 등을 핥고 입맞춤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지스카르의 머리카락을 잡으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입술과 혀가 깊이 닿는 것이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흐으으. 지스카르…….”

가벼운 애무에도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허리에 힘을 주고 살짝 띄웠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와락 붙들고 배꼽에다 키스하듯이 혀를 넣었다. 나는 너무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서 오히려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 행동에 논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지스카르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한참 더 몸을 애무했다.

그가 온몸에 잔뜩 침을 묻혀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스카르의 성기가 엄청나게 발기해 있었다. 남자 놈의 거시기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여전히 마뜩잖아 고개를 휙 돌렸다. 저런 걸 잘못 보다간 내 눈이 썩을지도 모른다.

“보는 건 싫어하면서…… 몸으로 느끼는 것은 좋아하니……. 너도 참 어지간하지.”

지스카르가 나른한 음성으로 내 행동을 지적했다. 게다가 아까 내가 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약이 올랐으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으음 앓는 소리만 냈다.

지스카르는 향유를 자기 음경에 가볍게 바르고 내 구멍에 맞췄다. 지스카르가 힘을 주기도 전부터 나는 아래가 가득 차는 상상을 했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지스카르가 한꺼번에 끝까지 밀어 넣자 너무 짜릿해서 온몸이 뒤틀렸다.

사타구니에 피가 몰려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바로 손을 뻗어 한참 전에 발기한 내 음경을 쥐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손 위로 바로 자기 손을 얹었다. 왜인지 지스카르는 내가 스스로 하게 두는 법이 없었다.

그가 손을 겹친 채로 힘을 쥐어 내 것을 꽉 쥐었다. 나는 찌르르한 기분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가 그냥 그의 손에 전부 다 맡겨버렸다. 지스카르가 유도하는 대로 음경을 바짝 당기거나 빠르게 쳐올리며 자위 아닌 자위를 했다. 지스카르는 내 손을 움직이면서, 뒤에 박은 채였던 성기를 깊이 넣었다가 빼고 연이어 빠르게 쑤시기 시작했다.

“읏. 흐으, 지스……카르……, 하아.”

“레이…….”

지스카르가 몸을 숙이고 움직임을 더욱 빨리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레이……. 레이.”

나는 남은 손으로 아래의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지스카르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데 낯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간질간질하면서 저릿하고 숨이 꽉 막혔다.

지스카르가 몸을 낮춰 날 끌어안으며 윗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이를 가볍게 사리물고 있던 내가 입을 열자 바로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입 안을 헤집으며 쪽쪽 빨아당기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갑자기 자위 중인 내 손을 치워버리고 자기 손으로 직접 내 음경을 꽉 쥐었다.

성에 안 차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지스카르가 직접 자극해 주자 나는 파르르 자지러졌다. 앞뒤로 뭔가가 꽉 차듯 흥분이 극에 달했다.

“하. 흐윽. 지스카르! 아.”

“레이, 더……. 계속…….”

“으으. 아, 지스카르! 아읏! 하아!”

나는 정신없이 신음을 질렀다. 지스카르가 만족을 못 하고 계속 재촉하고 재촉했다. 낮게 재촉하는 목소리만으로도 자극받아 싸버릴 것 같았다. 진짜로 한계의 한계에 다다랐다.

지스카르가 음경을 끝까지 박아 넣고 몸속에 사정했다. 나도 바짝 굳어서 참았던 것을 전부 다 쏟아냈다. 사정을 다 끝내고 허리에 힘을 툭 빼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아……. 지스카르…….”

사정을 끝낸 지스카르가 자기 이름이 불린 것을 몹시 기꺼워하며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나는 지스카르에게 안긴 채 길게 늘어져서 헐떡거렸다.

천천히 여운이 가라앉고 몸이 조금 식었다. 나는 잠시 동안 지스카르의 품에서 가만히 있어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버티고 결국 놈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놈이랑 알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게 진짜 징그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기어이 놈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서 앉자 지스카르가 김빠진다는 분위기를 했다.

“레이.”

“내가 남색에 아직 반밖에 취미가 안 붙어서 말이다.”

소름이 돋은 팔을 득득 문지르며 대꾸했다. 지스카르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누운 채로 머리를 괴며 말했다.

“반보단 넘고 8할 정도는 취미가 생긴 것 같다만.”

“헛소리가 지나친데. 많이 봐줘야 6할?”

“그럼 7할쯤에서 합의해야겠군.”

“네놈이 많이 컸구나. 안면 근육이 굳어서 농담 같은 건 못하는 게 아니었나?”

실소를 지으며 지스카르의 턱 끝을 검지로 퉁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지스카르가 몸을 닦아주겠다며 바로 뒤따라 일어났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얼굴을 붉히고 실랑이를 했다. 잠시 후 겨우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대낮에 한바탕 한 것이라 아직 시간이 많았다. 지스카르도 적당히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그는 근처 테이블로 가서 물을 따라 내게 한 잔 권하고 자신도 한 컵을 비웠다. 잠깐 머물다가 다시 일하러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계속 여기서 쉴 생각인 것 같았다.

“오늘은 바쁘지 않은가? 하긴……, 애초에 나 때문에 에디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라 했었지. 지금 와서 보니 세상 현명한 결정이었군. 에디와 만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칼을 뽑고 주변을 초토화한 것을 봤을 때 말이다.”

내가 지그시 쳐다보자 지스카르는 무뚝뚝한 얼굴로 딴 곳을 보았다.

“뭘 못 들은 척하는 거냐?”

“…….”

“유치한 속내를 숨기는 데 그 뚱한 얼굴만 한 게 없지?”

“……회담 준비 때문에 실제로 바빴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쪽에서 준비할 것은 마무리가 되었고 당분간 크게 할 일이 없는 상태다.”

“한가하다는 거군.”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쉬고 있는 것이지.”

에드리히와 한판 싸우고 온 뒤로 지스카르는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나도 에디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곤 하던데. 에드리히 녀석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람 속을 뒤집는 기술이라도 얻은 모양이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바깥을 가리켰다.

“미첼 아카데미가 위치한 덕분에 여기 소펜 시가 아주 번화한데 한번 나가보겠느냐? 기분 전환이 될 수도 있다.”

“기분 전환은커녕 생각만 해도 속이 시끄럽구나. 구경꾼은 또 얼마나 몰려들 것이며, 짐이 거리로 나가겠다고 하면 경호 문제로 친위대 전원의 얼굴이 해쓱해질 것이다.”

“무슨 얼빠진 소리냐? 당연히 신분을 숨기고 잠행 나가는 것이지. 혹시 네 머릿속엔 호위 없이 나간다는 가정 자체가 없는 거냐?”

나는 세상 재미없게 생긴 지스카르의 얼굴을 뻔히 들여다봤다.

“너 설마 수행원 없이 황궁 밖을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겠지?”

말을 하고 나니 지스카르가 수행원을 따돌리고 밖으로 놀러 다니는 그림 같은 건 확실히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 드래곤의 힘을 빌려 미첼 아카데미를 잠깐 돌아다닌 것 외에는 아마 전무하지 않을까.

세상에 이제 보니 저거 완전 온실 속 화초 같은 놈이잖아? 내가 끔찍하다는 듯 얼굴 구기자 지스카르가 내 속을 읽은 듯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던필과 가끔, 크리스티안도 합류해 외유를 다닌 적이 있다.”

“아! 던필이 가자고 했겠군?”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괴짜에다 막무가내인 던필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거리 구경이라…….”

지스카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놀러 나가고 싶어서는 아니고, 글렌 백작이라고 신분을 숨기고 미첼 아카데미를 살펴보았던 것처럼 외부의 거리도 시찰해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럼 내일 일찍 움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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