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지스카르는 아베크 중립국에 도착할 때 엘 파셔의 황제로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갈색 망토를 구해 입고 옷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봄 날씨에 조금 유난해 보였지만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시기가 여름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렌턴 시 급은 되겠군.”
지스카르가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렌턴은 근 10년 사이에 급성장한 엘 파셔의 신흥 상업도시였다.
“아카데미라는 중립기관을 내세워 엘 파셔와 스트라스의 자원을 쪽쪽 빨아먹고 아주 번창하는 중이지. 하지만 아카데미 교수들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져서 국왕의 권한은 많이 축소된 것 같더군.”
“양대 제국 사이에 끼어 어차피 정상적인 왕권 행사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발 물러서 교육 국가로서 위상을 세우고 부가적으로 얻을 이익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지.”
“그편이 안정적인 처세로 보이지만, 국왕이 자기 손안에 있던 권력을 교수들에게 뺏기는 걸 눈 뜨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일단 나 같으면 안 두고 보지.”
나는 턱에 손을 얹고 씨익 웃었다. 지스카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까. 너라면 사익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할 것 같다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이 몸이 아베크 국왕이라면 학문에 전력 투자해서 교수들 앞에서 학식을 증명하고 스스로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겠다. 그럼 교수 놈들에게 끌려다닐 일도 없고 권력까지 양자를 모두 손에 쥘 수 있지.”
내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허세를 떨었더니 지스카르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씩 너의 오만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 몸 정도 되면 허세를 좀 떨어도 된다. 대부분의 허세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실현 가능하고, 사람이니 실패한 일도 있겠지만 임기응변으로 잘 무마시키면 그뿐이지.”
“공수표를 쓰는 것은 짐의 취향이 아니구나. 너는 스스로 만든 허세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 어떤 놈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몸이 공수표를 쓴 줄 모를 것이다. 아랫것들이 허세 가득한 윗전에 얼마나 열광하는데 네가 그 맛을 모르는군.”
“매사에 임기응변해야 하는 것이 피곤하지도 않은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틀린 말도 아니겠으나…….”
지스카르와 대화하다 보면 은근히 치고받는 재미가 있었다. 대부분의 대화가 이 몸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형태로 흘러가 버리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흐름은 확실히 신선하다.
지스카르도 말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주제에 내가 한마디 하면 잘도 받아치면서 길게 대화를 했다.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것도 대화를 흥미롭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거리를 다니며 잡담을 했더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날이 저물 즈음 예전에 에드리히와 잠시 방문한 적이 있는 주점을 발견했다. 잠깐 쉬어 가자고 말하자 지스카르가 눈썹을 살짝 끌어 올렸다.
“짐이 금주하라고 명했을 텐데.”
“또 되지도 않을 소리 한다. 잔말 말고 따라와.”
나는 지스카르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뻗어 주점 문을 열려 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갑자기 내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턱.
누군가 내가 잡으려던 문고리를 손으로 짚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드리히가 웃는 낯으로 문을 짚고 서 있었다. 나는 망연히 그를 보았고 한숨을 푹 토했다.
“하아, 이리될 것을 내가 예측 못 하다니.”
에드리히가 자기 입으로 아베크 중립국에 정보원을 깔아놓았다고 이야기했었다. 누구 눈치를 보는 녀석도 아니니 첩보를 받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고 훌쩍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에드리히는 호위를 수십 명씩 끌고 오진 않았다. 그는 예전에 만났을 때처럼 에반 하나만 대동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에반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반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둘이서 밀회라도 즐기고 계시나?”
에드리히가 비꼬듯 물었다. 내가 뭐라고 답하려는데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밀회 중이니 눈치껏 빠져주길 바란다만.”
나는 조금 의외라 지스카르를 쳐다봤다. 저런 식으로 뻔뻔하게 받아치는 것은 내 전문이다. 저놈이 저렇게 대답하는 수도 있는가 싶었다. 에드리히는 이야기를 듣고 입을 크게 비틀었다.
“그랬군. 밀회 중이시라니 당장 훼방을 놓아야겠는데?”
에드리히가 바로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마법으로 팔의 근력을 강화해 폼멜을 콱 찍어 눌러 검을 뽑지 못하게 했다. 이래 봤자 에드리히가 진심이라면 내 손 정도는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로 힘을 줘서 검을 뽑아봐라. 내가 네놈을 어찌하나 한번 확인을 해보든가.”
“…….”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에드리히는 검에서 손을 뗐다. 날 보는 동안 살기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살기등등한 그는 항상 그랬듯 내게만 무한히 호의를 보였다.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에드리히는 내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검에서 손을 뗐다. 에드리히는 호의적으로 날 보다가 교만하게 턱 끝을 들어 지스카르를 보았다. 지스카르도 무표정이었지만 분위기가 서늘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싸웠던 놈들이다. 길거리에서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이쯤에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주점 바로 앞에서 잠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주점 문이 열리며 오십대 중년인 일행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문 앞에 있는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은체를 했다.
“엇! 전에 뵀던 귀족 나리 아니십니까?”
“진짜네!”
에드리히와 주점을 방문했을 때 손님으로 있었던 자들인 모양이었다. 지스카르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네 친교 범위가 대단하구나. 이런 곳에 아는 자가 있단 말인가?”
“전에 여기서 에디와 술을 마신 적이 있어서.”
그의 질문에 대충 대답해 주었다. 중년인들은 한턱 거하게 얻어먹은 덕분인지 나는 물론이고 에드리히까지 굉장히 반겼다.
“여기 무섭게 생긴 나리도 계시는군요.”
“그때처럼 기분 좋게 한잔하셔야죠! 하하,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들이 주점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하게 문을 열면서 들어오라고 말했다.
“…….”
지스카르는 무표정이었지만 뭔가 불쾌하다는 분위기를 드러냈다. 그러기를 잠시, 언제는 나더러 금주하라고 그러더니 자기가 먼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놈이 뭐 하나 싶어 인상을 쓰는데 에드리히도 슬쩍 입을 비틀더니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두 놈이 다 들어가 버리니 나도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중년인 일행이 반갑다는 둥 약간 호들갑을 떨자 주점 주인도 우리를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그는 살벌한 에드리히는 은근슬쩍 피해 내 앞에 와서 딱 섰다. 상기된 얼굴을 보니 예전처럼 거금을 써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오늘은 조용히 술만 마시러 왔다. 시킬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그때 오너라.”
“예.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주인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웃는 낯으로 꾸벅 인사했다. 우리를 알아보았던 중년인 일행은 이쪽을 보더니 슬그머니 다시 주점 테이블에 앉았다. 나를 아는 손님을 중심으로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이번엔 돈 쓸 일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적당한 위치의 테이블로 먼저 걸어갔다. 에드리히가 느긋하게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를 녀석이라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는 테이블의 의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한 걸로 알겠다. 저기 앉아.”
“사양 않고.”
에드리히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지스카르는 마뜩잖은 분위기를 드러냈다. 에드리히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실 만큼 좋은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군소리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스카르가 앉는 것을 보고 나도 적당히 그의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랬더니 에드리히가 갑자기 와락 인상을 썼다.
“지금 어디에 앉으려 거지?”
에드리히가 뭐 하냐는 투로 탁자 위를 손끝으로 탁탁 쳤다. 나는 지스카르의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으려 한다만? 그 반응은 무엇이냐. 그럼 내가 장성한 동생 놈 옆에 나란히 앉아야겠느냐?”
저놈이 정말로 나를 형님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드리히가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으로 지스카르를 가리켰다.
“아, 그래? 짐도 그럼 정석으로 따져볼까. 막간에 얻은 남첩 놈이 귀여운 것은 알겠지만 장성한 아우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티를 내도 되는 것인가? 첩질이 뭐 자랑이라고?”
“……하.”
나는 잠깐 할 말을 잃고 낮게 소리를 냈다. 에드리히는 비틀린 표정을 누르고 내 반응에 의문을 표했다.
첩질이 뭐 자랑이냐는 스트라스식 사고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첩이 없는 귀족이 몇이냐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보통 스트라스인은 첩질을 부끄럽게 여기고 가능한 한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관념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칫 첩과 관련해 지저분한 소문이라도 돌면 그자는 사교계에서 매장되기도 했다. 여성들은 대외적인 활동에서 제약을 받긴 해도 최소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권한은 확실히 보장받았다.
그에 반해 엘 파셔는 정부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본처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첩을 데리고 다녀 그녀들이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 엘 파셔의 문란한 풍습 때문에 내가 덕을 보기는 했다. 지스카르와 공공연한 관계인데도 사교계에서 따가운 시선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관심을 끄는 말은 또 있었다. 나는 지스카르를 가리켰다.
“이놈은 황제 폐하시고 나라 안에 가장 높은 분이지. 엘 파셔에선 이런 관계이면 이 몸이 정부 취급을 받는데 네가 당연한 듯이 저놈을 나의 남첩이라 하니 그게 재미있군.”
내 말에 지스카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위쪽에서 언뜻 본 것이라 정확한 표정은 보지 못했다. 에드리히도 입을 다물고 별 반응이 없었다.
우지끈!
아니 그건 완전히 착각이었다. 갑자기 에드리히의 손끝부터 나무 탁자가 쫙 금이 가고, 이내 반으로 갈라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손끝에 힘을 조금 준 것만으로 탁자를 박살 내버리고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놀라울 만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콰직.
그가 무너진 탁자를 발로 밟아 다시 한번 부숴버리며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짐이 정말로 안일했지. 역시 기회가 되었을 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주점 내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전부 이쪽을 주목했다. 주인장도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에드리히의 난폭한 성정을 미리 전해 들어서인지 난데없이 탁자를 박살 낸 것치고는 주변 반응이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에드리히의 어깨를 붙들고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
“그만둬. 네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내게 엘 파셔의 황후나 되라며 비아냥거려 놓고 이제 와서 화를 내?”
“소문의 인물이 당신인 줄 알았다면 당장 전 병력을 북상시켜 엘 파셔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말이다.”
“이 몸인 줄 몰랐다? 다들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네놈은 그따위 짓을 하고도 몰랐다는 소리로 넘어가려 했고?”
노예 신분이었던 내가 4중 영창 마법사임을 알리고 드래곤을 내세워 대공이 되자 스트라스는 정신 나간 일이라고 비웃고 온갖 더러운 추문으로 나를 조롱해 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내가 황제에게 몸을 팔아서 작위를 얻었다는 소리였다. 당장 아젤로스도 비슷한 말로 나를 조롱한 바가 있다.
내가 불쾌하게 추궁하자 에드리히는 그제야 조금 조용해졌다. 어쨌건 에드리히를 진정시키는 것엔 성공한 것 같다.
도통 에드리히의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악감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모욕당했다고 또 불같이 화를 내는 걸까. 애초에 나를 가장 모욕하는 자는 그 자신인 주제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에반에게 한 번 더 시선이 갔다. 에드리히는 나를 닮은 에반을 일부러 학대하고 괴롭히고 있었다. 내게 그 사실을 들켜놓고도 에드리히는 보란 듯이 에반을 데리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일단 복잡한 생각은 접어놓고 주인장을 불러들였다. 그때 지스카르가 나를 대신해서 나섰다. 그가 주인장에게 돈을 몇 푼 건넸다.
“소란을 원치 않는다. 탁자는 일단 내버려두고 영업을 계속해라.”
“예, 나리.”
주인장은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지스카르를 곁눈으로 흘낏 보았다. 특별히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전에 보지 못했던 새 인물이 하나 끼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스카르에게 수습을 맡겨놓고 에드리히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더 이상 살기를 드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또 이런 식이면 술자리는 바로 파장하겠다.”
에드리히는 순순히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순순해서 하나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어쩌다 그 순하던 동생이 저런 위험천만한 놈이 되었는지.
근처에 원형 탁자가 있어 일단 그쪽으로 이동했다. 처음부터 자리싸움 없는 원탁에 앉을 것을 그랬다고 뒤늦게 혀를 찼다.
주인장이 술과 안주를 몇 가지 내왔다. 나는 숨도 안 쉬고 술 한 잔을 비웠다. 시원함에 답답한 속이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에드리히를 보며 이 기회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는 언제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
“형님이 죽고 1년이 좀 안 돼서?”
그의 대답이 딱 예상대로였다. 에드리히가 빈 잔에 술을 다시 가득 따라주었다. 나는 반을 비우고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의 태평한 얼굴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네 말인즉 성인이 되자마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 정도면 놀랄 만한 성취다. 그런데 왜 아무도 네가 소드 마스터인 줄을 모르지? 추측성의 소문이 돌고 있긴 하다만, 대부분의 엘 파셔인은 스트라스에서 퍼뜨린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 있단 말이다.”
나는 지스카르의 얼굴을 가리켰다.
“딱 이놈도 너와 비슷한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데 그것 하나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몸과 동격이라며 국가 단위로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었다. 스트라스엔 레브노아드이고 엘 파셔엔 지스카르? 어디다 애송이를 갖다 붙이냐고 비웃긴 했다만, 국익을 위해서 그 정도 여론전은 훌륭한 전략이 되기도 한다. 너도 저놈처럼 자기가 소드 마스터라고 사방에 으스대고 다녔어야 했어.”
손가락으로 코앞을 쿡쿡 가리키자 지스카르가 낮게 한숨을 쉬며 내 손을 아래로 당겨서 내렸다. 지스카르는 자기 힘을 과시하며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엘 파셔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소드 마스터임을 내세워왔고 일부러 오라 소드를 들고 마물 사냥을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에드리히는 내 잔소리를 들으며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교가 전부 끝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죽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검에 정진해 바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륙 최초로 4중 영창을 성공시켰던 당신에 비하면 시대마다 서넛 이상 존재했던 소드 마스터 정도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신이 살아서 계속 검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마스터가 되었을 거라고 다들 말했다. 짐의 성취가 매우 초라해서 차마 으스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목구멍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숨을 길게 내쉬며 일그러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전부 내 이야기로 돌아오는구나.”
“물론이지. 짐에게 형님을 빼면 남는 것이 없거든.”
에드리히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웃는 얼굴이 도저히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실 소드 마스터가 돼서 좋은 점이 없었던 건 아니지. 짐에게 강한 무력이 없었다면 형님의 복수를 명분으로 수시로 튀어나오는 반역도에게 바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아랫것들을 잡아 죽이는 데 이보다 좋은 능력도 없지.”
“아, 그랬느냐. 참 잘 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칭찬해 주었다. 이쯤 되면 그냥 자포자기다.
반 정도 남았던 술을 비우자 에드리히가 또 잔을 채워주었다. 과거에 그가 이렇게 술잔을 채워주곤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한 잔을 쭉 마셨다.
나는 에드리히의 속내 따윈 접어두고 어떻게 하면 스트라스 황제의 권위를 높일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지스카르가 정기적으로 행하는 마물 사냥을 쉽게 봤는데 가만 보니 이게 절묘한 한 수다. 녀석은 마물을 베며 소드 마스터로서 힘을 과시하고, 백성들은 마물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 직접 검을 들고 백성을 수호한 황제는 더욱 명성을 높이고.
나는 괜히 가만히 있는 지스카르를 지그시 째려보았다.
에드리히와 대화를 하며 다시 술잔에 입을 댔다. 그때 지스카르가 갑자기 내 손 안에서 술잔을 뺏어갔다.
“여기까지.”
“아니 왜……! 또 참견이군.”
“주량을 넘기기 직전이다. 주정은 너도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두 잔은 더 마실 수 있다. 당장 술잔을 도로 내놔.”
나는 짜증을 담아 빈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으며 기어이 내 술잔을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아직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저놈이 고집스럽게 만류하니 정말 한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나보다 지스카르가 내 몸 상태를 더 잘 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
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서 그냥 술은 포기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에드리히의 앞에서 그런 얼빠진 주정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스카르가 내 결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이 몸이 아주 네 명령을 잘 듣지?”
놈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기는 했는데 역시 뭔가 배알이 꼬여 한마디 해주었다.
지스카르와 대화하는 것은 유쾌하다. 하지만 불쾌한 점도 있었다. 놈은 대제국 엘 파셔의 황제이고 명령을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냥 습관적인 말투일 뿐 그의 명령 속에 이 몸을 억압하려는 의도는 없을 수도 있었다. 다만 내가 아무리 작위를 얻었다 해도 황제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하고, 엄연히 상하가 있는 상태에서 명령조의 말투를 듣는 것은 대단히 불유쾌했다.
그때 불쑥 에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선황 폐하조차 레비 형님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선황께서는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형님이 결단을 내린 뒤로는 한마디도 이견을 내지 않으셨다. 사실상 스트라스의 전권은 형님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선황께서 내리시는 어명은 기껏해야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독촉하는 정도?”
지스카르가 약간 고개를 들어 에드리히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드리히는 주먹을 빠득 움켜쥐었다.
“네깟 놈이 그에게 명령을 하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어디서 근본도 없는 북방의 야만인 따위가.”
“…….”
지스카르의 표정이 애매했다. 나조차 기분이 참 묘했다. 엘 파셔에 살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을 에드리히가 아까부터 다른 입장에서 지적하는 것이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술은 됐다. 내가 그만 마시겠다고 결정한 것이니까.”
언쟁이 거칠어질 것 같아 이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싸울 듯 말 듯 긴장감이 돌았지만 어떻게 용케 대화를 나누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두 놈 사이에 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안주만 주워 먹는 것을 보고 에드리히가 주인장을 불러 새 안주를 더 주문했다. 아베크 중립국의 요리는 스트라스의 음식과 비슷해서 맛과 향이 풍부한 편이었다. 아베크 중립국의 요리를 좀 더 맛보고 싶어서 에드리히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에드리히가 뭔가 느낀 듯이 말해왔다.
“엘 파셔에서 식사는 제대로 하는가? 그쪽 음식이라면 아주 질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기를 한 점 포크로 찍어 먹었는데 톡 쏘는 향과 맵싸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살짝 감동하면서 입을 열었다.
“음식이 너무 입에 안 맞아서 고생하고 있긴 하지.”
“너는 음식을 너무 자극적으로 먹는다.”
내 말에 지스카르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나도 그 즉시 놈의 말을 받아쳤다.
“네놈들이 싱겁게 먹는 거야.”
“맞는 말이다. 엘 파셔에서 만드는 음식치고 제대로 된 것이 없지.”
에드리히까지 가세해서 지스카르가 열세다. 진실이 그런 거니까 이 부분만큼은 어쩔 수 없다. 지스카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는가 싶던 그때 지스카르가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에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스트라스 출신 요리사가 열 명이나 대기 중이다. 그들이 너를 위해서 향신료를 들이부은 이상한 음식을 매끼 대령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엘 파셔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고 말한단 말인가?”
“전담 요리사는 기본 중의 기본인데 뭘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거지? 연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어김없이 엘 파셔 음식이 등장하는데 거기에 입맛을 맞추기가 얼마나 고역인지 아느냐. 그런데 향신료를 들이부은 이상한 음식이라니?”
그동안 너무 맵고 짜게 먹는다고 점잖게 말하더니 저것이 본심?
지스카르가 숨을 돌리더니 또 말했다.
“그리고 네가 짐의 말을 잘 듣는다고? 네가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
지금 언제 이야기를 다시 가지고 오는 거냐? 한참 전에 술잔을 뺏으면서 나온 이야기잖아.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쨌건 태클을 걸어오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삐딱하게 몸을 기울여 지스카르의 턱 아래를 검지로 톡톡 치며 말했다.
“이 몸이 얼마나 순종적인지 봐라. 네 명령대로 규정 위반 사항도 시정하고, 사치도 줄이고, 뇌물수수도 중단하며 조신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으냐.”
“그 부분은 짐의 명령 여부를 떠나 네가 당연히 삼가야 할 행동인 것 같다만.”
지스카르가 턱 아래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네놈 기준에서나 당연한 일이지. 이 몸이 어째서 그런 시시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지? 대범하게 이 몸에게 전부 투자해! 마정석 광산 열 개 정도는 내게 바치라 이 말이다!”
아예 지스카르의 턱 끝을 확 잡아 끌어당기며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맞은편에서 술잔이 날아왔다. 잔이 정확히 지스카르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바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챙그랑.
목표를 잃은 술잔이 건너편 테이블 의자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이 놀라서 또 이쪽을 봤다. 나는 인상을 쓰고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너 진짜…….”
에드리히가 새로운 잔을 다시 쥐고 지스카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이 그렇게 귀여운가?”
“뭐라?”
“당신이 저놈을 너무 귀여워해 주니 짜증이 치밀어서 말이지.”
무슨 소리야. 아까 그 대화의 어디가 귀여워해 주는 거로 보인다는 거냐?
와그작.
그때 에드리히의 손아귀에 든 유리잔이 반으로 부서졌다. 에드리히가 갑자기 탁자를 밟고 올라서며 손에 든 유리 조각으로 지스카르를 공격했다.
지스카르는 앉은 상태에서 옆으로 물러나며 피했고 대신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살짝 잘려나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에드리히의 목표는 지스카르가 아니라 그 모자였다. 에드리히는 모자를 확 움켜쥐고 손목을 꺾어 유리 조각으로 찢어버렸다.
모자가 벗겨지며 지스카르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다시 얼굴을 가리려 해도 모자가 완전히 찢어진 상태였다. 에드리히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거창하게 행렬을 끌고 왔으니 그쪽을 알아보는 눈이 아주 많겠지. 그 웃기지도 않는 망토는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일 테고?”
에드리히는 개별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도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에드리히가 말한 대로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손님 중 하나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곧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에, 엘 파셔 황제…….”
“뭐야. 설마.”
“나도 그때 행렬이 왔을 때 나가서 봤었는데.”
“진짜로……?”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확신이 침묵으로 바뀌어 내려앉았다. 지스카르는 망토를 아예 벗어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무표정이었으나 은근하게 불쾌한 기세가 전해졌다.
“이런 짓이 재미있나 보군.”
“네놈을 엿 먹이는 일인데 즐겁다마다.”
에드리히가 탁자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며 대꾸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처음부터 이 구성으로 술 같은 걸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술자리를 접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려 해도 지스카르가 얼굴을 드러낸 상태로 거리를 걸으면 주변의 이목을 엄청나게 끌 것이다. 수행원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인파가 몰리고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스카르는 엘 파셔의 황제 폐하시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간 그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테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한숨을 쉬며 주인장을 불렀다.
“하아. 얼굴을 가릴 만한 옷가지가 있느냐. 아니, 그에게 누가 쓰던 헌것을 뒤집어씌우기도 그렇고.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서 새것으로 모자가 달린 망토를 구해와라.”
“아……, 예……!”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주점 안에서 대기다.”
나는 주위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명령했다. 누구 하나라도 밖으로 나가 황제를 봤다고 소문을 퍼뜨려 사람이 몰려들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주점 주인이 서둘러 내가 시킨 대로 옷을 구하러 뛰어나갔다. 거리가 번화하니 망토 정도는 금방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점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쩐지 다들 지스카르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손님들은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자기 테이블의 술도 마시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려 황제가 행차하였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지스카르가 팔짱을 끼자 사람들이 별일 아닌데도 흠칫거렸다. 지스카르는 대단히 불쾌해 보였다.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식기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이 상태로는 대화도 할 수 없다. 편하게 여가를 즐기려고 나온 것인데 일이 전부 뒤틀렸으니 짜증이 날 만했다.
지스카르가 짜증이 난 만큼 에드리히는 이 상황이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는 태연히 술을 따른 다음 지스카르에게 내밀었다.
“옷이 올 때까지 시간이 있지 않은가. 어때? 한 잔 들지?”
지스카르는 지그시 에드리히를 응시했다.
“그쪽이 권하는 술은 평생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스트라스 황제.”
자기 신분이 드러난 지스카르가 일부러 에드리히의 신분을 언급했다.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드리히가 먼저 시비를 건 것이 사실이지만 지스카르까지 그에 한 손 거드는 중이다.
당연히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놈을 쳐다봤다. 엘 파셔 황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놀랍고 신기한데 그 옆에 있는 놈이 심지어 스트라스 황제란다. 어안이 벙벙할 만하지.
나는 그냥 놈들이 어디까지 가나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계속 뜯어말리기도 이젠 피곤하다.
에드리히가 술잔을 내려놓고 대꾸했다.
“그건 복수라고 하는 짓이냐? 짐은 네놈과 달리 신분이 드러나는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만.”
“당연히 그렇겠지. 그간 네가 보여주었던 행동에서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굳이 네 신분을 언급한 것은 너에게 짐 앞에 설 자격을 주기 위해서다.”
“자격?”
“네 꼴이 어떤지 잘 봐라. 어전에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무뢰배 그 자체다. 주위 시선이 따갑지도 않던가?”
웬 놈이 황제에게 대드는가 싶어 애매하게 쳐다보았던 사람들이 흠칫하면서 찔린 표정을 지었다.
에드리히는 잠시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다음 순간 지스카르가 앉은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의 발이 닿기 직전에 지스카르가 먼저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며 의자를 에드리히 쪽으로 던지다시피 밀어냈다. 발길질 한 번에 묵직한 나무 의자가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힘에 사람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이거 예상외로 입을 잘 터는군? 체면 차린다고 슬슬 도망이나 치던 주제에 말이다.”
에드리히가 빈정거리면서 얼굴을 지스카르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스카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갑자기 에드리히의 얼굴을 뭉갤 것처럼 팔을 옆으로 내려쳤다. 에드리히는 즉시 얼굴을 빼며 물러났고 지스카르의 팔이 뒤편의 나무 벽을 내려쳤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나무가 다 부서지고 돌벽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한 번 더 놀라며 ‘이야’, ‘우아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높으신 분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고 눈앞의 광경이 흥미진진해 죽겠다는 얼굴이다.
그들의 심정이 십분 공감되었다. 세상에 어디서 이런 구경거리를 또 보겠는가. 나는 엉망이 된 탁자 위에서 과일 하나를 주워 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그래, 둘이서 열심히 싸워봐라.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비루한 이 몸이 무슨 힘으로 위대하신 황제 폐하 두 분을 말리겠는가.”
지스카르와 에드리히가 서로 대치하다 말고 이쪽을 보았다. 지스카르는 쓰게 말했다.
“……진짜 힘이 없으면 그런 소리를 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작작 하란 소리다! 힘만 세가지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놈들이 막가겠다니 나도 막가기로 했다. 이제 와서 나 하나 보탠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어.
내 으름장이 통했는지 에드리히는 웃는 낯으로 어깨를 한차례 들썩이며 물러났고, 지스카르도 한숨을 쉬며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소란이 가라앉고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숨 막혀 죽겠다는 얼굴을 할 때쯤 주점 주인이 망토를 구해서 돌아왔다. 그는 아까보다 한층 엉망이 된 주점을 보고 기겁했다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조심스럽게 지스카르에게 망토를 갖다 바쳤다.
지스카르가 망토를 걸치고 얼굴을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스카르와 에드리히 두 놈을 쫓아내듯 먼저 밖으로 밀어내고 잠시 입구에 서서 주점 내의 손님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 일은 못 본 셈 쳐라. 윗전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녔다가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것이다.”
대충 으름장을 놓고 나는 주점 밖으로 나왔다. 이래 봤자 소문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하긴 소문이 퍼져 봤자 두 놈 황제가 아주 사이가 나쁘더라는 정도? 스트라스와 엘 파셔의 황제가 사이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 별문제는 없겠는걸.
밖으로 나오니 지스카르와 에드리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놈은 엘 파셔 황제시고, 한 놈은 스트라스 황제다. 어쩌다 이런 기막힌 구도 가운데에 끼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자.”
그만 미첼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다.
한동안 대화 없이 거리를 걸었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에드리히가 불쑥 날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쯤 스트라스로 돌아올 셈인가? 귀환 일정도 슬슬 짜야겠는데.”
저놈은 마지막까지 황당한 짓만 한다. 나는 기가 막혀서 에드리히를 쳐다보았다.
“뭘 아무렇지도 않게 개소리냐? 돌아갈 생각 같은 건 없어.”
“당신은 레비 형님이 아닌가?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스트라스를 두고 엘 파셔 놈들과 섞여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에드리히의 질문에는 중의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녀석은 내가 레브노아드가 맞는지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또한 레브노아드가 맞다면 스트라스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사실 에드리히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온전히 레브노아드 황태자라면 말이다.
“나는 레브노아드이지만 레브노아드가 아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오래전에 독차를 마시고 죽었다.”
내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순간 에드리히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보았다. 역린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굳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에드리히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의 나는 잘 끼워 맞춰봐야 죽은 전 황태자의 사생아 정도에 불과하다. 너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면 간신히 황족 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그 신분으로 스트라스로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황제의 총애를 입고 있으니 일단 황태자나 황자 놈들이 내게 적의부터 드러내겠구나. 내가 네 자식들과 피 튀기며 싸우는 꼴을 보고 싶으냐?”
그 말을 내뱉고는 씁쓸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황권을 잡기 위해 형제와 친족을 무수히 죽인 일에 나는 웃기게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친족 살해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내가 비루한 노예 신분에 안주하여 세월을 보낸 것도 그들의 품에 있는 동안에는 피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던 에드리히가 어느새 굳은 표정을 풀고 크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렇지.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군.”
“……뭐?”
“형님은 강인한 분이셨고 대단히 두려운 분이었다. 가끔 감상에 빠져 흔들리기도 했으나 때가 되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원하는 바를 행하였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죽였다. 후환이 될 자는 태아까지 끄집어내 목을 분질렀다. 필요하다면 당신은 또 같은 일을 하겠지. 과거엔 선황께서 조력자가 되어주셨으니, 이번에는 짐이 조력자가 될 차례인가.”
에드리히가 과거사를 언급할 때마다 계속 신경을 쓰는 것도 피곤해서 그냥 웃어넘겨 버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목구멍 끝까지 욕이 치밀어 올랐다. 어금니를 빠득 깨물며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원치 않는 일을 앞두고 좌절할 때도 있으나 순식간에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평정을 찾는다. 그리고 냉정한 눈으로 당신이 선결해야 할 문제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에드리히가 어서 가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아, 레비 형님.”
그때 지스카르가 뒤쪽에서 내 허리에 팔을 둘러 거칠게 끌어당겼다. 에드리히만 보면서 넋을 놓고 있었던 탓에 무방비하게 균형을 잃고 놈에게 끌려갔다.
체격의 차가 있어 나는 작은 동물이라도 된 듯 지스카르의 품에 완전히 안겨버렸다. 항상 무뚝뚝하던 지스카르가 격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노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저자도. 네가 사랑하는 스트라스조차도.”
“지스카르.”
“짐이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지스카르가 에드리히와 칼싸움을 하고 주먹질까지 했지만, 솔직히 진심이 되어 대응했다면 그 정도에서 끝났을 리가 없다. 그는 에드리히와 마찰을 빚지 않으려고 최대한 참고 있었다. 나라 간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무엇보다도 내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무식한 북부 놈이 계속 당신을 건드리도록 허락할 건가? 보기가 좋지 않은걸.”
에드리히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물었다. 불쾌하게 입가를 들어 올리는데 얼굴의 상처가 무섭게 도드라졌다. 그는 도저히 내가 알던 마음 약한 에디와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강렬한 살기를 품은 두렵고도 절대적인 스트라스의 황제였다.
나는 허리를 붙들고 있는 팔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스카르와 자연히 눈이 마주쳤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저 얼굴이 훨씬 더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지스카르를 가볍게 밀어냈다. 지스카르는 잠시 망설였으나 팔에 힘을 빼고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에드리히를 보며 말했다.
“에디. 네가 온종일 과거사만 입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눈을 똑바로 뜨고 봐라.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죽었고,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또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이런 이야기만 꺼내면 에드리히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광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동안 노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의 금발과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가 말했다.
“아니, 당신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드리히는 고집스럽게 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에서 한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반에게 에드리히를 제대로 보필해 숙소까지 모셔가라고 말했다. 그가 떠난 후에 나도 숙소로 되돌아왔다. 내가 머물던 숙소가 아니라 엘 파셔 황제가 머무는 건물로 당분간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방에 도착한 지스카르는 탁자를 짚고 뭔가 생각에 잠긴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묻지 않고 소파에 앉아 쉬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지스카르가 탁자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정적을 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구나 싶어 시선을 주었다.
“짐은 너에게 짐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세습 가능한 대공 작위를 주었고 남부의 너른 영지를 하사했으며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자는, 스트라스 황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하는구나. 너는 황제가 될 몸이었고 짐이 주는 그 어떤 권력도 너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턱을 괴고 나태하게 있던 나는 놈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자세를 적당히 바로 했다.
팔을 뻗어 지스카르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에드리히에게 몇 마디 들었다고 그새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놈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내가 오만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사내로 태어나 가장 높은 자리에 욕심이 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사실 나는 그다지 황제가 되지 않아도 좋았다.”
지스카르가 가까이 와서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노비스 형님이 나를 신임하고 받아주었다면 나는 그의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성질 죽여가면서 황제가 된 형님에게 감히 잔소리도 하고 그가 바르게 나라를 통치하도록 도왔겠지. 하지만 형님은 내가 가진 특별함을 경계했고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 했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이고 스트라스의 황제가 되고자 했지.”
지스카르를 마주 보면서 나는 물었다.
“너는 어떠냐. 이 몸을 경계하는가. 내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지스카르가 진심으로 친애를 담아 내 손등에 키스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잘생긴 턱을 손으로 잡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게 했다.
“그럼 된 거다. 조금 아니꼬운 감도 있지만, 나는 너의 신하가 되어줄 수도 있다. 네 밑에서 나라를 꾸리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방식대로 국정을 잘 운영하고 있으니 내 도움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이 몸과 통치 방식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엘 파셔는 이미 완벽하게 기틀이 잡혀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랜만에 지스카르의 얼굴을 한참 동안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북부인 특유의 흰 얼굴에 머리카락은 검고,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크리스티안만큼 대단한 미남은 아니지만 강인하고 선이 굵은 얼굴은 어디서든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수준이다. 특히 얼굴선과 턱선이 아주 완벽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해서 자꾸 턱에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의 훌륭한 얼굴선에 시선을 두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엘 파셔에서 태평하게 지내는 것이 뜻밖에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나라에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마법 연구나 실컷 하고, 네놈과 하찮은 말싸움이나 하면서.”
“네가 엘 파셔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라곤 할 수 없지. 스트라스인은 본능적으로 엘 파셔 놈들을 싫어하게 만들어져 있거든.”
내가 웃으며 대꾸하자 지스카르가 불쑥 내 목덜미를 끌어당겨 뺨과 목에 깃털 같은 키스를 했다. 입술이 닿는 것이 간지러워서 몸을 조금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보고 놈이 소파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아예 날 타고 올라왔다. 이런 데서 건드리지 말라고 싫은 척을 했지만 금방 입을 열어 깊은 키스를 받아들였다.
놈이 지분대는 것을 받아주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스트라스를 조국으로 여기고 있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타지에서 평생 눌러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음침한 소리를 하는 거냐.”
“짐의 아래서 네가 만족할 수 있다고? 네가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짐은 잘 안다.”
“이 몸은 한때 나무뿌리나 씹으며 평생 노예로 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결국 그런 건 무리였지. 굴욕을 참지 못하고 드래곤까지 찾아내서 작위를 얻지 않았느냐.”
“잘 아는군. 이 몸이 황위 찬탈을 계획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걸 고맙게 여기시지.”
에드리히가 계속 귀환을 독촉해 온 덕분에 오히려 내가 엘 파셔를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내 손으로 얻어낸 작위와 영지, 황궁 마탑에 벌여놓은 수많은 연구 일지. 그 모든 것을 이젠 쉽게 버리기가 아쉬워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존재는 스트라스에 큰 내분을 일으킬 것이다. 스트라스를 위해서라도 엘 파셔에 남는 것이 바람직할 터였다.
그래……. 나는 아마도, 평생 엘 파셔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짐의 곁에 있거라. 너의 욕망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짐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그럼 마정석 10만 갈론.”
놈이 애절하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손가락을 세우며 선물을 달라고 말했다.
“……너무하는군.”
지스카르가 괴로워하며 대꾸했다. 놈을 끌어안고 소리 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