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평화회담이 바로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스트라스 측은 계속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응답을 주지 않았다. 정말로 여기까지 와서 모든 것을 엎어버릴 셈인지 걱정이 깊어졌다.
나는 며칠간 청강도 듣지 않고 에드리히에게 관련 문제에 대한 확답을 요구했다. 에드리히는 웃으며 회담에 응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에드리히는 내게 관대하게 굴었으나 항상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도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러나. 당신이 좋아하는 어린양고기를 준비해 두었는데.”
에드리히의 권유에 그의 거처에서 저녁 식사까지 해버렸다. 에반의 일을 알고 에드리히와 다시는 말도 섞지 않을 것처럼 돌아섰는데 다시 어영부영 놈과 어울리고 있었다. 에드리히가 멋대로 구는 것이야 항상 있던 일이다. 이건 내가 냉정하게 에드리히를 잘라내지 못한 탓이다.
에드리히가 턱을 괴고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제 슬슬 스트라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평화회담 진행이나 제대로 하거라.”
대화가 계속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에드리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드리히와 일별하고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시라크를 만났다. 아젤로스 3황자도 동행 중이었다. 그런데 아젤로스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아젤로스가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폐하를 뵙고 오셨습니까?”
“그래, 회담 문제로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폐하께서 자주 대공 전하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
아젤로스는 길게 끌지 않고 자신이 왜 그렇게 우울한 기분인지 솔직하게 심정을 이야기했다.
“보셨겠지만 폐하께서는 저 같은 것은 본 척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동안은 이를 크게 속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선 모든 자식에게 평등하게 무심하셨으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 당신을 특별하게 여기며 매일 시간을 내주고 계신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다시 속상한 마음이 드는군요.”
아젤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라크도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시라크도 아비에게 외면당한 적이 있다. 지금 보니 둘의 처지가 무척 비슷했다. 하지만 황실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딱히 공교롭다고 말할 일은 아니다.
“모든 자식에게 평등하게 애정을 나눠 준 황제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느냐. 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아젤로스는 가만히 내 말에 귀 기울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치기 어린 모습도 가끔 보여주지만 아젤로스는 기본적으로 진취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나이에 시라크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철이 늦게 들어서 그렇지 지금은 시라크도 제법 의젓했다. 시라크가 아젤로스에게 기분전환을 위해 하루 정도 쉴 것을 권했다.
“아젤로스 전하,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럴까. 집중도 잘 안 될 것 같고.”
아젤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마는 어떤가?”
내 권유에 두 사람이 날 바라보았다. 승마를 싫어하는 스트라스 황족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스트라스에는 평원이 많다. 탁 트인 녹색의 평원을 보며 말을 달리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아젤로스가 예상대로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왔다.
두 사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나도 간만에 승마에 즐기기로 했다. 항상 그래 왔듯 크리스티안과 던필, 그리고 체르도와 모시스 경을 포함한 스트라스 기사 다섯 명이 호위로 따랐다.
체르도를 본 아젤로스 3황자가 정중하게 예를 차리며 인사를 건넸다. 체르도는 과거 엘 파셔와의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모시스도 그렇고 황태자 친위대에 소속되었던 기사들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 본국에서 상당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강력한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황제 폐하를 수행해야 할 기사들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자리를 비우게 만들어도 될지 모르겠군.”
친위대장인 체르도를 비롯해, 유능한 기사들을 내가 호위라고 끌고 다니는 것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걸렸다. 체르도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저에게 전하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체르도가 내게서 레브노아드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검 스승이고,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최측근. 내가 그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도 내 일에 과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감정을 이해할까. 하지만 아무리 내 존재가 눈에 밟힌다 해도 체르도가 방금 한 말은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다.
“중요한 일이 없긴 왜 없느냐. 황제의 친위대가 당연히 황제 폐하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해야지.”
“지금 저에게 최우선은 당신이십니다.”
“…….”
체르도는 굳은 얼굴로 끝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체르도가 내 안전에 과민반응하며 에드리히에게 무례를 범하는 광경을 몇 번 보았다. 나는 체르도의 뒤에 서 있는 모시스나 다른 눈에 익은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체르도의 발언에 동조했다.
나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뭐가 이렇게 무례하지?
대륙의 절반을 통치하는 만인지상 스트라스의 황제에게 어떻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황제의 친위기사란 자들이.
“이는 폐하께서도 윤허한 일입니다.”
“……그래.”
에드리히 본인이 시켰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긴 했다.
나는 크리스티안과 던필을 보았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도 지스카르가 자기 핏줄보다 신뢰하는 측근 중의 측근인데 요 며칠 동안 내 개인 호위로 전락해 있었다.
“네놈들도 친위대로 복귀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 때문에 맥스 경이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저희라도 전하의 곁에 함께하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서 마음을 놓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래, 여기도 황제 놈이 시켜서 날 쫓아다니고 있는 것이지. 나는 괜히 못마땅해서 무고한 크리스티안을 붙잡고 한마디 더 했다.
“엘 파셔도 아니고 먼 타국 땅에서, 황제를 호위해야 할 가장 큰 전력 둘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워도 정말 상관없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그래서 야간 보초는 가능한 한 제가 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낮엔 날 따라다니다가 밤에 보초를 서면 잠은 언제 자고?”
던필이 이때다 하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공 전하! 사람이 잠은 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던필과 교대로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보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 업무인데 타국인지라 폐하의 안전에 신경을 안 쓸 수도 없고. 크으, 본국에 돌아가면 그 즉시 한 달짜리 휴가계를 써버릴 테다.”
크리스티안이 이를 뿌득 갈며 던필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스트라스 기사들도 보는데 어디서 자꾸 헛소리냐고 진심으로 정색하고 있었다.
내가 지적할 필요도 없이 크리스티안은 과할 정도로 성실했다. 던필도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황제의 측근답게 책임감이 있었다. 이게 당연한 일인데, 에드리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상념을 털어내고 일행에게 슬슬 출발하자고 말했다.
미첼 아카데미가 위치한 소펜 시의 서쪽에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기왕 나온 것 풍경이나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으로 강가를 목적지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얼마간 말을 달리다가 웃음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아젤로스가 시라크와 무슨 농담을 주고받았는지 그 또래 사내애들답게 킬킬 웃고 있었다. 내가 둘을 소개해 줬지만 저렇게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는 정말 짐작도 못 했다.
흐뭇한 기분이 되어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을 보았다. 좌측으로 엠버 산맥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아베크 중립국은 주변에 산이 많아 스트라스와 같은 탁 트인 평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낮은 풀이 가득한 녹색의 아름다운 대지가 아쉬웠다. 그래도 승마를 즐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고삐를 고쳐 쥐고 말의 속도를 더했다. 내가 먼저 치고 나가자 다른 자들도 말을 재촉해서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몰라도 시라크나 아젤로스는 뒤처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목적지를 말해두었으니 상관없겠지. 이래서야 보호자 자격 미달일지도.
세 시간 정도 말을 달려 목적지인 강가에 도착했다. 일부러 길을 빙 돌아왔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고, 원래 강까지는 3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오랜만이라 내가 너무 기분을 냈나.”
지친 말을 강가로 몰아가며 시라크와 아젤로스를 쳐다봤다. 둘의 얼굴이 해쓱했다. 먼저 강가로 향해도 될 텐데 어설픈 승마 실력으로 굳이 날 쫓아오려 하다가 저렇게 녹초가 되어버렸다.
크리스티안이 말에서 내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고강한 기사님인지라 뒤쪽의 꼬맹이들과는 달리 오래 말을 달리고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이렇게 승마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한 바퀴 더 돌아보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일찍 들어가야지. 애들도 있으니.”
내가 손사래를 치니 뒤에서 던필이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면서 또 애들이라 하시는군요.”
“내가 늙은 놈이 취향이라는데 네놈이 또 참견이로군?”
“던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말이 지쳤으니 바로 강으로 데려가서 물부터 먹여라.”
“네에, 알겠습니다, 대장님. 대공 전하도 말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지친 말을 돌보는 동안 크리스티안, 던필과 잡담을 나눴다. 체르도도 바로 가까이에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아마도 체르도는 애매한 거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레브노아드 전하께서도 승마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바쁘셔서 시간을 자주 내기 힘들었지만, 가끔 멀리 평원까지 나오셔서 날이 저물 때까지 승마를 즐기셨지요.”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희 쪽에 인원의 여유가 있으니 아젤로스 전하 쪽에 기사를 두 명 남겨서 호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소소한 일은 모두 맡기시고 좀 더 승마를 즐기길 원하신다면 그리하십시오.”
체르도의 권유에 크리스티안이 표정을 약간 굳혔다. 두 사람이 은근히 경쟁하듯이 행동하는데 중간에 낀 내가 아주 난감했다.
“권유는 고맙지만 거절하지. 혼자 즐기겠다고 둘을 내팽개쳐 두고 가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군.”
체르도는 나의 거절이 다소 아쉬웠는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보며 잠시 동안 침묵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바로 들고 말했다.
“전하께 어려운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무엇이지?”
“지금, 잠시 시간을 내셔서 저와 대련을 허락해 주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무슨 대련이냐며 경계를 표했다. 체르도가 특이한 요구를 해오니 시라크와 아젤로스도 피곤함을 잊고 눈을 반짝이며 이쪽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체르도가 정중하게 몸을 낮추고 말했다.
“스트라스의 기사인 제가 대공 전하께 대련을 청한 것이 알려지면 뒷말이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보는 눈도 없고,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공 전하. 부디 저에게 전하의 마법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주십시오.”
체르도가 왜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며칠 전 두 놈 황제를 뜯어말린다고 4중 영창 마법을 쓴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 마법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요청을 받아주었다.
“어려울 것도 없지.”
내 허락에 체르도는 크게 기뻐했다. 스트라스의 다른 기사들도 비슷하게 표정이 환해졌다.
사람들이 싸울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아젤로스 전하, 뒤로 더 물러나시지요.”
“뭐냐, 시라크.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다들 어디까지 가는 거야?”
“하긴 너 전하는 대공의 마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너 전하? 너면 너고, 전하면 전하지, 그건 무슨 호칭이지?”
“너라고 말하려다 신중하게 전하라고 말을 바꾼 거잖아.”
“너 존대 안 하냐?”
둘이 아옹다옹하면서 멀찍이 물러난 뒤 완전히 구경꾼 상태가 되어 자갈밭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앉은 뒤로도 뭐라고 싸우는데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애들 기분 전환시켜 주겠다고 나와놓고 어쩐지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는 것 같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고개를 돌려 체르도를 응시했다.
“먼저 오겠는가?”
“아닙니다.”
“그럼 이쪽에서 가지.”
가볍게 마법 시동어를 읊자 전방으로 안개가 쫙 깔렸다. 두 번째 주문에 안개가 빠르게 얼어붙어 갔다. 체르도가 쥐고 있던 검끝에도 습기가 들었다가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창! 촤창!
칼날에 피해가 가기 전에 체르도는 바로 오라를 발현시켰다. 오라 소드로 가까이 몰려드는 얼음을 베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아마도 지스카르라면 얼음 장막 따위 족족 다 때려 부수고 일직선으로 내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나는 전력으로 거리를 벌리며 네 개의 주문을 모조리 동원해서 대량으로 마법을 퍼부었을 테고.
하지만 체르도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최근엔 지스카르하고만 대련을 했기 때문에 느낌이 색달랐다. 솔직히 말해서, 꽤 여유가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얼음으로 작은 송곳을 다수 만들어 가까이 접근하는 체르도의 다리를 겨냥해서 뿌렸다.
탓.
하반신에 오라를 실어 체르도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땅을 박찰 때마다 흙바닥이 깊게 패었다. 마법이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얕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체르도가 코앞에 들이닥치기 직전에 굵직한 얼음창을 하나 만들어 던졌다. 체르도는 피하지 않고 오라 소드로 창을 꺾었다.
오라를 연이어 소모한 탓에 체르도의 검에서 빛이 사라졌고, 일시적으로 일반 철검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나도 검을 들어 체르도의 공격을 막았다.
캉! 카캉!
“오라를 기본적인 수준만큼만 다룰 수 있게 되어도 검의 활용도가 크게 올라갈 것입니다.”
검을 맞대면서 체르도가 내게 충고했다. 지스카르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애송이 놈이 어디서 충고냐고 당장 한소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체르도는 어릴 적 나의 검 스승이니 적어도 검에 관한 한은 내게 충고할 자격이 있었다.
상대가 오라 소드를 들었을 경우 내가 쥔 검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내가 아무리 잘 막아내도 이 손의 철검 따윈 오라 앞에서 종이처럼 두 동강 나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나는 마법을 난사해 상대의 오라를 소진한 다음 그때야 검을 들었다.
만약 내가 오라를 조금이라도 사용할 줄 안다면 귀찮은 사전 작업이 없어도 오라 소드를 잠깐 막아내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 주문을 한 개 이상 아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좋은 충고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나 오라를 발현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캉! 카카칵!
몇 번 검이 교차하며 오갔다. 체르도가 내 검을 차분히 살피면서 말했다.
“본인에게 그만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검 훈련할 시간에 마법 연구를 한 시간 더 하겠다, 그런 생각은 아니시고요?”
저런, 이렇게 사람 정곡을 함부로 찌르면 쓰나.
“레브노아드 전하께서 그러셨듯이 대공 전하께서도 검에 재능이 대단하십니다. 저의 간절한 청이오니, 하루 중 한 시간이라도 검을 위해 시간을 내주십시오.”
“싫은걸.”
나는 옛날에 그랬듯 이번에도 눈웃음치며 툭 대꾸했다. 체르도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파아아앗!
체르도의 검에서 다시 백색 오라가 피어올랐다. 일찌감치 대치를 풀고 거리를 벌렸어야 했는데 말을 주고받느라 너무 오래 근접전을 이어갔다.
오라 소드에 내 검이 두 동강 나기 직전이었다. 나는 몸을 낮추고 검을 옆으로 당겼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간격을 맞추며 아래에서 위로 교묘하게 끌어당겼다.
스렁.
강철로 된 검면이 오라 소드에 닿아 대패에 밀린 것처럼 얇게 벗겨져 나갔다. 묘기 부리듯 체르도의 공격을 흘려내자 순간 그의 얼굴에 희열이 피어올랐다.
“역시……!”
응용력이 대단하시다, 역시 재능이 있으시다, 아마도 이런 소리를 하려던 게 아닐까.
‘전하께서는 검을 드셔야 합니다!’
친숙한 그의 음성이 바로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닐 텐데.”
체르도가 감상에 빠졌듯 나도 감상에 잠겼다. 하지만 대련 중에 이런 짓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바로 들고 그를 위해 가볍게 경고했다.
내 양쪽 어깨 위로 불길이 세 개가 맺혔다. 이내 화살로 변화한 불길이 체르도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마법을 날린 직후 검을 빼며 뒤로 멀리 물러났다.
소드 마스터처럼 압도적으로 빠른 것도 아니고 오라가 넘쳐 흘러서 펑펑 터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체르도는 근접한 거리에서 갑자기 쏟아진 마법을 침착하게 막았다.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왼쪽 어깨에 얕은 화상을 입는 정도로 불화살을 피하며, 나머지 두 개는 검신의 오라를 가능한 한 얇고 길게 뽑아내 한 번에 베어냈다.
나는 거리를 벌리며 검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넓게 분산되기 쉬운 벼락이 검신을 따라 응축되었다가 굉음을 터뜨리며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체르도는 즉시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벼락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는 없다. 오랜 경험과 몸에 밴 감각이 그의 다리를 움직였다. 동시에 오라를 최대한 뽑아내서 검을 방패처럼 들고, 나뭇가지 형상으로 튀어 오르는 벼락 일부를 막았다.
나는 체르도에게 보라는 듯이 느리게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간신히 벼락을 피하고 갈라내며 체르도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 개의 주문을 연속으로 사용해 아까부터 자잘한 마법을 머리 위에 잔뜩 띄워놓은 상태였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온갖 종류의 마법들. 일반인은 그 모습을 보며 보통 퍼렇게 질리거나 기겁을 한다.
“아……!!”
하지만 체르도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 되어 크게 전율했다.
체르도는 몇 번이나 이 마법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적을 궁지로 몰아붙일 때. 수세에 몰려 적의 전진을 막아야 할 때. 이 몸과 함께 전쟁터를 돌면서 몇 번이나 수백의 마법이 무수히 쏟아지는 광경을 보아왔다.
나는 이를 드러내 웃으며 가차 없이 체르도의 머리 위로 마법을 떨어뜨렸다.
“체, 체르도 경!!”
근처에서 아젤로스가 소스라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그가 보기에도 이 마법이 무척 위험해 보였던 모양이다.
지스카르는 거의 무한정으로 넘쳐흐르는 오라를 자기 주변에 폭사시켜 이 무수한 폭격을 방어해 냈다. 하지만 체르도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 마법의 폭격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체르도는 머뭇대지 않았다. 그는 오라 소드를 들어 마법을 몇 번 베며 오른쪽으로 뛰었고, 다시 정해진 경로를 밟으며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했다. 오라 소드를 몇 번 휘둘러 마법을 베었지만 대부분의 마법이 스스로 그를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마법이 그를 비켜 간 것이 맞았다.
쿠구구궁.
콰과과광!
열기와 폭음이 엄청나다. 이 마법은 타격 범위가 굉장히 광범위하며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아군이 위험 지역에 있을 시에 무사히 벗어날 수 있도록 딱 한 군데 교묘하게 탈출로를 만들어놓았다.
세월이 그리 오래 지났음에도 체르도가 그 방법을 잊지 않고 정확히 땅을 밟아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오라 소드가 다시금 힘을 받아 강하게 백색 빛을 뿌렸다.
“체르도 경.”
검이 코앞임에도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이니, 이것도 알 것이다. 내가 이미 주문 네 개를 전부 회수한 상태라는 것을.
꽈릉.
손끝에서 번쩍 뻗어나간 한 줄기 전격을 체르도는 감각에만 의지해 오라 소드를 들어 가까스로 막았다. 전격과 함께 그는 주르륵 수 미터를 밀려 나갔다. 그때 밀려나는 속도보다도 몇 배 빠르게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덮쳤다.
체르도는 이를 악물고 오라에 힘을 더했으나 금방 한계가 찾아왔다. 핏 하고 오라가 힘을 다해서 사라지는 순간 화염이 완전히 그를 집어삼켰다. 아니, 삼키기 직전 화염 폭풍은 갑자기 강한 역풍에 휘말려서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내가 손을 위로 들자 그 손끝을 따라 마법이 하늘로 솟구쳤다. 체르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도 내 손끝을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위쪽으로 한 번 더 털었다. 화염과 바람이 꽈릉, 쿠르르, 굉음을 내며 서로를 찢어발기고 할퀴어대기 시작했다. 한동안 요란한 광경을 연출하다가 두 마법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마법이 사라진 뒤엔 작은 불씨가 몇 개씩 아래로 떨어졌다.
“하아……, 후우…….”
체르도는 오라를 너무 사용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해서 숨을 골랐다. 그는 검을 거둔 뒤, 가슴에 손을 얹고 내게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저의 완패입니다. 전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를 상대로 너그럽게 대련을 허락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발끝에도 못 미치다니, 겸손이 지나치군. 이 몸의 마법에 경만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자는 몇 명 없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체르도도 나를 마주 보며 편하게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자기가 눈물을 흘린 것을 알고 체르도가 당혹스럽게 눈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흐, 크흐…….”
강건하던 그의 얼굴이 물 먹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를 꽉 깨물고 그는 낮게 흐느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나 얼굴을 감싼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체르…….”
당혹스럽게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강가 쪽을 보았다. 스트라스의 다른 기사들도 평정을 지키지 못하고 체르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모시스 경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감정에 북받쳐 다른 이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체르도와 그들이 왜 이렇게 감상적으로 되어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레브노아드가 즐겨 쓰던 기술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에드리히도 내 손을 잡고 자기가 꿈을 꾸는 거냐며 자주 중얼거렸다. 아마 체르도도, 모시스도, 모든 기사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일까.
“전하……, 전하…….”
체르도가 낮게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나는 떨고 있는 체르도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세월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그 강인하던 손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벌써 오십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체르도처럼 나도 감상에 사로잡혔지만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부축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일어나지.”
“하아……. 예…….”
체르도는 지나치게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한 듯 서둘러 눈물을 훔쳐내고 일어섰다. 그와 함께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스트라스의 다른 기사들은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니. 다들 왜 이러십니까. 체르도 경. 모시스 경…….”
아젤로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사들을 붙잡고 물었다. 스트라스를 대표하는 대기사들이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이고 눈물을 흘리니 그 당혹함이 정말로 컸을 것이다. 시라크도 사정을 모르기에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워했다.
체르도가 감정을 추스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 당신께서 보여주신 마법은 레브노아드 전하의 마법과 똑같았습니다. 무수한 폭격 속에서 아군을 위해 길을 열어준 방법까지.”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
나는 애매하게 말을 끌었다. 불쑥, 내가 레브노아드 본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함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못 된다. 환생을 쉽게 믿을 자도 있겠지만, 믿지 못하는 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환생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나는 죽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사칭하는 발칙하고 위험한 놈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체르도에게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모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마정석 팔찌, 방금 보여주신 마법들까지……. 레브노아드 전하께서 유일한 친자인 당신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유산으로 남기셨군요.”
아무래도 내가 레브노아드의 아들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길인 모양이다. 사실 그의 유산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대충 이렇게 해두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편리할 것 같기도 했다.
레브노아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모시스는 다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주룩 흘렸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듯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분위기가 굉장히 가라앉았다.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한 아젤로스와 시라크는 약간 물러나서 침묵했다.
크리스티안과 던필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했다. 체르도가 과거를 들먹이며 친분을 표하면 크리스티안은 항상 불쾌하게 경계를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체르도가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스트라스로 돌아오십시오. 당신의 존재를 안다면 험버트도, 에른스트도……, 모두가 감격할 것입니다.”
순간 크리스티안이 표정을 굳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가만히 크리스티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조용히 대기하라는 뜻에서. 크리스티안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 내 뜻에 따라 침묵을 지켰다.
나는 다시 체르도를 보았다. 그가 언급한 이름들이 무척 그리웠다.
“험버트 경, 에른스트 경. 모두 황태자 친위대에 있던 기사들이군.”
체르도와 기사들은 크게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는 분위기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들 모두가 오직 황태자 전하를 위하여 존재하는 기사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예, 대부분은 황제의 친위대에 복무 중입니다. 은퇴한 자들도 있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자들도 있습니다만…….”
“그래. 황제의 친위대로 이동한 건가. 체르도 경 그대만 해도 친위대장이고…….”
체르도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죄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의 친위기사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알고 있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내 편린을 보고 눈물을 쏟을 정도로 레브노아드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거의 빛바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전부가 감격스러운 일이 되어야 할 텐데, 나는 어느 순간 뭔가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대부분 황제의 친위대로 이동했다고?
에드리히 현 황제의 친위대에 왜 이렇게 나의 측근들이 많지?
심지어 체르도는 친위대에서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예전에 강의실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사실을 감지한 적이 있다. 그때는 미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에드리히를 수행하는 자 중에 나에 대해서 아는 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도대체 왜? 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수록 에드리히는 기사들을 제 뜻대로 다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체르도와 모시스, 나의 기사들은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 대단히 유능했다. 그들의 능력을 생각해서 다소간의 문제가 있더라도 끌고 가기로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오히려 유능하기 때문에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
에드리히는 다소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자기 사람들로 친위대를 채워 넣어야 했지 않았나?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본 적도 없는 젊은 피만으로 최측근 친위대를 편성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였을 터.
“…….”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체르도가 조심스럽게 내 심기를 살폈다.
나는 다시 체르도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에반 경이 나를……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체르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기사들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체르도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께서 모르셨으면 했는데 역시 그때 알게 되셨군요…….”
“에드리히 현 황제가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더군. 그래서 일부러 그를 닮은 에반을 곁에 두면서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이 아닌가?”
“…….”
체르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쥐어짜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경의 잘못이 아니다. 사과를 받으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야.”
“죄송합니다. 전하…….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막지 못하고…… 무능하게도,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
역시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체르도와 나의 기사들은 에드리히의 행태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에드리히가 에반에게 화풀이하는 것을 끔찍이 혐오하고 싫어했으며, 레브노아드의 아들인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에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나를 만류했다.
이들에게 에드리히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출발할 때 느꼈던 위화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대체 에드리히는 뭘 하는 것이지? 왜 자기한테 충성하지도 않는 자를 친위대에, 측근으로 두고 있는가. 에드리히의 속이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봐야 결론이 나지 않을 일이었다.
“멀리까지 나와서 너무 우울해져 있군. 조금 쉬지 않겠나?”
기사들은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천천히 돌아갈 채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 체르도가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대공 전하. 당신은 레브노아드 전하의 하나뿐인 혈육이십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스트라스로 돌아오십시오.”
순간 여태 참고만 있었던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의 자리는 엘 파셔 제도에 있고, 엘 파셔 남부에 그레이언 대공령까지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억지를 부릴 셈입니까?”
체르도는 물론이고, 스트라스 측 기사들의 표정이 굉장히 무섭게 돌변했다. 내가 레브노아드의 친자이고, 그의 유지까지 물려받은 것이 확실해진 이상,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내게 집착하고 있었다. 모시스 경이 팔을 크게 내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 파셔 놈은 빠져라! 이건 스트라스 내부의 문제이니!”
던필은 이런 다툼을 말리는 쪽에 속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심각하다고 여겼는지 크리스티안의 곁에서 몇 마디를 거들었다.
“엘 파셔 대공의 문제가 어떻게 스트라스 내부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까?”
“엘 파셔의 대공 작위 따위, 그분의 혈통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초라한 것이다. 전하께서 어떤 분의 자손인지 들었으면서 감히 이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이냐!”
“흐음, 당신들보단 내가 지금의 대공 전하에 대해서 더 잘 알 것 같은데. 모신 기간은 짧아도 인상적인 사건이 많았던지라.”
던필의 건들대는 태도가 엄격한 스트라스 기사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그때 던필을 뒤로 당기며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조금 전에 체르도 경께서 직접 그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에드리히 현 황제가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에게 악감정이 있어 지금까지도 그와 닮은 이에게 분풀이하는 중이라고. 그런데 전 황태자의 친자라고……, 다들 믿고 있는 그가 스트라스로 향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 같습니까.”
크리스티안이 정확히 문제점을 짚어주었다. 이 문제 역시 내가 스트라스로 돌아가지 못할 여러 이유 중의 하나다. 에드리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스트라스로 귀환하여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스트라스에 손톱만큼이라도 해가 될 일은 절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언쟁 중인 이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주목하게 되었다. 나는 주변의 친숙한 이들을 한 사람씩 응시했고 이윽고 말했다.
“나는 이미 거취를 정했다. 내가 스트라스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레이언 대공으로 엘 파셔에 남을 것이다. 아마도…… 엘 파셔에 뼈를 묻게 되겠지.”
“전하!!”
“전하! 어찌 그런!”
스트라스의 기사들이 낭패한 얼굴로 외쳤다.
크리스티안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고 이내 길게 안도 섞인 한숨을 쉬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안도하는 거지. 내가 진짜 스트라스나 어디로 떠나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건가.
뭐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훌쩍 엘 파셔를 뜰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알아서 잘하면 될 일 아니냐. 크리스티안도, 지스카르도,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는지.
“전하! 엘 파셔에 남으시겠다니, 엘 파셔는 적국입니다. 영원히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원수의 나라입니다! 당신께서,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체르도가 자기 가슴을 쥐어짜듯이 꽉 움켜쥐며 외쳤다. 그의 심정이 어쩐지 이해가 갔다. 그는 나를 레브노아드 황태자와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스트라스를 등지고 엘 파셔인으로 살겠다니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체르도의 간절한 모습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단호해져야 할 시기였다. 나는 냉정하게 체르도를 보며 말했다.
“경의 의견은 더 듣지 않겠다. 나는 엘 파셔에 남기로 결정했고, 이미 내린 결론에 이견을 다는 자는 좋아하지 않아.”
“그……!”
나는 옛날부터 내 결정에 토를 다는 놈들을 아주 싫어했다. 충언이랍시고 귀찮게 구는 자들은 모조리 변방으로 쫓아내 버렸다.
내가 측근들의 의견을 완전히 불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까지 나름 시간을 들여 귀를 기울여주었다. 다만 그들이 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결정을 내리기 딱 전 단계까지다.
체르도는 오랜 버릇 때문인지 나의 경고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전하.”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체르도는 다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월의 흐름을 체감했다. 옛날이었다면 감히 내 앞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였을 텐데, 참 많은 것이 변했지.
체르도를 냉정히 무시하고 나는 아젤로스에게 다가갔다.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구나. 외부로 이야기가 새어나가서 특히 스트라스에 좋을 것이 없으니 주의하도록 해라.”
“계속 엘 파셔의 대공으로 남을 생각이십니까.”
“들었다시피.”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 전하의 명성은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친자이신 당신께서 스트라스에 들어오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보여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는 대공 전하의 결정을 존중하겠습니다.”
아젤로스가 배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유감을 표했다. 잠시 몸을 낮추고 있던 아젤로스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사실 대공 전하께서 스트라스로 들어오시면, 현 황태자이신 콘라드 형님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군요.”
순간 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내게 귀환을 독촉하고 있어 그 분위기에 휩쓸릴 만도 하건만, 아직 어린 황자가 제대로 핵심을 이해하고 있었다.
“장래가 기대되는 황자님이로군.”
나는 아젤로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애 취급을 받은 아젤로스는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뿐, 금방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나 보다.
“전하의 4중 영창 마법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놀랍고 경이로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군요. 위대한 경지에 이르신 대공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앞으로 계속 엘 파셔의 대공으로 남으시더라도 전하를 존중하는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께 고귀한 스트라스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영리하게 대답하는 아젤로스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젤로스가 시라크에게 걸어가며 크게 배포를 써서 말했다.
“시라크, 사석에선 말을 편하게 해도 좋다. 자꾸 반말했다가 존대했다가 하지 말고 앞으로는 일관성 있게 말해.”
“아, 그래? 그럼 사양 않고.”
“너 한 번쯤은 인사치레로 거절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도 앞으로 일관성 있게 시라크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
“이런 건방진 엘 파셔 놈!”
아젤로스가 버럭 화를 냈다. 시라크는 건방지다고 욕을 먹었지만 엘 파셔인이라고 불린 것에는 꽤나 만족스러운 분위기였다. 둘이서 투닥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만 움직이자는 말에 약간 지체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내 다들 말에 올랐다. 일행은 늦지 않게 미첼 아카데미로 귀환했다.
강가에 다녀온 뒤로 사흘이 지났다.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의 평화회담이 예정된 날이었다. 스트라스의 무성의한 태도 때문에 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이 크게 점쳐졌기에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행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젤로스 3황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