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37/43)

12.

스트라스의 3황자 아젤로스가 빈 강의실에서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다.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사건이었다. 현장에는 저항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젤로스는 황족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적이라 할 만한 상대가 없어서 교내에서 호위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홀로 있는 아젤로스를 살해하는 것은 어린애 팔을 꺾는 것만큼이나 쉬웠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변고에 아베크 중립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3황자가 살해당한 것 자체도 큰일이었지만, 양대 제국 황제가 아카데미 내에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폐하!”

시라크가 다급한 얼굴로 지스카르를 찾았다. 반역죄로 추방된 폐황태자가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시라크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황태자 시절의 인맥을 찾아 온갖 억지소리를 해가며 통사정했다고 들었다. 그는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것조차 건성으로 하고 급하게 질문을 했다.

“폐하! 지금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던데. 정말로……, 아젤로스가 그렇게 된 것이 진짜입니까?”

지스카르는 말없이 시라크를 응시했다. 지금 시라크의 행동은 몹시 무례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 삼을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잘못을 질책하는 대신 질문에 답해주었다.

“네 시간 전 아젤로스 3황자가 사망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생각보다도 아젤로스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 사망 소식을 정식으로 전해 들은 시라크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나도 영민한 아젤로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일단 멍하니 서 있는 시라크에게 소파에 앉아 쉬기를 권했다.

“사망 소식만 알고 있을 뿐 이쪽에도 아직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추가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니 너도 기다려 보거라.”

시라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지스카르에게 사죄를 청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앉아서 기다리거라.”

“예…….”

시라크는 느리게 걸어서 소파 한쪽에 앉았다.

나는 한숨을 길게 쉬며 지스카르에게 다가갔다. 그의 곁에 평화협정에 쓰일 예정이었던 서류가 널려 있었다. 가만히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 이내 손끝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와그작 구겨졌다. 나는 노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어떤 놈이 감히, 양국 황제가 머물고 있는 미첼 아카데미 내에서 스트라스의 3황자를 살해했을까.”

“일단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그때 때마침 사무관이 아젤로스와 관련한 새 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지스카르가 바로 보고서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평화회담까지 무산되었지만 지스카르는 평소처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은 놈이다. 그런데 보고서를 읽는 동안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점점 굳어갔다.

“지스카르?”

나는 의문을 표했다. 시라크도 뭔가 이상을 느끼고 소파에서 일어나 지스카르를 주목했다.

“…….”

보고서를 다 읽은 지스카르는 잠시 서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리 넘겨달라고 손을 내밀었으나 놈이 평소답지 않게 재깍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지스카르의 손에서 보고서를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왔다. 그리고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빠르게 읽어갔다.

보고서에는 희한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범행 현장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 강의실 바닥에 어지럽게 찍힌 범인의 발자국 사이에서 내 소지품이 발견되었고 한다.

미첼 아카데미에서 청강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증서, 초반에 발급받고 어디다 처박아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 종이가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발자국의 크기도 내 것과 유사했다. 이쪽 눈치를 보느라 보고서에 단정적으로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젤로스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라는 결론이었다.

“이건 뭐…….”

다른 것보다도 황당한 감정이 앞섰다. 설사 내가 정말로 아젤로스를 살해했다 쳐도 범행 현장에 이름이 떡하니 적힌 증서를 떨어뜨리고 간다고? 지금 누굴 등신 취급하는 거냐.

대체 누가, 뭣 때문에 나에게 이런 엉터리 누명을 덮어씌운 것인지……!

나는 이를 갈면서 생각하다가 우뚝 멈췄다. 증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냥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은 있었다.

에드리히. 스트라스 황제.

녀석이라면 분명히 이 일과 관련해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손에 들린 보고서를 한 손으로 완전히 구겨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아젤로스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라는군.”

“예?”

멀리에 서 있던 시라크가 당혹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내 자기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용의자 취급은 못 해도 참고인 조사니 뭐니 해서 곧 중립국 쪽에서 찾아오겠는데?”

“전부 무시해라. 중립국의 조사관 따윌 네가 직접 상대할 필요 없다. 짐은 네게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엘 파셔 황족이 중립국 조사관 앞에서 조사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중립국이든 혹은 스트라스든, 너는 어떤 자를 상대로도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지스카르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뭐,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다.”

참고인 조사 같은 것을 받으러 가서 해줄 말도 없고. 어차피 생각이 있는 자라면 이게 누명이라는 것 정도는 바로 눈치챌 것이다.

지금은 중립국의 조사관 같은 것보다 달리 만나고 싶은 자가 있었다.

“에디를, 스트라스 황제를 만나봐야겠다.”

“레이.”

“너도 보고서를 읽는 순간 그놈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나? 스트라스의 3황자를 살해하고 범행을 일부러 내게 뒤집어씌웠다. 이 정도 사건을 일개 개인이 저지를 가능성은 극히 낮아. 엘 파셔와는 완벽히 무관한 일이니, 스트라스 쪽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다. 에디라면 무엇이든 짐작 가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미친놈이 뭘 알고 있는지 내가 꼭 들어봐야겠어!”

문을 향해 한 걸음 떼는 순간 지스카르가 거칠게 내 팔을 붙잡았다. 바로 뿌리치려 했으나 손아귀 힘이 무섭도록 강해서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졌다. 스트라스 황제가 언제 선을 넘을지 불안하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자는 위험해! 더 이상 그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내가 네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한 적이 있지.”

우우우우웅.

팔찌에 박힌 마정석들이 크게 공명했다.

“폐하!”

위협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방 안에 있던 사무관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당장 바깥의 기사를 부르러 나가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사무관이 뛰어나가든지 말든지, 나는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엘 파셔의 황제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없어서 항상 내 쪽에서 먼저 물러나곤 했지. 하지만 진심으로 날 화나게 한다면 네놈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 놓고 떠날 수도 있다. 사람이 좋게 말할 때 당장 이 손 놔.”

지스카르는 한참 만에 천천히 손을 놓았다.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만약 끝까지 나를 막고자 한다면 진짜 오라 소드를 들고 싸워야 한다는 깨달은 것이다.

“끝까지 가야만 하겠다면 짐이 동행하겠다.”

“말도 안 된다는 거 스스로도 아는 주제에 억지 부리지 마라. 에디가 널 보고 당장 칼부터 뽑으려 들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거지 싸움을 붙이러 가는 것이 아니야. 크리스티안, 던필까지는 내가 호위로 데려가마.”

“…….”

“그리고 마정석을 가지고 있는 이상 에디도 감히 날 어찌하지 못한다. 네놈의 과잉보호 따윈 필요 없단 말이다! 알았느냐?”

나는 지스카르를 노려보며 신경적으로 경고했다.

문득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젤로스가 죽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특하게 눈을 반짝이며 자기 의견을 밝히던 그 아이가. 당연히 분노가 치밀었다.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지스카르가 다시 팔을 들어 이번엔 내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내가 무고한 녀석에게 화풀이했음을 깨달았기에 이번에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넘기고 손을 아래로 내려 목 전체를 한 손에 잡았다.

“하아, 진심으로 너에게 족쇄를 채워버리고 싶군.”

놈이 낮게 탄식을 터뜨렸다. 목을 쥔 손끝에 금방이라도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목을 만지던 지스카르의 손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왔다.

“다녀오너라.”

* * *

아젤로스 사건 후 열흘간 휴교령이 내려졌다. 보통 사건이 아니었기에 다들 몸을 사리느라 바깥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길 가운데에서 에드리히를 만났다. 그는 내가 자신을 만나러 올 줄 이미 알았다는 것처럼 근처 길가에 나와 있었다.

“수행원은 모두 물리고 비밀 이야기, 어떤가?”

에드리히가 태평하게 말했다. 그가 먼저 호위를 뒤로 물렸다.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서 젊은 친위기사들이 내게 미미하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아마도 내가 스트라스의 3황자 아젤로스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체르도나 연배가 있는 기사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소문 정도로만 접했던 젊은 평기사와 황태자를 직접 수행한 적이 있는 선배격인 기사의 반응이 크게 달랐다. 친위기사들 사이에 세대 차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일단 나도 크리스티안과 던필에게 떨어지라고 눈짓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뒤로 물러났다. 칼을 든 수행원을 데리고 스트라스 황제와 독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무작정 나를 쫓아다니기보다는, 에드리히 외에 다른 위험 요인이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 같았다.

기사들을 뒤로하고 적당한 장소로 이동했다. 이쯤이면 누구도 대화를 듣지 못할 것이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에드리히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키가 작지?”

“뭐라?”

저놈이 시작부터 뜬금없는 소리였다. 일이 년 사이에 약간 성장해서 내 키는 현재 175센티 정도 되었다. 조금씩 계속 자라곤 있는데 이제는 성장기가 다 끝나서 솔직히 더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평범하게 잘 큰 축에 속하고 절대로 작은 편은 아니다.

주위 놈들이 하나같이 185 전후라서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에드리히는 그중에서도 제일 건장해서 190은 될 것 같았다. 뭐 네놈은 크다고 지금 시비라도 걸겠다는 거냐?

하지만 단순히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에드리히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그가 내 머리부터 딱 12센티 위로 손을 가리켰다.

“이 정도는 커야 옛날의 형님과 같아질 텐데. 체격도 더 좋아져야 하고. 이래서야 짐이 한참 밑으로 내려다봐야 하지 않은가.”

“뭐가 불만이지? 이때가 아니면 언제 네가 이 몸을 내려다보겠느냐.”

“그렇긴 하지만.”

에드리히가 팔짱을 끼고 갸우뚱하며 흥미롭게 날 내려다봤다. 내 입으로 말한 것이지만 녀석이 내려다보고 내가 올려다보는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나를 한참 마주 보던 에드리히는 팔짱을 풀고 손을 내렸다.

“작은 것이 귀엽긴 하지만 말이다…….”

귀엽다는 말에 더욱 발끈해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에드리히가 흐리던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역시 큰 편이 좋지. 어떤 놈도 감히 얕잡아보지 못할 훤칠한 키와 신체 같은 것 말이다. 당신은 아랫사람을 압도하는 용모를 꽤 중요하게 여겼지 않나. 다른 건 형님과 다 똑같은데 왜 그렇게 몸집만 다르지?”

“하, 내가 엘프에게 땅꼬마가 되라는 저주를 받았거든.”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지만 다시 얼굴을 굳혔다. 헛소리는 여기까지다. 저놈이랑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나는 더 이상 온전한 레브노아드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옛날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를 보는 에드리히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진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녀석의 표정에 금이 갔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리기만 했던 네가 자식을 가지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정도로, 아주 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너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체르도 경도 감히 내 결정에 거역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꿈도 못 꿀 행동을 하더군. 그만 눈을 뜨고 현실을 봐라.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아니, 중요한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에드리히가 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더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팔을 내밀었다. 팔찌의 마정석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드리히는 태연하게 내 팔을 옆으로 툭 밀어냈다.

멋대로 손을 뻗어 귓가의 머리카락을 슥 옆으로 쓸어 넘겼다. 처음 내가 레브노아드라고 밝혔을 때는 함부로 손도 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점점 스킨십에 거침이 없어졌다. 에드리히가 손끝에 걸린 금발을 보면서 말했다.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이제 하나씩 준비를 시작하는 편이 좋겠지.”

“뭐?”

나는 바로 오만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당신은 누구의 아래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스트라스로 돌아온다면, 당연한 일인 것처럼 황위를 노리게 되겠지.”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네놈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주자니 아주 진이 쭉쭉 빠지는구나. 대체 무슨 개똥 같은 헛소리냐! 옛날에 독차 마시고 뒈져버린 전대 황태자의, 적장자도 아닌 사생아가 무슨 수로 황제가 돼. 심지어 바로 너, 현 황제의 아들이 열 놈이나 멀쩡하게 살아 있다. 황녀까지 합치면 네놈의 자식이 스물이 넘는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

“아니, 충분히 가능하다.”

녀석이 느슨히 내 어깨에 두 팔을 두르고 몸을 낮춰 나와 최대한 비슷하게 시선을 맞췄다. 당장 떨쳐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아까부터 에드리히가 하는 짓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에드리히를 볼 때마다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비밀을 보는 것 같은 기분. 그런데도 나는 계속 미련을 놓지 못하고, 지스카르가 만류하는 것도 끝끝내 뿌리치며, 결착을 봐야겠다며 이렇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짐도 황제가 되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황제 같은 건 될 수 없는 처지였지만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 모조리 죽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황좌에 오르게 되었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말 그대로, 당신도 스트라스의 황제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황족이 모조리 죽으면 당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된다. 그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품고 당신이 아젤로스를 죽인 것은 아닐까?”

일순 숨쉬기를 멈췄다. 끔찍한 소리에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목덜미에 올린 팔을 꽉 움켜쥐어 앞으로 떼어냈다. 마법의 힘을 빌려 잠시 동안 놈의 악력을 압도했다. 에드리히의 팔을 눌러 쥐고 놈을 노려보았다.

“그만, 헛소리는 이제 그만해라. 이런 미친놈 같으니! 내가,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다고……!”

나는 고함을 지르다가 퍼뜩 에드리히를 다시 보았다. 놈이 아젤로스의 죽음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아는 것이 있으면 당장 이실직고하라고 추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설마…… 네가 아젤로스를 죽였느냐?”

“…….”

“나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네가 아젤로스를 죽였어?”

이미 확신을 내리고 있으면서 나는 에드리히가 부정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내 질문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고 바닥이 길게 늘어지면서 원근감이 이상해졌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아젤로스의 얼굴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지금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천진난만하던 아이가 죽었다고? 유쾌하게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한데.

“이런.”

에드리히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나를 부축했다. 그는 이참에 나를 그대로 확 끌어안고는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맨살에 코를 박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내게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그걸 바라고 하는 짓 같았다. 숨을 들이켠 뒤 내뱉을 때 놈의 뜨거운 입김이 목에 닿았다.

“……!”

확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놈이 무엇을 원하든 그따위 일은 다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냥 거칠게 놈을 밀쳐냈다. 말을 듣지 않을 시엔 마법으로 팔다리를 모조리 분질러버릴 각오까지 했지만 다행히 에드리히는 순순히 물러났다. 자기는 반항할 의지가 없다는 듯 장난스럽게 양손을 내밀며 큭큭 웃었다.

어느새 숨소리가 크게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털어냈다. 그래, 에드리히가 말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 것이 내 특질이다. 금방 머리가 맑아지고 원근감도 제대로 돌아왔다.

“정말로……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내가 비록 과거와 같은 절대 권력을 가지진 못했으나 그래도 황족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엘 파셔의 대공이다. 그런 허술한 누명 따윈 내게 털끝만큼도 타격이 되지 않아. 너도 얼간이가 아닌 이상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런데 아무 의미도 없는 시시한 누명이나 씌우겠다고 자기 아들을 죽여?”

내 추궁에 에드리히는 느긋하게 목을 드러내며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님에도 그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전부 알고 있었다. 그가 믿기지 않을 만큼 포악해졌고 기이한 광기에 절어 있다는 것을.

“뭐, 알다시피 아들 같은 건 발에 챌 만큼 많아서.”

“에드리히!!”

아젤로스의 취급이 발에 차이는 자갈만큼도 못해서 노기가 확 치밀었다. 하지만 금방 열은 식어버리고 나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은 지 몇 년이나 되었지? 기억이 다 흐려질 만큼 까마득한 옛날 일인데도 에드리히는 아직까지 나를 닮은 자를 곁에 두고 그의 목을 조르거나 모욕을 주었다. 그는 이제 나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 목적만으로 자기 아들까지 살해했다. 단순하게 나를 죽이려 든 것이 아니라 아젤로스를 죽였다. 그의 비틀린 광기가 얼마나 깊은지 그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당연한 일을 이제 와서 깨닫고 말았다.

너는 이토록이나 지독하게 나를 증오하고 있구나.

* * *

끔찍한 진실만 알아낸 뒤 지스카르가 기다리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사무관이나 기사들은 모두 물러난 뒤였고, 시라크도 어디를 갔는지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힘없이 들어오자 지스카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또 무슨 일이 있었군. 입을 꾹 다문 채였지만 말을 했다면 틀림없이 그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지스카르.”

그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니 신기하게도 뭔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스카르는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로 원리원칙을 중시했다. 그는 항상 규정이나 약속을 지킴으로써 신뢰를 보여주려고 했다. 딱히 내가 그 통치 방식이 옳았다고 굴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가 주는 안정감이 크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지스카르에게 에드리히를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젤로스가 왜 죽었는지, 에드리히가 내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는 이야기도. 에드리히의 증오와 광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것까지.

지스카르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말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내 밑바닥을 전부 털어내도 지스카르가 상대라면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그때 지스카르가 낮게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눈을 끔뻑이고 의문을 표했다. 순간 녀석이 거칠게 내 어깨를 붙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대처할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문을 몰라 그대로 구석에 처박혔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놈의 푸른 눈이 분노로 가득했다. 본래 표정 없는 냉담한 얼굴이 훨씬 더 차갑게 굳었다.

“네 얼굴이 아주 무방비하구나. 너는 온전히 짐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만. 아니, 짐의 인내심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

지스카르의 경고를 들으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녀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왔는지 과거를 돌아보았다.

내가 중립국에 남아서 에드리히의 심중을 알아내겠다고 고집을 부려 지스카르는 결국 나를 엘 파셔로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중간에 끼어서 곤란해할 것을 생각해서 일부러 에드리히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집무실에 틀어박히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만큼 양보해 왔다.

“짐도 솔직한 심정을 너에게 이야기해 볼까. 너와 스트라스는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외면하지 않고 전부 들으려고 했지. 하지만 역시 무리다. 알기 싫은 진실을 계속 듣는 것이 이렇게 심력을 깎아내리는 일이구나. 네가 사랑하는 스트라스가 아주 눈엣가시다. 가능만 하다면 당장 스트라스 황제를 찢어 죽여 버렸을 것이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스카르와는 다른 이유로, 나도 에드리히의 행태에 크게 화가 나 있었다. 놈이 황제만 아니었다면 아젤로스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 역시 당장이라도 놈을 죽여버리겠다고 분통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해라. 스트라스의 황제에게 함부로 해를 가하는 것은 용납 못 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상 너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짐이 정말로 못 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지스카르가 노기를 담아서 낮게 물었다. 나는 눈만 들어서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지스카르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이지만, 오직 내가 걸린 일에 한해서는 때때로 미친 짓을 하곤 했다. 내가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으며 놈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파먹은 것도 사실이다. 지스카르의 차가운 추궁에 확답이 나오지 않았다.

에드리히가 광기에 빠져 이런 짓을 저지른 것도, 틀림없이 내가 원인이었다.

이건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그래. 전부 내 잘못이 크군…….”

나는 몸에서 힘을 빼며 말했다. 기분이 끝없이 바닥으로 치달았다.

“레이!”

지스카르가 어울리지 않게 또 언성을 높였다. 내가 풀이 죽어 있는 것이 꼴 보기 싫다는 표정이다. 사과한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는 사과를 해도 불만이냐.”

“그래, 네가 하는 짓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울해 있던 나는 지스카르를 확 뿌리쳤다. 내가 뿌린 씨라는 것을 인정하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영 짜증이 났다.

“네놈은 사람이 우울해하고 있는데 위로를 해라. 협박할 게 아니라! 혓바닥에 기름칠 좀 쳐서 듣기 좋은 말도 하고! 살며시 곁으로 다가와 이 몸의 눈치도 좀 살피고!”

나는 뻔뻔하게 놈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했다. 지스카르는 잠시 황당한 듯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듯이 놈도 충분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위로를 한들 또 스트라스 황제에게 들이받으러 갈 텐데 의미 없는 짓을 왜 하겠는가!”

“시끄럽군. 네놈은 내가 비루한 신분으로 전락한 것에 감사해야 해. 옛날 같았으면 스트라스의 황제가 될 이 몸이 사과 같은 걸 했을 거 같으냐?”

“차라리 옛날이 낫겠구나. 최소한 그자 앞에서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지.”

“어디 그뿐일까. 에디가 내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그 순간에 목을 짓밟아 죽여버렸을 것이다. 나는 잠깐의 변덕으로 에드리히를 주워서 오랫동안 곁에 두었다. 녀석이 어리고 무해한 동물처럼 보여서, 이 몸에 손톱만큼도 위협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에드리히의 판단은 다 옳았다. 에드리히에게 당당하게 검을 들라고 했고, 광대가 웬 말이냐고 추궁도 했지만, 녀석이 주제넘은 짓을 한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나는 그 자리에서 돌변했을 것이다. 에디의 목을 베어버리면서 나는 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며 연민에 빠졌을 테지.

“봐라. 이런 게 바로 배부른 승자의 여유라는 것이다.”

나는 옛날이야기를 하며 거만하게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그 팔목을 틀어쥐었다.

“거기까지 해라.”

“읏, 뭐를 거기까지 해?”

“쓸데없이 자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게 뭐가 자책이야?”

“……됐다. 위로를 하라고? 그래,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네 눈치를 보면 되겠느냐.”

“그걸 당사자에게 물으면 어찌해? 예전엔 알아서 잘 하더니.”

지스카르가 거칠게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붙잡고 허리에 팔을 꽉 두르고 키스했다. 열린 입술로 혀가 닿았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금방 뒤로 떨어져 나왔다. 대신 이마와 눈에 다정하게 입술을 눌렀다. 잠자리를 갖겠다는 게 아니라 위로하겠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다.

입이나 눈이나 별다를 바도 없지 않아? 어차피 저 서툰 놈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이 정도뿐이지. 나는 빤한 행동을 우습게 여기면서 그냥 눈가에 뽀뽀하기 좋으라고 두 눈을 다 감았다.

“…….”

한참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문득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서 지스카르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뒷머리 끝을 만졌다. 그러다 아예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 아래로 따뜻한 체온이 닿고, 손가락 사이로 서늘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면서 손을 빼고, 귓바퀴와 귓불도 만져 보았다.

내 쪽에서 먼저 만지는 일은 사실상 없다시피 해서 그렇게 자주 끌어안고 키스하고 해놓고도 손에 닿는 촉감이 낯설었다. 이런 느낌이고, 이런 모양이었나.

지스카르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로 내 손을 이끌어 입 맞췄다. 손등에 키스하는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눈가가 약간 발갛고 아래로 내리뜬 속눈썹이 짙고 길었다.

조금 인정하기 싫은 느낌인데, 내가 이런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아래를 보는 녀석의 속눈썹 같은 것에 자꾸 눈길이 갔다. 지스카르는 내 시선을 인지하지 못한 채 천천히 손을 놓고 허리도 풀어주며 물러났다.

이런 걸 위로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평정을 조금 되찾았다. 우울한 감상을 내려놓고 나자 이제 에드리히가 참혹한 살해를 저질렀다는 사실만 남았다.

“시라크는? 아젤로스 때문에 충격이 큰 것 같던데.”

“근처 방에서 대기 중이다.”

알고 지낸 기간은 짧지만 시라크는 아젤로스를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시라크도 어느 정도는 사정을 알 자격이 있었다. 지스카르가 바깥의 기사를 불러 시라크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잠시 뒤 시라크가 집무실을 찾았다. 잠깐 동안 무엇을 한 것인지 눈 아래가 퀭하고 검었다.

“대공 전하. 누가 아젤로스를 죽인 겁니까. 누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거죠?”

시라크는 내가 아젤로스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라는 사실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젤로스를 죽였을 거란 가정은 애초에 없는 것 같았다.

시라크의 눈빛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강가에 승마를 나갔을 때 스트라스 황제가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를, 그리고 그의 핏줄인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라크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자기가 아는 단서를 토대로 어떤 결론을 냈다. 단편적인 단서에 비약을 섞어서 만든 결론이지만 그것은 사실에 완벽히 근접해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죽인 겁니까. 대공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아젤로스를 죽인 것입니까.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자기 아들을…….”

“…….”

나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시라크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시선을 돌려 갑자기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나이를 먹고 제법 의젓해졌음에도 시라크는 여전히 지스카르를 어렵게 여기고 눈도 함부로 맞추지 못했다.

시라크는 항상 두려워하던 아버지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비식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순간 굵은 눈물이 주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폐하……. 사실…… 사실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짊어진 줄 알고…… 그렇게 불쌍한 척을 했어요…….”

“…….”

“그런데……. 하……, 하하……. 아젤로스…….”

시라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고개를 푹 숙였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스카르는 무심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었으나 얼마 못 가 시라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낀 시라크는 참지 못하고 더욱 크게 흐느꼈다.

시라크도 아젤로스도 둘 다 황족이었고 황제에게 냉대를 받았다. 그래서 시라크는 자신과 아젤로스가 똑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며 우울한 연민에 빠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상은 시라크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지스카르는 결코 다정한 아비는 아니었으나 정말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는 시라크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자기 자식을 작은 음모에 소모품처럼 사용했다.

시라크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한참 동안 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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