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에드리히는 자기가 아젤로스를 죽이고 누명을 덮어씌운 것이 맞다고 내 앞에서 시인한 주제에 대외적으로는 중립국 조사관을 앞세워 스트라스 3황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내놓으라고 엘 파셔를 압박했다.
지스카르는 중립국의 조사관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고, 휘하의 친위기사들도 어디서 헛소리냐고 조사관을 발로 걷어차서 모조리 쫓아내 버렸다.
아베크의 국왕이 직접 지스카르를 알현하여 최소한의 협조라도 부탁한다며 호소를 하기도 했다. 잠시 후 국왕 역시 조사관처럼 볼썽사나운 형태로 친위기사들에게 쫓겨났다.
국왕을 포함한 중립국 출신의 저명인사들이 다수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가 쫓겨난 뒤, 스트라스는 엘 파셔에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했다. 스트라스와 엘 파셔가 연일 충돌하면서 중립국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뻔뻔한 스트라스 놈들 같으니. 말이 되는 누명을 씌워야 장단이라도 맞춰주지!”
“살인을 저지른 다음 신분증을 보기 좋게 두고 가다니, 이래서야 누명이 아니라 장난으로 보일 정도로군.”
“그런데 진짜로 스트라스 3황자를 죽인 건 누굴 거 같나?”
“자기들끼리 황위 다툼하다 뒈진 거 아닌가? 스트라스 내부에 평화회담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을 것 같군. 애당초 회담 날짜에 딱 맞춰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일세. 처음부터 판을 엎을 작정을 한 게 아니고서야!”
복도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친위기사들이 아젤로스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성질을 내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화들짝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나는 계속 쉬라고 손짓을 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아젤로스를 살해한 범인이 나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중립국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지만, 적어도 엘 파셔 쪽에서는 이번 일이 누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에드리히는 치밀하게 현장을 꾸미지 않았다. 아무리 그럴듯한 증거를 만들어도 나는 엘 파셔의 준 황족이고, 현행범으로 붙잡힌 것이 아닌 이상 타국에서 이 몸을 함부로 죄인 취급할 수 없다.
에드리히는 처음부터 이 정도로 나를 어찌해 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나를 심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질 나쁜 장난이다.
장난이라는 단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끔찍한 장난 때문에 아젤로스가 목숨을 잃었다. 어린 나이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가 가엾었고, 그를 위해 종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라크가 안타까웠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약간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스트라스의…… 체르도 경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모시스 경이나 다른 기사들도 함께인가? 아니면 혼자?”
“혼자였습니다. 전하와 독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 스트라스 쪽에서 사람이 방문했다고 먼저 보고하고, 체르도 경은 안으로 들게 해라.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크리스티안은 명을 받고 물러났다.
먼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체르도가 안내를 받아 도착했다.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에 분위기가 흉흉한 탓에 친위기사들은 깐깐하게 신체검사를 하고 소지 중인 검도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요청했다. 체르도는 별말 없이 엘 파셔 측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
“전하, 평안하셨습니까.”
“며칠 전에도 보지 않았나. 보다시피 난 건강해. 경은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군.”
“생각할 것이 있어서…….”
체르도와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하인이 들어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
“…….”
사람들이 전부 물러난 뒤 응접실에 둘만 남았다. 한동안 침묵이 돌았다. 나는 지루한 기색을 드러내며 다리를 모로 꼬았다.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일 텐데 언제까지 머뭇거리고만 있을 거냐는 뜻이었다. 체르도는 금방 내 의도를 이해했고, 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혹시 아젤로스 3황자 전하를 정말로 죽이셨습니까?”
“아니.”
지나치게 짧은 대답이었으나 체르도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는 즉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혹시 황제 폐하께서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까?”
나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체르도는 황제의 친위기사다. 적진 한복판에서 함부로 황제를 의심하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아젤로스는 그의 친자다. 허술한 누명이나 씌우겠다고 자기 아들을 죽일 거라 생각한단 말이냐?”
체르도는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자는…… 당신을 모욕하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입니다.”
“뭐라고?”
그자?
그놈?
나는 진정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가……!
“지금 자신의 주군에게 무슨 불경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대공 전하,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에드리히 황제가 당신께 누명을 씌운 것이 사실입니까?”
내가 무례를 지적했으나 체르도는 그런 건 더 이상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나를 보고 강하게 물었다. 나는 어쩐지 낯설어 보이는 그의 갈색 눈을 오래 응시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어 물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천천히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드리히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노기를 실어서 그를 나무랐다.
“뭘 용서 못 한다는 것인가. 그는 스트라스의 황제이고, 경의 주군이다!”
체르도는 나를 응시하며,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 전하의 유지이기 때문에 현 황제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누가 그런 폭군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까.”
“체르도 경! 다른 자도 아니고 황제의 친위기사인 자가, 그런 무도한 망발이 어디에 있는가. 황제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체르도는 내가 유년기일 때부터 뛰어난 기사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어린 시절 나의 검 스승으로 여러 가지 기본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는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스스로 나의 신하가 되어 친위대장을 역임했다.
내가 아무리 어려운 임무를 하달해도 그는 단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대체할 자가 없다 여길 만큼 진정 유능한 사람이었다. 기꺼이 내 등을 내어줘도 좋았던,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
“에디는 왜 너를 죽이지 않는 거지? 너 같은 놈을 곁에 두었다간 황권이 흔들릴 텐데.”
나는 망연히 체르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 체르도에게 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적대감마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결국 뒤따라온 결론은 이거였다. 에드리히는 왜 저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놈을 죽이지 않고 곁에 두는가.
체르도가 내 질문을 듣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에서 낮게 자조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양손을 꽉 깍지 껴서 움켜쥐었다.
“황제는 저를 죽일 수 없습니다. 황태자 직속 친위대 중 절반이 그대로 현 황제의 친위대로 넘어갔습니다. 저를 죽이면 모시스, 험버트, 에른스트, 그리고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는 유력 가문까지 모두 황제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레브노아드 전하의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모두를 말렸기 때문입니다. 새 황제에게 충성하고 스트라스의 안위를 우선하는 것이 틀림없는 전하의 뜻이라고 설득했기 때문에…….”
“…….”
“그래서 그 많은 황태자 전하의 기사들이 전부 에드리히 황제의 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레브노아드 전하의 원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드리히의 휘하에 나의 신하이던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에드리히가 나를 암살했다고 의심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 체르도가 황제에게 충성하라고 설득했기 때문이었던 건가?
내가 죽은 뒤 나의 복수를 명분으로 몇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반역자들에게 화가 났다. 나는 복수 같은 것을 원치 않았다. 재위 초기에 반란 따위를 일으켜 엘 파셔에 득이 될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스트라스의 장래를 먼저 생각하라고 말했다.
체르도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나의 첫 번째 기사다웠다. 그는 정확하게 나의 의지를 읽어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당신의 복수보다도 스트라스의 안녕을 더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장에서 무수히 명성을 쌓아 가시면서도 전하께서는 항상 휴전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전쟁이 사라진 땅에서, 화려하게 번영하는 스트라스의 미래를 꿈꾸셨습니다. 그분이라면 스트라스의 안위를 우선시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뿌드득.
체르도의 손아귀에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깍지 쥔 손에 극한까지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손부터 시작해서 그의 어깨가 불안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이것은 저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고, 실은 황태자 전하가 지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원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멋대로 자신의 뜻을 왜곡하여 자신을 살해한 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저를 찢어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니신가 하고. 하루에도 수백 번을…… 수천 번을…….”
그의 얼굴에 불안이 어렸다. 아니, 불안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커다란 공포였다.
불충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기사를, 그러나 누구보다도 나에게 충성스러운 그를, 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체르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뇌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에게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 자는 오래전에 죽어버렸다. 아마도 영원히 그 답을 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체르도가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심판대 위에 올라온 대역 죄인과 같았다.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자를 대신해서 나에게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경의 판단은 옳았다. 스트라스 황족의 혈통이 끊기는 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어선 안 될 일이다. 레브노아드라면 분명히 스트라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체르도의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일부러 가볍게 뒷말을 이었다.
“그는 그렇게 속 좁은 놈이 아니다. 어차피 죽어버렸으니 별수 없다면서 독차를 마신 일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지옥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걸.”
웃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환생해서 나름 잘 먹고 잘살아 왔으니까.
그때 체르도가 또다시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체르도만큼 눈물이 어울리지 않는 자도 없었는데, 강철처럼 굳건했던 그가 우는 모습을 벌써 몇 번째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
체르도가 머리를 깊이 숙이고 낮게 거듭하여 나를 불렀다. 그에게 내가 레브노아드 본인이라고 진실을 말해줄까, 문득 그런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체르도는 내가 레브노아드이든 아니든 더 이상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감히 털어놓을 수 없었을 고민을 내게 이야기했고, 내 입에서 대답을 들은 뒤 깊이 감격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미 레브노아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하. 당신을 반드시 스트라스로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흐느끼는 것을 멈추고 체르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뭔가 쳇바퀴 돌듯 돌아오는 그 요청들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가 스트라스로 가면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나는 이미 엘 파셔에 정착했다. 이 땅에 남는 것이 마음 편해.”
“전하!!”
“체르도 경. 이 화제는 여기까지 하지.”
“전……!”
체르도가 다시 내 말에 반발하려고 했다. 나는 확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건만 계속 나를 거스르면서 토를 다는 그가 아주 낯설면서 불쾌했다.
나를 사실상 레브노아드와 다름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최소 이 몸을 레브노아드의 혈통으로 존중한다면, 내 의사를 끝까지 무시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지금까지 경이 해왔던 일에 의심을 가지지 마라. 황제에게 충성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결정에 끝까지 책임을 져라! 경의 판단이 옳았다고 바로 이 몸이 보증할 테니. 알아들었는가!”
냉정하게 대화를 중단시키고 체르도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가 쉽게 포기할 것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응접실에 홀로 남아서 생각에 잠겼다.
체르도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스트라스는 뭔가 이상했다. 에드리히는 포악하며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고, 체르도의 행동도 완벽하게 마음에 찬다고 할 수 없었다.
약점이 잡혀 불손하기 짝이 없는 기사들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 황제.
황제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억지로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
전부 엉망진창이다!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꼴이냐. 군신 간에 신뢰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거의 원수나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상태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긴 할까?
이제야 스트라스의 실체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지스카르가 스트라스의 국내 사정이 좋지 못하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랐겠지만, 적국에서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할 정도면 실체는 얼마나 엉망인 것이냐?
인기척이 느껴져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가장했다. 지스카르가 문을 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방 밖에서 대기하는 것이 보통인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황제가 먼저 착석하고 크리스티안과 던필도 약식으로 허락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누명을 쓴 경위에 대해서 두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해 두었다. 사무관 두 명에게도 간단하게 언질해 둔 상태다. 대비가 필요했기에 최소한의 인원에게 알린 것이니 양해를 부탁하마.”
나는 지스카르의 조치에 동의했다.
크리스티안이 침중하게 말했다.
“아젤로스 3황자는 옆에서 몇 번 본 적이 전부였지만 훌륭한 성품을 가진 것 같았는데, 안타깝고 통탄할 사건입니다.”
던필도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게 물었다.
“기분은 괜찮으십니까?”
“아니, 동생에게 누명이나 쓰고 기분 아주 더러운걸.”
나는 잠시 씁쓸하게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이번 사건 때문에 호위 업무가 더욱 과중해지겠어.”
과잉 업무라고 투덜거렸던 던필은 정작 중요한 때가 되자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때를 위해서 친위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의 안전을 위해 전력을 다할 테니 안심하시고 편히 계십시오.”
크리스티안도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굳은 표정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황제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황제를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직접 봤으니까.
“체르도 경이 방문했다고 들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서 짧게 대화하고 바로 돌려보냈다.”
“…….”
지스카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자세히 알려달라는 뜻이다. 지스카르에게 무엇이든 다 이야기하겠다고 내가 먼저 약속했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것을 망설이게 되었다.
지스카르와 크리스티안, 던필을 한 명씩 보았다.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황제와 군주에게 충성하는 측근 기사들. 특별할 것도 없고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광경이다.
내가 그들 앞에서 에드리히와 체르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엘 파셔 놈들 앞에서 스트라스가 그 꼴이라고 말할 수 있어?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체르도 경이 스트라스로 돌아와 달라고 또 같은 소리를 하더군. 황제를 수행하는 일에나 집중하라고 호통을 쳐서 일단 돌려보냈다. 나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았다만.”
나는 적당히 아귀가 들어맞을 이야기를 꾸며서 했다.
지스카르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진실을 전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눈치챘다. 크리스티안처럼 적당히 둔해도 좋을 것을 쓸데없이 날카로워서는.
그는 이 자리에서 당장 나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호위를 강화할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엘 파셔로 귀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평화회담이 불의의 사건으로 무산되면서 더 이상 양국 황제가 아베크 중립국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지스카르가 내게 귀환 행렬에 동행하라고 명령했다. 아젤로스가 내 문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상황이다. 나는 요구대로 엘 파셔로 복귀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초 귀환 일정은 닷새간 평화회담을 가진 후, 하루 여유를 두고 이튿날에 출발하기도 계획되어 있었다. 일정이 붕 떠버린 상황이었지만 일단은 예정에 따라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스트라스 3황자 살인범으로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예정보다 빨리 움직이면 도망간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레이, 중립국의 조사관 따윈 만날 필요가 없다 하지 않았는가.”
“나도 그리 생각한다만 그래도 예의상 한 번 정도는 만나주려고. 세간에 내가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스트라스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물밑 공작을 시작하면서 생긴 소문이다. 어차피 사건 자체에 노골적으로 누명을 씌운 티가 났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해봤자 내게 큰 타격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한 번 정도 조사에 얼굴을 내밀어주며 소문을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양대 제국 사이에 끼어서 발만 동동 구르던 아베크 국왕의 수심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도 있겠지.
내가 참고인 조사에 응하겠다고 전하자 바로 그날 오후 아베크의 조사관들이 세상 밝은 얼굴로 나를 모시러 왔다.
“레이.”
내가 떠나기 전 지스카르가 갑자기 날 불렀다.
“…….”
사람을 불러놓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사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무엇이든 다 털어놓곤 했던 내가 왜 갑자기 비밀을 만들었는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넌 그 말투 좀 고칠 필요가 있어.”
시시하게 농담이나 던지고 조사관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재깍 호위를 위해 뒤를 따랐다. 엘 파셔의 기사들이 나를 보고 정중히 몸을 낮추었다. 상명하복이 중요한 기사대뿐 아니라 관료들도 규율이 잘 잡혀 있고 황제에 대한 충성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히 강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잔인한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는 에드리히와 불순하고 무도한 태도로 황제의 친위대장을 맡고 있는 체르도가 떠올랐다. 역시 이것만큼은 지스카르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아베크 중립국에서 참고인 조사를 하기 위해서 미첼 아카데미의 학장실을 내주었다. 스트라스의 황자가 사망했기에 조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엘 파셔의 눈치도 보여서 최대한 나를 예우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 결과다. 약소국의 슬픈 처지가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
“기사님들은 이쪽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잠시 나를 보다가 안내인을 따라 근처 대기실로 이동했다.
“귀한 분을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나를 아카데미 학장실로 안내한 조사관이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학장실은 내게 익숙한 장소였다.
하녀가 들어와 간단한 다과를 두고 갔다.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조사관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아까부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사든 뭐든 슬슬 시작하지?”
내가 가볍게 턱을 괴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학장실에 딸린 작은방의 문이 열렸다. 나는 크게 인상을 찡그렸다.
“에디……!”
에반 경이 문을 열었고 에드리히가 성큼 학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베크 중립국의 조사관 두 명은 황제를 맞이하며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에드리히와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 분명했다. 나는 조사관 둘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아베크 중립국은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러는가?”
“이들은 이제 아베크의 앞날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을 거다. 짐이 이들에게 스트라스에 좋은 자리를 약속했거든.”
“…….”
에드리히는 조사관을 매수했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가 힐끗 조사관을 보며 꺼지라고 한마디 하자 그들은 즉시 옆방으로 물러났다.
에반 경과 에드리히, 그리고 나 셋이 남았다. 이런 순간에도 에반이 유일하게 에드리히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이 잠시 눈길을 끌었다. 일단 나는 불쾌하게 에드리히를 응시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무슨 일로 수고롭게 조사관까지 매수해서 이런 자리를 만드셨을까?”
“아젤로스 일 이후로 당신이 계속 짐과의 대화를 거부했으니까.”
에드리히는 내게 살인 누명을 씌운 주제에 스트라스로 돌아오라며 태연하게 요구를 해오고 있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요구 따위는 무시하며 엘 파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에드리히를 노려보며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가엾은 아이를 죽여 내게 누명까지 씌워놓고 평소처럼 대화하길 바랐단 말이냐.”
“황자 하나 죽은 것 가지고 너무 정색을 하는걸?”
“도대체!!”
아젤로스의 취급이 너무 지독하다. 나는 에드리히를 노려보며 벌컥 화를 냈다.
“아젤로스는 네 아들이다! 그 아이에게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단 말이냐!”
에드리히는 나의 노성에 느른하게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아젤로스를 죽이고도 끔찍할 정도로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십여 년 사이에 그는 잔인하고 포악한 폭군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벌레처럼 죽였고 아젤로스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정을 준 적이 없다. 당연히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지.”
“에드리히……!”
“당신은 혈육을 죽인 뒤에 항상 부채감에 시달렸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지는 않다.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짐은 애초에 죽이지를 않았을 것이다.”
“…….”
에드리히가 말하는 순간에 숨통이 콱 막혔다. 그는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유난한 재능이 있었다. 에드리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는 나를 지켜보며 느긋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레비 형님.”
녀석이 내가 앉아 있는 소파 뒤쪽에 멈춰 서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쓸데없이 접촉이 잦은 것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나는 일단 놈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요를 억누르며 나는 가능한 한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내 이름은 레이다.”
“당신이 레비 형님임을 알았는데 짐이 왜 그런 천민 같은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야 하지?”
“천민 같은 이름이라 미안하군?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내 이름이다.”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에드리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레비 형님. 이제 진짜로 때가 되었다. 스트라스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때다.”
나는 빠득 이를 갈았다.
“제발 개소리 좀 그만하지? 엘 파셔에 남을 것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겠느냐.”
“귀환 시기도 가까워졌고, 이제 당신에게 진지하게 답을 들을 때도 되었군. 당신은 스트라스의 적이 될 생각인가? 엘 파셔에 남겠다는 것은 그런 뜻이 될 텐데.”
전에도 에드리히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약간이지만 동요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착하게 질문에 대꾸했다.
“휴전 협정이 성사되고 평화가 지속된 지도 이십 년 가까이 되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와는 상황이 달라. 스트라스와 엘 파셔는 상생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래 봤자 적국이지.”
에드리히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투였다.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서 웃는데 입가의 상처가 일그러지며 얼굴 위로 살벌한 광기가 자리 잡았다.
“당신의 말은 이상론이다. 당장 짐이 군대를 이끌고 엘 파셔를 공격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에 서서 검을 들 것인가? 짐이 당신을 스트라스로 데려간다면 엘 파셔의 점잖은 척하던 그놈도 분명 격분해서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그때 당신은 어느 쪽에 설 생각이지?”
“애초에 네놈들이 싸우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냐.”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 같은 건 없다. 당신은 한 명뿐이고 둘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에드리히가 내 어깨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 둘로 나눌 수 있다 해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넘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칠게 에드리히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같잖은 소리를 너무 오래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바로 출입구로 향했다. 잔뜩 화가 나서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에드리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연히 무시했다.
덜컹.
“폐, 폐하……!”
그런데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이 놀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리히가 경련하는 손으로 소파를 붙들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채 다른 손은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전에도 에드리히가 두통에 시달리며 비틀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만성 두통으로 종종 침대 신세를 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젤로스 사건 후로 다시는 에드리히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가서 몸 상태를 살폈다.
에드리히는 내가 곁에 있음을 의식하며 표정을 수습하고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억누르려 애썼다. 순식간에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에디……! 안 되겠다, 바로 신관을 불러와야겠어!”
나는 바로 사람을 부르려고 일어났다. 순간 에드리히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신관 따윈…… 필……요 없다…….”
“에디?”
나는 일단 몸을 낮추고 앉아서 다시 에드리히의 상태를 확인했다. 에드리히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극한까지 치달았던 통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있는 모양이다.
“오래된…… 두통이다……. 어차……피……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렇다느니, 마음을 편히 먹으라느니 그딴 소리나 하겠지…….”
말을 하는 동안 점점 그의 안색도 조금은 돌아왔다. 나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통증이 심하니 일단은 신관을 부르는 게 나을 것이다.”
“쓸데없다 했을 텐데…….”
그의 완강한 모습이 조금 의아했다.
“왜 그렇게 신관을 부르는 걸 싫어하지?”
어느새 식은땀에 푹 젖은 에드리히를 보며 나는 질문했다. 에드리히가 고개를 들더니 피식 웃었다.
“형님.”
에드리히는 아까부터 내 팔목을 잡고 있었다. 그 손아래에 마정석 팔찌가 있었다.
콰득.
그는 손아귀에 오라를 실어 강철과 보석으로 이뤄진 팔찌를 순식간에 부수고 뜯어내 버렸다.
“……!”
어찌 대응하기도 전에 팔찌를 빼앗기고 에드리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뒤편 탁상으로 밀려서 처박혔다. 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바로 낭패감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전부 마정석을 빼앗기 위한 연극이었나.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에드리히는 정말로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연기로 저렇게 식은땀을 흘릴 수는 없는 일이다.
에드리히는 깊게 한숨을 쉬고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하아, 이건 운이 좋군……. 당신을 어떻게 데려갈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다니. 두렵고도 상냥한 형님. 당신은 또다시 짐의 앞에서 방심하는군.”
변명의 여지도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아무리 에드리히의 상세가 나빠 보여도 그가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더 경계했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놈이 아프든 말든 신경도 쓰지 말았어야 했다. 뭐가 놀랄 일이라고 황급히 놈에게 달려갔는지, 정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에반. 그 약을 이리로.”
에드리히가 불쑥 에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반은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잠시 허둥댔다. 하지만 이내 품에서 물약 같은 것을 꺼냈다.
에드리히는 에반에게서 받은 물약을 자기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바로 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고 입을 맞췄다. 약을 먹이려는 의도가 명백해서 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하지만 에드리히가 턱을 짓눌러 강제로 입을 열게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에드리히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욱……!”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약을 삼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마치 어린애 다루듯 여유가 있었다. 그가 떨어져 나오며 입과 코를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숨이 막혀 부들부들 떨다가 울컥 약을 삼키고 말았다.
에드리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잠시 손을 떼어주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발악한다고 약을 전부 삼키지는 않았다. 쿨럭대는 동안 입 안에 고여 있던 약과 침이 뒤섞여 줄줄 흘러나왔다.
에드리히가 내 모습을 보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거칠게 그것을 뿌리치고 바로 바깥의 크리스티안과 던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리히가 소리를 내지 못하게 다시 손수건을 든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 상태로 어린애를 무릎에 앉히듯이 나를 끌어와 자기 품에 앉혔다.
입을 막고 등 뒤에서 나를 반쯤 안은 채로 시간이 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며 천천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 에드리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강력한 당신을 해칠 수 있는 자는 없어야 하는데 휴전협정 때도 짐이 건네준 별것 아닌 차 한 잔이 당신의 목숨을 앗아갔지. 당신은 오직 짐의 앞에서만 방심을 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건 뜻밖에 무척 기쁜 일이기도 하더군. 당신이 진심으로 짐을 아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에드리히가 힘없이 늘어지는 나를 등 뒤에서 한층 강하게 끌어안았다. 전부 놈의 말대로다.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혈육이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소용없는 줄 알고도 대화를 해보려 했고, 끝내 방심해서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시야가 백색으로 뒤덮이며 점점 생각이 흐려져 갔다. 이대로 끌려가나? 그러면 지스카르는 어떻게 반응할까. 제발, 제발, 부디 놈이 이성적으로 행동하길. 만에 하나라도 지스카르가 이성을 잃고 기사들을 움직인다면, 그에 에드리히가 맞대응이라도 한다면.
두 놈은 엘 파셔의 황제이고 스트라스의 황제였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이 대륙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질 수도 있었다.
“읍……, 윽…….”
나는 약간씩 경련하며 어떻게든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아두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레비 형님.”
에드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짓누르던 손을 떼어냈다. 그대로 내 얼굴을 잡아 뒤로 당기며 입술을 맞췄다. 일순 눈을 크게 떴다. 아까는 약을 먹이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무의식 아래로 잠겨들었다. 눈앞이 완벽하게 희게 변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약에 취한 탓인지 몽롱한 상태로 꿈을 꾸었다. 에디가 묵직한 장검을 휘두르며 훈련에 한창이었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되는 에디는 또래보다 10센티는 작았다.
나는 일부러 연무장에 서서 에디가 검술 훈련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따로 처리할 일도 많았고, 날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들이 성문 밖까지 줄을 서서 대기 중이지만 없는 시간을 억지로 쪼개서 에디를 만나러 왔다.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에디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훈련을 피했기 때문이다.
“이 몸에게 보초를 서게 만들다니 너도 대단한 녀석이다.”
“혀, 형님. 거기 계시지 않아도 열심히 훈련할 테니…….”
“내가 빤한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내가 으름장을 놓자 에디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검을 들었다. 에디가 자꾸 훈련을 빼먹고 도망치거나 했지만 사실은 검을 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 숙청당할까 봐 두려워서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훈련을 끝내고 에디가 내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에디는 잠깐 내 얼굴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애매하게 턱 끝 정도에 맞췄다.
“어딜 보느냐. 눈을 맞춰야지.”
“하지만 제가 감히…….”
“녀석이 하라면 하는 것이지 말이 많다.”
에드리히는 바짝 얼어서 감히 내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으름장에 곧 나와 눈을 맞췄다. 내가 하면 되지 않냐고 웃었더니 에디도 마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검도 실컷 만질 수 있게 해주고 밝게 웃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낸 보람이 있다고 제멋대로 즐거워했다.
에디는 휘하의 뛰어난 기사들이나 머리 좋은 관리들과 달리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오히려 내 앞길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황가의 마지막 남은 핏줄이다. 언제든 주제넘은 짓을 한다면 목을 베어 죽여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조그맣고 강아지처럼 귀엽기만 했기에 그 아이에게 무한정 애정을 베풀었다.
아주 옛날부터,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공포에 질려 있는 아이를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는 것처럼 귀여워하며 곁에 두었다.
그는 유일하게 내 죄업에서 벗어난 존재이니까. 나는 그를 아끼는 것으로 친족을 죽인 죄책감을 마음껏 덜어냈다. 오직 사랑하고 사랑하기만 했던…… 가련한 나의 동생.
“으.”
별 괴이쩍은 감상적인 꿈을 꾸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기절한 뒤로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진 않은 것 같았다. 정확하게 시계를 본 것은 아니지만 체감상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끔뻑거려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정신은 금방 돌아왔으나 목이 뻐근하고 몸도 무거웠다.
덜컹.
몸을 약간 움직이자 뭔가가 팔에 걸렸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사지가 족쇄로 결박되어 있었다. 팔다리를 묶은 족쇄는 침대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주위 광경이 눈에 익었다. 전에 에드리히의 병문안을 위해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황제의 침실이었다.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쓴웃음을 터뜨렸다. 전에 이 비슷한 짓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랬다. 그땐 발목에만 족쇄가 있었지만.
“전하, 왜 웃으십니까?”
문득 고개를 드니 감시를 맡았는지 에반이 근처에 있었다. 나는 비아냥조로 대꾸했다.
“내 꼴이 웃겨서 웃었다. 에디 그놈을 예뻐해 주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 벌써 두 번째 아닌가?”
“황태자 전하. 당신이 정말로 황태자 전하라면, 그러하다면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스트라스로 돌아와 주십시오. 아젤로스 전하 사건부터 시작해서 이런 일까지……. 당신 때문에 사태가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고집을 부리지 마?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에드리히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진 않고?”
에반은 힐끗 문 쪽을 보다가 다시 빠르게 말했다.
“전하께 이야기해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저를 찾아주십시오.”
이내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에드리히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힐끗 에반을 보며 꺼지라며 턱짓을 했다. 에반은 정중히 머리를 조아린 뒤 밖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에드리히는 고개를 돌려 내게로 걸어왔다.
“벌써 깨어났군. 약을 제대로 다 삼키지 않은 탓인가.”
나는 족쇄에 묶인 팔을 당기며 말했다.
“납치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마. 이제부터 내 가죽이라도 한 겹 한 겹 벗겨낼 심산인가?”
“무슨 살벌한 농담을. 당신을 끌고 온 것은 좀 충동적이었다. 애초에 납치하고 싶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는데 때마침 운이 따라서 이런 일이 가능했군. 이리될 줄 알았다면 스트라스로 바로 떠날 수 있게 준비를 해두는 것인데 말이야.”
에드리히는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반대로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심 안도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스트라스로 끌려가 버렸으면 일이 몇 배로 복잡해질 뻔했다.
“정말 안타깝군. 체르도가 친위대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어 그의 눈을 피해 당신을 데리고 아베크 중립국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가 않더군. 진작 내 심복을 좀 더 만들어놓을 것을 그랬지.”
에드리히는 다시 한번 나를 보며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녀석이 가까이 다가와 침대 위에 앉았다. 결박당한 상태에서 놈이 접근하자 긴장감에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예상과 달리 다정한 태도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몸 상태는 어떤가. 현기증 같은 건 없고?”
“너는 평소에도 사람을 납치하려고 이상한 약을 들고 다니는 모양이지?”
“그건 짐이 불면증에 시달릴 때 쓰는 마약성 수면제다.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몸에 크게 해롭진 않을 거야.”
“이 상황에서 상냥한 척하기냐. 허튼소리를 할 셈이라면 이 족쇄부터 풀어보시지.”
“당신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라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에드리히는 그리 말하며 팔을 묶은 족쇄를 진짜로 풀어주기 시작했다. 양팔을 풀고 오른쪽 다리도 풀어주었다. 왼쪽 발목을 결박한 족쇄는 남겨두었다.
“이건 만약을 위한 방지책으로.”
어차피 마정석이 없으면 족쇄가 다 풀려도 에드리히에게 저항할 방도가 없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깐 양 팔목을 주무르며 신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출입구 쪽 테이블에 부서진 마정석 팔찌가 놓여 있었다. 아예 안 보이는 곳에 숨기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저건 나를 약 올려보자는 수작인 게지?”
내가 마정석을 가리키며 묻자 갑자기 에드리히가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즐거울 수밖에. 당신의 반응이 예상했던 그대로이니까. 당신이라면 마정석까지 다 뺏기고 무력한 상태가 되어도 딱 그런 얼굴로 뻔뻔하게 쏘아붙일 거라고 상상했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에드리히가 갑자기 내 어깨를 짓눌러 침대에 쓰러뜨렸다. 뭐라 하기도 전에 놈이 입술을 덮쳤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겹쳐졌다.
“……!!”
기겁하여 놈의 팔을 잡고 밀쳤다.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을 꽉 다물자 녀석이 다문 입술 사이를 축축한 혀로 천천히 핥아 내렸다. 나는 희게 질리고 말았다. 이, 이 무슨 개 같은 짓을!
에드리히가 충분히 입술을 핥으면서 뒤로 떨어져 나왔다. 나는 어금니를 빠득 깨문 채 겨우 놈을 쳐다보았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아마도 내가 아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에도 에드리히가 내 입에다 키스 같은 걸 했던 기억이 났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에드리히는 변명을 하기는커녕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누르고 다른 손으로 눈과 코, 입까지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 내렸다.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당신에게 입을 맞추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래, 이런 얼굴이었군. 놀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눈으로, 이런 목소리로 놀란 표정을 지을 거였어.”
“에드리히!”
에드리히가 몸을 낮춰 귓불을 이로 살짝 물었다. 혀가 귀를 핥아나갔다. 이게 뭐냐. 무슨 짓이야. 진짜로 가죽이나 벗기고 고문 같은 걸 하면서 화풀이를 할 줄 알았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나는 네 형이다! 네 녀석, 역시 나를 형님이라고 믿은 적이 없었던 거지!”
소리를 지른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에드리히는 오히려 나를 형님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날 짓밟는 상상을 하며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했다고 말했다.
에드리히가 귓가에서 지분거리다가 잠시 떨어져 나왔다. 일부러 하던 것을 멈추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다시 그가 목덜미로 내려왔다. 내 머리를 잡아 위로 누르고 길게 드러난 목을 혀로 핥아 내렸다. 순간, 나는 숨을 꾹 참았다. 에드리히는 쇄골의 연한 살 부분에 입 맞추듯이 깊게 빨았다.
“형님.”
에드리히가 부드럽게 나를 부르며 입술을 건드렸다. 그만 숨을 쉬라면서. 나는 그제야 숨을 허억 토했다. 어안이 벙벙하고, 왠지 몸이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약물의 후유증인가. 어차피 내 힘으로 무슨 짓을 한들 에드리히에게 통하지 않을 테고.
에드리히는 웃으면서 윗옷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빠진 손으로 그의 팔을 더듬더듬 붙으며 방해했다. 하지만 허둥대기만 할 뿐 손이 그냥 미끄러져 떨어졌다. 뭔가 현실감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 전부터 대단히 당황하고 있었다. 에드리히가 진심으로 ‘레브노아드인 나’를 겁간하려고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형님, 레비 형님……. 당신이 이 정도로 당황할 줄은 몰랐는데.”
에드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내 행동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동요하는 눈동자, 허둥대는 손가락, 가쁘게 숨 쉬는 모습, 그 모든 행동을 관찰하더니 ‘아아’ 하고 낮게 탄사를 터뜨렸다.
단추를 전부 풀어낸 그가 셔츠를 젖혔다. 맨살에 찬 기운이 닿는 순간 차가운 현실도 함께 돌아왔다. 그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애써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그만, 여기서 멈춰라. 에드리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에드리히는 분노에 가득 찬 내 눈동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아, 눈동자가……. 그래. 진짜로 화가 난 당신은 이런 빛을 냈었지.”
“미친놈.”
놈은 미쳤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에드리히와 나는 비록 어머니는 달랐으나, 둘 다 선황제의 아래에서 태어난 같은 핏줄이었다. 동성인 이복형제에게 음심을 품는 게 정상인이 할 짓이냐?
나의 경멸을 에드리히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신의 말이 맞다. 짐은 예전에 미쳐 버렸는지도 모르지. 매일 형님을 발가벗기고 은밀한 곳을 만지는 것을 상상했다. 당신이 아픔에 허덕일 때까지 짐의 것으로 가득 채워 넣을 상상을 했어.”
에드리히가 덥석 치골 쪽을 붙잡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경기하듯 몸을 비틀었다. 발버둥 치는 내 몸을 에드리히가 침대에 꾹 억눌렀다.
“너……!”
에드리히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놈은 나를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나를 죽이는 대신 내가 호의를 보였던 아젤로스를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에드리히는 절대로 나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헐벗기고 강간하여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을 줄 것이다.
수십 년 넘게 억누르고 억눌러온 무서운 분노를 담아서.
그래.
내게 당한 것이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에드리히가 어릴 적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워했던 내 얼굴을 멋대로 만지고 쓸어내렸다. 그리고 함부로 키스를 했다. 입 안으로 혓바닥이 밀려들어 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고개를 틀었다.
“웁, 아……!”
갑자기 뜨끔거리는 통증에 가슴을 붙들었다.
뜬금없는 일인데, 멀쩡한 심장이 아팠다. 당연한 일에 실망해서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실망스럽고, 우스꽝스럽게도 슬펐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냐, 전부 알고 있었던 일이지 않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되는 것인지. 이게 다 빌어먹을 약 때문이다. 약 때문에 시시한 옛날 꿈을 꾸다가 깨버려서,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이 감상적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심장이 짓이겨질 듯이 아픈 것도 전부 다 약에 취한 탓이다. 사람에게 이상한 약을 처먹여서 이렇게 숨도 쉬기가 어렵게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에드리히가 강제로 턱을 움켜쥐고 깊이 혀를 넣어 음미하듯이 입술을 빨아들였다. 진득하게 키스하고 그는 떨어졌다. 에드리히는 여태 그래 왔듯 또다시 위쪽에서 내 얼굴을 관찰했다.
“……당신을 안았을 때 어떤 표정을 할지 상상해 왔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크게 화를 내거나 역겨워할 것이라고 상상했지. 그런데…… 이런 얼굴은 예상에 없던 것이로군.”
에드리히는 붉어진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가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형님.”
에드리히는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서 맨살을 느리게 만지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나의 형님.”
나를 만지던 에드리히의 손길이 갑자기 멎었다.
고요하다. 이해할 수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숨을 고르며 그의 진의를 찾으려고 애썼다. 문득 에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스트라스로 돌아와라. 짐이 여기서 더 미쳐 버리기 전에.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만 해.”
“약속?”
“그래, 약속.”
에드리히가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어렵게 한숨을 토했다. 그 모습이 억지로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내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리히의 얼굴이 천천히 다시 광기에 얼룩졌다.
그가 내 목덜미를 덮쳤다. 이를 세워 목을 약하게 깨물고 강하게 빨아서 붉게 흔적을 남겼다. 맨살을 핥으면서 그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더는, 더는 견디기 힘들어서 에드리히의 머리를 꽉 쥐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예민한 돌기를 혀로 누르고 입술로 깊게 빨아당겼다.
“……!”
나는 숨을 헉 들이켜고 눈을 질끈 감았다. 혓바닥으로 자극을 받아 유두가 빳빳하게 섰다. 목을 뒤로 젖히고 힘을 주며 벌벌 떨었다. 이렇게……, 이렇게 끔찍할 수가.
“그만…….”
에드리히가 손으로 반대쪽 유두를 지분거렸다. 내 손 힘으로는 도저히 에드리히를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옆으로 팔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만……!”
살면서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겨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궁지에 몰려 막다른 처지가 되면 구원자를 찾고 신을 찾게 된다고 하던데, 적어도 내 성미와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 치욕을 당했을 때도, 고문당해 온몸이 문드러질 때도, 항상 당연하다는 듯이 스스로 생각해서 살아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침대를 긁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신이든 누구든 이 지옥 같은 수렁에서 구해주기를 바랐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아무래도 좋으니.
“지스……카르……!”
퍼렇게 질린 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지스카르를 불렀다. 내가 벌벌 기면서 도움을 구한 상대는 우습게도 내게 똑같은 굴욕을 주었던 그놈이었다. 어차피 스트라스의 황제를 상대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자는 엘 파셔의 황제인 그 녀석 정도밖에 없다.
순간 에드리히가 번득 몸을 일으키고 저 위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레비 형님.”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잠깐이지만 지옥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속셈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왜. 질투라도 나는 모양이지?”
“형님. 당신이 어떤 놈을 데리고 즐기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마음을 내주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 잘나신 엘 파셔의 황제인데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지, 네가 무슨 참견이라고?”
“형님!”
에디가 사납게 내 얼굴을 붙잡고 키스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에드리히의 팔과 등을 긁어내렸다. 입이 자유로웠다면 비참하게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미친놈, 미친 새끼. 제발……, 제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쾅!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스카르.
침대를 기면서 놈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진짜로 녀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던필과 눈에 익은 엘 파셔 기사들이 두 명 더 있었다. 뒤이어 부상을 입은 체르도와 익숙한 스트라스의 기사 셋이 침입자를 쫓으려는 듯 뒤따랐다. 하지만 방 안의 풍경을 보는 순간 그들은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 멈췄다. 체르도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생각보다 빨리 방해물이 나타나셨군. 이래서 스트라스로 바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에드리히가 몸을 일으키며 이를 드러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반응이 빨랐다. 지스카르가 에드리히의 아래에 반라로 깔려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아주 끔찍하게, 처참히 일그러졌다.
“레이……!”
진심으로 격분하여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스카르가 저런 얼굴에, 저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지스카르가 벼락같이 검을 뽑아 에드리히를 공격했다. 에드리히도 즉시 침대맡에 세워두었던 검을 들고 맞대응했다.
그들이 격돌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문득 손 안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던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손에 마정석 팔찌를 건네주었다.
카앙.
지스카르가 오라 소드를 휘두르고 에드리히가 가로막았다. 크게 튕겨 나가며 두 번째 공방이 이어졌다. 한 걸음, 지스카르가 앞으로 밀어붙이듯 발을 내디디며 연이어 검을 들었다. 일순 그의 검에 서린 오라가 무시무시한 밀도로 압축되어 휘황하게 휘몰아쳤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파괴적인 힘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데 소름이 쫙 끼쳤다. 오라의 총량만이 아니라 밀도도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순간, 지스카르의 검이 번쩍하고 떨어졌다.
에드리히도 오라를 더해서 이어지는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두 자루의 오라 소드가 맞부딪쳤을 때 지스카르가 휘두른 일검이 에드리히의 검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커다란 굉음이 터지며 에드리히의 자세가 크게 흔들렸다. 지스카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카앙.
세 번의 공방 만에 결과가 나왔다. 지스카르가 한 번 더 무겁게 검을 내리찍자 에드리히는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짓눌려 어깨가 비틀렸다. 삼합 동안 에드리히는 방어에만 급급했을 뿐 제대로 공격을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그는 끝내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스카르는 검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주 호언을 했다. 그 전부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지금 이 순간에 증명했다. 감히 가늠도 하지 못할 수준의 가공할 오라가 검신을 따라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악력, 근력, 모든 신체의 기능이 아득히 한계를 넘어 그를 진정 무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세상에 재앙이라도 내릴 것처럼 그는 무시무시하게 격노해 있었다. 지스카르는 분노를 담아 에드리히의 어깨를 짓밟아 바닥에 쓰러뜨렸다. 으드득,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지스카르가 백색으로 불타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오라 소드가 에드리히의 목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안 돼!!”
내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엘 파셔의 황제가 스트라스 황제를 죽이는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아니 그런 정치적인 사정 이전에, 에드리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다급하게 부탁했다.
흠칫, 지스카르는 검을 멈췄다. 내가 짧게 외친 한마디만으로 지스카르는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단숨에 이해했다.
푸욱.
그런데 그 순간, 지스카르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장검이 붉은 피를 머금은 채 지스카르의 등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예전부터, 매번 그랬다.
내가 그만두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스카르는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결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에드리히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키며 망설이는 지스카르의 가슴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
어떤 소리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스카르에게 달려가는 동시에 왼쪽 발목의 족쇄가 마법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침대에서 급하게 뛰어내리느라 순간 발목을 접질렸지만 상관하지 않고 다시 지스카르에게 달려갔다.
멍청한 놈. 멍청한 자식!
눈앞에 지스카르밖에 보이지 않았다. 숨이 가쁘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에드리히가 지스카르를 찌른 검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 압축된 마력 덩어리를 날려 그를 구석에 처박았다.
에드리히는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갑자기 무언가에 짓눌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무형의 힘이 아래로 짓누르는 방식의, 공격보다는 제압을 위해 사용되는 마법이었다.
에드리히를 제압하면서 지스카르의 등에 손을 얹었다.
“조용히 해라! 다들 닥쳐!”
엘 파셔의 황제가 칼에 찔린 순간부터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스트라스의 기사들까지도 패닉에 빠졌다. 던필, 체르도, 아직 누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든 간에 소리를 지르거나 소란을 피우기 전에 나는 입을 다물라고 경고했다.
“할 수 있어…….”
초조하게 혼잣말 같은 것을 하며 지스카르가 자세를 낮춰 앉도록 도왔다. 동시에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치유 마법을 그의 상처에 쏟아부었다.
“지스카르. 제발.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네게는…… 오라가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1미터짜리 장검이 갈비뼈를 부수고 가슴을 깊숙이 관통하고 있었다. 폐가 찔렸는지 지스카르는 숨을 잘 쉬지 못했다. 상태를 살펴보니 심장 주위의 큰 혈관까지 건드린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면 벌써 의식을 잃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스카르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아직 버티고 있었다.
나는 엘 파셔의 친위기사 중 하나를 불러 검을 뽑으라고 요구했다. 창백하게 질린 기사는 아주 신중하게 천천히 지스카르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지나치게 튼튼해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지스카르의 몸이 퍼들퍼들 경련했다. 놈이 낮게 기침을 하자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검을 뽑자마자 상처를 누르며 지혈 마법과 치유 마법을 계속 퍼부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다, 지스카르.”
지스카르의 몸이 느리게 앞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 상황이 기이할 만큼 낯설었다.
“지, 지스카르. 지스카르…….”
놈을 꽉 안은 채로 멍청하게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레……이…….”
문득 지스카르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나를 달래는 듯한 음성이었다. 피를 울컥 토하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주제에 용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덕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스카르는 치명상이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를 이대로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 이거 아깝군. 이번에야말로 죽여버릴 수 있었는데…….”
뒤쪽에서 에드리히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쾅!
나는 주문을 하나 더 동원해 에드리히를 한 번 더 구석에 처박았다. 하지만 놈에게 주문을 두 개나 할애하고 있는 것이 아까워 바로 다시 하나를 회수하여 치유 마법에 집중했다.
“적입니다.”
그때 출입구 근처에 있던 던필이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는 상황이 급박할수록 그 어떤 자들보다도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황제의 가슴에 검이 박히는 것을 보고도 퇴로를 지키며 바깥 동태를 정확하게 살피고 있었다.
문득 매캐하게 탄내가 느껴졌다. 회색 연기까지 문틈 아래로 밀려들어 오는데 정신이 없어서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에 화재라도 난 것일까. 여기까지 잠입하기 전에 적의 눈을 돌리기 위해 엘 파셔 쪽에서 일부러 불을 질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 체르도가 어금니를 빠드득 깨물더니 던필을 제치고 출입구로 걸어갔다. 그는 가까이 접근하는 스트라스 기사들을 막으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당분간 아무도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전부 밖으로 철수해서 화재를 진압해! 내가 폐하를 모시고 나가겠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깥의 인기척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물러났다. 그때 에드리히가 육신의 힘만으로 내 마법을 이겨내며 한쪽 다리를 세워 앉았다. 그가 부상을 입은 왼쪽 어깨에 손을 얹고 웃는 낯으로 지껄였다.
“그래, 짐이 심기가 불편하긴 하지.”
“…….”
체르도는 지금 반역 행위를 하고 있었다. 적국의 기사가 황제의 침소까지 쳐들어왔다. 황제의 친위기사인 체르도는 당연히 목숨을 걸어서라도 적을 처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에드리히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꼴을 보는 순간 그는 크게 격분하여 황제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적 기사들의 행적을 감춰주었다. 더 기이한 것은 자기 친위기사가 반역을 하고 있는데도 에드리히는 웃고 있기만 하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은 깊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체르도, 모시스, 스트라스 쪽의 기사들과 엘 파셔의 기사들, 마지막으로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라. 엘 파셔의 기사들은 이곳에 온 적이 없다. 내가 여기까지 끌려온 적도 없었다. 엘 파셔의 황제가 부상을 입은 일도 전부 없었던 일이다. 알았느냐!”
“…….”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들 유능한 자들이기에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이 단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 에드리히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미봉책으로 이번 일을 숨겨본들, 짐은 당신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만?”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에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당장 손끝만 뻗어도 그의 갈비뼈 몇 대를 으스러뜨려줄 수 있었다. 화풀이 목적으로 그를 짓이겨버리고 싶은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나는 에드리히를 보며 다시 경고했다.
“모든 것은 극비로 취급해야 한다. 부상을 입은 자들은 전부 화재에 휘말렸을 뿐이다. 항명하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죽여서라도 입을 막아라.”
어차피 지금의 나 같은 건 스트라스 황제인 에드리히에게 명령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 이건 허공에다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별말을 하지 않고 대신 큭큭 웃었다.
나는 다 집어치우고 주문 네 개를 모두 치유 마법으로 돌렸다. 4중 영창은 치유력을 올리는 데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치유는 신관의 영역이고, 마법으로 행하는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반해 지스카르가 입은 상처는 너무 심각했다. 치명상이었다. 내가 쉽게 겁에 질리는 성격이 아닌데 지스카르를 안고 있는 손끝이 자꾸 떨렸다.
만에 하나라도 엘 파셔 황제가 죽는다면? 이런 곳에서? 그것도 내가 내뱉은 멍청한 소리 때문에? 상처를 누른 손이 피로 흥건했다. 출혈을 느끼자 다시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나는 던필에게 지스카르를 넘겨주고 빠르게 움직이자고 말했다.
이 끔찍한 사태의 원인이 내게 있음을 알았다. 최소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지스카르…….”
그를 보며 나는 어금니를 빠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