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5.
새 황제가 즉위한 직후부터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의 복수를 외치며 각지에서 빈번하게 반란이 발생했다. 다른 속셈이 있는 자도 있었겠지만, 명분은 전부가 일관되게 전 황태자를 암살한 현 황제를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란군은 빈손으로 즉위한 현 황제를 우습게 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소드 마스터였고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했다. 또한 레브노아드를 쫓아 전쟁터를 다닌 덕분에 전략 전술에도 밝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전무패를 자랑했던 전 황태자의 친위기사들이 반란군의 진압을 돕고 있었다.
“체르도! 어떻게 원수의 검이 될 수가 있느냐. 죽어서 황태자 전하의 얼굴을 어찌 뵈려고!”
“…….”
체르도는 레브노아드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황제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가끔 복수를 했어야 옳았던 것인지 의심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레브노아드를 살해한 에드리히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그를 도와서 스트라스를 재건하는 것이 황태자 전하의 뜻임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인의 복수를 택한 동료의 머리에 칼을 박았다.
체르도는 황제의 친위대장이 되면서, 전 황태자의 신하였던 이들을 만나 새 황제에게 충성하라고 설득했다. 그의 뜻에 공감한 친위기사들과 많은 자들이 에드리히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들은 대단히 유능해서 반란을 진압하는 일뿐 아니라, 많은 일을 도맡아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황제에게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에드리히를 레브노아드의 원수라고 믿고 있었다. 속내를 숨기려 했으나 황제를 혐오하고 멸시하는 태도가 저도 모르게 겉으로 드러났다.
황제의 검을 자처하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체르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 황태자의 신하 중에서 가장 불손한 자가 바로 그일지도 몰랐다. 친위대장인 그는 황제에게 무례한 자들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했고, 때때로 어전에서 감히 언성을 높이는 식으로 황제의 위신을 깎았다.
황제로 즉위하였음에도 에드리히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선황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그를 냉대했고, 마지막 순간엔 그를 찢어 죽였어야 했다고 증오 섞인 유언까지 남겼다. 자연스럽게 황궁 내에는 그를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종들조차도 새 황제의 말에 제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에드리히는 도를 넘어 무례를 범한 시종 하나를 죽였다. 그랬더니 꽤 많은 수의 시종들이 공손해졌다. 시체가 늘어갈수록 그의 앞에서 무도하게 구는 자들이 줄어갔다.
그는 직접 전장에 나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반역도의 목을 베었고, 잔당의 본거지를 불태우며, 한편으로 황궁에서 법도를 무시하는 아랫것들을 죽였다. 몇 명 정도 죽이는 것으로는 수습되지 않아 사소한 죄만 지어도 엄벌에 처하니 드디어 황궁이 조용해졌다.
에드리히는 검에 엉겨 붙은 피를 무감동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와 죽음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온 나라에 피를 뿌리는 것으로 그는 황제의 권위를 겨우 일부나마 되찾았다.
* * *
에드리히가 친정하여 일곱 번째 반란군의 성을 불태웠던 날이었다. 전투가 마무리되고 병영이 만들어지자 병사를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헐벗은 여자들이 주위를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사내도 몇 명 있었다.
호위도 없이 혼자 병영을 걷던 에드리히는 문득 금발 청년이 막사를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언뜻 스치며 본 것뿐이지만 그자의 눈동자는 분명히 녹색이었다. 에드리히는 형님을 떠오르게 하는 자를 저도 모르게 뒤쫓고 팔을 붙잡았다.
청년이 뒤돌아보았을 때 에드리히는 크게 실망했다. 당연하지만 그자는 형님이 아니었다. 형님은 이미 죽었는데 대체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인 것만 빼면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초라하게 생긴 남창이었다.
“누구십니까? 절 사주시려고요?”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에드리히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남자는 슬쩍 그의 팔을 당기고 유혹했다.
“…….”
닮은 것이라곤 머리 색과 눈동자 색뿐이었지만 어쩐지 위안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에드리히는 남자를 막사로 데리고 왔다.
남자가 살살 웃으며 스스로 옷을 벗었다. 에드리히의 옷에는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색사는 원하지만 천한 놈이 자기 몸에 손대는 건 싫어하는 높으신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 뒷구멍에 향유를 바른 손가락을 넣고 스스로 안을 넓혔다. 으응, 아앙, 하고 일부러 유혹적인 교성을 내며 에드리히를 바라보았다. 에드리히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하고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자, 여기다 한번 넣어보세요.”
“그건…….”
남자가 형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외모가 닮아서 데려온 자다. 눈앞의 남자를 취하는 것이 마치 형님에게 같은 짓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새롭다는 듯 웃었다. 그의 눈에 에드리히는 신분은 무척 높으나 어딘가 순진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제가 넣어드릴까요? 이렇게나 건장하신 분이 박히는 걸 좋아하실 줄 몰랐는데. 하하, 그러지 말고 한번 해보세요. 남색은 처음이신 모양인데 굉장히 만족스러우실걸요.”
“…….”
에드리히는 홀린 듯이 남자의 몸을 바닥에 눌렀다. 남자가 바지 위로 에드리히의 중심을 살살 만졌다. 약간의 애무만으로 성기가 팽팽하게 발기했다. 에드리히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성급하게 자기 성기를 꺼내 남자의 구멍에 밀어 넣었다.
“아앗!”
노련한 남자가 아픈 척하며 신음을 냈다. 에드리히는 강하게 허리를 찍어 누르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황족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기 위해 종마 노릇을 하느라 수없이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지금만큼 기분이 고양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의 구멍을 쑤시면서 에드리히는 감히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만약 눈앞의 남자가 경애하는 형님이라면.
결코 이렇게 좋다고 앙앙대진 않았겠지. 얼마나 크게 화를 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무섭게 죄악감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행위를 멈출 수는 없었다. 믿기지 않는 열락에 빠져 남자의 금발을 쥐었다. 남자의 녹색 눈을 들여다보다가 마치 형님을 안는 것처럼 남자를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 보지도, 만지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아름다운 형님이 흐트러지며 그의 품에 안겼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자신은 왜 형님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것일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에 던져진 채, 형님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를 찾고, 그리워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는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저 형님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 전율이 일 만큼 감격스러울 뿐.
에드리히는 진심으로 감동하여 남자에게 다정하게 입술까지 맞췄다. 성기를 연이어 박으며 움찔거리고 조여대는 내벽의 감각에 집중했다.
“하앙, 하아……. 우리 나리께서 너무 좋아하시네. 저 진짜 잘 조이죠? 하응……, 저만큼 쫀득한 구멍은 또 없을걸요.”
남자가 에드리히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으며 아양을 떨었다. 순간, 간드러진 목소리가 에드리히를 단번에 현실로 끌어냈다. 형님이 이런 식으로 천박한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행위가 끝나고 남자는 슬쩍 에드리히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첫 대화만으로 에드리히를 멋대로 순진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참에 뭣 모르는 귀족 나리를 잔뜩 뜯어먹어야겠다고 눈을 빛내며 원래 가격보다 다섯 배나 되는 화대를 불렀다.
“딱 동화 스물여섯 개면 돼요.”
에드리히는 하룻밤 화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레브노아드를 쫓아 전쟁터를 드나들면서 이쪽 관련으로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만족스러웠으니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다.”
에드리히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남자는 그를 더욱 만만하게 보았다.
“저 정말 잘하지 않나요? 딱 봐도 저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절 아예 남첩으로 삼으시면 어때요?”
“…….”
남자는 대뜸 탁자에 있던 팔찌를 집어 들었다. 그건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즐겨 쓰던 팔찌를 모조한 것으로 에드리히가 종종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우와, 이 팔찌 비싸 보인다. 잘생긴 나리, 이거 저 선물로 주시면 안 돼요? 제가 하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데.”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에드리히는 짜증이 일었다. 당장 입을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치밀었다. 형님과 닮은 자라고 생각하여 데려왔으나 하는 말마다 천박했다. 왜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보니 남자의 머리카락은 갈색이 많이 섞여 형님의 화려한 황금색 머리카락과는 하나도 같지 않았다. 눈동자 색도 그의 것처럼 선명하지 못했다. 남자는 형님을 털끝만치도 닮지 않았다.
에드리히가 무표정이자 남자는 일부러 에드리히를 유혹하려고 정액으로 흥건한 다리를 슥 벌려서 드러냈다. 이런 걸 보고도 버틸 수 있겠어요? 그가 음탕하게 교태를 부렸다.
언제 저 꼴을 보고 흥분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차게 식었다. 하지만 잠깐의 만족도 분명히 있었으므로 에드리히는 남자에게 팔찌를 하사했다.
남자는 귀족 나리가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왔다고 믿었다. 금발에 환장하는 귀족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보니 이 귀족 나리는 금발에 녹색 눈 집착증인 것 같았다. 어쨌든 운이 아주 좋았다. 사실 남자는 지금 목숨이 간당거릴 만큼 급한 사정이 하나 있었다.
“잘생긴 나리, 제가 오늘 밤에 완전히 녹여드릴 테니 제 부탁 좀 들어주지 않으실래요? 건너에 푸른 옷을 입은 창녀들이 있는데 사고를 빙자해서 쓱싹해 주시면 어때요?”
남자가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무엇 때문에……?”
에드리히의 눈빛이 더욱 차게 변했다. 그가 그간 눌러왔던 살기를 느리게 개방했다. 살기 중 일부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남자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질문에 대답했다. 감히 거짓말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제, 제가…… 도, 돈을 조금 빌린 게 있어서요.”
“돈 몇 푼을 갚기 싫어서 여자들을 죽여달라?”
에드리히는 남자를 뿌리쳤다. 남자는 알몸인 채로 얼른 그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일부러 젖은 다리 사이에 손을 끌어당겼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조금 겁만 주셔도 되고요!”
나름대로 사정이 급했던 남자는 황급히 말했다. 남자는 성을 사는 자들의 심리를 잘 안다고 자신했다. 눈앞의 귀족 나리가 자기 몸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남자들은 정사한 직후만큼은 너그럽게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곤 했다. 실제로 비싸 보이는 팔찌까지 자신에게 주지 않았던가.
“그냥 더러운 계집들일 뿐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나리 같은 분들은 그런 천것들 신경도 안 쓰시면서.”
남자는 바짝 붙어서 속살거렸다.
“다시는 사내새끼 못 받게 무서운 칼로 거시기를 살짝만……. 딱 겁만 주는 겁니다. 겁에 질려 밑으로 줄줄 흘리는 게 생각보다 꼴리실 거예요.”
에드리히는 조금 전처럼 뭉개버리고 싶었던 남자의 입을 진짜로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오라가 실린 손아귀에서 우드득 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억눌린 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에드리히의 눈이 무서운 살기로 가득 찼다.
“너도 짐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더러운 창놈이지.”
그는 검을 들어 남자의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남자가 몸을 괴이하게 비틀고 꺽꺽거렸다.
남자는 천박하고 저열했다. 심지어 잔악무도하기까지 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런 천한 놈이 형님과 손톱만큼이라도 같을 수가 없는 것을. 멍청하게도. 어리석게도!
에드리히는 분노에 휩싸여 팔을 자르고 다리를 베고 수없이 검을 내려찍었다. 이성이 돌아온 후에도 그는 손속을 늦추지 않았다.
황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미 많은 자들을 죽여왔다.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감각이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살아 있어봤자 해악밖에 안 될 버러지를 에드리히는 끝내 갈가리 찢어 죽여 버렸다.
다음 날 해가 밝았을 때 친위대장인 체르도가 황제를 모시러 왔다. 그는 막사 안의 광경을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체르도가 이제 와서 천한 놈 하나 죽였다고 저렇게 사색이 될 인물이 아닌데 이상한 반응이었다. 에드리히는 자신이 죽인 남자를 내려다보았고 곧 상황을 파악했다.
죽은 남자는 형님과 똑같이 금발을 가졌으며 녹색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체르도의 눈에는 마치 에드리히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강간하고 사지를 잘라 죽인 것처럼 비쳤을 것이다.
형님이라고 생각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형님을 눈곱만치도 닮지 못한 벌레 같은 놈이었기 때문에 찢어 죽인 것이지.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해도 변명이 될 것이다. 자신이 형님을 암살하지 않았다고 수없이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체르도의 눈에 핏발이 시뻘겋게 섰다. 검을 움켜쥔 손부터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눈앞의 남자가 레브노아드 황태자처럼 보인다면 저런 분노는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나.
에드리히는 체르도의 검을 기다렸다. 한참 전에 죽어 나자빠졌어야 했는데 뭔가가 잘못되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죽게 될 것이다. 형님에게 잠깐이나마 더러운 욕정을 품었던 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그러나 체르도는 끝내 검을 뽑지 않았다. 쉽사리 떨림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증오 어린 눈으로 에드리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전하를 살해하였고, 죽은 그분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은혜로 인해 살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분노로 인해 드문드문 끊어지는 음성으로 그는 간신히 말을 마쳤다.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원하는 길이 스트라스의 평안이라고 체르도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스트라스의 황제를 감히 살해하지 못하고, 에드리히를 그냥 둔 채로 돌아섰다.
체르도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에드리히는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뭔가. 또 살아남았다. 형님이 죽은 뒤로 웃지 못한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한번 웃고 나자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큭큭 웃으며 자조했다.
“차라리 죽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에드리히는 얼굴의 상처를 눌렀다. 황제가 남긴 상처의 후유증으로 그는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를 찢어 죽였어야 했다고, 황제의 피맺힌 유언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지.
죽이지도 못할 주제에.
그날 이후부터 에드리히는 형님을 닮은 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형님을 닮은 남창을 안았을 때 순간적으로 얻었던 안도감이 잊히지 않았다.
금발에 흐린 녹색 눈을 가진 여자를 발견하여 침소로 데려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 역시 형님을 손끝만큼도 닮지 못했다. 에드리히는 저속하고 천박했던 여자를 난도질해서 참살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에드리히 황제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닮은 사람을 끌고 와 강간하고 죽인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소문으로 퍼졌다. 이야기를 들은 레브노아드의 신하들은 역겨움을 견디지 못해 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모시스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동료들에게 성토했다.
“저는, 저는 정말 더는 참지 못하겠습니다. 이대로 황제의 기사로 남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와서 황제를 시해라도 하자는 것인가. 후계 문제도 심각하고, 무엇보다 황제는 쉽게 죽임을 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 나라 안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이며 내란을 직접 평정하는 동안 굉장히 노련해졌으니까. 자칫 내전으로 번지면 싸움이 아주 길어질 것이다.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체르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전하를 닮은 자들을 수십, 수백 명 참살한다 한들, 에드리히 황제는 전하께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한다. 어차피 그것들은 전하가 아니며, 결코 전하가 될 수 없으니까.”
체르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분노하였고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으나 그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체르도 친위대장이 호위 업무를 위해 나타나자 에드리히 황제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체르도 경. 요즘 근심이 많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에드리히 황제는 근래 들어 표정이 밝아졌다. 쉽게 소리를 내서 웃었고, 웃으면서 사람을 벌레 죽이듯 함부로 죽였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는 공포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지지 기반이 약해 몸을 낮추고 있었을 뿐, 에드리히 황제는 원래 나라 안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였다. 본신의 강대한 무력과 무자비한 형벌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며 그는 어느덧 폭군으로 스트라스에 완벽하게 군림했다.
“이만 출발하지.”
오늘 하루는 제도를 시찰할 예정이었다. 친위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선 에드리히는 우연히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비렁뱅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지만 틀림없는 금발에 녹색 눈이었다. 에드리히는 그자를 가리키며 황궁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갑자기 지목을 받은 사내는 깜짝 놀랐지만 순순히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황궁으로 향했다. 사내는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제, 제가 황제 폐하를 모시게 된단 말입니까?”
기사들은 무표정을 유지했으나 속으로 멍청한 것이라고 그자를 비웃었다. 곧 죽게 될 줄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 꼴이라니.
깨끗하게 단장하고 기다리자 가운을 입은 젊은 황제가 침소에 도착했다. 사내는 곁눈으로 황제를 훔쳐보았다. 황제는 키가 대단히 컸다. 190센티는 족히 되어 보였고 전신이 근육질로 꽉 짜여 놀라울 만큼 강인했다. 몸도 좋았고 얼굴도 사내답게 잘생겼다. 하지만 뺨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너무 크게 도드라져 보였다. 어쩌다가 얼굴에 저렇게 큰 상처를 입으셨는지, 사내는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폐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에반이라고 합니다.”
평생 천대만 받고 살았던 자신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을 날이 오다니. 남자의 몸으로 남자를 모신다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상대는 스트라스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
에반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며 큰절을 올렸다. 하지만 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에반의 머리채를 쥐었다.
“네 이름 같은 걸 짐이 왜 알아야 할까.”
“아아악!”
에반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에반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황제는 에반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기는커녕 벌레 보듯이 경멸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닥쳐라. 시끄럽게 굴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으니.”
“으윽! 왜…….”
“눈이라도 똑바로 치떠라. 레비 형님은 네놈처럼 벌벌 기지 않아.”
무자비한 폭행에 에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레비 형님이라는 자는 누구이길래.
황제가 침대에 앉아 에반의 머리채를 잡아 자기 성기 앞에 들이밀었다. 에반은 사내를 상대해 본 적이 없지만 하늘 같은 황제에 대한 막연한 공경심 때문에 그의 성기를 열심히 빨았다. 정성을 다하자 성기에 곧 힘이 들어갔다. 성기가 서자 황제는 에반을 똑바로 보게 쓰러뜨리고 두 다리를 잡아 넓게 벌렸다.
에반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본능적으로 눈을 조금 감았다. 순간 황제가 무섭게 분노하며 그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에반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눈을 감지 마라. 감는 순간 눈알을 파버릴 테니까.”
무시무시한 경고 직후, 황제가 그의 구멍에 성기를 처넣었다. 구멍이 좁아 성기가 잘 들어가지 않자 황제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입구를 당겨 벌리고 다시 끝까지 밀어 넣었다. 에반은 고통에 자지러지면서 일순 눈을 감을 뻔했다. 헐떡거리며 눈동자를 들었다가 황제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아, 레비 형님.”
황제가 혼자 허리를 흔들며 탄성을 흘렸다. 황제가 그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위로 당기고 입술을 맞췄다. 한 올 한 올 아깝다는 듯이 금발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키스한 뒤에는 아래로 내려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에반은 그제야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은 레비라는 사람의 대용품이었다. 천민 출신인 그를 더럽게 여기고 경멸하면서도 레비라는 사람을 닮은 금발과 눈동자 때문에 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에반은 크게 실망했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냐. 그럼 이 나라의 황제가 정말로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황궁에 데려왔을 줄 알았단 말인가.
황제가 한쪽 다리를 치켜들고 거칠게 성기를 쑤셨다. 고통이 너무 커서 에반은 벌벌 떨며 황제에게 빌었다.
“폐, 폐하. 제발…… 그만……. 윽, 아픕니다.”
“폐하가 아니다. ‘에디’라고 불러.”
마른 구멍을 사정없이 쑤시며 황제가 차갑게 명령했다. 아래가 찢어지고 피가 후득 흘렀다. 에반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어째서 감히 이름을 허락하는지 금방 이해했다. 아마 레비라는 사람이 황제를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명령대로 입을 놀리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느냐? 에디라고 부르라 했다!”
황제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다시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에반은 이를 악물고 에디라고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딱딱하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
순간 황제의 입꼬리가 가소롭다는 듯 비틀어졌다.
에반은 자신이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밑바닥 생황을 전전하다가 더러운 뒷골목 어딘가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죽기 전에 기적처럼 황제의 눈에 들어 황궁에 왔지만 역시 세상에 그런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궁의 기사와 시종들이 왜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그를 봤는지 이제 알았다.
“폐하, 저는 에반입니다. 시궁창 옆의 빈촌에서 태어나 평생 천민이라고 업신여김당하며 살아온 비루한 놈입니다.”
“네놈이 뭔지 흥미 없다고 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이름이나 불러봐.”
뒷골목의 같은 비렁뱅이들이 에반에게 주제에 맞지 않게 자존심만 내세운다고 그를 자주 조롱했다. 그 말이 모두 옳았다.
에반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황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 저는 레비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
황제는 잠시 에반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을 뿐, 이내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건방지게 입을 놀리지 마라. 시키는 대로, 명령에 따르기나 해!”
에반은 절대로 황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잔혹한 황제의 분노를 샀으니 당연히 곱게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잔인하게 다뤘지만 죽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행위 끝에 그는 방을 나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시종들이 기척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반은 상처투성이인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시종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고 나자빠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인데 황제와 하룻밤을 지내고 살아남은 것은 에반이 유일했다.
에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살아남았다. 에반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황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레비라는 사람을 흉내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살아남은 것이다.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대용품으로 끌려왔지만, 한편으로는 레브노아드 황태자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은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렇다고 황제가 에반을 아낀 것은 아니다.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고 교양도 없는 에반을 황제는 한결같이 경멸했다. 하루는 에반이 제복을 차려입은 기사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자 그를 하루아침에 자기 친위기사로 임명했다.
검도 쓰지 못하고 기사의 직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그냥 기사 감투를 씌워버린 것이다. 이런 것은 배려가 아니라 조롱이다. 친위기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으나 여전히 에반이 하는 일은 황제의 밤 시중을 드는 일뿐이었다.
친위대장인 체르도는 지금 상황이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닮은 사내가 황궁을 돌아다니며 황제의 노리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전엔 하룻밤 상대로만 들어왔다가 바로 시체로 실려 나가는 통에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매일 황태자를 모욕하는 자를 부하 기사로 두고 만나야 했다. 체르도뿐만 아니라 모든 기사가 황제의 행태에 분노하고 에반을 역겨워했다.
이제 에반도 황궁에 지낸 지 시간이 제법 되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전 황태자의 기사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보며 치를 떠는지 이유를 알았다. 분노를 참지 못한 기사들이 에반을 황궁에서 쫓아내려고 폭력을 가했다. 에반은 황궁에서 잠시도 편히 지낼 수 없었다.
매일 상처투성이에 퉁퉁 부어서 오는 에반을 보고도 황제는 조소만 던졌다. 하지만 이대로 맞아 죽는 게 아닌가 싶던 어느 날, 황제가 갑자기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를 끼는 순간 눈에 띄던 밝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어두운 검은빛으로 변했다.
체르도는 머리 색과 눈 색이 바뀐 에반을 한참 말없이 응시했다.
“……그래. 너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니.”
쓸쓸하게 분노를 누르며 그는 에반을 지나쳤다. 고통받아야 할 것은 에반이 아니다. 진정으로 심판받아야 할 자는 자기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황제이지!
에반이 겉모습을 바꾸는 반지를 꼈다고 해서 그가 전 황태자의 대용품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노리개 취급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체르도가 이성을 되찾는 계기는 되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에반에게 손을 대는 기사가 완전히 없어졌다. ‘기사로서 명예를 지켜라. 그에게 손을 대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친위대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 * *
세월이 흘러갔다. 에반은 남는 시간 동안 검을 쓰는 법도 조금씩 익히고 기사의 직무도 기본적으로 배우면서 겉모습이나마 황제의 친위기사가 되어갔다. 그래 봤자 여전히 허울뿐인 기사였지만.
에반은 오랫동안 친위기사로서 황제의 곁을 쫓았다. 황제는 그를 특별한 벌레로 취급하며 기분이 좋아질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곤 했다. 에반은 조용히 앉아 황가의 은밀한 사정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반은 주제넘게도 황제를 가엾게 여기게 되었다. 황제의 곁에 진정으로 믿을 만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선황제가 생전에 에드리히 황제를 지독하게 냉대하면서 그가 설 자리를 전부 빼앗아버렸다. 선황이 오래전에 죽었음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체르도를 중심으로 한 전 황태자의 신하들이 아직도 정권의 중심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 황태자의 뜻을 지키기 위해 복수를 포기하고 황제의 신하로 남았다. 하지만 말로만 신하를 자처했지 한순간도 황제를 공경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곁에 머물면서 무례한 작태로 그의 권위를 계속해서 손상했다.
황제는 강력한 소드 마스터였기에, 특히 젊은 층에서 그를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황제는 전 황태자의 신하들을 밀어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겼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계속 전 황태자에게 집착하면서 불손한 전 황태자의 신하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도록 방치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어리석은 자신이 보기에도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 황태자 신하들의 불손한 태도만 지적할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황제가 잔혹하며 불성실한 폭군으로 군림하여, 일부지만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려 했던 옛 신하들에게 반발을 사고 현재 상황을 자초하기도 했다. 자신이 감히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면 에반은 진짜 황제의 기사라도 된 것처럼 충신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폐하, 체르도 경과 전 황태자의 신하들을 죽이고 진짜 신하들을 곁에 두십시오. 그들의 권세가 강하긴 하지만 폐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을 따르는 신하를 거느리고 무너진 황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어느 날 에반은 겁도 없이 두려운 황제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 천한 놈이 어디서 감히…….”
에드리히는 크게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에반을 상대로 마음껏 욕정을 털어낸 뒤라 잔인한 주인이었던 그는 잠시나마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다리를 툭 얹었다.
“……체르도는 형님이 가장 아끼던 자였다. 다른 놈은 다 죽여도 체르도만큼은 죽일 수가 없다. 모시스도 그렇고, 험버트도, 에른스트도. 형님이 참 마음에 들어 하셨지. 흠. 그자도……, 역시 죽이기 좀 그래.”
에드리히는 친위기사와 주요 인물들을 하나씩 꼽으며 말하다가 곧 냉소를 머금었다.
“형님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매우 유능하다. 형님의 망령을 끌어안고 있는 한, 그들은 짐에게 충성하고 스트라스를 위해서 일할 것이다.”
“그게…… 충성하는 것입니까?”
에반이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진실이 어떤지 누구보다 황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반은 몰래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의 시신이 있는 지하 석실을 찾았다. 투명한 관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나라는 죽은 자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황과 전 황태자의 신하들은 복수를 포기한 시점에서 에드리히 황제에 대한 적개심을 버려야 했다. 애매하게 그를 황제로 만들어놓고 업신여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도저히 전 황태자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릴 수가 없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에드리히 황제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는 편이 나았다. 선황제와 체르도는 미련 없이 에드리히를 죽이고 다른 자를 황좌에 앉혀야 했다.
에드리히 황제가 불충을 참지 않고 체르도를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누구 하나라도 그리했다면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겼을 것이다. 한동안 국정이 혼란에 빠졌겠지만, 이 나라는 훨씬 더 일찍 정상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선황은 에드리히에게 황위를 넘기겠다고 결심했으면서 전 황태자를 잊지 못해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냉대했다. 체르도는 에드리히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면서도 전 황태자의 유지 때문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겉모습뿐인 충성을 바치는 중이다. 에드리히 황제도 전 황태자가 아끼던 자들이라 하여 불손한 자들을 죽이지 못하고 내버려두고 있었다.
스트라스의 최고 정점에 선 자들이 모두 황태자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었다.
* * *
에반의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숨을 약간 가쁘게 쉬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믿지?”
“이곳에 안치된 전하의 시신을 보고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곳이라면 전하께서 제 말을 온전히 믿어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에반이 주먹을 꽉 쥐고 절박하게 말하다가 이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와 똑같은 금발로, 눈동자가 밝은 녹색으로 변했다.
“저를 보십시오. 저는 뒷골목을 떠돌던 천민이었지만 하루아침에 황제의 친위기사가 되었습니다. 단지 당신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사실 에반에게 확인을 받지 않아도 나는 이미 많은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도를 넘어 불충을 저지르고 있는 체르도와 완전히 어긋나버린 에드리히.
그때 에반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 황제 폐하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지쳐 있는 그분을 다시 일으켜드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힘이 되어달라고?”
에반은 나를 이곳까지 데려오기 위해 나름의 큰 각오를 했을 것이다.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지만 에드리히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다면 그것은 에반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뒤엉켜버린 일을 내가 말 몇 마디로 풀 수 있는 건가? 그런 것이 가능해?
에반의 요청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투명한 관 속에 안치된 내 시체를 쳐다보았다. 죽은 지 십 년도 넘은 시체가 금방이라도 살아서 일어날 것처럼 생생하게 잠들어 있었다. 비정상적인 광경에 다시 한번 소름이 끼쳤다.
내가 왜 전생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마어마한 집착이 전신을 칭칭 옭아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