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화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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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1996년의 가을은 단풍 소식, 그리고 무장공비와 함께 시작되었다. 강릉에 좌초한 잠수함에서 상륙한 무장공비가 육지로 올라오면서 대대적인 간첩소탕작전이 펼쳐졌다는 뉴스가 매번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오늘은 몇 명을 사살했고, 또 무슨 부대 몇 명을 투입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타전되었다. 슈퍼마켓의 라면은 박스 채로 팔리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매일 저녁 내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학교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군대 간 동기 중에서 강원도 쪽 부대에 있는 녀석들에게서는 가끔 이런 전화가 오곤 했다.

"여기 분위기 장난 아냐, 인마."

"알아. 여기 뉴스에도 매번 그 소리다."

"강릉은 완전 전쟁터 분위기야. 안 그래도 민간인보다 군바리들이 더 많은 동네인데, 이제 민간인들은 죄다 싹 숨어버렸고 길거리에 군인만 쫙 깔렸어."

"네가 좋아하는 짧은 치마 다방 레지 구경도 못 해서 어쩌냐."

"그러게 말이다. 휴우. 한석아. 이 형아가 열심히 지켜주마. 근심걱정 말고 자라."

"웃기고 있네. 누가 형이야, 인마?"

이런 되도 않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과 출신 중에서 지금 입대 중인 남학생들에게 위문편지를 쓰자고 건의했다. 과조교인 진호 선배는 좋은 의견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거 말고 또 있냐."

그러면서 진호 선배는 과비를 더 걷어 군대 가 있는 애들에게 먹을 것도 보내자고 했다. 없는 살림에 갑작스러운 지출이 늘어나는 건 다소 뼈아팠지만 뒤에 안전하게 남은 사람의 의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 먼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며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내 스물 두 살의 가을은 그렇게 뒤숭숭하게 시작되었다.

내 이름은 최한석. K대 제어공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다.

집은 저 멀리 남쪽이기 때문에 학교 주변에서 방 하나를 얻어 혼자서 자취하고 있다. 남학생들이 대개 그러하듯 1학년이나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갈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2학년부터 전액 장학금을 타게 되어서 휴학을 미루게 되었다. 장학금을 탈 성적이 되었는데 휴학을 해버리면 등록금 면제 혜택이 날아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2학년을 그렇게 보내고 3학년에도 전액 장학금을 탔다. 그래서 다시 군대를 미루었다. 이제 이렇게 되고 보니 4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야할 판이다.

엄마는 내가 장학금을 탄 걸 크게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군대를 미룬 것에 대해서는 늘 투덜거리곤 했다. 외삼촌들이 워낙 드세었고, 그 분들은 입버릇처럼 "군대 다녀와야 남자 된다"를 외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라고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졸업하고 군대를 가게 되면 나보다 어린 사람을 선임으로 모실 확률이 백 퍼센트였고, 나이 먹은 녀석이 왔다고 괄시당할 위험도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제일 안 좋은 게 학교를 같이 다니는 동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2학년까지는 남아있는 녀석들이 몇 명 있었는데, 3학년이 되고 나니 정말 동기는 씨가 말랐다. 올해 초에 진호 선배와 나눈 대화는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과에서 94학번은 이제 너 혼자야."

"에엑?"

"앞으로 전공수업은 선배들이랑 듣거나 후배들이랑 들어라. 아참, 어차피 너는 재수강도 없으니 전부 선배들이랑 같이 들어야 겠구나."

"선배들이랑 들으면 학점 따기 힘든데..."

"어쩌냐. 억울하면 군대 가든가."

"으윽."

남들 다 하는 걸 때 맞춰서 하지 않으면 이런 부작용이 발생하는 법이다. 동기 중에 여자가 있었다면 같이 다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 텐데, 나와 동기 중에서 여학우는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있었지만... 아, 그 일은 빨리 잊자. 우리 과에 여학생이 들어오는 건 꽤 드문 일이다. 후배들 중에서는 한 학번에 두세 명씩은 들어오는 것 같은데, 내 학번은 이제 아무도 없다.

결국 올해는 본의 아니게 철저히 외톨이가 되어 생활했다. 후배나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같이 맞춰서 수업표를 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같이 다닐 친구가 없었다. 식당에서 밥을 혼자 먹고, 수업에 들어가도 서로 노트를 바꿔 볼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것, 처음에는 그게 퍽 당황스러웠는데,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이르자 그것도 슬슬 익숙해졌다.

익숙함이란 무서운 것이다. 9월에는 무장 공비 사건으로 그렇게 난리도 아니었는데, 10월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하게 되었다면서 이제부터 선진국이란 뉴스가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나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선진국이라니.... 그저 나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실험과제와 리포트에 밀려 정신없이 보낼 뿐이었다. 게다가 코앞으로 닥친 중간고사가 내 정신을 홀딱 빼놓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시험을 끝내고 기진맥진하며 학교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가을 날씨가 힘을 잃고 조금씩 추워질 무렵,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소개팅...이요?"

"소나 개나 다 한다는 소개팅."

"....재밌어요?"

"그래. 난 재미있는데? 암튼, 소개팅.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차 마시고 이야기하는 소개팅."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들른 과사무실에서 만난 진호 선배는 다짜고짜 내게 소개팅을 권했다. 평소 같으면 여러 이유를 들어 고사했겠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최소한 아는 여자라도 하나 생기면 보다 대학생다운 라이프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죠? 제가 가능한 요일이..."

달력을 보며 스케쥴을 가늠하려는데, 진호 선배가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요일이고 뭐고간에, 바로 오늘이라고."

"........엑?'

"오늘, 인마. 영어로는 투데이. 일본어로는 큐. 어때, 다른 말로도 더 해줘?"

"아뇨. 그건 필요 없고요. 무슨 소개팅을 당일에 잡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됐어요. 전 안 할래요."

고사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진호 선배가 내게 매달렸다.

"야. 진짜 이거 드문 기회야. 애도 참한 애고, 내가 걔한테 빚이 많아서 남자 꼭 소개시켜 주기로 했단 말이야. 그런데 원래 나가기로 한 녀석이 점심에 대체 뭘 먹었는지 배탈이 났어. 학생회관 밥은 작작 먹으라고 했는데 말이야."

"....학생회관 밥은 저도 먹었는데요."

"그래, 그걸 먹고도 전혀 문제없이 튼튼한 우리의 호프, 최한석! 자네만 믿겠어."

진호 선배는 내게 메모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시내에 있는 한 카페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약도도 그려져 있었다.

"이름은 이명희. 간호전문학교를 나와서 지금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랑 같은 교회 다니는 애야. 애가 진짜 참 착해. 이쁘기도 하고. 솔직히 너한테는 많이 아까운 애인데, 내가 특별히 소개시켜 주는 거다."

"착하고 이쁜 애면 선배가 만나시지, 왜 저한테...."

"아, 그건 말이야."

진호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음, 그건 말이다.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조금 있어."

"사정이 뭔데요?"

"방금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사정이야. 그러니 내가 너한테 아까운 애인데도 불구하고 소개시켜 주는 거잖아."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갈 사람 없다고 저보고 가라고 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생각해보니 저 도서관에 가야할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비싸게 굴기는 인마."

진호 선배는 날 툭툭 치더니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가슴도 꽤 크다. 장난 아냐.“

도서관에서 해야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도 되는데, 그럼 가볼까요?"

"큭큭. 짜식. 난 네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지!"

진호 선배가 씨익 웃으면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쩐지 선배의 계략에 말려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내 발걸음은 학교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메모를 따라 전철을 타고 시내로 이동한 뒤, 약도에 그려진 커피숍을 찾아보았다. 금방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부끄럽게도, 난 아직까지 여자랑 사귀어 본 적도 없고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진호 선배가 급하게 밀어붙여서 여기까지 얼떨결에 오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뭐를 해야 하지. 여자와 이야기라. 엄마랑 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나눌 순 없는 거잖아. 이런저런 고민들로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러나 이미 칼은 뽑은 상태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숫돌에 갈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 이게 아닌가. 배추라도 썰어야 하든가? 무였나? 뭐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김장할 것도 아니니 일단 커피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시내 커피숍은 다들 쌍쌍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둘러본다.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를 발견. 통로를 따라 걸어가며 그쪽을 향해 슬쩍 쳐다본다.

가슴이 크다!

틀림없다.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 앞에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얀 얼굴에 씌워진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는 큰 눈이 날 주시하고 있다. 선배의 추천은 틀리지 않았다. 예뻤다. 그리고 컸다.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죠?"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을 둘러보기에 진호 선배를 찾나 싶었다.

"아, 선배는 안 왔고, 저 혼자 왔습니다. 제가 진호 선배 소개를 받고 온 최한석입니다. 오늘 소개팅 할 상대자요. 이명희 씨 맞으시죠?"

그녀는 날 빤히 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반응이 느린 건지... 그녀의 대답은 다소 한 박자 늦었다.

"저도 원래는 소개팅 계획이 없었는데요, 진호 선배가 갑자기 절 부르는 바람에 옷차림도 그냥 평소 차림이고.... 원래는 다른 애가 나올 거였는데.... 아,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에, 그럼 커피를 시켜야 되나. 여기요!"

여자를 앞에 두고 1대 1 면담이라니. 갑자기 이런 난이도 높은 짓을 시키면 제 아무리 과톱의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는 나라도 힘든 법이다. 차라리 압박면접이 더 쉽겠는 걸. 일단 점원을 불러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가져온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주문을 생각한다.

"아, 명희 씨는 뭐 드시겠어요? 같이... 주문 하실래요? 제가, 제가 사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너무 횡설수설해서 그런가 싶어서 자책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한석... 씨라고 하셨죠?"

"네. 최한석입니다. K대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학교 이름을 말하는 건 좀 아니었을까. 잘난 척 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녀는 전문학교를 나왔다고 하니 학력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소릴 했다.

"술, 잘 드세요?"

"네? 술이요?"

좀 뜨악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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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예전에 썼던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전에 보셨던 분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겁니다. 새로 오신 분들은 반갑습니다.

많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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