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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시작하고 나서 더 이상의 놀림은 없었다. 한 시간을 통째로 날려먹은 건 뼈아팠지만 아는 선배 한 명에게 노트를 빌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전 수업을 다 마치고 복사실에 들러 노트를 복사했다. 과사무실에 올라가 선배에게 전달해 달라고 노트를 맡겨두었다. 사무실 안에 진호 선배가 보이지 않았다. 과사에서 서무 일을 맡아보고 있는 여자애한테 선배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뭔가 쓰고 있던 그녀는 내 부름에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진호 오빠요?"
"....네. 진호 선배요."
묘한 기분이었다. 난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는 대선배님인데 그녀는 굉장히 편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꽤 어린 나이였다. 작년에 상고를 나와서 바로 여기 취직했다고 하던데, 진호 선배에게 오빠라... 하긴 어린 여자에게 이런 호칭으로 불리는 건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하니까, 아마 선배가 그녀에게 그렇게 부르라고 한 걸지도 몰랐다.
"아까 교수님 심부름으로 서점 다녀온다고 했어요."
"아, 그런가요... 그럼 전 학관에서 밥 먹고 있을 테니까, 선배가 오면 저 거기에 있다고 알려주시겠어요?"
"왜요?"
"제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알았어요."
사무실을 나와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학생들이 몰려올 시간이라 먼저 밥을 먹는 게 유리했다. 식권판매소에 가니 볶음밥이 오늘의 메뉴였다. 원래 가격은 2,000원인데 할인해서 1,500원에 팔고 있었다. 주저 없이 그걸 골랐다. 식사를 받아 자리에 앉자마자 일단 계란국부터 원샷해 버렸다. 어제 그렇게 마셔대었으니 속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그녀는 어떠려나.
이명희.
그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카페에 혼자 앉아있던 그녀. 별 말 없이 술만 마시던 그녀. 날 침대로 데려간 그녀.... 그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직 식당은 한산했다. 내 다리 사이에 일어나 모종의 신체변화를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다.
"휴우..."
머릿속으로 아까 수업시간에 들었던 공식을 다시 암기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제의 강렬한 느낌을 잊기란 쉽지 않았다. 뭐든지 처음이란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처음으로 가진 내 방, 처음 가진 자전거, 처음으로 키웠던 강아지, 처음으로 들어갔던 기숙사. 그리고, 그리고.
처음으로 만져 본 여자의 깊은 속살. 맡아본 냄새. 그리고 그 숨결.
황급히 숙이고 밥을 퍼먹었다. 어제의 흥분이 다시 밀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얌마, 너 어제 왜 그랬어?"
"에엑? 어제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하마터면 입에 물고 있던 볶음밥을 뿜어낼 뻔 했다. 가난한 학생의 허기를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고귀하신 존재인 볶음밥을 함부로 뱉을 수는 없는 법.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물 한 잔과 함께 넘겨 입 안을 비워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진호 선배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내 뒤통수를 한 번 어루만지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진호 선배가 "어제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물론 소개팅을 주선해준 사람이 선배였긴 하지만 소개팅 이후에 이어진 그 "일"까지 알고 있는 거란 말이야?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어젯밤에 명희한테 전화 왔었다."
"그....그래요?"
어젯밤이라면 명희와 미친 짐승마냥 엉켜있던 바로 그 어젯밤을 말하는 건가? 명희가 어디로 전화를 건 기색은 없었는데...? 아니, 애초에 그럴 시간이 있었던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대체 어쩌자고 어제 일을 선배에게 다 말했단 말인가. 그러나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래, 인마. 니 안 나와서 바람 맞았다고 나한테 막 뭐라 그러던데."
....뭐? 잠깐. 뭔가 이상한데.
"바람이요?"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분명 나는 명희와 만났고 첫날부터 모텔로 직행하는 아주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건만 지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어제 내가 만난 사람은 명희가 아니라 귀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진호 선배는 내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물론 소개팅 대타랍시고 갑자기 널 보낸 나도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기 싫으면 싫다고 말할 것이지, 꼭 나갈 것처럼 나한테 대답해놓고 약속장소에 안 나타나고 그러면 어쩌냐. 내가 명희한테 일단 사과해 놨으니까 이따 오후에 걔네 병원 앞으로 니가 직접 가서 다시 사과하도록 해. 너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야."
"병원이 어딘지 모르는데요."
"이걸 받아."
진호 선배는 시내에 있는 한 병원 이름과 대략적인 약도를 적어주곤 가버렸다. 쪽지를 손에 든 나는 볶음밥을 마저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있었다. 뭐지? 어제 일은 전부 꿈인가? 역시 태어나서 처음 여자랑 응응....한 일은 전부 다 내 망상이었단 말인가?
식당을 나와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며 어제 하루를 찬찬히 복기해 본다. 명희의 그 훌륭한 가슴과 감촉..... 아, 씨... 이거 먼저 생각나면 또 아랫도리에 힘부터 들어가니 다른 걸 먼저 생각해야겠다. 어제의 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떠올려 본다.
그녀를 카페에서 만나 바로 술집으로 직행하고, 이후의 일은... 뭐... 이하 생략.
근데 왜 내가 명희를 바람 맞췄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그녀는 선배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분명히 만나서 함께 밤까지 보낸 사람을 왜 못 만났다고 하는 거지?
오후 수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수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붕 뜬 오후를 보내고 학교를 나섰다. 의문을 가득 품고 선배가 적어준 대로 병원을 찾아간다.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금방 도착했다.
M의원. 약도에 적힌 걸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층으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대기실에는 서너 명의 사람이 앉아있었고 접수처에 앉아있는 간호사는 서류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다가가자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처음이세요? 이름은요?"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리고 깜찍하게 생긴 간호사가 나를 올려다보고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낸다. 원래 병원에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묻는 질문들인가 보다. 질문을 던지고 나서 바로 또 뭔가를 입력하려는 듯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 사람 좀 만나러 왔는데요. 처음이구요. 그리고 이름은 최한석입니다."
"최한....석?"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름을 입력하려던 간호사는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본다. 왠지 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그러지? 처음 오는 병원에 처음 보는 간호사에게 미움을 받을 만큼 중병을 가진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최.한.석.씨라구요?"
"그런데요."
"하아... 지금 따지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이미 진호 오빠에게 이야기는 들었구요. 조금 있으면 제 퇴근시간이니까 저쪽에서 좀 기다리세요."
간호사는 턱으로 대기실 한 쪽을 가리켰다. 대체 저 간호사가 나한테 왜 화를 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진호 선배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건가. 암튼 한 30여분 정도 앉아있으려니 접수처의 그 간호사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나 나를 불렀다.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따라 나간다.
사람을 불러놓고 한참을 말도 않고 앞서서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 나를 홱 돌아보며 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올려다보았다. 내 키가 보통보다 조금 큰 수준이긴 하지만 그녀는 보통보다 꽤 많이 작은 키였다.
"물론 그쪽도 급하게 대타로 나왔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제가 약속시간에 쪼~~끔 늦긴 했지만요... 그래도 그걸 못 기다리고 그냥 가버리나요? 행여나 그쪽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커피숍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구요. 제가 한 시간이나 남자를 기다려보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아니, 무슨 남자가 여자가 겨우 한 시간 늦었다고 그냥 가버리고 그래요? 네에?"
"아뇨. 음. 그러니까. 저기,"
커피숍? 이 여자가 말하는 걸 듣고 나니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소개팅을 하러 그 곳에 갔었다. 내가 만나기로 한 상대의 이름은 "이명희"였다. 그 소개팅은 진호 선의 소개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명희....?"
이제 뭔가 좀 파악이 될 것 같았다. 어눌하게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더니 그녀의 화가 더 폭발한 듯싶었다.
"그래요. 제가 진호 오빠한테 댁을 소개받은 이명희예요. 물론 그쪽도 원래 나오려던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그렇지만 이름은 연락 받아서 알고 있었어요. 최한석 맞죠? 맞잖아요! 그렇다고 제 이름을 지금 확인하는 이유는 뭐예요?! 지금 저 가지고 장난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당차게, 그리고 힘차게 화를 내고 있는 그녀를 달래는 것은 꽤나 쉽지 않았다. 분당 3,600회의 속도로 회전하는 동기전동기에 필적하는 스피드로 자기 할 말을 쏟아내며 뭐라 그러는 그녀의 위세에 완전히 눌려 버렸다. 한참이나 쩔쩔 매며 그녀를 간신히 달래어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의문점만이 가득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이명희라면 어제 그녀는 대체 누구였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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