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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보름간 좀비처럼 지내는 시험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방학이 되었다. 학교에 더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오전 중에 한 번씩 학교에 들르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호 선배에게 부탁해놓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방학하고 일주일 되던 날, 내 얼굴을 본 선배는 반가워했다.
"아, 한석아. 잘 만났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말이야."
"예, 진호 선배. 안녕하세요?"
"니가 지난번에 부탁했던 과외 건 말이야, 하나 들어왔어. 방학동안 예비 고1 과정 가르치는 건데, 할 수 있겠어?"
"예비 고1이요... 흐음...."
방학이 되었지만 겨울에는 시골도 농한기라서 딱히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보나마나 삼촌들이랑 사촌 형들이랑 어울려서 술이나 퍼마실 테니 말이다. 그 사람들 마시는 것에 어울리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게다가 요새 지갑 사정도 굉장히 열악했기 때문에 진호 선배에게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예비 고1이면 중학교 과정 복습 간단하게 하고 선행 학습 좀 시키면 되려나요?"
"뭐, 내용이야 니가 알아서 하는 거고... 아, 맞다. 참고로 여자애다."
"에엑? 여자애요?"
"인마 너무 노골적으로 좋다는 표시 하지 마라. 인삼, 산삼보다 좋다는 고삼, 그것보다도 좋다는 중삼이다. 크크큭. 오늘 안에 연락해봐라. 거기서 빨리 구하고 싶다고 하더래. 우리 과사로 바로 전화 오더니 공부 잘 하는 대학생으로 해주면 좋겠다고 하더라. 딱 너가 생각났어."
산삼보다 좋다는 고삼이라니.... 저런 썰렁한 유머를 해대니 아저씨 소리를 듣지....
"그나저나 제가 언제 좋다는 표정이었습니까, 놀라서 그렇죠."
"그치? 나도 좀 놀랍기는 했어. 우리 학교가 그렇게 잘난 학교도 아닌데 과사무실로 과외를 부탁하는 전화가 걸려오다니 말이야. 대개 이런 건 교육학과나 수학과로 전화하지 않나? 하다못해 행정실로 전화하든가 말이야."
"애가 이과인가 보죠."
"인마. 이제 중삼이라는데 문과, 이과가 어디 있어."
"그런가요."
듣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학과는 제어공학과. 공대 중에서도 상당히 마이너한 과에 속했다. 전기과나 기계과 같은 메인도 아니고, 요새 뜨고 있다는 컴퓨터공학과도 아니었다. 굳이 우리 학과에 전화를 걸어 과외할 대학생을 구했다니, 특이한 부모임에 틀림없다.
"네 과외 구한답시고 교회 사람들에게 부탁해놓은 건 취소해야겠다. 두 탕 뛰기는 어렵지?"
"네. 아무래도요."
역시 발이 넓은 선배를 두면 삶이 편리해진다. 다음에 선배에게 맛있는 걸 사주기로 하고 과외할 집의 연락처와 주소를 받았다. 주소를 보니 학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단지였다. 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예전 같으면 과외할 애가 여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손사래를 쳤겠지만 요새는 명희는 물론이고 지혜나 효진과도 잘 어울리는 나 자신이 대견했기 때문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고 나서 일단 원래 내가 가려던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사이클을 몰았다. 등에 멘 배낭에는 꽤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었고 나는 이것을 전달할 의무를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배달을 받은 고객은 너무도 쉽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야, 내가 검정색 구두도 가져오라 그랬잖아."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됐어. 빨리 가봐."
금요일이고 근무가 빨리 끝나는 날이면 명희는 모처에 있는 클럽으로 출동한다. 출근하면서 클럽의상으로 갈 수는 없을 테니 대개는 근처 지하철역의 코인락커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제는 내 방을 코인락커 대신 삼고 있다. 돈도 안 들고 게다가 이런 배달 서비스까지 제공하니까 편하기 그지없겠지. 참고로 입고 난 것을 그녀가 갖다놓으면 세탁소에 맡겨서 세탁도 해온다. 물론 내 돈으로.
"예, 그럼 수고하세요."
"수고? 뭘 수고해, 인마. 병신 같기는...... 그리고 뭘 좋다고 실실 쪼개?"
"아, 그게요. 이번에 알바자리를 구해서요."
"알바?"
옷가방을 들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하는 건데? 노가다 뛰냐?"
"아뇨. 그건 아니고 학생 가르치는 건데요. 과외요."
"뭐? 과외?"
명희는 코웃음을 쳤다.
"야, 니가 누굴 가르쳐. 변태 주제에. 괜히 애 건드려서 잡혀가지나 마. 설마 여자애야?"
"......아뇨, 아닙니다. 남자애예요."
황급히 부정했다. 왠지 여자애라고 대답하면 좋은 소릴 못 들을 것 같았다.
"그러겠지. 내가 엄마라면 너 같은 녀석은 내 딸 주변 10미터 이내도 못 들어오게 할 거야."
"그...그러신가요."
"아니면 그걸 확 잘라버리고 과외 하라고 하던가."
"그럴 바에는 과외를 포기하겠습니다.."
여자애라는 사실을 먼저 말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명희가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사이클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와 받아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본다. 신호가 한참 가고 나서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졸린 듯한 목소리.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일까.
"예, 안녕하세요. 전 K대학교 3학년 최한석입니다. 과사무실에서 소개받은 학생입니다."
보일 리도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까지 한다.
"으음... 좀 이른 시간에 전화를 주셨네요.... 일단 이따 한번 오세요. 여기 주소도 받았나요....?"
"아, 예."
"그럼. 이따 오세요."
달칵-
나도 모르게 시계를 보았다. 좀 있으면 점심 먹고 농구 한 판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했더니 "이른 시간"이라고? 대체 얼마나 잠퉁이인거냐. 게다가 이따 오라는데 이따 몇 시에 오라는 지도 이야기 안 하고.... 왠지 이런 엄마 밑에 있는 애라면 엄청 게으름뱅이에다가 집중력 제로일 것 같다. 앞으로의 수업이 난항을 겪을 것 같아 한숨을 푹푹 쉬다가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빌라 입구에서 마침 들어오던 지혜와 마주쳤다.
"어머, 한석이네. 어디 가?"
"어? 어. 밥 좀 사먹으러."
"점심?"
"응."
이사 후로 오고가며 종종 마주치곤 했지만 내가 시험기간이라 정신이 없고 바쁘기도 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간신히 하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한참 전부터 말을 놓으라곤 했지만 왠지 또 어색했다. 그러나 나만 그런 모양이었다. 지혜는 전혀 어색하게 날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선뜻 이런 제안을 했다.
"나도 지금 해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 혼자 먹기는 좀 심심하잖아."
"그....그럴까?"
밥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영부영 그녀의 집 안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2인용 식탁도 놓여있고 크진 않지만 작은 가구들도 센스 있게 잘 배치되어 있었다. 확실히 여자가 사는 방은 달랐다. 낡은 텔레비전과 매트리스 한 장, 구석에 쌓여있는 옷더미와 행거가 전부인 내 방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러다 문득 이 집 안에 그녀와 나 단 둘뿐이라는 생각하고 멈칫거렸다.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두 사람, 같은 방에서 알몸으로 있었던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또....
"왜 서 있어? 여기 앉아."
지혜가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급히 그 지시에 따른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이런저런 반찬을 꺼내어 식탁을 차리면서 내게 말했다.
"쌀 떨어졌어? 왜 밥을 사 먹어?"
"어... 그게 말이야... 난 따로 밥 해먹은 적이 없어. 집에서."
지혜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엥? 한번도?"
"어. 그냥 맨날 학교에서 먹든가가 그냥 요 근처 분식점에서 먹든가 하는데. 아예 우리 집에는 그릇이나 냄비 같은 게 없기도 하고."
그러자 찬을 늘어놓던 지혜가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예 그릇이 없어? 진짜 남자들이란... 아니다. 그래도 혼자 사는 남자들은 라면도 종종 끓여먹고 그러잖아. 집에서 밑반찬 같은 것도 보내주실 거고. 그런 것도 없어?"
"어, 없는데... 그냥 요기 편의점 가서 컵라면 먹든가."
문득 그녀가 "혼자 사는 남자들"을 많이 겪어봤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사는 남자를 보면 챙겨주고 싶어 하는 건 그녀의 몸에 밴 오랜 습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보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야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는데, 섣부른 짓이었다. 그녀는 밥공기에 밥을 가득 담아 내게 내밀었다. 계란후라이도 한 장 부쳐준다.
"나 혼자 맨날 먹는 거라서 따로 차린 반찬이 없어. 이거라도 더 먹어."
"아냐.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집밥"을 먹게 된 건 지난 여름방학에 집에 내려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지혜가 이사 온 다음 날에도 여기서 북엇국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났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내 준 커피까지 대접받는다. 오랜만에 먹게 된 집밥에 대한 감상과 찬사를 가감 없이 들려주었더니 다시 또 웃으면서 재미있어 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집에서 먹는 밥에 많이 굶주렸었나 보네. 또 먹으러 와. 어차피 요새는 맨날 집에 있으니까."
"집에 있어? 회사는?"
"어? 음... 아직은 이것저것 알아보는 중이야."
물어보고 나서 아차 싶었다. 그녀의 지난 번 회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뻔히 아는데 말이다. 황급히 밥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맨날 먹으러 오면 너무 폐가 되잖아. 난 밥 많이 먹는다고. 그럼 밥값이라도 낼까?"
"밥값이야 나중에 하면 되지."
"하다니? 뭘 말이야?"
커피맛이 겹쳐서 났다. 방금 내가 마신 커피맛 위에 그녀가 마신 커피 맛이 더해진다. 지혜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내 입술에 키스한 것이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이렇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커피가 아니라 다른 이의 타액을 마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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