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3화 (1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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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대 따위에 다녀서 미안하다. 거참 대단히 미안하구나. 그 이후, 유진의 일방적인 설명을 경청하는 처지가 되었다. 시간 조정 및 근래 과외 시세에 비추어 적정선의 페이까지.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일주일에 두 번씩 여기에 와서 두 시간씩 시간을 죽여야 한다. 물론 떠들면 안 된다. 공부하는 유진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럴 거면 대체 왜 오라고 하는 거냐! 물론 이런 건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고 실제로 외치진 않았다.

"기왕 돈 받고 하시는 거니까, 늦지 마시구요. 만약 시간을 변경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루 전에 연락 주세요."

"어? 응."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래."

대화는 끝났고, 쫓겨나다시피 아파트에서 나왔다. 인형처럼 귀여운 대신 인간미가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공부 안하는 바보가 아니라서 다행이기는 하다. S대를 가겠다고 공언하는 거나 말투만 봐서는 엄청 똑똑한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 그냥 시간만 채우면 돈이 나오다니! 이렇게 좋은 과외자리라니! ...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뭔가 좀 입맛이 썼다. 딱히 나쁜 애도 아니고 누구처럼 입이 험하면서 총을 겨누는 것도 아니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똑부러진 게 오히려 안쓰럽다고나 할까.

이틀 후, 날짜와 시간을 맞춰서 유진이네 아파트를 방문했다. 여전히 커다란 그 아파트에는 유진 혼자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거실 한 쪽에는 전에 없던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교과서와 노트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지금이 두시니까요. 네 시까지 '과외' 하겠습니다."

"예."

"특별히 질문이 없으면 바로 시작할게요."

"예."

참고로 방금  "예, 예"하고 대답한 사람이 나다. 유진은 나에게 그다지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풀고 있던 문제집을 이어 풀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고등학교 1학년 수학 문제집이었다. 크흠. 이건 뭐...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나는 준비해 간 전공 책을 꺼내놓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온 것 빼고는 딱히 움직이는 사람도 없고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적막한 공간에서 책 넘기는 소리와 필기하는 소리만 있을 뿐.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나자 유진은 나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먹고 싶은 거라니?"

"엄마가 과외 끝나고 나면 식사를 대접하라고 했거든요. 드시고 싶은 거 있음 말하세요. 시킬게요."

"그...그래?"

평범한 게 좋겠지 라는 생각에 짜장면이나 시켜 달라고 하자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전화기를 들고 짜장 한 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또 전화를 걸더니 초밥을 시킨다. 으악. 초밥이라니. 1인분에 짜장면 세 그릇 값이잖아! 나도 초밥 시킬 걸. 젠장.

그냥 앉아있기 어색해서 유진이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그럼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과외를 하는 거야?"

"예."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러면 굳이 돈 내가면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상관없어요. 딱히 엄마도 내가 공부를 더 했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를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을 쓰고 싶다는 생색을 내고 싶은 거니깐요. 그렇다고 내가 쇼핑이라든가 다른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집에 돈이 많은가 보네. 내가 이런 말 할 건 아니지만 솔직히 돈이 좀 아깝긴 하다."

"아저씨 돈은 아니잖아요? 왜 아까워요?"

인형 같은 얼굴로, 그러면서도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하는 소리를 정면으로 받고 있자니 '참 싸가지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

"지금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으헉! 사람 마음도 읽을 줄 알아?"

"아저씨는 얼굴에 생각이 다 쓰여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했다만, 너 정도 나이의 애한테 들은 건 처음이야."

"저도 종종 들어요. 어른 같다고."

"..........미안. 아니,.음.. 암튼 미안."

왠지 내가 미안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후 시킨 음식들이 왔고 나는 짜장면, 유진이는 초밥을 먹었다. 하나 줄 법도 한데 하나도 안 준다. 얄미운 계집. 식사를 마치고 유진이네 집을 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쟤네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코빼기도 비추질 않는 걸까. 애가 공부는 잘 하는 것 같다만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서야 앞으로 사회생활 하는데 애로사항이 꽃 피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한참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뭐, 어떠랴.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그냥 내버려두자.

그렇게 과외는 주로 침묵 속에서 이뤄졌지만 가끔 그 침묵을 깨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유진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아저씨."

"응?"

"이 문제는 어떻게 풀죠?"

유진이가 내민 건 딱 봐도 복잡한 문제였다. 수학 정석 중에서도 상위권 학생들이 푼다는 정석이 있는데 아마도 거기서 나온 게 틀림없었다.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게 된 나는 아무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이 문제는, 그러니까... 어떻게 푸냐면... 일단 미분을 하면 식이 간단... 아니지. 넌 아직 미분 안 배웠지."

그러면 유진이 한숨을 푹 쉬더니 혼자서 슥슥 풀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날 한심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무리 그렇게 말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과외잖아요. 학생이 볼 문제 정도는 미리 풀어보고 준비해 오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그렇지."

"역시 S대생으로 바꿀까..."

"미안! 다음부터는 제대로 준비해올게."

자기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감히 과외 선생님을 테스트하는 문제를 내다니! 이 고얀 녀석 같으니.... 덕분에 그 이후로 과외를 가기 전에는 나 역시 문제를 풀어보느라 끙끙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이 얄미운 유진이 녀석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뭔가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 어린 녀석한테....

그리고 가끔 과외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애엄마한테서 온 건가 싶었는데 전화를 받는 유진이의 말투와 호칭을 보아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유진이는 전화 상대방을 언니라고 불렀다. 처음 과외를 하겠다고 왔을 때 말했던 바로 그 "언니"인 모양이었다. 전화를 하면서 내 쪽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언니는 물론이고, 유진이의 엄마를 단 한 번도 보질 못 했다. 집에 오면 유진이는 그 큰 집에 늘 혼자 있었고 과외 준비며 식사 주문도 혼자서 다 했다. 밥을 같이 먹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이 아이 혼자서 항상 있었던 걸까 하는 그런 생각.

"아저씨."

"어?"

문제를 풀던 유진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과외 중인데 딴 생각은 그만하세요."

"어, 알았다. 미안."

....크윽. 어차피 앉아서 시간 때우는 게 전부인 과외인데, 엄청 힘들다. 딴 생각도 못 해!

원래대로라면 나는 거의 매일 주인님을 모시러 가야 한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병원 앞에 가는 일이 주된 일과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과외를 시작하고 나니 그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언제 말씀드려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영화를 보러 가던 날, 마침 주인님의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살짝 이야기를 꺼냈다.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고, 시간이 주간 퇴근과 겹칠 때는 데리러 올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은 마중을 못 나온다구요."

"하아..... 진짜 니가 미쳤구나?"

"예?"

명희, 아니 주인님은 팔짱을 끼고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요새 좀 안 갈구었더니 개념이 사라졌어? 니가 못 나오는 거야, 아님 안 나오겠다는 거야?"

"아뇨. 그게 그러니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과외 때문에 그렇다니까요."

"그렇다고 노예새끼가 해야 되는 일을 안 하겠다고? 그깟 과외 한다고 얼마나 버는데?"

"저.....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명희 씨 때문에 쓰는 돈 때문이라도 과외를 꼭 해야 돼요. 쫌 봐주세요."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니, 그런 노력 안 해도 그녀는 이미 나를 비굴하게 보고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잠시 생각하던 명희는 내게 물었다.

"월급날 언제야?"

"월급? 아, 보수는 이 달 말에 받아요."

그러자 명희는 곰곰이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심각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뒤이어 씨익하고 웃는데...... 여태까지의 경험을 미루어봐서 이 웃음은 무척 위험한 웃음이다.

"좋아. 그럼, 이 달 말에 니가 끝내주는 곳에 가서 식사를 사면 용서해주지."

"끝내주는 곳이요?"

"그래. 적어도 호텔 레스토랑 정도."

호텔? 드라마에서 가끔 나오는 그런 곳 말인가. 직접 가 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잘 안 간다.

"......저기, 제가 그런 데를 안 가봐서 그런데요, 그런데는 대충 얼마정도 하나요?"

"나도 모르지. 한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 정도 하지 않을까?"

"에엑! 겨우 두 사람 먹는데 그렇게나 많이요?"

"뭔 헛소리야. 일인당 그 정도 든다는 거지. 거기에다 와인도 한 병 시키면 더 들고."

"......명희 씨. 제발 조금만 기준을 낮춰주세요."

"우후후. 니 하는 거 봐서."

명희가 웃었다. 그녀와 같이 다닌 지도 어언 3개월. 가끔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풀고 저렇게 맑게 웃을 때도 있는 게 신기했다. 뭔가 근본이 나쁜 아가씨란 생각은 안 드는데 나한테 워낙 모질게 굴어서 방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날 모형총으로 협박해가며 찍은 수치스러운 사진. 그 사진의 필름이 내 손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전혀! 전혀!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어? 아... 명희 씨가 웃으니까 예뻐서요."

"뭐?"

명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대신 약간의 홍조가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홍조라니.

"실없는 새끼 같으니...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

또 거친 말을 한다. 그리고 거짓말도... 음. 이쯤 되면 그녀의 거친 언어 사용은 어떤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보았다. 요즘 도서관에서 여성심리에 대한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있는데 어딜 봐도 특정 개인한테는 쌍욕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몹시 살갑게 구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쓰여 있지 않았다. 아직 내가 못 찾은 걸까, 아니면 명희가 특이한 케이스인 걸까.

마침 영화관 입장시간이 다 되었다. 개표가 시작되자 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팝콘바구니와 콜라를 들고 일어섰다. 명희도 따라 일어서다가 나를 향해 묻는다.

"야, 근데 표는?"

"어? 아마도 제 주머니에 있을 건데요."

"꺼내."

"저...지금 손을 쓸 수가...."

내 두 손은 둘 다 이미 사용 중이었다. 한 손에는 팝콘, 한 손에는 콜라. 명희가 인상을 확 찌푸린다.

"지금 나보고 니놈시키 주머니에다 손 넣고 표를 꺼내라고?"

그 쪽은 간호사인데 엉덩이에 주사도 안 놓나요? 낯선 이들의 엉덩이를 제법 많이 만져보았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내가 꺼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있는 곳이 사람이 많고 어수선해서 딱히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곳을 찾기 어려웠다.

"가만 있어봐. 에휴."

명희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내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녀가 내 안에서 꺼내든 것은..........

"야. 이게 뭐야."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그녀 쪽을 내려다본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가슴이 덜컹!

"이런 건 왜 가지고 다니실까~아? 대체 언제 누구에게 쓰실라고 말이야? 어엉?"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에 담긴 분노는 측정할 길이 없어 보였다. 편의점에서 3,000원에 팔고 있고 잘 밀봉된 채로 세 개가 들어있는데다가 각각 다른 과일향이 난다지만 나는 아직 써보질 않아서 무슨 과일향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콘돔박스!! 저게 왜 내 주머니에 들어있지 않고 지금 그녀 손에 들려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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