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4화 (1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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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야이 새꺄! 너! 나를 뭘로 보고!"

"아니, 주인님! 아니, 명희 씨! 그건 그게 아니라요...."

그건 당신에게 쓸 게 아닙니다.....라는 소리를 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주먹이 내 명치를 강타했다. 작다고 결코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 있죠? 사실 작은 고추는 단단합니다.

"커헉-"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던 내가 숨을 다시 쉬기도 전에 명희가 내지른 로우킥이 내 무릎 뒤를 강타했다. 2 Hit Combo! 공격에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바닥에 철푸덕 내려앉은 나는 한참 후에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닌데 암튼 충격이 엄청났다. 아무래도 그녀는 간호사가 아니라 어디 뒷골목의 싸움짱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피니 팝콘바구니는 굴러다니고 콜라는 죄다 엎질러졌으며 콘돔 박스는 내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나친다. 나를 중심으로 약 5m 정도 원 모양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쪽 팔린 것도 처음이고 당혹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명희는 안 보였다. 황급히 극장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영화표는 시작시간이 지났다고 환불도 안됐다. 별수 없이 집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아주 적절하게도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날이다.

우산을 들고 나간 게 아니라서 내리는 비를 죄다 맞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겨울치고는 비가 제법 왔다. 쫄닥 젖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얼른 집으로 들어갈 생각에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부른다.

"한....석...아...."

"응?"

돌아보니 나만큼 홀딱 젖은 효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계단에 앉아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어, 말하자면 긴데 내가 아버지 말도 안 듣고 하라는 걸 안 했더니 내쫓지 뭐야. 그래서 일단 수중에 있는 돈으로 머물 곳을 찾으려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돈은 고사하고 카드도 안 가지고 왔고, 그래서 지혜한테 빌붙으러 왔는데 얘는 안 보이고..."

"확실히 길구나."

"어....일단 나 좀 니네 집에 들어가면 안 될까? 좀 춥네.... 으으으으."

"그래. 얼른 들어와."

문을 열고 효진이를 방안으로 들였다. 다 큰 딸자식을 길거리로 내쫓다니, 효진이 아버지 성격도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방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대충 발로 밀어내어 공간을 만들었다.

"미안한데... 갈....아....입을 만한 옷...좀 없을까....? 에취!"

"어? 내 옷은 꼴들이 영 아닌데...."

"아무래도... 괜찮아.... 지금 이거보단 낫겠지.... 에취! 에취!"

활달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 홀딱 젖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꽤나 불쌍해 보였다. 행거에 걸린 옷 중에서 박스티랑 츄리닝 바지 하나를 내주었다. 그나마 최근에 빨아놓은 옷이니 냄새가 덜 나길 기대하면서.

"오...쌩유...."

"냄새가 좀 나더라도....... 윽...."

효진은 옷을 받자마자 그 즉시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의 분홍색 브래지어가 보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홱 돌렸다. 얘는 수치심 같은 것도 없나. 등을 돌린 채로 볼멘소리를 했다.

"아, 좀 말을 하던가.."

"추워 죽겠는데....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뭐 어때?"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글쎄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되어 조용해졌다. 옷을 다 갈아입은 모양이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에취! 지혜, 이 년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연락도 안 해보고 온 거야? 기다리면 오겠지. 일단 따뜻한 거라도 줄까?"

"그래 주면 땡큐!"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 효진은 방바닥에 깔려있던 이불 속으로 냉큼 들어갔다. TV리모컨을 찾기에 그런 건 없다고 이야기해주고 직접 텔레비전을 켰다. 금성 텔레비전에서 뭘 바라는 거야.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우리 집의 유일한 식기인 컵과 코코아 봉투를 꺼냈다. 슬쩍 돌아보니 효진은 마치 자기 집 안방마냥 뒹굴 거리며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다.

"자, 마셔."

"오오.... 최고의 서비스로군. 한석 군 친절해~"

조금 전까지도 골골거리던 효진은 금세 회복이 되어 낄낄거리면서 코코아를 홀짝였다. 나는 그녀가 코코아를 마시는 동안 방바닥을 주섬주섬 치웠다. 그런 내 모습을 가리키며 효진이 키득거렸다.

"뭘 이제 와서 청소야. 그리고 내 방보다도 훨씬 깨끗하구만."

"...이 방보다 더 더러운 방이라니. 그게 여자방 맞아?"

"크크크. 선미랑 똑같은 소리하네. 크큭."

선미? 그건 또 누구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치우는 게 더 급했다. 바닥에 놓인 그녀의 옷가지를 거두어서 세탁기에 넣어 탈수라도 돌릴까 싶었다. 집어 올리려던 손이 우뚝 멈춘다. 마치 애벌레 허물 벗듯 던져 놓은 그녀의 옷가지에는 분홍빛 브래지어와 팬티도 고스란히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준 것은 티셔츠와 바지뿐인데... 그렇다면 설마....

"어휴, 변태. 뭐하나 싶었는데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역시 남자들이란 여자 속옷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네."

등 뒤에서 효진이 반쯤 웃으면서 농을 건넨다. 황급히 변명했다. 아마도 내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안 봐도 알겠다.

"치우려고 한 거란 말이야! 너 말이야, 젖은 옷을 방바닥에 두면 어떻게 해?"

"대충 두면 마르지 않을까?"

"방 눅눅해진단 말이야. 장판에 곰팡이 생겨!"

"그럼 방주인이 알아서 치우겠지, 뭐. 내 방도 아닌데."

"으윽...."

세상에. 저렇게 논리 정연한 싸가지라니. 살짝 열이 받았기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녀의 옷가지를 전부 뭉쳐 들고 가서 세탁기에 넣어버렸다. 내가 입고 있던 젖은 옷도 화장실에서 모두 벗어서 세탁기에 함께 넣고 욕실 안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으로 돌아가자 효진이 살짝 웃는다.

"몸매에 자신이 없나보네? 그냥 여기서 갈아입어도 되는데 말이야."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들을 때마다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너는? 자신이 있어서 남자 앞에서 막 갈아입고 그래?"

"나 정도면 나쁘지 않지. 항상 운동하고 있어서 허리도 늘씬하고 다리도 미끈한데 말이야."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받쳐 든다.

"그래도 가슴 작은 건 어떻게 좀 안 되더라. 지혜 거라도 갖다 붙이면 진짜 완벽한 몸매일 텐데..."

마시던 코코아를 뿜을 뻔했다. 으악, 진짜 얘는 머릿속이 정말 궁금하다.

"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맞다. 넌 지혜 가슴 만져봤지? 어때? 감촉 끝내주지?"

"내....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어라? 거짓말 하기야? 안 만져 봤어?"

반쯤 농담 같고 반쯤 실실 웃던 효진의 얼굴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안 지 몇 달 되지도 않았고 그리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보이는 건 처음 본다.

"난 거짓말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말해봐. 진짜 지혜 가슴 만져본 적 없어? 정말, 단 한번도? 내 얼굴 보고 똑바로 대답해봐."

나도 모르게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꼴이 되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추궁에 시달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위엄이 장난 아니었다. 한참 동안이나 대답 못 하고 전전긍긍하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어."

하도 모기만한 소리라서 내 귀에도 안 들렸다.

"안 들려."

"...봤어..."

"뭘 봐?"

"만져봤다고...."

이게 말로만 듣던 고해성사인가요, 하나님. 아니, 하나님에게 하는 게 아니라 원래는 신부님에게 하는 거 아닙니까? 그때 내 머리통을 무언가가 휘어 감는다.

"진~~작 그럴 것이지. 짜식.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컥컥...."

효진의 헤드락이 내 머리통에 작렬했다. 그녀의 옆구리, 엄밀히 말하면 젖가슴의 옆 부분이 내 뺨을 사정없이 비빈다. 전에도 이런 일을 한번 당해본 사람으로서...... 여자가 남자에게 거는 헤드락만큼 에로틱한 자세는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지금 이 녀석은 노브라란 말이야! 내가 준 티셔츠 바로 너머 둥글고 푹신한 무언가가 있고 바로 그 근처에 얼굴을 문대고 있는 건 괴로운 일인지 행복한 일인지 자못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어때, 한번 비교해볼래?"

"뭐…….뭘?"

"감촉 말이야. 나도 직접 지혜 꺼 만져보고 내 꺼도 만져보고 그랬지만 난 당사자란 말이지. 그렇다면 제 3자가 해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헤드락에 끼여 있느라 정신이 없어 그녀가 말한 "지혜 꺼"와 "자기 꺼"가 뭘 의미하는지 바로 파악하질 못했다. 대답을 잘 못하고 있으니 그녀가 재촉한다.

"응? 싫어?"

"좋아! 아...아니, 그게 아니라...."

"푸하핫. 알았어. 일단 일루 와봐."

그녀는 내 머리통을 끌어안은 채 이불을 끌어올려 두 사람을 덮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다가 이불까지 덮어쓰니 꽤나 어두컴컴해졌다. 어둠 속에서 나란히 누운 채 서로를 바라본다. 그 자세로 효진은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공정하게 평가해야 돼? 알았어?"

"어? 어...."

나에게 다짐을 받은 그녀는 눈을 감더니 셔츠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가 드러나고 이어서 젖의 아랫부분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내 눈부시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싱그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누운 자세라서 둥근 언덕의 경사는 상당히 완만했지만 부드럽고 여유 있는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때?"

"............."

"어떠냐니까?"

".....일단 만져볼게."

"......그래."

본인도 인정했다시피 지혜에 비해서 크기가 좀 작았다. 지혜는 한쪽을 한 손으로 잡았을 때 꽤나 많은 부분이 빠져나가는 편이었지만 효진은 그러질 않았다. 그래도 제법 한손 가득 잡히긴 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본다. 주무르는 감촉도 괜찮다.

"흐음.... 어때?"

"어? 어.. 좋아..."

"막연하게 대답하지 말고. 지혜랑 비교해서 말해봐. 어느 쪽이 더 좋아?"

"어? 난 둘 다 좋은데..."

"이게 진짜!"

그녀는 헤드락을 한 번 더 걸 것처럼 팔을 들었지만 그저 내 머리통에 올려놓았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혀를 내밀어 핥기 시작했으니까.

"하악.... 지금 ... 뭐해...."

"뭐하긴, 맛도 봐야지."

"이거 숙맥인 줄 알았는데 완전 선수잖아... 하윽...."

유두 하나를 덥석 베어 물고 손 하나는 등을 쓸어내린다. 쓸어내리다 끝나는 지점에는 낡은 츄리닝이 걸린다. 옷을 살짝 들추고 더 아래로 내려간다. 엉덩이 골을 따라 손가락이 배회하다가 둥근 언덕의 동산을 비벼본다.

"뭐야... 어딜 만져...."

말로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그녀는 허리를 비틀어 내게 더 안기는 자세를 취했다. 가슴을 빨던 입은 목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입술을 찾는다. 입술을 겹치려 하자 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싫어. 키스는 안 돼."

"어? 왜?"

"몰라. 암튼 안 돼."

"그럼 이건?"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무대를 옮겼다. 등산을 마치고 앞으로 돌아와 계곡 사이로 파고든다. 비에 젖은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젖은 건지... 이미 그곳은 대규모 홍수사태다.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그녀가 몸을 비비 꼰다. 거치적거리는 셔츠를 벗겨내고 츄리닝을 끌어내린다. 나 역시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에 알몸을 포갠다. 툭 튀어나온 육봉에 효진의 차가운 손가락이 걸치더니 살짝 감아본다.

"그때도 느꼈지만.... 제법 크단 말이야?"

"그때?"

"그 날 기억 안나? 지혜 이사한 날... 나랑 지혜가 니 꺼 빨아줬잖아."

그렇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

"지혜랑 찐하게 놀고 있자니 갑자기 발동이 걸려서 말이야. 여기 물건 하나 있으니 한번 세워보자 그랬지."

"지혜랑 찐...하게 놀다니?"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아저씨."

궁금하고 아주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효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물건을 허벅지에 대고 비비니 다리를 살짝 벌려주는 것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다. 콘돔을 찾아와서 씌웠다. 충분히 젖은 곳으로 진입시켰다. 내 목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효진을 달래어가며 전진 후진을 반복했다. 키스를 못 하게 해서 주로 목과 가슴을 빨았다. 귀 뒤를 핥아주니 반응이 제법 좋았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효진의 두 다리가 늘씬하니 보기 좋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몸을 탐하고 쑤셔 넣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마지막 한숨을 토해내며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효진을 꽉 끌어안고 한참을 숨을 헐떡이며 있었다. 눅눅하고 약간 냉기가 돌았던 내 방이 모처럼 사람 사는 집처럼 훈훈해졌다. 뒤처리를 끝내고 이불 속에 나란히 들어가 있었다.

"저기..."

"응?"

"이런 거 물어봐도 돼?"

"뭐가?"

몸을 돌려 효진이 쪽을 쳐다본다. 여태 그녀를 자주 만났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뭐랄까. 아주 뛰어난 미녀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게 생겼다. 게다가 표정도 꾸밈없이 밝은 편이라 인상이 무척 좋았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피부가 깨끗하고 생기 있었다. 눈웃음 짓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나랑, 왜 한 거야?"

그러자 효진이 눈을 껌뻑인다. 너무 무례한 질문을 한 걸까 싶어 주저하고 있자니 그녀가 깔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휴, 우리 한석 군. 그게 궁금했쪄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스킨십이 퍽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글쎄다. 나도 하고 나니 궁금하네."

".....본인도 모르는 거냐!"

"모르지. 당연히 모르지. 자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랑 나랑 궁합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는 거잖아? 지금 이렇게 해보고 나니 한석 군이랑 나랑 궁합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생각해봐. 자보기 전에 그 사람이랑 자기랑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어? 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어울리지 않게 이런 부분에서 논리정연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힘도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당겨 내 쪽으로 안으니 자연스럽게 품 안으로 파고든다.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안으며 속삭였다.

"아마도 그거겠지. 지혜랑 속궁합이 잘 맞는 남자는 나랑 어떨까 싶어서 궁금했던 모양이야. 히히히."

"지혜?"

"그래. 지혜. 걔가 대놓고 말 안 해서 그렇지, 너랑 꽤 잘 맞는 거 같던데. 아냐?"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지혜랑 찐한 시간 어쩌고 하는 소리도 했었다. 머릿속에서 어떤 용어가 떠올랐지만 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효진은 그 뭐냐, 여자끼리 그러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런데 남자 랑도 그럴 수 있는 건가? 효진이 지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워낙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해서 딴죽 걸기 힘들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이야기는 엄청난 이야기였다. 가만 있어보자. 이걸 뭐라고 하더라....

"이거 게임기 맞지?"

효진은 엎드린 채로 있다가 내 TV 밑에 놓인 패미콤 게임기를 본 듯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테트리스 있냐고 물어본다. 게임팩 중에서 테트리스를 뒤적이며 꺼내어 연결시켜 주었다. 작고 낡은 금성 텔레비전에서 러시아 민족음악을 8비트 풍으로 어레인지한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오오. 나 이거 되게 좋아하는데!"

효진은 옷도 아직 다 안 입었건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게임패드를 들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짓다가 문득 아까 들었던 삐삐 진동 소리가 떠올라 가방을 뒤졌다. 삐삐에는 이렇게 찍혀있었다.

[4444]

...........주인님이로군. 이건 아무리 봐도 행운의 숫자 4라기보다는 죽음을 뜻하는 4자가 맞겠지? 음성메시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냥 번호만 남긴 듯싶었다. 혹시 나중에 보면 정말로 죽이겠다는 소리면 어쩌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생과 사를 가르는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등 뒤에서는 환호와 비탄이 쏟아졌다.

"아싸아, 집어넣었다. 아앗!! 긴 게 안 나와, 긴 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효진의 등짝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녀처럼 속 편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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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삐삐]라는 물건이 뭔지 모르는 분도 꽤 다수일지도 모르겠군요. 혹은 알더라도 직접 써보지는 못 하고 그저 이름만 들어봤다거나.

시대 배경이 96년도라고 하니까 지금 2014년보다 무려 이십여년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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