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6화 (1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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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과외가고... 여기서 말하는 평소란 주인님을 모시기 전의 평소를 뜻한다. 혹시나 싶어서 계속 삐삐를 들여다보았지만 이전의 [4444] 이후로 어떤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진호 선배를 보고 뭔가 물어 볼까도 싶었는데 차마 말은 꺼내지 못 했다.

예를 들어,

"진호 선배, 제가 명희 씨에게 오해를 하나 샀는데 그걸 풀 수 있을까요?"

"무슨 오해?"

"제가 콘돔을 가지고 있는 걸 명희 씨가 보고 언짢은 생각을 했나 본데요, 전 그걸 명희 씨에게 쓰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썼습니다. 그러니 오해라고 전해주세요."

.........라고 말할 순 없지 않는가. 아무리 선량하고 후배를 잘 챙기기로 소문 난 진호 선배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 나를 살려둘 것 같지는 않다. 명희의 본성을 모르는 그에게 있어 그녀는 착하고 귀여운 교회 동생이니까 말이다.

병원으로 다시 찾아가 볼까 싶다가도 명희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자꾸 망설여졌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사이에 그 날이 되고 말았다.

월급날 말이다.

얼마 전에 유진에게 받은 정장을 꺼내어 입어본다. 다소 노티나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이다. 유진에게 옷을 돌려주려고 하였지만 자기 집에서는 입을 사람이 없다며 나보고 가지라고 했다. 입을 사람이 없는 옷을 그럼 왜 가지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좋은 옷을 준다기에 사양도 안 하고 덥석 받아들였다.

이놈의 거지근성. 나란 남자. 저렴한 남자.

일단 집을 나서기 전에 명희의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남기지 말라고 했던 삐삐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오늘 과외 끝나고 같이 레스토랑에 가자는 말도 남겼다. 호텔 레스토랑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근사한 곳으로 시내 모처에 예약을 했으니 꼭 와 달라고 신신당부 했다. 시간과 위치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내가 유진이네 집에 도착하고 맨날 하는 '과외'를 마칠 때까지 호출은 오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응, 그래. 너도..."

두 시간 동안 꼬박 문제집을 풀던 유진이 책을 덮음과 동시에 나도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유진이 전화기를 들고 초밥 2인분을 시켜서 기다리는 동안 오늘은 어머님이 오시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뇨. 지금 시간이면 가게에 계실 시간이라... 근데 갑자기 엄마는 왜요?"

"아니, 저. 그게 말이야... 오늘이 그 날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월급..."

아무리 어른스러운 애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백히 어린 아이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좀 우스웠다. 그래서 한참을 주저하다가 겨우 말을 꺼낸다.

"그 날....? 월급....? 아, 맞다."

항상 무표정하던 유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살짝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유진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언니? 저예요, 유진이......네...........네..........엄마 있어요? 예? 음..... 네......."

한참 통화를 하던 유진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뭔가 더 이야기하더니 전화를 끊는다. 내 이름도 몇 번 나오고 월급 어쩌고 하는 걸 봐서 월급 이야기인거 같기는 한데.... 유진은 나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J동이 어딘지 아세요?"

"아는데, 왜?"

"죄송하지만 돌아가실 때 거기에 잠깐 들렸다 가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엄마한테 월급 이야기 하는 걸 깜빡 했네요. 지금 언니에게 이야기해 두었으니까 저희 가게에 잠시 들렸다 가주세요."

가게에 가서 돈을 받아가라니.... 낭패였다. 아무리 내가 받아야할 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수쟁이 수금하듯이 받아가는 건 또 웃긴데 말이다.

"에? 그냥 다음에 올 때 주면 안 돼?"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아저씨도 항상 시간을 잘 지켜주셨는데 제가 약속을 어길 순 없죠. 오늘 드리기로 했으니까 오늘 받아가세요."

뭐랄까. 이 녀석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묘하게 반박하기 힘들다. 게다가 만약 지금 바로 월급을 받지 못한다면 이따가 갈 레스토랑에서도 무슨 수로 지불을 할 건지 막막하기도 했다. 내가 마지못해 수긍하자 유진은 노트 한 페이지를 찢어 거기에 약도를 그려주었다. 약도만으로는 찾기 어려운지 말로 더 설명했다. 몇 미터를 가고 어느 쪽으로 돌면 된다는 식으로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게 퍽 특이했다.

"......이쪽에서 보시면 아마 보일 거예요. 가게 이름은 로즈구요."

"아, 가게 이름이 로즈. 음, 근데 뭐하는 가게인데?"

".........."

항상 명확하게 대답하던 유진인데, 지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얼굴을 한번 쳐다보자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살짝 눈을 내리 깔고 대답했다.

"가보시면 알아요. 찾기 어려우면 저한테 전화 하시구요. 들어가자마자 아무나 붙잡고 선영이 언니를 불러 달라고 하세요. 언니에게 제가 보냈다고 하면 알아서 주실 거예요."

"선영 씨? 알았어."

"참고로 저희 엄마는 아마 없을 테니까요. 절대로 찾지 마시구요. 그냥 선영이 언니를 만나서 월급 받으세요.."

"응?"

녀석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명 아까는 자기 엄마가 가게에 있을 시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엄마를 만나지 말라니, 이게 대체 무슨 연유인가 싶었다. 녀석의 말투는 미묘했다. 마치 내가 자기 엄마를 만나면 큰일 날 것처럼 말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

유진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전혀 물어볼 수가 없다. 곧 이어 배달된 초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에 올라타고 유진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간다. 직선거리가 가까워서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유흥가로 유명한 곳이다. 말로만 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가보니 유흥가 중에서도 정말 최고의 정점에 달한 곳이다. 아직 오후라서 사람도 없고 연 가게도 별로 없어서 썰렁했지만 아마 해가 지고 나면 가장 밝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실제 길과 약도를 맞추어 나가면서 "로즈"를 찾았다. 유진이의 약도가 워낙 상세하여 가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녀석이 말해준대로 걸어가니 딱 나와서 헤매고 말 것도 없었다. 그리고 유진이 대답하기 껄끄러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즈 Rose]

그곳은 아주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리고 술집이었다. 그렇다고 막 대학생들이 즐겨 찾는 호프집이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잔 걸치러 들어가는 그런 개방된 술집이 아니라 그 왜 있잖은가. 입구부터 딱 고급스러운 분위기 물씬물씬 풍기고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데다가 건물의 바로 위는 고급 모텔로 되어있는, 그런 술집 말이다. 예전에 선배들에게 비즈니스 클럽이라는 곳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딱 그런 종류였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비즈니스"를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익숙지 않은 곳이라 편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받을 돈이 있다는 생각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간다. 커다랗고 둥근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쪽에는 꽤 넓은 홀이 있었다. 홀에서 둘러보니 방사형으로 복도가 뻗어있고 복도를 따라서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나무문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방의 크기나 홀의 크기. 밖에서 본 건물의 크기 등을 미루어 짐작해보니 이 술집의 규모는 꽤 클 것 같았다. 괜히 돌아다니면 길을 잃을 것 같아 홀에 서서 다른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저기, 저기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이고 맥주박스를 나르고 있는 웨이터가 보여 불렀더니 나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온다. 몹시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그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시큰둥하게 말했다.

"손님, 아직 영업 시작 전입니다."

아무래도 날 여기에 술 마시러 온 손님으로 아는 모양이다.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전 그게 아니라 누구 좀 만나러 왔는데요."

"아가씨들도 아직 준비 전 입니다."

아가씨? 아아. 그러고 보니 이런 곳은 그냥 들어와서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가씨들도 나오는 곳이구나. 그렇다면 유진이가 말한 "언니"라는 사람도 여기에서 일하는 건가? 아까 말한 선영이라는 여자도?

"그게 아니라 유진이가 보냈는데 여기서 선영 씨 찾으면 된다고..."

그러나 웨이터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아, 글쎄. 유진이고 선영이고 나발이고 아직 준비 안 되었다니까?"

말투가 거칠다. 아무래도 이 자식은 사회에 불만이 있는 놈인 게 틀림없다. 아니면 내가 오기 전에 다른 진상 손님을 겪었다거나. 딱히 진상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나를 다소 거칠게 밀쳐내며 나가라고 종용한다. 은근히 열이 받는다. 내가 여기에 뭐 땜에 왔는데! 게다가 오늘은 큰 맘 먹고 좋은 옷도 입고 있는데!! 이렇게 민다고 밀릴 내가 아니다. 그의 나가라는 소리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서서 맞선다. 그의 목소리를 점점 더 커졌다. 그 때였다.

"이군아~ 왜 그러니?"

웨이터와 살짝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미녀가 서 있었다. 길에서 본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돌아볼만한 매력을 뿜어내는 미모였다. 커다란 눈가는 매혹적으로 반짝이고 있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마치 날 아주 잘 안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보내왔다. 저런 게 접객업을 하는 사람의 미소인걸까?

아니. 조금 다르다. 그녀의 눈인사는 마치 상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보내는 친근한 눈인사였다. 나도 모르게 응대를 했을 정도다.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저를 어디서 본 적 있으신가요, 라고 물으면 물론이죠. 라고 대답할 표정이었다. 게다가 옷차림이....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 부분은 깊이 파여 있어 커다랗고 맵시 있는 가슴 두 개가 만들어 내는 계곡선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긴 생머리를 등 중반까지 늘어뜨리고 얇은 금테 안경을 살짝 걸치고 있어 꽤나 지적인 분위기였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으면 모셔야지."

그러자 웨이터가 투덜거렸다.

"아, 사장님. 지금 이 아저씨가 아직 영업도 시작 안 했는데 막 들어와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선영 씨라는 분을 만나러 온 거라니까요."

"선영이가 누군데? 그런 사람 여기 없어!"

"엑? 유진이가 여기로 가라 그랬는데? 내가 잘못 왔나?"

"유진이는 또 누구야?"

웨이터가 툴툴거리자 여자가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더니 귓속말을 좀 한다. 그러자 웨이터는 금방 표정이 변했다.

"아... 실장님 성함이... 제가 늘 실장님이라고만 부르고 있어서 성함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웨이터는 황급히 내게 구십 도로 인사를 꾸벅하더니 총총걸음으로 가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여자 쪽을 쳐다보니 날 마주보며 생긋 웃는다. 여전히 날 아주 잘 안다는 듯한 미소다.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이 여자의 눈빛 앞에서는 어쩐지 발가벗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화장이 조금 진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왠지 낯익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왜 얼굴이 낯이 익을까?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유진이 과외하시는 분 맞죠? 우리 이군이 여기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애라서요. 아직 잘 모르는 게 많네요."

"아, 예...."

"우리 유진이 공부 잘 하고 있죠?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유진이가 여기에 와서 선영 씨라는 분을 만나라고 해서요."

"선영이? 걔는 왜요?"

"예? 아, 저... 그게.... 오늘 과외 월급날인데, 유진이가 미처 준비를 못 했다며 저보고 여기에서...."

그러자 여자는 눈을 크게 뜨며 손뼉을 쳤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벌써 그렇게 됐나?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자연스럽게 손을 뻗더니 내 팔을 잡는다. 은은한 향냄새가 내게 확 밀려왔다. 취할 것 같았다. 여자를 따라가면서 방금 그녀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유진이를 가리켜 "우리 유진이"라고 했다. 어렴풋이 기억났다. 전에 유진이네 집에 전화 걸 때 통화했던 목소리 말이다. 바로 이 목소리다. 사무실에 따라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혹시 유진이 어머님 되시나요?"

"어멋~ 제가 아직 인사를 안 드렸네요. 예, 제가 유진이 엄마예요. 진유미라고 합니다."

"아, 예. 최한석입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기에 나도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가슴이 꽤나 깊게 파여져 있는 거라 몸을 숙이면서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났다. 뭇 아가씨들이 그러하듯 손을 들어 가리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당당하게 인사를 하니 시선을 돌리기도 뭣하다. 워낙 짧은 순간이었지만 고스란히 그 계곡을 감상하고 말았다. 지혜만큼은 아니지만 이분도 꽤나 상당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지혜를 본지 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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