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0화 (2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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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와의 뜨거운 밤을 보내고 이틀 후, 다시 과외 날이었다. 유진에게 단단히 따져 물어볼 게 있었던 터라 나는 평소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표정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과외선생님입니....다? 어라?"

인터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낯설면서 낯익은 목소리였다. 일단 유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첨 들어본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항상 과외 하러 오면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늘 유진이었던 터라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도 보통 기운이 아니다. 콘푸로스트를 먹었나... 뭔 놈의 호랑이 기운이냐, 이건.

"서....선영 씨?"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말의 내용만 두고 본다면 상냥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투만 들어보면 영락없이 드잡이 질이다. 말투에 어울리는 말로 재구성한다면 "저리 꺼져, 병신아" 이 정도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그런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쿨하게 넘어갔다.

"아, 예."

지난번과 같은 풍의 오피스 레이디풍의 정장은 안 그래도 딱딱한 표정의 선영을 더더욱 딱딱하게 보이게 했다. 검은색 투피스는 마치 사신의 복장과도 같아 보인다. 그런 선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가자 늘 앉던 테이블에 의자가 하나 더 있는 게 보였다. 유진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유진아."

항상 앉듯이 유진의 왼쪽 대각선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유진의 오른쪽 대각선에는 선영이 뒤따라 앉는다. 결과적으로 나와 선영은 마주 앉게 되었다. 뭐야. 당신도 과외 받는 거야?

"늘 유진이를 맡겨두기만 한 것 같아 죄송스러워 오늘은 수업에 참관하려고 합니다. 그냥 저는 없는 셈 치고 늘 하던 대로 수업해주세요."

나의 눈길을 받고 선영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딱히 그녀가 방해된다 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늘 하던 대로 수업"이라니. 수업을 한 적이 있....었던가?

"선생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행렬문제가요, 잘 이해가 안 돼요."

"어?"

유진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수학문제집을 펼치며 내 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내민다. 항상 이 녀석이 혼자 풀던 그 문제집이다. 이걸 왜 나한테......? 선영 쪽을 힐끔 쳐다보니 아주 그냥 정자세로 앉아 이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다. 조만간 내 머리통에 구멍 뚫리것다, 이 여자야! 그런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을 어떻게 없는 셈 치냐!!! ....... 라고 따져 묻고 싶지만 일단은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 이거 말이지. 일단 역행렬 구하는 거부터 시작하는 건데 말이야...."

"네, 선생님."

그러고 보니 날 보고 항상 아저씨라 부르던 유진이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날 부르고 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게다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학생다운 모습"을 보여주다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연습장에 식과 풀이과정을 이리저리 써가며 요령을 알려주자 유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문제를 풀어간다. 그리고 또 얼마 못가 응용문제 하나를 물어봐온다. 앞서와 같이 설명을 마치고 선영 쪽을 다시 힐끔 보자 왠지 아까와는 많이 다르게 누그러진 표정이다.

그렇게 "평소와는 전혀 다른 과외"를 "평소 하듯이" 해내고 나니 두 시간 만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사람의 시선을 받는다는 일이 이토록 고된 일일 줄이야. 게다가 유진에게 내 삐삐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아야 하는데 선영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도 못 했다. 왠지 그녀 앞에서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업이 끝나고 나자 유진이는 3인분의 초밥을 시켰고 세 사람은 그걸로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배달되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유진은 자기 학교생활과 친구들에 대한 것을 선영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고 선영은 인자한 표정으로 그걸 듣고 있었다. 유진이가 저렇게 애처럼 구는 경우도 있구나, 그리고 선영이라는 저 여자가 저런 자애로운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구나, 싶었다. 물론 간혹 가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다시 독기를 품는 게 영 꺼림칙했지만....

"댁이 어디시죠? 모셔다 드릴게요."

체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편한 자리에서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선영이 따라 나온다. 평소 같으면 자전거 타고 가느라 사양했겠지만 며칠 전 레스토랑 갈 때 중간에 전철역에 세워둔 것을 아직 안 가져왔기에 군소리 없이 따라갔다. 운전사는 마음에 영 들지 않지만 그래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있는데 이를 마다할 리가 없지. 이놈의 거지근성.... 잠시 후, 선영이 끌고 온 검정색 중형 세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저, 집 대신에 K대로 가주시면 안 될까요? 볼일이 있어서...."

"그러죠."

대답을 마친 선영을 악셀을 밟았다. 그리고 K대로 가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짜라고 막 올라탄 그 선택을 몹시도 후회했다. 듣기로 심야 불법 영업 달리는 총알택시들이 난폭운전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지금 내 옆에서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미친 듯이 악셀과 핸들을 조작하는 이 미친 여자만큼은 아닐까 싶다.

급출발, 급제동, 끼어들기, 앞차 바짝 붙기, 신호무시 등등 도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종합선물세트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서...선영 씨! 앞에 신호등!!!"

"......"

"...............이 빨간색이 되기 전에 통과하면 되는 군요.... 으악! 커브!!!"

"......"

".............에서 속도를 줄이면 안 되는 건가요."

차가 멈추었을 때, 내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절 낳아주셔서 감사한데 아무래도 방금 전까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효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살려주세요.

"도착했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은 대답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살려두기로 하긴 한 모양이다.

".......자..잠시만 앉아있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서 이 차로부터 최하 백 미터 이상 덜어지고 싶지만 지금 바로 일어나서 대지를 밟으면 꼴사납게도 휘청거리며 몇 걸음 못 걷고 넘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대지에 엎드려 땅바닥에 키스하고, "오, 육지다!"라고 할지도 모르지. 이래저래 이 여자 앞에서 약하거나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아무튼 나는 조수석에 몸을 파묻은 채로 잠시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꽤나 적막한 시간이었다. 카오디오도 켜지 않은 터라 더욱 그러했다.

"저기, 오늘은 왜....?"

뭔가 이야기라도 꺼내야 될 것 같아 아까부터 궁금했던 사안을 꺼내보았다. 선영을 고개를 살짝 돌리고 내 쪽을 바라본다.

"무슨 문제라도...?"

"아뇨, 문제라기 보단 뭐랄까. 좀 갑작스러워서 말이죠."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문제가 생길만한 수업을 하고 계셨습니까?"

"에엑?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면 대체 뭐죠?"

어느 샌가 그녀는 몸을 이쪽으로 잔뜩 기울여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자세가 무척이나 도발적이다. 이쪽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다보니 그녀의 블라우스 안쪽이 조금 벌어졌고 그녀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하던 나는 시선을 떨구다가 나도 모르게 그쪽을 잠시 응시하고 말았다. 뭐, 건강한 남성이라면 눈앞에 드러나는 가슴 계곡에 단 1초라도 시선을 던지게끔 되어있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이걸, 보고 계셨나요?"

"에엑!!!!"

선영은 자신의 블라우스 안쪽, 가슴 계곡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심지어 옷을 잡아당겨 더 잘 보이게까지 한다!! 고맙습.....그게 아니라!! 화들짝 놀라 뒤로 황급히 물러났지만 좁은 차안에서 도망칠만한 곳은 그리 많은 게 아니었다.

"아, 아뇨! 아뇨! 절대로!!!"

"거짓말."

싸늘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정말입니다! 그냥 눈 돌리다가 우연히, 그러니까!"

"보긴 봤다는 말이군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요...."

"상관없어요. 제가 일부러 보여준 거니까."

"에에에에에에엑?"

그녀는 자세를 바로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러고 보니 블라우스 윗단추는 대체 언제 푼 거지...? 잠시 후 내 쪽을 돌아보며 예의 그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로 말했다.

"방금 당신이 증명해주었다시피 자지달린 남자들은 정말 한결같죠.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여자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살짝 만만하게 보이면 금방 칠렐레팔렐레 하니까요. 당신도 자지가 달린 이상 똑같은 남자겠죠."

"......전에도 그랬지만 그 자지소리 좀 빼주시면 안 됩니까? 그리고 일부러 보여줬다니...대체...."

"간단한 테스트입니다. 당신은 합격하지 못 했어요. 결론부터 말하죠. 제가 조만간 다른 과외선생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만두세요."

내 말을 자르고 지 할 말만 하는 게 꼭 누구 같다.

"테스트? 그리고 그만 두라니.... 대체 왜죠? 오늘 가르치는 걸 보니까 영 아니던가요?"

"가르치는 거야, 뭐...."

그녀는 잠깐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 잡은 듯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달려있는 자지가 문제인거죠."

"으아아아아악! 제발 그 단어 좀 빼고 말하면 안 됩니까?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아가씨가 무슨 말만 하면 그.....그....런 소리를 합니까?!"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서 돌려 말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전, 도무지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러니 부디 과외를 그만두세요."

"하! 이유가 단지 그겁니까?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그래요. 만약 유진이를 여자로 보고... 당신이 자지 달린 짐승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단 둘이 그러고 있는데!"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격해져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잠깐, 그럼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나보고 과외를 그만두라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유진이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요? 아무리 당신이 유진이 언니라지만 이건 좀 심한 처사 아닙니까?"

"심해요? 하나도 심하지 않아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해온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조치는 당연한 겁니다."

"끄아아악! 제가 유진에게 손끝이라도 대던가요? 그리고 대체 당신이 뭡니까? 만약 저를 고용한 유진이 어머니가 과외를 그만하겠다고 한다면 이유야 어떻든 간에 결국은 그만두는 게 맞지만 당신이 대체 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테스트니 뭐니 하며 저를 자르겠다는 겁니까?...."

"제가 누구냐구요?"

"그래요!! 당신이 대체 뭐길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렇군요....... 정말.... 내가 뭐라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 소리 높여 싸우던 두 사람이 입을 다무니 더더욱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만 이었다.

"에...선영 씨...저기, 그러니까....."

손수건을 내밀자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두 눈을 두드려 닦아냈다. 그리고는 코를 팽- 하고 풀었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래요. 사실 난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죠. 그렇지만 누구보다 유진이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게 착하고 예쁜 아이의 곁에..... 그런 아이 곁에..... 당신 같은 남자가 있다는 게 싫어요. 정말 싫어요."

"저기, 아까부터 자꾸 나 같은 남자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당신을 본 언니는 한 눈에 알아보겠다고 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야 말로......"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나를 힐끔거렸다. 언제나 독기서린 눈만 보여주다가 눈물로 촉촉이 젖은 눈을 보여주니... 좀 의외이긴 했다. 항상 독한 표정만 짓고 있어서 잘 몰랐지만 나름 색기 있게 생긴 얼굴임에는 분명하다.

"언니한테 못 들었나보죠?"

"네?"

"모르나 보군요. 알았어요. 그러면 그냥 제 말은 잊어버리세요."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문의 잠금쇠가 열렸다. 나보고 서둘러 나가라고 재촉하듯이 말이다. 그녀는 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내 인사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뻘쭘해진 나는 차에서 내렸고 문을 닫자마자 차는 급출발 급가속을 하며 떠나버렸다. 마치 내게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럽다는 듯, 그 모습을 황급히 감추었다. 나는 차가 떠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이내 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후문을 지날 때쯤 뭔가 하나 잊었다는 게 생각났다.

"아, 내 손수건."

..........돌려받는 걸 잊긴 했지만 왠지 안 받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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