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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하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푹푹 내쉰다. 요 삼 일간 너무나도 괴롭고도 힘들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과외 하러 밖으로 나갈 스케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루 재워주면 부산 자기 집으로 곧 내려가리라 생각했던 마리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대로 눌러앉았다. 내게 매달려 서울 구경을 시켜달라고 졸라댔다. 점잖게 거절하고 싶었으나 왠지 덩달아 신이 난 효진이까지 조르기에 가세하여 나를 등쳐먹기 시작했다.
"넌 서울 사람이잖아! 오히려 내가 서울 사람이 아니라고."
"서울 사람이라고 다 서울 구경을 해본 건 아니야. 원래 자기 사는 곳에는 별로 관심 없어."
"맞아예. 저도 어디 가서 부산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해운대 가봤냐고 하는데, 사실 지는 해운대 함도 안 가봤어예."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내가 너희들을 서울 구경 시켜줘야 하는 이유인데..."
"재밌잖아!"
어떤 이유나 논리를 대도 이 둘을 설득할 순 없었다. 덕분에 남산과 명동부터 시작해서 롯데월드까지 이어지는 서울 구경 풀코스를 이틀 동안 내리달렸다. 밤이면 역시 효진과 마리의 주도하에 게임판과 술판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혜를 한사코 경계하는 마리 덕분에 나는 지혜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 했다. 분명히 지혜는 나에게 많은 "싸인"을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 주머니 속에 상비되어 있는 콘돔이 너무도 가엽고도 슬프다.
........ 물론 더 불쌍한 녀석은 내 바지 속에 있는 쥬니어겠지.
게다가 자전거를 세워두었던 전철역에 갔더니 맙소사. 없어졌다!!! 황망히 인근을 뒤져보았지만 나타날 리 만무.... 전철역에 문의도 해보았지만 분실물로 자전거가 들어온 것도 없고 내가 세워 두었던 쪽에는 설치되어 있는 CCTV도 없다는 절망적인 소리만 들었다. 해가 질 때까지 전철역 근처를 뒤졌지만 자전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덕분에 나는 익숙하지도 않은 버스노선을 익히느라 시간이 꽤 걸렸고 엉겁결에 꽤나 이상한 곳에 내려버리는 바람에 거기서부터 유진이네 집까지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자전거로 갔으면 정말 순식간에 갈 거리를 터덜터덜 걸으며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유진이네 아파트 앞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한참 늦어버린 후다. 비록 가르치는 건 없어도 성실 근면 하나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과외자리였건만. 이래서야 그 지 할 말만 하고 싶어 하는 한선영인가 뭐시기 하는 여자에게 나는 똑바로 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땅만 보고 걸어가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늦으셨네요."
"어? 미안... 어.... 일이 좀..... 근데 너 왜 여기 있니?"
1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 유진이가 서 있었다.
"아저씨 기다렸죠. 참고서 좀 사려고 하니 같이 가주세요."
"그...그러냐."
한참 걸었으니 이제 좀 앉아 쉴까 싶었는데 다시 걸어야 하다니. 낭패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유진은 먼저 앞장서더니 아파트 단지 앞에 세워져 있는 택시 중에 하나에 냉큼 올라탔다.
"뭐하세요. 빨리 타요."
"어? 어...."
요즘 애들은 택시에 이리도 쉽게 냉큼냉큼 타고 다니는 구나... 유진은 택시기사에게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서점의 이름을 댔고 택시는 이내 출발했다.
"거기라면 저 쪽에서 전철 타는 게 빠를 텐데..."
"전철은 안 타봐서요."
"그러냐."
이래서 곱게 자란 것들은! 쳇!! 누구는 버스비랑 전철비가 아까워서 자전거 타고 위험천만한 서울도로를 누비고 있건만... 그나저나 내 자전거. 나름 내 재산목록 1호였건만. 다시 사야 되나? 가뜩이나 요새 지출도 이것저것 있어서 살 돈도 없는데.... 개강이 코앞이니 교재 사는 것만 해도 또 수도 없이 많은 돈이 깨져 나갈 텐데..... 아이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머리를 감싸고 창문에 쿵쿵 찧고 있자니 옆에 앉아있는 유진이 나를 이상한 놈 쳐다보듯이 쳐다본다.
맞다... 난 이상한 놈이다. 이상한 놈이야. 으흐흑. 미쳤다고 자전거를 거기다 세워두었지. 아이고. 내가 미친놈이야.
잠시 후, 서점에 도착한 우리는 참고서 코너 쪽으로 갔다. 어떤 과목 살 거냐고 묻는 내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고등학교 참고서 코너를 찾아들어간 유진은 그 중에서 한 권의 문제집을 쑥 골라내더니 카운터로 걸어가 신속하게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내게 돌아온다.
"다 샀어요."
"뭐?"
어이가 없다. 방금 낸 택시 값만 해도 그 문제집 값보다도 더 나왔겠구만.... 게다가 구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문제집도 아니고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잘 나가는 문제집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집 앞에 있는 서점에서 사면되는 거 아냐? 정말이지 이 녀석의 사고방식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나저나 그러면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과외방식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과외선생님인데 그런 나한테 의견도 안 묻고....
아니다. 이 녀석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 나이에 뒷목 잡고 혈압관리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따지는 것은 신속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서점을 빠져나가면서 유진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집으로 가냐?"
유진은 대답이 없었다. 뭐하는가 싶어서 돌아보니 서점 출구 쪽에 자리 잡은 팬시점에 서서 뭔가 좀 웃기게 생긴 인형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해? 집에 안 가?"
"이거 이쁘네요."
......이봐. 그건 내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지 좀 말어. 나는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하며 인형을 관찰하는 척을 했다.
"좀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어?"
"예쁜데요."
이런 말하기는 좀 무엇하지만 차라리 니가 더 예쁘면 예쁘지 결코 그 눈만 댑따시 큰 인형에게 예쁘다는 표현을 쓰기는 힘들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 녀석의 미적 감각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대신 지갑을 꺼내어 인형 값을 치루고 사주었다. 이 녀석의 행동에 이유나 조건 같은 것은 따지지 않기로 내심 마음먹었으니까 말이다. 유진은 그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품에 꼭 안고 걸어갔다. 거 참. 취향 한 번 굉장히 독특한 녀석일세.
"아저씨가 인형 사주셨으니까 저는 밥 사드릴게요."
"응?"
서점에서 나온 유진은 내게 말했다. 대답을 주저하고 있자니 팔을 잡아끌고는 근처에 보이는 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해물스파게티와 크림스파게티를 시킨다.
"스파게티 싫어하지 않죠?"
"그런 건 시키기 전에 물어봐야지."
"그럼 싫어해요?"
"아니, 오늘은 과외 안 해?"
"걱정 마세요. 오늘도 과외 한 걸로 쳐서 페이 드릴 테니까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닌데...."
뒤통수를 긁적여 보았지만 뭐, 별 수 있나. 나는 잠자코 앉아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한참 만에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언니가 와 있어요."
"응? 언니? ... 아... 선영 씨 말이구나."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언니가 와 있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지? 요리보다 먼저 나온 피클을 뒤적거리며 그녀에 대해 묻자 유진은 답한다.
"언니가 그만두라고 했다면서요? 정말 그만 둘 거예요?"
"아니. 이렇게 꿀 빠는 과외자리를, 아니, 그게 아니라...... 넌 내가 그만 두었으면 좋겠어?"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다행이네.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우습지만... 만약 과외에서 짤린다면 나는 당장 공사판 막노동이라도 하러 나가야 돼. 개강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고... 개강이 되고 나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대학생은..."
"집에서 용돈 안 주나요?"
"물론 받긴 하지만.... 엄마 혼자서 밭일 해가면서 힘들게 번 돈은 당신 위해 쓰라고 하고 싶어서 말야."
문득 괜히 내려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설에도 내려가 보지 않은 집 생각이 났다. 나만 보면 술만 먹이려드는 삼촌이나 사촌 형들은 그렇다 치고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온 엄마의 모습이 생각났다. 내려가지는 못 해도 오랜만에 전화나 한 번 해볼까.
"절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저씨는 합격이에요. 앞으로 특별히 사고치지 않는 이상 자르지 않겠어요."
".....상당히 고맙긴 한데 사고는 대체 뭘 말하는 거냐."
"저를 귀찮게 하는 거."
"아, 예."
"지금 들어가 봤자 언니에게 싫은 소리만 들을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과외 하는 걸로 치고 다음에 수업하죠."
"예, 예."
참 대단한 은혜로움입니다. 뭐... 사양할 필요가 없으니 그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자니 유진이 묘한 질문을 한다.
"근데 저보고도 뭐 특별히 할 이야기 없어요?"
"음?"
내가 왜 널 보고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하냐, 라고 물으려다가 다시 곰곰이 살펴본다. 평소와는 다르게 교복을 입고 있다는 점 말고는 다른 걸 모르겠는데 말이다. 과외를 시작한 게 방학 중이었기에 여태 녀석의 교복 차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복을 입고 있다. 아직 방학이 안 끝났을 텐데....? 그나저나 짙은 곤색의 체크 무늬 자켓과 푸른빛의 치마라.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교복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오늘 학교 가는 날이었어? 교복을 왜 입고 있어?"
유진이가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아..... 이건 이번에 들어가는 고등학교 교복이구요, 아직 가는 날 아니에요. 그냥 입어봤어요."
"그래?"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
"..........."
"그게 끝?"
"그럼 뭔가 더 물어봐야 돼?"
뭔가 질문이 부족했나? 유진의 표정이 상당히 불만스럽다. 입을 삐쭉 내민 녀석을 향해 하나 더 물어보기로 한다.
"그럼 입학식 때나 입지 왜 벌써 입어?"
"...됐어요."
표정을 살짝 찡그린다. 뭐가 대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마침 식사가 나왔기에 당분간은 먹는데 집중했다. 유진은 포크로 면발을 이리지러 찌르며 투덜거렸다.
"쳇.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뭐? 내가 뭘?"
"됐어요. 그래 가지고 여친은 어떻게 만들었나 몰라."
"여친?"
그제야 생각이 났다. 명희와 모텔에 갔을 때, 난데없이 울렸던 내 삐삐.
"맞다. 너, 그때 나한테 삐삐친 거.... 내 번호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저씨가 그 때 씻으러 간 사이에 봤어요. 그 때 번호를 외운 거죠."
"뭐 하러?"
유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딴 곳을 쳐다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글쎄요."
"글쎄라니."
"그냥 알아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날은 왜 호출한 건데?"
"선영이 언니가 나한테 막 뭐라 그러길래 가게에서 아저씨가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죠. 그거 물어보려고 연락한 거예요."
"사...고?"
잠시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명희를 만나기 전, ROSE에서 있었던 일... 으음. 대체 선영은 나에 대해 뭐라고 한 걸까. 모르긴 몰라도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찔리는 게 많아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근데 정작 아저씨는 연락도 없고 웬 아줌마한테서 연락오더니 샤워중이라질 않나..... 정말 저질이야."
"명희가 아줌마는 아닌데... 그리고 내가 왜 저질이야."
"몰라서 물어요?"
항상 무표정에 가깝던 유진의 얼굴이 이례적으로 살짝 붉어졌다.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서... 한 명이 샤워중이라니..... 어휴, 정말 불결해."
"아아, 그게.....그러니까..... 그건 말하자면 긴데, 아, 그리고 너랑 있을 때도 샤워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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