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5화 (25/471)

0025 / 0471 ----------------------------------------------

분기점

명희와의 잊지 못할 그 날 이후.... 그러니까 명희와 모텔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이후, 그녀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노예 콜 전용의 삐삐는 잠잠했다. 내가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러질 못 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그 날을 떠올려본다.

세 번인지 네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밤을 새워 몸을 녹이고 그녀 안에 나를 밀어 넣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방안에 없었다. 널브러진 콘돔과 휴지를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내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하고 강간 미수 사진을 찍어 나를 노예로 만들었던 불과 몇 달 전 그녀의 모습과 전날 밤 나의 몸 아래에 교성을 지르며 몸을 떨고 나를 끌어안으며 혀를 섞던 그녀의 모습은 좀처럼 겹쳐지지 않는다. 마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반가운 표정보다는 움찔하는 기색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며...명희 씨."

"한석 씨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과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한쪽 소파에서 진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자세로 앉아 선배와 이야기중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포르노 처음 본 중딩이 다음날 버스에서 앉아있는 생판 처음 만난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포르노가 연상되어서 알몸이 상상되는 것처럼 확 흥분이 달아올라버렸다. 바지 안쪽에서 급격한 팽창이 시작되고 말았다. 자동반사적으로 흥분되는 몸과는 다르게 말투는 몹시 공손하게 나왔다.

"오...오셨네요. 어쩐 일로..."

"진호 오빠랑 교회 관련해서 이야기할게 좀 있어서요...."

"아, 예...."

".........."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남녀처럼, 우린 서먹했다. 나는 그녀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만 그녀는 또 왜 이런 반응이려나. 어쩐지 평소대로의 그녀라면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이라도 확 붙잡으면서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를 거 같은데 말이다.

"하이고, 예가 과사인교? 들어오는 길 선배님이랑 안 왔시면 길 잃어버려가 뺑뺑 헤매기 딱 좋다 아입니까."

"어? 어...."

명희가 내 팔을 붙잡는 게 아니라 뒤따라 들어온 활달한 후배가 내 팔을 덥석 붙들며 사무실을 둘러본다. 며칠동안 지혜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고 있는 요 녀석은 스킨십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시도해온다는 점에서 꽤나 골치 아픈 녀석이다. 뭐....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끈적한 스킨쉽"을 이 녀석에게 먼저 저질러 버린 내가 그런 점에 대해 지적질을 하면 곤란하겠지.

"아, 이 분도 선배님인교? 안녕하십니까. 김마리라고 합니데이."

마리는 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명희를 보곤 선배인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진호 선배에게도 인사를 하러 간다. 명희 쪽을 쳐다보자 그녀는 천천히 "예전의" 표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시니컬하고, 강하고, 독기 있는...... 그런 표정 말이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야, 쟤는 또 뭐야. 엉?"

"그게 그러니까...."

"지혜랑 효 뭐 하는 애는 그렇다 치고, 저건 또 뭐야. 못 본 사이에 새끼 친 거야?"

"아니, 제가 무슨 번식기도 아니고 새끼를..."

"그럼 뭐냐고!"

진호 선배랑 꽤나 즐겁게 대화하며 하하거리고 있는 마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명희가 묻는다. 어느 샌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설명을 요구한다. 아니 찌르는 수준이 아니라 숫제 갈비뼈를 부술 요량으로 나를 강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살짝 으르렁거리듯이 말한다.

"네놈이 말한 년은 그래, 지혜인가 뭔가 하는 년이랑 효진이, 그리고 그 중딩. 셋이잖아. 저건 또 웬 거야?"

"중딩은 아니고 이제 고딩인데.... 아니, 지금 그 애 이야기는 대체 왜.... 그리고 웬 거라기 보단 그게....어....."

학교에서 주워온 후배, 라고 설명하면 그녀가 이해해주려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호 선배와 마리는 인사와 통성명을 끝내고 있었다. 학교 구경하러 며칠 전에 올라왔다는 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진호 선배는 의례적으로 묻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 지내고 있는데?"

"지금예? 하하. 한석 선배네서 지내고 있어예. 잘 해주시네예."

"아, 그래?"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아무리 후배라곤 하지만 분명히 한석이는 혼자 살고 있는데 거기에다 여자애를 재운단 말인가 싶은 의아함이 가득한 진호선배의 눈길과 별꼴이다 라고 나를 비난하는 과순이의 눈빛과 이건 대체 무슨 놈의 소리냐고 내 기필코 네 놈을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명희의 기세를 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천하의 개쌍놈, 파렴치범, 색마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너는 지금 무슨 말이니! 제 집이 아니고요! 저희 옆집에요!!! 친한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지내고 있어요!! 물론 여자애고요!! 그 집에...."

"옆집에 친한 여자가 산다고?"

진호 선배의 눈길은 명희 쪽을 한 번 보았다가 나를 다시 한 번 본다. 아까보단 덜 하지만 그래도 의혹이 담긴 눈빛이다. 끄아악. 그러고 보니 명희와 나를 소개해준 사람이 진호 선배였지. 게다가 선배는 나랑 명희랑 지금 잘 사귀고 있는지 알고 있고.....

"친하지만!! 결코 이상한 사이는 아닙니다!! 정말로요!!!"

"......누가 뭐래니..."

이대로 과사에 오래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당할 것 같아서 얼른 명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을 지나 공대 안쪽 마당에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내 정강이는 사정없는 로우킥을 맞아야만 했다. 분명 공격이 들어올 거라고 마음먹고 나름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처 방어하지 못한 공격은 무척이나 날 아프게 한다.

"으헉!"

"빨리 설명해. 이 새끼야. 네 놈은 정말이지 잠깐 좋게 봤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눈빛으로 불도 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명희는 조금만 설명이 늦었다간 나를 잡아먹을 태세다.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횡설수설 설명을 시작한다.

"그게 그러니까... 학교에 왔는데 쟤가 있어서.... 갈 데가 없다기에 집에 데리고 갔는데.... 집에서 재울 수는 없어서 지혜네 다가...."

좀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어찌어찌하여 설명을 끝냈다. 내 설명은 다 들은 명희는.

"......하아. 진짜 구제불능이다. 구제불능이야."

하며 머리를 짚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직도 화가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긍한 것 같다. 물론 그녀가 "알아들었다"라도 대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다. 아니라면 "뭐라고? 닥쳐! 시끄러! 죽어!" 라며 사정없이 나를 후드려 팼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알아들은 것과는 별개로 왠지 표정이 안 좋았다. 모르긴 몰라도 명희는 마리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제가 많이 잘못한 건가요?"

"몰라! 후배든 뭐든 알게 뭐야. 그냥 얼어 죽게 내버려두지. 아니, 애초에 지가 지 발로 자전거 끌고 나온 년이라면서. 그럼 지가 알아서 어디든 기어들어가겠지. 그걸 왜 니가 참견이야?"

"그래도 후배인 걸 알았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핫. 진짜 어이없네. 야, 남자 후배라면 내가 이렇게 화내겠어? 엉? 처음 본 다 큰 사내자식이 재워준다는데 그걸 또 쭐래쭐래 따라가? 그 년도 어디가 좀 이상한 거 아냐?"

"그럼 남자 후배를 재워줬다면 명희 씨가 이렇게 화를 안 냈겠네요?"

"당연하....."

뭔가 더 말하려던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녀의 반응은 뭐랄까. 딱히 마리가 싫다는 것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다른 여자랑 가깝게 지낸게 마음에 안 든다는 투였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야, 읍...."

또 때리려나. 허락도 맞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내 입술로 말이다.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나를 비난할 수 없겠지. 굳게 닫혀 있을 줄 알았던 입술은 잠시 주저하며 열리더니 내 혀를 받아들인다. 얼마 전 내 자지를 부드럽고 힘차게 빨아대던 그녀의 혀는 이제 내 혀를 농락한다. 입술과 입술이 겹치고 그 안에서는 혀들의 백병전이 벌어진다. 허리에 두른 손을 나도 모르게 옷 안으로 집어넣는다. 매끈한 등의 감촉을 만끽하며 어루만진다. 조금씩 올라간 손은 이윽고 브래지어 끈에 닿는다. 여기서 더 나아갈까 말까 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나를 밀어낸다.

"푸핫- 여...역시 거기까지 만지는 건 좀 그랬나요?"

막혔던 숨을 내쉬며 멋쩍게 말을 거는데 그녀는 내 쪽이 아니라 내 등 뒤 쪽을 보고 있던 모양이다.

"바...바보야! 니 뒤를 봐!"

"네?"

뒤를 돌아보니 웬 아가씨 한 분이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사적인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하군요."

"네....."

무척이나 사적이었지. 어느 정도 사적이었냐면 조금만 더 있으면 엄청 더 사적인 씬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그 아가씨는 나의 이 분노를 감지하지 못 하고 자신은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용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실례를 무릅쓰고 길을 여쭙고자 합니다. 수행원을 놓치고 나니 이런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게 쉽지 않군요."

말투가 어째 쫌....? 게다가 수행원이라니.... 그러고 보니 퍽 입고 있는 옷도 고급스럽고 자세도 점잖은 것이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인 듯싶었다. 다만 꽤나 길치인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학교 공대가 첫 방문하는 이에게 자동으로 친절한 길안내가 가능할 정도의 간단한 구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로까지는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어떻게 길을 헤매면 이리로 오는 걸까. 여긴 공대 애들도 평소에 거의 안 오는 곳인데 말이다.

"혹시 이곳에 소속된 분이신지요."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안내를 부탁드릴 수 있겠군요. 방금 전의 ....... 흠흠, 사적인 시간을 계속 방해한 것과 안내해주신 것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저기, 혹시...."

"네?"

사람을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 초면에 꽤 실례되는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아까부터 이 아가씨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얼굴과 너무도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 녀석은 지금 이 아가씨에 비해서 머리카락은 훨씬 짧고 얼굴도 까무잡잡하고 표정도 훨씬 개구쟁이 같지만 말이다.

"혹시 마리..........?"

주저하며 한 이름을 꺼내자 그녀의 표정이 급변한다.

"마리를 알고 계시나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살아있죠? 밥은 잘 먹고 있답니까?"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데 "마리"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가씨는 대번에 흥분하여 내게 바짝 다가와 질문을 쏟아낸다. 내가 기겁하여 한발 뒤로 물러서자 그제야 자신의 흥분을 눈치 챈 듯 다시 헛기침을 하곤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마리의 지인이시군요. 저는 마리의 언니인 김리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 예. 마리의 선배인 최한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통성명을 한다. 명희는 이쪽을 외면하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나가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온화한 얼굴로 인사하며 떠나는 명희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평온해보였지만 나는 그 안에 자리 잡은 폭풍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명희를 먼저 보내고 리사를 안내하려고 과사 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등골이 살짝 오싹하다. 불식간에 몸을 부르르 떨자 곁에서 나란히 걷던 리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방금 전 애인분께는 본의 아니게 큰 결례를 저지른 거 같은데요... 괜찮으십니까?"

"아, 뭐... 괜찮겠지요. 하하핫...."

명희 이야기를 길게 하기는 좀 그래서 화제를 돌려보았다.

"그나저나 마리는 언니를 정말 닮았네요. 저는 처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쌍둥이인줄 알았어요."

"쌍둥이 맞습니다만...."

"에엑? 그...그런가요?"

나도 모르게 리사를 한번 더 쳐다보았다. 비록 얼굴이 쏙 닮았다고는 하나 말투며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에 당연히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언니 동생 사이인줄 알았던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마리는 초등학교 남학생의 분위기가 난다면 리사 쪽은 그런 초등학교 선생님 분위기랄까. 걷는 것도 꽤나 조신한 것이 정말 "참하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똑같은 얼굴이면서도 이렇게 사람 분위기가 다를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여기 마리가 있습니다."

그리 멀지않았기에 금방 과사에 도착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마리는 진호 선배와 무슨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마리를 불렀다.

"마리야. 네 언니 오셨는데?"

"엥? 언니야가 여긴 무신 일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눈을 껌뻑이고 있는 마리를 향해 리사가 뚜벅뚜벅 걸어간다. 갑자기 이 아가씨의 분위기가 변한다. 아까까지는 봄에 피는 꽃 같은 인상이었는데 방금 나를 스쳐지나갈 때는 흡사 살기 비슷한 기운마저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리의 앞에 우뚝 서서 바르르 떨며 말했다.

"무신 일.....? 니 지금 무신 일이냐고 했나?"

"응. 우짠 일로 여기에....."

"이... 이......... 이, 문디 가스나야!!!!!!!"

"어....언니야아?"

분위기 잘 못 읽고 천상 아이같이 굴던 마리도 그 순간 바짝 얼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던 리사의 폭풍 같은 방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기 모꼬? 니 자전거 타고 잠깐 둘러보고 온다 안 캈나! 그란 게 지금 며칠 째고? 집에는 연락도 읍꼬! 손꾸락이 쓱어 문드러짔나! 전화 한 통화하면 어디 니깐 년에 구멍이라도 나드나! 이기마 아주 디져뿌랐는지 우쨌는지 당최 소식도 없고 간데도 없고!! 오죽하마 내사마 미칬다고 예까지 빠득빠득 기어 올라가 이 문디 같은 가시나 찾는다고 니 지원했던 대학이라는 대학은 다 디비고 다녔겠나!! 이기 모꼬? 이기 당최 모냐 말이다! 으잉?! 입구녕 달렸으면 말해봐라! 언능 말해보라 카이! 니 미쳤제? 그제? 미칬다고 해라! 가시나가 안 미치고는 이리 뽀로롱뽀로롱 죽자고 돌아다니긋나! 그나, 안 그나!!! 앙?!!!!"

"..........."

"..........."

"..........."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가. 아닌가, 안 그런가. 아니. 뭐가 맞지. 음.... 뭐라고 대답을 해야 저 상황에서 마리가 리사에게 안 맞아 죽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말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기에 과사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 내놓은 리사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잃어버린 말을 찾지 못 했고 그 무겁고도 무서운 침묵을 깬 것은 마리였다.

"언니야. 미...안타. 내가 노느라 정신 팔려서 미처 연락을 못 했다. 함만 봐도."

말은 이렇게 했다만 꽤나 무심하게 말하는 투가 별로 크게 미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 저렇게 지옥의 원귀처럼 분노로 불타고 있는 리사가 저런 성의 없는 사과에 풀릴까 싶었다. 저 말투는 마치 부모님이 사다놓은 과자를 다 먹어버렸다고 미안해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그러나 모두로 하여금 침묵케 하고 그녀의 눈치만 보고 있게 만들어버린 리사는....

"그래? 그럼 반성하는 거지?"

하고, 아주 쿨하게 받아버렸다.

"응."

"알았어. 그럼 다음부터는 조심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라는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쥐어뜯거나 창문을 와장창 뚫고 뛰쳐나가버리고 싶을 지경으로 어이가 없었다. 뭐냐! 고작 저 정도 사과에 화가 풀릴 거면 대체 왜 화를 냈던 거야!!! 그것도 보통 화가 아니라 아주 그냥 주변에 보이는 모든 인간을 생으로 잘끈잘끈 씹어 삼킬 듯한 포스를 뿜어대는 분노를 말이다. 진호 선배를 비롯한 과사에 있던 다른 이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보아 나 말고도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마리와 리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보니 공대 앞에는 세워진 검정색 고급 세단이 보였다. 검정색 양복에 선글라스까지 낀 전형적인 보디가드 복장의 여자 수행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키가 아주 컸고, 머리도 아주 짧았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몸이 아주 다부지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뒷좌석에 올라타는 마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선배님요, 그럼 다음에 봐요."

"어, 그래. 조심해서 내려가."

리사도 꽤나 공손하게 인사를 해왔다.

"본의 아니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예. 조심해서 내려가십시오."

문이 닫히고 수행원이 운전석에 올라타자 세단은 지체 없이 출발했다. 뒷문 유리창이 열리고 마리가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드는 게 보여서 응대해주었다. 머리가 금세 쑥 들어가는 걸로 보아 언니에게 또 혼나는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나타나 뜬금없이 사라진 마리. 오는 것도 정말이지 특이하게 오더니 가는 것도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특이하게 떠나버렸다. 시끌시끌하던 녀석이 떠나버리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만 몇 걸음 걷다가 그 생각을 긴급하게 수정했다.

개강만 하면 다시 나타날 녀석이잖아. 저거. 개강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뒤통수를 긁적였다. 왠지 이번 학기는 학교 조용히 다니기 글렀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든다. 그나저나 올해 안에 입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마음 놓고 다른 준비도 시작 할 텐데...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학교에 나온 이유가 마리로 하여금 학교 구경 시켜줄려고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그 이유 자체가 증발해 버린 지금, 내게는 갑자기 시간이 남아버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는....

─────────────────────────────

1회차 플레이에서는 선택지가 하나만 제공됩니다.

1회차 엔딩을 감상한 후 또 다른 선택지가 열립니다.

─────────────────────────────

선택 : A. 집으로 돌아간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