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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다시 떴을 때, 몹시도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찌르르르르르- 찌르르르르르-
여전히 숙취가 가시지 않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몸이 무겁다. 몸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없다. 정확히는 왼팔이 몹시 무겁다. 고개를 들고 왼쪽을 바라보니 내 왼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있는 선영의 머리가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째려볼 때는 그렇게 무서운 여자였는데, 지금은 마치 아기처럼 곤하게 자고 있었다. 속눈썹이 아주 길었다.
멍청하게 쳐다보던 난 재빨리 나 자신에게 경고했다. 으윽. 이런 자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채권자님께서 일어나서 본다면 또 나의 귀중한 그곳을 자른다고 덤비겠지. 최대한 팔을 조심조심 빼내어 침대 밖으로 나온다. 그러는 와중에도 차임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골 아프게 시리.... 나는 짜증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현관에 대고 외쳤다.
"나가요, 나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며 현관문을 연다. 거기에는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완벽하게 잘 되어있는 내 옷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리고 몹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제나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 꺄악!! 변태!!!"
참나, 세상이 어찌되려고 어떤 놈의 변태가 신속하고 정확하며 깨끗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말세로다. 말세. 안 그래도 요새 좀 있으면 지구 망한다고 지하철역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놈들이 있던데 그 놈들이 설치는 이유가 있었구만. 그런 변태가 다 있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 오피스텔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그 때까지 덜 깬 수면에 해롱거리고 있던 나의 뇌를 일깨웠고 그제서야 그 놈의 신속, 정확, 깨끗한 변태가 누굴 가리키는 건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세탁한 옷을 배달 온 꼬마 아가씨 앞에서 알몸으로 나타난 녀석이라든가.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걸 모르는 놈이라든가. 암튼, 뭐 그런 놈 말이다.
"우왁!!!"
황급히 손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내 옷을 낚아채어 몸 앞을 가린다. 앞에 서 있는 꼬꼬마에게 이미 보일 것 다 보였다고는 하나 이제부터라도 가려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꼬마 아가씨, 눈을 가리려면 손가락을 착 붙여서 눈 전체를 가려야지 손가락이 그렇게 벌어져 있으면 눈이 전혀 안 가려지잖니!!
"죄...죄송합니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난데 앞에 서 있는 꼬마 숙녀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먼저 사과한다.
"아니요. 제가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 역시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이 년이 문을 못 닫게 한다.
"잠깐만요!"
왜! 더 보고 싶은 거냐? 그런 거냐!!
"네?"
한 손으로는 문손잡이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옷으로 전면을 가리느라 자세가 좀 어정쩡했다. 게다가 이 옷을 감싸고 있는 비닐 때문에 미끄러져서 제자리에 고정이 안 되고 자꾸 흘러내리려고 하는 바람에 내가 아주 미쳐버리겠다. 나 좀 빨리 들어가게 해줘! 아, 쫌!
"세탁비 안 주셨는데요?"
"에에?"
세탁비? 아, 세탁소에 옷을 맡기면 돈을 주어야 하는 건가? 살면서 세탁소에 옷 맡겨 본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이라 그런 훌륭한 제도가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았다. 그나저나 어떤 훌륭한 제도든 뭐든 간에 나 좀 빨리 안에 들어가게 해주고 하면 안 될까?
"저.... 일단 이 문을 닫고 제가 옷을 입은 다음에 돈을 찾아서 드리면 안 될까요?"
아직 추운 날씨인데다가 알몸인데도 불구하고 땀이 철철 날 것 같다. 사정조로 나오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처절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죄송하지만요, 그렇게 문을 닫고 다시 안 여는 분도 종종 있어서요. 되도록이면 지금 바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발을 문틈으로 스윽 집어넣는 모양새가 흡사 프로 수금꾼이로다. 너 세탁소 그만 다니고 사채 일수 받으러 다녀도 되겠구나. 아주 잘 할 것 같아. 그나저나 으갸아악!! 니가 그렇게 안쪽으로 자꾸 들이밀면 나랑 더 가까워지고 있잖아!! 여전히 미끄러져 내려가려는 옷들을 추스리느라 내 자세는 영 바르지 못한다. 황급히 돈을 찾아본다. 알몸 어딘가에 주머니가 달려있어서 거기서 돈을 꺼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러고 보니 내 지갑은 어디 있지? 소지품들은 아직 선영에게 받지 못 했는데?
"지금 뭐하는 거죠?"
서늘한 목소리. 잠이 덜 깬 목소리이긴 하지만 여전히 박력을 담고 있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선영이었다.
"아, 선영 씨! 저기, 이 분이 세탁비를 달라고 하시는데.... 으악!"
뒤를 돌아다본 나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옷을 죄다 떨어뜨리고 다시 한 번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변태가 될 뻔 했다. 당신은 아까 평상복으로 잠들지 않았었습니까? 어째서 지금은 브라와 팬티 차림입니까? 그나저나 브라와 팬티도 검정색 일색이라니... 겉과 속이 참 일관된 분이군요. 선영은 자신의 차림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현관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음, 양씨 아저씨에게는 제가 매달 말일에 정산해서 드리고 있는데 지금 따로 돈을 받아가야 하나요? 사장님이 꼭 지금 받아오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닌데.... 아, 혹시 장부 손님이세요?"
선영의 설명을 들은 수금원은 그제서야 발을 빼내고 뒤로 한 발 물러선다. 이제야 녀석을 제대로 관찰한다. 얼굴은 귀여운 편이고 몹시도 똘망똘망하게 생겼다. 나이는 이제 열 대여섯 살 정도 먹었을까 말까 싶은 쪼끄만 한 녀석이었다. 유진이보다도 키가 작고 더 앳되 보이는 얼굴이지만 씩씩한 표정에 넘쳐흐르는 기운과 씩씩한 박력에서 어쩐지 유진이보다도 언니뻘일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녀석은 문에서 완전히 물러나 다시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에?"
그러고는 나에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까지 외치고 쏜살같이 사라진다. 뭘 수고하고 어떤 걸 화이팅하라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닫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옷이 왔군요. 얼른 입고 나가세요."
"아, 예."
쭈뼛거리며 옷을 입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시츄에이션이 누가 보면 딱 전형적인 "그 일" 직후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몸의 남자와 가장 기본적인 속옷만 걸친 여자라....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군. 녀석이 나에게 "수고"하라 그러고, "화이팅"이라고 외친 이유는 그 뭐시다냐. 좀 더 열심히 "하란" 말인가? 선영을 상대로? 으으.... 어쩐지 어색하군. 아무리 그녀와 한 침대에서 이런 차림으로 같이 잤다고는 하나 성욕보다는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나로서는 그런 망상을 지워버린다.
내가 옷을 입는 동안 선영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에서 내 소지품도 꺼내어 챙겨준다. 그녀는 속옷 바람인데도 내 앞에서 전혀 거리낌이 없다.
"빠트린 거 없나 확인하세요. 괜히 나중에 당신 물건을 빼돌렸네 어쩌네 하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소지품이라고 해봐야 지갑과 삐삐가 전부다. 확인이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전부 다 그대로였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지갑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내가 소지하고 다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들어있었다. 원래 내 지갑은 동전 몇 개 뿐이었는데 말이다. 이 푸르디푸른 세종대왕님들은 대체 뉘신지.
"저, 여기 제 돈이 아닌 게 들어 있는데요?"
그러나 나의 질문은 받은 선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관심을 잃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졸린 기운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 나른하게 대답한다.
"착수금이에요. 그걸로 교재 준비하고 다른 필요한 거 챙기세요. 하아암.... 그리고 남자가 그렇게 너무 빈 지갑으로 다니는 것도 보기 안 좋아요..... 그러면..... 다음에....."
"아, 예."
대체 누가 보기에 안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왕 주신 돈이니 잘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침대로 들어간 그녀가 옆에 있는 커다란 곰돌이를 끌어다가 품에 안는 걸 못 본 체 하기로 했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기분이다. 다행히 현관이 오토락이라서 따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조용히 빠져나온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양 옆으로 똑같은 모양의 문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헷갈리지 않도록 선영의 집 문에 적힌 번호를 외어둔다.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다. 곧 이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간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 건물 밖에서 왼쪽으로 가야되나 오른쪽으로 가야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가까운 전철역이라도 물어볼까 싶어 몸을 돌렸다가 나도 모르게 우뚝 서고 만다.
"아, 안녕하세요."
"....아, 예에...."
배달을 아직 덜 마친 건지... 한 손에 옷가지 몇 개를 들고 있는 아까 그 소녀와 딱 마주친다. 그쪽에서 인사를 먼저 해오기에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인사를 받아준다. 살짝 미소마저 지은 채 나를 아래부터 위로 훑어보는 녀석의 흐뭇한 표정은 어쩐지 굴욕적이다.
"혹시 죄송한데요, 길 좀 물어도 될까요?"
굴욕은 굴욕이고 지금 당장은 길 안내가 급했다.
"예. 물어보세요."
"여기 가까운 전철역이 어디죠?"
"아, 전철역이요?"
녀석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한쪽 방향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전화국 지나서요, 좀만 더 가시면 사거리가 있거든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주욱 걸어가시면 전철역이 있어요. 4호선이요."
"아, 감사합니다."
전철역 이름을 듣고 나니 여기가 어딘지 파악되었다. 유진이네 집 바로 근처였다. 감사를 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등 뒤로 어떤 시선이 날아와 꽂히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저 녀석, 나이도 어린 녀석이 말이다. 아까 선영을 볼 때는 일종의 경외마저 담고는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나를 볼 때는 눈을 제대로 가리지도 않았고....
그러고 보니 선영의 가슴도 은근히 볼륨이 있었다. 항상 재킷 같은 걸 입고 있는데다가 등빨이 좀 있어서 잘 몰랐는데 말이다. 하프 컵으로 감싸인 젖의 푸근함이나 솟아오른 모양새가 무척이나 만져보고 싶어지는 타입이었......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다. 잘못 처신하면 자지가 잘리는데 손모가지까지 잘리고 싶지 않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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