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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떴을 때, 효진은 한창 게임 삼매경이었다. 거품을 입으로 쏘아 적을 잡아내는 공룡이 뿌잉뿌잉 소리를 내며 점프 하고 있었다. 조이패드를 손에 들고 이얍이얍! 기합까지 넣어가며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효진의 차림새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고 위로는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있는데 그녀에게는 맞지 않게 펑퍼짐한 모양새로 보아 아무래도 내 티셔츠 같다. 하긴 그녀가 여기에 올 때 무슨 짐 같은 걸 가지고 온 것도 아니니까. 등 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건성으로 묻는다.
"일어났어?"
"어....."
어젯밤, 그녀와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앞으로도 하고 뒤로도 하고 옆으로도 하고.... 콘돔이 다섯 개들이 한 박스뿐이라서 몹시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효진은 지난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난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내게 말을 건넨다.
"밥 먹으러 가야지. 어차피 너네 집에는 밥 없다면서?"
"우리 집에 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냐? 아... 지혜한테 들었어?"
"그래. 크큭. 아예 그릇이 없다면서? 심하다, 진짜. 집에서 라면도 안 끓여먹냐?"
"나... 라면도 잘 못 끓여."
"뭐? 푸하하하하~"
물 맞추는 게 얼마나 고되고 힘들며 난이도 있는 일인지 모르는 녀석이로군. 그나저나 이제는 지혜 이름을 쉽게 말할 수 있구나.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 생각만으로 가슴이 먹먹했는데. 나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옷을 입으며 말했다.
"나가자. 근처에 기사식당 있는데 나 항상 거기서 밥 먹어."
"니가 사는 거지?"
"그러지, 뭐."
효진은 자기 바지를 찾아 입더니 그대로 나선다. 위에는 내 티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 말이다. 셔츠의 안쪽은 아무래도 아무것도 안 입은 것 같다. 봉긋한 가슴, 그 정점에 무언가 살짝 더 도드라진 걸 본인은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은데 내가 괜히 지적하는 것도 우습고 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효진의 성격은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몸매만큼이나.
우리는 그렇게 집에서 나가 느지막이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효진은 집에 가봐야겠다며 식당에서 나와 헤어졌다. 효진은 정말이지, 뭐랄까. 거침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나와 잤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나에게 얽매이거나 반한 것 같은 태도가 아니다. 그냥 하룻밤 친한 친구랑 잘 놀았다는 정도? 그녀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녀가 내 불알친구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녀는 불알이 안 달려있지만 말이다.
노브라 차림의 효진을 배웅하고 몸을 돌렸다. 고개를 살짝 움직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어젯밤의 격렬한 운동 때문인지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이다. 그러고 보니 목욕을 다녀온 지가 제법된 거 같다.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목욕탕으로 향한다. 다음 주면 개강인데 때 좀 벗겨야 하지 않겠는가. 늘 가던 목욕탕에 가서 노곤노곤해질 때까지 탕에서 몸을 푼다. 수면실에서도 한숨 푹 잔다.
잘 싸고 잘 먹고 잘 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이란 이렇게 단순한 존재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앞이 좀 소란스럽다.
"글게 뭔 놈의 가구를 일케 싸매고 왔노?"
"이렇게 좁을지 몰랐지."
"하이고. 내가 언니야에게 말 안 했드나."
"아이 참, 이걸 어쩌지..."
똑같은 얼굴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한쪽이 좀 까무잡잡하고 커트머리, 다른 한쪽은 긴 생머리에 약간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졌다. 커트머리 쪽은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생머리 쪽은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구면이다.
"으짤 수 없다. 일단 저 육자 농은 내려 보내고 침대도 하나만 들이라. 글면 좀 되겠네."
"그럴까?"
이사를 온 모양이다. 그런데 좀 특이하다면 특이하달까. 어째 한 인상하는 인부들이 좀 많다. 덩치도 지나치게 좋고... 요새는 인부들이 저런 검은 정장을 입고 짐을 나른단 말인가? 어쩐지 저 사람들이 어두운 골목 같은데 한 무리로 모여 있으면 그쪽 골목으로 가기 싫은 기분이 들겠는 걸? 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들 중 한 명이 날 알아보고 펄쩍 뛰었다.
"앗~ 선배님요~ 안녕하십니꺼."
"어? 어.... 마리구나."
그렇다. 지금 빌라 앞 입구에서 옥식각신 하고 있던 두 여자는 마리와 리사였다. 덩치 좋은 인부들에 쫄아서 어지간하면 시선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는데 나를 보며 펄쩍 뛰어 인사를 하는 마리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나를 본 리사도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 때 뵌 마리 선배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허리를 굽혀 인사를 마주한다. 기분탓이려나. 지금 저 덩치 좋은 인부들이 전부 나를 보는 것 같은데....? 그나마 익숙한 마리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다.
"마리, 너 여기 이사 오는 거야?"
"예에. 여기 202호라예."
"202호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호수인데? 어라?
"지혜 언니가 미리 연락 해줬다 안캅니까. 언니 결혼 때문에 어제 이사 나갔다믄서요? 맞지예?"
지혜가? ... 나름대로 그녀도 주변 정리라면 주변 정리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에게 그런 서비스를 해주었던 것도 나에 대한 배려였던 걸까. 마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앞뒤가 정리되었다. 그녀가 지혜네서 머물던 동안 학교 다니며 살 집 구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이사 갈 날짜를 말해주면서 이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원래 2월말에는 이미 나갈 만큼 다 나가서 학교 가까운 앞에서 집도 절도 구하기 힘들다 카던데 지혜 언니 덕분에 윽수로 편하게 방 구했심더."
"아, 그건 그렇지."
학교 앞에서 집구하기 가장 힘든 시기인 건 맞다. 지혜는 이미 그때부터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알고 나니 속이 좀 쓰렸다. 조그만 더 일찍 말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고개를 한 번 흔들어 털고 애써 그녀에 대한 원망을 날려 보낸다.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리사는 인부들을 지휘하여 이삿짐을 마저 정리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인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지시를 내리는 걸 봐서 원래 다들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게다가 인부들 태도가 뭐랄까. 지나치게 공손하다고나 할까. 마리에게 묻는다.
"혹시 지금 일하는 분들 다 아는 분들이니?"
"아저씨들이예? 하모요. 다 알죠. 다 가족인데~"
"가족?"
어쩐지 가족이란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랑은 좀 다른 거 같은 기분인데... 게다가 예전에 보았던 그 검은 정장 입은 키 큰 여자가 내려오더니 리사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으음. 마리와 리사는 아무래도 보통 집안의 영애들이 아닌 모양이다. 마리와 리사는 검은 정장의 여자를 예린 언니라고 불렀다. 리사와 예린은 한참동안 집안 물건 배치와 집안 이것저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굳이 여기 계속 서 있을 필요가 없어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리가 나를 부른다.
"선배님요, 점심 드셨는교?"
"아니, 아직인데."
"글면 저희랑 같이 하시지예."
"응?"
거절하고 싶었다. 왠지 모르지만 저 사람들이랑 먹다가는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옆이 있던 리사도 거들며 나에게 권했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 했다. 잠시 후, 나는 짜장면 그릇을 손에 들고 마리네 집 거실에 앉아있게 된다. 불과 며칠 전에는 지혜네 집이었는데 이제는 마리가 살게 된다. 기분이 미묘하다.
"거쪽이 대학생인교?"
"아? 예. 그렇습니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인부가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키는 땅딸막한데 어깨 넓이와 두께는 나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이다.
"우리거튼 사람덜은 공부랑은 원체 담을 쌓아놔서 그런지 대학생이라니까 신기하네. 우리도 핵교는 많이 들갔지만 대학생은 못 됐는디."
별로 웃긴 말도 아닌데 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들 웃는다. 그나저나 방금 말한 핵교라는 곳이 학교 맞겠지? 근데 내가 아는 그 학교가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이 분들은 뭐하는 분들이라나.
마리와 리사, 예린을 빼고는 전부 40대 아저씨들이었는데 전부해서 일곱 명이었다. 그닥 크지 않은 집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들어차있으니 자리가 몹시도 빽빽했다. 마리와 리사, 예린은 부엌에 있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고 나와 인부들은 거실 바닥에 신문지 하나를 깔아두고 각각 손에 짜장면 그릇을 들고 있었다.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연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몸이 저절로 배배 꼬일 지경이다.
"마리 아가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교?"
"아..... 우연히 학교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제 후배더라구요. 그래서...."
"아직 핵교 시작도 안 했는디 워째 만났는가?"
"마리가 자전거 타고 학교에 왔던데요."
내 대답을 듣자 저희들끼리 또 의견을 교환한다.
"자전거면 그때 말인가?"
"하모. 리사 아가씨 음청 훼까닥 해가 완전 디비뿐 때 그때 맞는갑다."
"그 참에 난리도 아니었제. 좀만 더 있었으면 예린이가 소집령 내린다고 준비하라 캈는데."
짜장면은 다 먹었다만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좁은 자리에 밀집해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나에게 계속 쏟아지는 질문 때문이다.
"여긴 으쩐 일인교?"
"네? 무슨 말씀인지...."
"야야, 말 좀 살살 해도. 느무 씨게 말하면 여거 서울 사람들은 몬 알아듣는다 안 카나. 근까예. 야 말은 우리 아가씨 일루 이사오는지는 어째 알고 예 왔나 묻는 겁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한다.
"저도 여기 사는데요."
"으응?"
갑자기 맞은 편 사내의 눈빛이 빛난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뭔 소린교? 여가, 여 집에 같이 사는 거라고? 마리 아가씨랑?"
"아, 아뇨. 이 집이 아니라 여기 맞은편이요. 전 여기 빌라 201호에 사는데요."
손을 들어 문 밖을 가리키자 이번에는 지들끼리의 토론이 한층 더 격렬해진다.
"이 머시기가 맞나뿌다."
"근까. 안 그래도 형님이 집 따로 구해 놨다 카는데 마리 아가씨가 고집 부렸다 내 안 카나. 지 갈 집 따로 있다구루."
"글면 그게 진짜 이 눔아 때문인가?"
"근가 보네. 마리 아가씨가 이야기 하는 폼이랑 딱이네.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연신 나를 뜯어본다. 눈빛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난 이미 저 비어있는 탕수육 그릇처럼 텅텅 빈 신세가 될 지경이다. 내가 쫄아있다는 건 눈치 챘는지 맞은 편 사내가 좌중을 조용히 시킨다.
"다덜 입 다물어. 괜시리 입방아 찧다가 진도 미리 나가지 말고."
"예에."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나머지 손으로 손등을 덮는다.
"잘 해보드라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따, 이 자식 몬체 하는 거 보소."
그러자 다들 와하하하고 웃는다. 사내는 내 팔뚝을 당겨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는다.
"물론 우리 마리 아가씨가 딸아치고는 원체 억셔가 델꾸 있기는 좀 빡시겠지만서두 사람 하나는 진국이니까 진짜 잘 해보소. 대학물까지 먹었으니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구만."
의미의 절반도 못 알아들을 그의 말에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먼저 대답한다.
"내가 어때서예?"
"어이쿠, 마리 아가씨. 식사 다 하셨는교?"
갑자기 거실에 등장한 마리에 다들 껌뻑 죽는 시늉을 한다. 그렇다고 정말 죽었다는 건 아니고...
"진수 아저씨 목소리 하도 커가 제서도 다 들렸심더. 나보고 억세다 켔지요?"
내 팔을 잡고 있던 진수라는 사내가 난처한 얼굴로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마리 억신거 뭐 하루 이틀인가~."
마리는 다시 발끈했지만 이미 다들 웃어넘겨 버린 후라 혼자 발만 동동 구르고 만다. 식사를 모두 치운 후, 청소가 시작된다. 밥 얻어먹은 값을 하려고 도우려고 하였으나 이미 손이 많다며 나를 밖으로 밀어낸다. 그대로 서 있기도 뻘줌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후, 모두들 돌아간다고 기별이 왔다. 인사하러 밖으로 나간다. 커다란 봉고 하나에 아저씨들이 모두 올라 타 있었다. 리사가 운전사에게 당부를 하고 있었다.
"운전 조심하세요. 괜히 짭새 걸려서 시비 만들지 마시구요."
...........늘 공손하던 그녀의 말에서 뭔가 하나 툭 튀어나온 느낌이긴 한데 그냥 넘어가자. 봉고가 출발하고 이제 여자들이랑 나만 남았다. 리사는 그렇다 치고 저 예린이라는 키 큰 여자도 같이 사는 건가?
"선배도 욕 봤심더. 정신 없었지예?"
"어? 내가 뭘 한 게 있나. 그냥 밥만 얻어먹었지."
"굳이 안 와도 된다 캤는데도 아저씨들이 하도 을러메서 같이 올라왔지라. 언니는 별 씰데없는 짐만 바리바리 싸오고."
그러자 리사가 반론한다.
"장농은 그렇다 치고 옷가지가 어떻게 쓸데없어? 넌 여기서도 맨날 츄리닝만 입고 다닐 거야?"
"하이고. 까짓 옷이야 파는 데 널렸는데 암데나 가서 사면 되지. 내 말 안 하드나. 서울에 명동이라는데 가면 옷가게가 천지삐까리다. 거 뭐냐. 동대문도 그렇고."
"그래?"
옷가게가 많다는 말에 리사가 급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마리가 내 팔뚝을 끌어안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글면 우리 명동이나 갈까여? 언니 어때? 괜찮지?"
"음.... 괜찮을 것 같기도...."
나는 팔을 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잘 다녀와. 나는 이만...."
그러자 마리가 다시 팔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예린 언니는 서울에 별로 안 와봐가 길 잘 모른다 아입니까. 어제 아레도 서울에서 운전할 거 걱정하드만."
리사의 등 뒤에 서 있던 예린이 살짝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냐. 이 세 여자가 한통속이 되어서는.... 결국 나는 길안내를 위해 예린이 운전하는 검정색 대형 세단의 조수석에 올라타게 된다. 아까 들어올 때 본 그 비싼 차구나. 어쩐지 싸구려 월세방 빌라 주차장에 세워두기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차라고 생각했는데 얘네 차였구나.
안전띠를 메면서 불현듯 선영의 운전이 떠올라 퍼뜩 긴장했지만 예린의 운전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승차감이 굉장히 편안하여 대형 세단이 괜히 비싼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뒷좌석에서는 마리가 지난 번 서울에 왔었을 때 구경했던 일에 대해 열심히 조잘거리고 있었고 리사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명동에 도착하고 쌍둥이의 신나는 쇼핑리사이틀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주로 매장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씩 마리가 "이거 어때 보여요?"라고 묻는 거에 건성으로 대답이나 해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린과 계속 서 있게 되었다. 키가 꽤 큰 그녀인지라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다. 가만히 있기도 멋쩍고 해서 말을 붙여본다.
"예린 씨는 옷 안 사나요?"
"제 옷은 충분합니다."
말투는 몹시 건조했다. 불친절하다는 느낌보다는 사무적이라는 느낌?
"그래도 구경도 좀 하고 그러시지..."
예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이옷 저 옷을 입어보는 마리와 리사를 흘깃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옷을 갈아입는 건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죠. 제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아가씨들은 무방비가 됩니다. 아가씨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 예...."
그러고 보니 예린은 마치 문 입구를 방어하듯이, 그러면서도 문을 막지 않는 범위에서 살짝 비껴 서 있었다. 검은 색 재킷에 검은 색 정장바지..... 딱 케빈 코스트너의 보디가드에 나옴직한 복장이다. 복장에 어울리는 행동이로군.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건 왠지 그녀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 같아 나도 조용히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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