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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선영을 과외하기로 한 첫 날이다. 괜히 일찍 눈이 떠진다. 그녀와 약속한 시각은 오후 1시였는데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문제집과 시험지 등을 챙겼다. 그러고도 할 일이 없어 가볍게 운동이나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후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해진 느낌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문 앞에서 가볍게 팔을 잡아당기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맞은 편 문이 열린다. 아는 얼굴이 나올 테니 가볍게 인사나 하자는 생각에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으헉!"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내 망막에는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꽃자수 무늬가 아른거리고 있다.
"어머,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경쾌하고도 예의바른 리사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뒤로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리....리사 씨... 옷....옷이요!"
"네? 제 옷이 왜....? 엄맛!!"
쾅-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닫힌다. 닫힌 문 너머로 "꺄악-"라든가 "엄마, 나 몰라!"라든가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라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리사 씨. 꽤나 얌전하고 차분한 분 인줄 알았는데 속옷 차림으로 신문을 가지러 나올 정도의 대단한 덤벙거림을 갖추고 계시군요. 덕분에 아침부터 좋은 구경 잘 했습니다. 마리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몸매를 갖추셨.... 흠흠.... 그러고 보니 불과 며칠 전, 선영의 오피스텔에서 나도 비슷한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구나. 남 말할 때가 아니군.
그나저나 남자가 저러고 나온다면 정말이지 안구테러겠지만 저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여성이 해준다면야 정말이지 쌩쓰갓. 잇츠프라이데이로다. 왠지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했는데 문이 잠겨있는 선영의 오피스텔 앞에서 30분째 기다리면서 아침의 생각을 수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인기척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집에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선영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저기, 유진아. 혹시 선영 씨 거기 있니?"
"언니는 왜 찾죠?"
"아니, 음, 그게.... 그러게, 내가 왜 찾더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아도 내가 딱히 선영을 찾을만한 이유가 없다. 과외를 해야 하는데 선영 씨가 집에 없네, 라고 말했다가는 비밀 엄수 계약 사항을 위반한 선생에 대한 분노에 휩싸인 선영에게 잘리겠지. 과외를 잘리는 것뿐만 아니라 소중한 나의 물건도...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혹시나 싶어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40분이 넘어간다. 이만큼이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어 한 쪽을 찢었다. 거기에 기다리다가 돌아간다고 써놓고 종이를 접어 문틈에 끼워두었다. 들고 온 문제집이랑 시험지도 두고 갈까 생각했는데 이건 아무래도 직접 건네주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놓고 돌아서는데 저기 복도 끝에서 누군가 온다. 혹시나 싶어서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썬 캡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검은 색 후드를 깊이 눌러 쓴데다가 위 아래 검정색의 운동복으로 쫙 차려입은 여자였다. 저승사자인 줄 알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 특유의 복장센스에서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분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조명이 켜진 곳이라 다행이지 만약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저 모습을 마주쳤다가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서...선영 씨?"
혹시나 싶어서 확인 차 물어본다. 블랙맨, 아니 블랙 우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썬 캡을 밀어 올렸다. 온통 땀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땀복이다. 이 여자는 무슨 권투선수가 체중감량 하듯이 운동하냐. 선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묻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죠?"
"어쩐 일은요.... 오늘부터 과외 한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막아선다.
"옷 갈아입고 씻을 동안만 밖에 있도록 하세요."
"예?"
"설마 제 옷 갈아입는 걸 보고 싶다는 건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난다. 눈앞에서 문이 다시 닫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복도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게 되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시는 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혼자서 툴툴거리는 거 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메모 하느라 내려두었던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문 앞을 서성인다. 그 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 또 나타난다. 젠장. 아는 얼굴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 예...."
손에 세탁물을 들고 있는 여자아이. 얼마 전 바로 이 장소에서 알몸을 한 채로 마주쳤던 그 녀석이다. 입가에 살짝 미소마저 띄운 채로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다. 모르는 얼굴도 아니고 인사를 무시할 수도 없어 인사를 받아준다. 바로 그 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면서 선영이 얼굴을 내민다.
"들어오세요. 샤워 끝났습니다."
"........예에."
그녀 나름대로 빨리 한다고 머리도 채 말리지 않고 나온 것이겠지만.... 안 그래도 모종의 행위에 대한 망상을 담은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어린 아해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대체 어떤 생각을 더 하겠습니까? 쭈뼛거리며 선영의 방으로 들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아까 그 소녀 쪽을 바라본다. 이쪽을 보고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녀석이 예의 그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입모양으로 외친다. '오늘도 힘내세요.'
아아... 저 녀석은 대체 날 뭐로 생각하려나. 생각만 해도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다.
"왜 그러고 계시죠? 빨리 앉으세요."
"아, 예."
맨 정신에 다시 돌아온 선영의 방은, 뭐랄까. 소녀의 방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그녀가 소녀이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침대 위를 비롯한 곳곳에 놓인 곰 인형부터 시작해서 액자라든가 시계라든가 인테리어 소품치고 꽃무늬가 안 들어간 거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냄새도 굉장히 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라 방 전체의 느낌이 부드럽다. 방 한켠에 놓인 접이식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준비해온 시험지를 꺼내었다.
"오늘은 일단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대로."
"네."
옅은 베이지색 짧은 반바지에 흰 색 면티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도 그렇고... 그나저나 얇은 면티 입으시면서 속옷은 검정색으로 입으시면 그대로 비쳐 보이잖아요. 으음.... 시선을 책상위로 고정한다.
"선영 씨 사정은 이미 들었으니까요... 중2 과정 중에서 핵심 되는 몇 군데만 뽑아서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전부 주관식이구요, 나중에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다시 배우는 부분들이니까 신경 써서 풀어주세요."
"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문제가 골고루 섞인 시험지를 그녀 앞으로 내민다. 손목시계를 풀어 그녀 앞에 놓아둔다.
"이건 뭐죠?"
"일단은 시험인데.... 시간 제한입니다. 전체 스무 문제이구요, 사십분 이내로 풀어주세요."
"굉장히 사무적이네요."
"일이니까요."
선영은 별 다른 불평을 하지 않고 잠자코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나는 별다르게 할 일이 없어 방을 둘러보다가 결국은 다시 선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에 든 볼펜으로 시험지를 끄적거린다.
그녀는 왼손잡이였다. 고개를 갸웃하다가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또 적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다시 또 고민에 빠지고.... 거꾸로 보는 거라 잘 보이진 않지만 대충 눈여겨보니 국어문제는 잘 하는 것 같은데 수학과 영어에서 고민하고 있다. 과학 쪽은 아직 시작을 안 했다. 시험지에 쓰인 그녀 글씨를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그녀가 손으로 시험지를 슬쩍 가린다.
"남의 시험지는 왜 보죠?"
"에?"
시험지에서 고개를 들자 그녀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항상 짙은 눈 화장을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처럼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참 예쁜 얼굴이다. 선한 인상이고, 그 중에서도 눈매가 참 곱다. 이런 여자가 화장을 할 때 일부러 화나 보이는 것 같은 얼굴을 왜 만드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남의 시험지는 왜 보시냐구요. 컨닝하세요?"
"컨닝이라뇨... 제가 낸 문제인데요."
"보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깐."
"넹...."
어차피 이따 채점할 때는 제가 샅샅이 읽게 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괜히 화를 돋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한참 문제를 풀던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옆 화장대에서 뭔가를 꺼내온다.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그것을 얼굴에 썼다. 안경이었다.
"아... 원래 안경 쓰세요?"
"예."
"평소엔 안 쓰시나봐요?"
내 질문에 선영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이내 다시 시험지로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대답한다.
"별로 눈여겨 볼 것들이 없으니까요. 대충 봐도 되는 것들이죠. 세상에 가득한 것들은."
"...........네."
더 물어보았다가는 예의 그 "남성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단어"가 나올 것 같아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가방에서 이번 학기에 쓸 교재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수업교재로 번역서를 쓰는 교수님은 대체 언제쯤 만나게 될까.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원서를 읽다보니 내용은 대충 패쓰고 수식이랑 도표만 읽게 된다. 끄응. 그렇게 한 사람은 문제에 고민하고 또 한 사람은 원서에 고전하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 시계를 보고 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은 나는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 씨, 1분 남았습니다."
"............"
"다 푸셨어요?"
"아 좀, 조용히 좀 해봐요. 아직 쪼끔 남았단 말이에요."
쪼끔입니까... 그게... 시계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종료를 선언하고 시험지를 가져가려고 하자 선영이 막는다.
"5분만 더 주면 안 돼요?"
"5분이면 남은 거 다 풀 수 있어요?"
"............"
대답을 못 한다. 가져오던 시험지를 마저 가져온다. 선영의 표정이 전에 없이 풀 죽은 표정이 된다. 약간의 고소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채점을 시작한다.
"으음.... 으음....."
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나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점수를 따로 불러줄 것도 없다. 이미 채점과정을 보고 있던 선영이니까. 내가 빗금을 칠 때마다 "아, 그거 원래는 아는 건데!" 이러면서 안타까운 외침을 지르던 선영이었으니까 모든 채점이 끝나고 지금 따로 이의제기도 못 하고 잠자코 있었다.
"저, 선영 씨....?"
"됐어요!"
"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든지, 암튼 됐어요! 절대 말하지 마요!"
앞으로의 진도와 수업방향을 말하려던 내 입은 그렇게 봉해진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흐른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다 보니 선영의 어깨가 들썩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 선영 씨... 울어요?"
".......흐어어엉....."
그때까지 소리 죽여 울다가 나에게 들키고 나니 소리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걸까. 안경을 벗고 소리 높여 꺼이꺼이 운다. 난감하다. 대체 이 여자는 내 앞에서 지금 몇 번째 우는 거야?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했으나 없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 여자 우는 거 달래려고 건네고 아직 못 돌려받았는데.
"문제 좀 못 풀었다고 울기까지 하세요? 울지 마세요....."
화장대에 곽티슈가 보이기에 통째로 들고 와서 그녀에게 몇 장 뽑아 건넨다. 그걸로 눈물을 닦아낸 그녀는 잠시 후, 진정했다.
"역시.... 무리일려나요. 나 같은 계집 따위가 공부라니...."
"아니, 뭐 공부를 대단한 사람들이 하나요. 다들 하는 건데요."
"다들 하는 그것도 안 하니까 이 모양이잖아요."
다시 또 울 태세다. 아.... 진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 정도로 변하는 건 유죄 맞아! 평소처럼 의연하지 못 하고 왜 이러지. 좋은 말을 여러 가지로 동원하여 간신히 달랜다. 한참 어르고 달래자 선영의 마음이 약간 진정된 것 같았다.
".....그럼 나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 지금은 말 그대로 시작하는 거니까요. 지금부터 잘 하시면 되죠."
"......크흠. 알았어요. 그 말 믿어보죠."
평소의 날카로운 선영으로 돌아오는 데는 꽤 오래 걸렸다. 그제야 나는 다음 수업부터의 진도와 일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고서 선영의 집을 나섰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스케줄은 유진의 과외였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다. 선영의 집에서 유진네 까지는 꽤나 가까운 편이었고 두 과외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에 선영네서 나와 바로 유진네로 가기에는 시간이 좀 그랬다. 결국 나는 유진이네 아파트 앞에 있는 상가 커피숍에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여자 점원 혼자 있는 커피숍이라 조용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받아들고 창가 자리에 앉아 마시면서 아까 선영이 풀었던 시험지를 다시 들여다본다.
"끄응...."
영어는 뭐 반타작이고... 그럭저럭이고 국어는 그나마 거의 다 잘 풀었는데 수학, 과학이 문제였다. 과학은 용어 자체를 모르는 것 같고 수학은 전개 과정이 죄다 틀렸다. 선영의 공부 목표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는 이과 쪽으로 갈 거라던데 이렇게 수학 과학 몰라서야 유진에게 "언니가 가르쳐 줄게" 할 수 있으려나.
"뭐하세요?"
".........으악!"
유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쑥 유진이 옆에 다가와 말을 거니 놀랄 수밖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교복을 입은 유진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질문은 제가 먼저 했는데요? 아저씨야 말로 여기서 뭐해요?"
언제나 그렇듯 말투며 질문이 또릿또릿하다. 그나저나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교복인데....
"너 과외 가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말이야.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었어."
"흐음.... 다음부터는 일찍 오면 온다고 연락하고 그냥 그대로 오셔도 되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유진은 의자를 끌어다가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뭐예요, 이건?"
"어? 그게...."
아뿔싸. 선영의 시험지가 유진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유진은 시험지를 대충 훑어보더니 나를 돌아보고 묻는다.
"나 말고 또 과외 하는 애 있어요?"
"어? 어...."
애는 아니지만, 암튼, 있지.
"여자앤가요?"
"어? 어....."
여자는 맞지만, 일단 애....는 아니라니까.
"이뻐요?"
"어? 어....."
평소에는 그냥 무서운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화장도 안 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 수수하고 예뻐 보였다. 안경을 쓰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더니 유진이 인상을 팍 쓴다.
"문제를 보니 지금 중2쯤 되는 모양인데, 역시 남자들이란..."
"남자들이란 뭐?"
"그저 어린 여자만 보면 헤벌레 한다고요. 언니들 말하는 거 틀린 거 하나 없네."
툴툴거리면서 시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유진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다른 여자들이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뭐 첨 듣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제 고등학교 들어가는 니가 할 소리는 아니지!
"게다가 공부도 엄청 못 하네. 이게 뭐야, 다 틀렸잖아요."
"아, 그건 그 애가 이제 공부 시작하는 거라..."
졸지에 선영이 애가 되어 버렸다.
"쳇. 보나마나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꾸미기만 하는 그런 골빈 애가 분명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그 골빈 애가 너한테 "언니가 가르쳐 줄게"하려고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만.... 참기로 했다.
"이 커피 안 마셔요?"
"응? 커피?"
내가 멍하니 있는 틈에 유진이 이번에는 내 앞에 놓여있던 커피 머그잔을 끌어 가져간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내 물건에 껄떡대는 거야.
"제가 먹어도 되죠?"
.....라는 질문을 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자기가 홀짝 마셔버린다. 그리고 비어버린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자기가 먼저 일어난다.
"커피 다 드셨죠? 그럼 얼른 들어가서 과외 하시죠."
"........그래."
남의 커피를 냅다 다 마셔버린 유진이보고 커피 값을 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내가 치른다. 그리고 유진이를 따라가 늘 하던 대로 "과외"를 했다.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선영과 유진, 이렇게 두 여자에게 시달리게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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