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4화 (3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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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

예전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느라 맞은편에 있는 마리가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마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선배님요, 여기 마음에 안 드시나예?"

"아, 아냐. 그냥 좀...."

황급히 변명하지만 마리는 이미 침울해져 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괜히 왔나보네예."

"아냐. 아냐. 너 때문은 아니고.... 그냥 좀 그랬어. 이제는 괜찮아."

애써 표정을 펴고 점원을 부른다. 뭐가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어차피 여길 오자고 한 게 마리였으니까 그녀에게 주문을 일임한다. 마리는 나에게 정말 아무거나 시켜도 되냐고 거듭 확인하고는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주문을 한다.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돌아가고 나자 자기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한마디 보탠다.

"아까 그분 땜에 그러신 가여?"

아니라고 부정할까 싶었다. 결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레기와 같은 과에서 남은 학교생활을 보내야 하는 마리에게도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 없는데서 이야기하는 건 뒷담화 같아서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까 그 선배는 좀 그래. 너도 될 수 있으면 그 선배랑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하렴."

"예."

"특히 괜히 친하게 굴거나 단둘이 있자고 하면 절대로 응하지 마. 알았지?"

"그 정도임니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리는 자못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 따라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러냐고 자세하게 물어오면 어쩌나 걱정되어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수업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까 이야기하던 최 교수님 수업에서의 주의점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때 마침 가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그쪽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

리사와 예린이었다. 거의 항상 같이 다니는 두 사람이었지만 드레스 코드는 참 극과 극이다. 리사는 예전에도 그랬는데 오늘도 꽤나 화사한 드레스풍의 옷차림이었고 예린은 늘 그렇듯이 검은 정장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반 발자국 뒤에서 리사를 에스코트하는 예린의 모습을 보니 마치 중세시대 때 귀부인을 모시고 다니던 수행기사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허리춤에 칼집만 채워주고 투구만 씌워주면 정말 이미지 딱이다. 완전 검은색까지는 아니지만 갈색 빛이 진한 선글라스도 항상 끼고 있어서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그녀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언니야가 여긴 우짠 일이고?"

"어제 잡지 같이 봤잖아. 점심 먹을까 싶어서 예린 언니랑 왔지."

역시 쌍둥이인가. 생각이 제대로 통했나보다. 리사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우리 테이블로 다가온다. 내게 인사를 하기에 나도 인사했다. 예린에게는 눈인사를 건넨다. 보일 듯 말 듯 그녀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답한다.

4인용 테이블에 나와 마리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이 더 왔으니 나랑 마리가 옆으로 조금씩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마리 옆에는 리사가 앉고 내 옆에는 예린이 앉았다. 리사가 나와 마리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마리랑 한석 씨랑 데이트 중이었나 보네? 괜히 우리가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요."

딱히 놀리거나 놀란 말투도 아니고 꽤나 평온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마리의 반응은 좀 달랐다.

"데이트는 무신~"

마리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베베 꼬며 부정했다. 그런데 그런 말투로는 전혀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고 오히려 반기는 것 같아 보여기에 내가 부연설명 한다.

"데이트 절대 아니구요, 그냥 밥 먹으러 나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마리한테 라면 얻어먹은 것도 있구요."

너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걸까. 마리가 살짝 샐쭉해져서 피잇- 소리를 내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리사는 내 대답을 듣고 입을 가리며 웃더니 이내 점원을 불러 자기와 예린 몫의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하긴 한석 씨 이미 애인 있으시잖아요. 귀엽게 생기셨던데요."

명희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리사에게는 명희와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들킨 적 이 있다. 명희에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진다. 그때 술집에서 그런 추태를 보여 놓고 다시 연락하는 건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이기에 더 염치없는 짓거리라고 생각된다.

"선배님요, 애인 있어여?"

내 맞은편에 앉은 마리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나에게 따져 묻는다. 명희 생각 하느라 대답이 늦었더니 그 짧은 사이를 못 기다리고 마리는 자기 언니에게 재차 묻는다.

"선배님이 애인 있는지 언니야는 우예 아노? 니 봤나?"

급한 말투의 마리와는 달리 리사는 여전히 여상스럽다.

"봤는데? 둘이 키스하고 있던데?"

"에에~!"

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려서 물 컵이 쓰러질 뻔했다. 마리는 내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선배님 접때 지혜 언니야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가 깨진 거 아니였습니꺼? 지혜 언니 결혼한다카기에 선배님은 이제 마 솔로 인줄 알았는데예?"

지혜. 그래, 지혜가 결혼한다는 것도 왠지 잊고 지내고 있었군. 효진 말마따나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는데 축하한다는 소리 하나 못 해준 못난 놈이 나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차였다는 생각에 그리 좋은 마음을 먹지는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효진의 바람대로 지혜에게 결혼 축하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혜 생각을 하느라 마리의 질문, 아니 추궁에 답하기도 전에 리사가 먼저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 그분 이름이 지혜라는 분이었구나.... 전에 마리가 신세졌다는 그분 맞죠?"

뭔가 좀 이야기가 꼬인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으으.. 그게 아니라 리사 씨가 본 애는 명희였는데...."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하면 안 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지혜 언니 말고도 또 있었습니까아~!"

다시 이어지는 마리의 절규.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녀석인데 저렇게 소리 지르다시피 말하고 있으니 가게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마리는 너무 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리사는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며 예린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계속 출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선배님예, 그렇게 안 봤는데 억수로 바람둥이네예. 실망했심더."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마리가 몹시도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내가 바람둥이인데 왜 니가 실망이냐 묻고 싶다. 그나저나 변명하려고 해도 워낙 이야기가 꼬이고 꼬인 터라 설명하기도 난감했다. 설명하다보면 개인적인 치부도 나올 테고.... 대답이 궁해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의외의 구세주는 따로 있었다.

"남자가 여자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다 능력이죠."

예린이었다. 시선을 계속 출입문 쪽에 두고 있어서 이쪽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리가 코웃음을 치며 묻는다.

"그게 먼 소리입니꺼. 예린 언니는 참말 그렇게 생각하나여?"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음식이 나오는 통에 우리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먹음직스러운 스파게티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진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마늘빵의 냄새도 아주 좋다. 포크를 들고 면발을 뒤적거리며 예린이 특유의 그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수녀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 옛날, 사람들이 악마가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고 악마와 내통한 사람은 잡아다가 재판에 회부하던 시절이 있었죠. 웃긴 소리 같겠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당시에 악마의 혀를 가졌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카사노바였습니다."

"헤에. 나 그 사람 이름 들어본 적 있어. 그 사람 양다리 걸치는 걸로 유명한 사람 아니에여?"

마리의 지적에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카사노바가 여러 여자를 만나고 유혹한 것은 맞지만 그는 한 여자를 만날 때 오로지 그녀에게만 충실했다고 합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있어도 결코 여자가 그를 원망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가 악마의 혀를 가졌다는 이유로 종교재판까지 받았겠습니까."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다 이유가 있고,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하나의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미움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사람이란 바로 인연을 소중히 하는 사람입니다."

예린은 말을 멈추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말이 많았군요. 실례했습니다."

마리는 펄쩍펄쩍 뛰며 예린에게 카사노바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냐며 따져 물었지만 예린은 한 번 입을 다물자 식사 하는 용도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까불던 마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얌전히 수긍했다. 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데 리사가 내 쪽을 보며 빙긋 웃는다.

"한석 씨가 훌륭한 사람이길 빌게요."

응원인가요. 놀리는 건가요. 그러나 그녀의 평상시 말투 그대로 조롱 같은 말투는 결코 아니기에 힘내라는 소리로 듣겠습니다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난 아무래도 카사노바처럼 훌륭하기는 그른 것 같다. 리사의 말을 끝으로 화제는 마리의 대학 생활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도 좀 거들었다. 마리의 과장 섞인 이야기를 들으며 리사는 호호 웃고 있었다. 예린은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더 이상의 옛날이야기는 없었다.

잠시 뒤, 식사를 마치고 뒤이어 나온 후식까지 해치우고 나니 내 수업시간이 다 되어갔다. 마리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한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계산서를 집어 들자 리사가 말린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니요. 원래 마리에게 사준다고 했으니까요. 리사 씨나 예린 씨에게 고맙기도 하구요."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왔다. 교양 수업이라 종합강의동으로 향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예린의 그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훌륭한 사람 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최소한 못된 놈은 되고 싶지 않다. 인연을 소중히 한다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 매달리는 것이 정말로 인연을 소중히 하는 것일까 싶은 자조감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못해준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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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플레이에서는 선택지가 하나만 제공됩니다.

1회차 엔딩을 감상한 후 또 다른 선택지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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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A. 지혜에게 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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