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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려면 아무래도, 지혜에게 연락을 취해봐야겠다.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또 그녀의 침대에서 계속 잠이 들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결심했다. 지혜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그러나 연락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나에게 지혜 연락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효진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효진이 연락처조차 없다. 바로 앞집에 살고 있었으니 따로 연락할 필요를 못 느꼈기에 그랬던 걸까. 아무래도 다음에 효진이가 오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던가. 효진을 보면 물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요 년이 당최 오질 않는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니 내가 찾아갈 수 있을지도 만무하고 효진이 연락처를 알 리도 만무하다. 혹시나 싶어서 마리에게 넌지시 지혜 연락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가 눈총만 더 받았다. 마리도 모른다고 했다. 하려던 일이 막혀버린 답답함이 나를 짓누른다. 하긴 효진이 놀러왔던 건 지혜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지혜가 가버리고 난 지금 굳이 그녀가 나한테 올 일이 뭐가 있겠냐 싶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개강 초의 바쁜 나날이 지혜에 대한 생각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더군다나 학교에만 가면, 아니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마리가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녀석을 건사하느라 안 그래도 바쁜데 더 정신없이 바빠졌다. 다다음주에는 팔자에도 없는 신입생 MT에도 가게 생겼다. 진호 선배가 항상 붙어 다니는 나와 마리를 보고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진호 선배 입에서 명희 이야기가 나오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걸로 봐서 그가 소원해진 우리 사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란 추측을 해본다. 명희에 대한 생각은 애써 지워버렸다.
"선배님, [문학 속의 성] 수업 발표 조 어떻게 하실 거에여?"
"아직 생각 안 해 보았는데..."
"그럼 일단 저랑 선배랑 한 조 먹고 두 명만 더 찾으면 되겄네요."
언젠가 내 수강표를 한 번 가져가더니 자기 교양과목들을 죄다 나랑 같은 거로 수강 변경 해가지고 온 마리는 내가 아직 수락도 안 했건만 나를 이미 한 조로 잡아 놓고 있었다. 전공과목이야 학년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4학년이 듣는 교양을 듣겠다고 덤비다니. 학점관리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는 녀석이로군.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거절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전체 대학을 대상으로 한 교양과목 같은 건 아는 사람 찾기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조원을 찾는 문제는 마리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대학 수업들은 원래 다 이럽니꺼?"
"뭐가?"
"아, 아까침에 수업시간에 말이에여, 막... 자....하따. 남새스러버 말도 못 꺼내겠네. 그런 소리를 교수라는 분이 막 하고 그래도 됩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들어도 좀 파격적이긴 했는데 원래 또 그런 맛이 있어야 교양 수업도 듣는 거 아니겠는가. 다만, 마리는 면역이 없는 듯 싶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다. 나도 모르게 악동의 기분이 들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자지 말야?"
"꺄악! 선배님요!"
마리는 마치 불이 난 걸 발견한 사람처럼 파닥거리다가 황급히 내 입을 자기 손으로 막는다. 여자아이답게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좋은 향이 풍겨온다. 여자애 귓가에 대고 자지라고 속삭이고.... 손가락 냄새나 맡고 있고.... 나 변태 아닐까?
"그...그런 말을 마 이런 디서 막 해쌌고 그래도 됩니까."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사람이 좀 많고 북적거리는 학관 입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대화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마리의 손가락을 떼어내며 웃어 넘겼다.
"뭐 어때, 수업 시간에 나왔던 말인데. 그 단어랑 다른 적나라한 것 까지 다 넣어서 써보라는 교수님 말씀 벌써 잊은 거야?"
"그래도 그랬지예....."
자지, 보지, 좆, 씹.
[문학 속의 성] 교수가 오늘 수업을 시작하면서 칠판에 대문짝하게 쓴 단어였다. 여학우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학생들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마리는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지난번에도 공지했지만 제 수업에서 중간고사는 보지 않습니다. (학생들 환호가 잠깐 지나갔다.) 다만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로 성애문학, 좀 순화된 표현으로 하자면 성인소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야설을 받을 겁니다. (여기서 학생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최소한 200자 원고지 50장, 물론 최대 양은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더 길게 써올 분은 써오셔도 되고 책 한 권까지 적어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교수는 자신이 칠판에 적어놓은 단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만 이 단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할수록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괜히 페니스, 그것, 거시기, 바기나 등과 같이 돌려 말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분들은 점수를 깎겠습니다. 명확하고 좋은 단어가 있는데 왜 대체 사용을 안 하시는 겁니까. 근데 또 말이죠. 지난 학기에 이렇게 이야기 했더니 얌전해 보이던 한 여학생은 자지, 보지 이 두 단어로만만 써서 원고지 50장을 채워왔더군요. 참신한 발상은 놀라웠지만 저는 그 학생에게 F를 줬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었다.
"야설이라고 해도 분명 하나의 소설이고 문학작품을 쓴다는 생각으로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소설적인 기법이 적절히 사용될 것. 완결된 이야기일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다음에 계속, 뭐 이런 식으로 시리즈로 적어오는 분은 아무리 재미있어도 C 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수업 시작하죠."
교수는 그러면서 천일야화와 춘향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수업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마리는 나한테 뭐 이런 수업을 듣는 거냐고 한참이나 항의를 했다. 이...이봐, 내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는 자유지만 따라온 건 너지 내가 오라고 한 게 아니잖아.
"선배님, 저 잠깐 좀 댕겨올테니 자리 좀 맡아주이소."
"어, 그래."
수업을 마치고 나온 마리와 나는 지금 학관 식당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 중이었다. 3월의 학관 밥은 아직 먹을 만해서 사람이 제법 붐볐다. 마리는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저 녀석도 이제는 좀 동기들이랑 돌아다닐 때가 되었는데 너무 나랑 붙어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줄이 언제쯤 줄어들려나 고개를 들고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어떤 쪼끄만 녀석이 끼어든다. 교복을 입은 걸 보아 부속 고등학교 여학생인 모양이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이봐요. 새치기는.... 어라?"
"아는 사람끼리, 같이 좀 서죠?"
"으음...."
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녀석인 동시에 정말 사람이 아니고 속까지 인형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인간미가 없는 녀석.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지난 번 서점에 갔을 때, 교복을 입고 왔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교복을 보고도 뭐 해줄 말 없냐며 갈구던 것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렇다. 이 녀석은 우리 대학의 부속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그 교복, 그래, 이 교복이 우리 학교 부속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기억해낸다. 평소에 캠퍼스에서 많이 보긴 하는데 눈여겨보질 않아 기억에 떠올리지 못 했던 거다.
"너, 이 학교였냐?"
"네."
"넌 원래 M여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M여고는 유진이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진학률 높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S대를 가겠다고 선언하던 유진이었으니 당연히 거기로 갈 줄 알았는데.
"거기 교복이 별로더라구요."
"그런 이유로?"
"왜요? 안 돼요?"
"안 될 것까지야 없지만....."
희한한 녀석일세. 빈 말로라도 우리 학교 부속고가 엄청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곳이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교생 실습 나갔던 선배들 이야기로는 아주 면학에 힘쓰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놀자판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고등학교였다. 인근에는 드문 남녀공학이라는 게 유일한 메리트라면 메리트일까. 유진이 성격이라면 좀 더 깐깐한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혹시 연합고사 못 본 거 아냐?"
할 수 있는 추측은 이게 다다. 그러자 유진이 살짝 웃으며 답한다.
"체육에서 2점만 안 깎였어도 만점이었거든요?"
"아, 그러세요."
어지간하면 대부분 만점을 주는 체육에서 2점이나 깎이다니. 녀석은 보통 운동치가 아닌 모양이다. 나머지 과목에서 만점 받았다는 거야... 뭐, 그닥 놀랍지도 않다. 녀석의 실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왜 여태 말 안 했어?"
"핫... 말을 안 해요? 계속 이 교복 보여줬는데?"
"그.....그랬나."
그러고 보니 그렇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겠다.
"근데 점심을 여기서 먹어?"
"귀찮으면 그냥 매점에서 빵 사먹고 마는데... 요즘은 밥이 먹고 싶어서요."
"......니 들고 있는 그 식권으로는 밥이 아니라 면류인데?"
"아무튼요. 되게 깐깐하네. 거참."
도시락 안 싸가지고 다니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모르긴 몰라도 얘 엄마나 선영이나 새벽까지 일하고 오전에는 내내 자고 있을 텐데 누가 싸주겠나 싶다.
"아저씨도 맨날 여기서 먹죠?"
"맨날은 아니고 되도록이면 여기서 먹지. 여기 아니면 저쪽 중앙도서관 식당에서 먹든가 아니면 저쪽 멀티관 식당이나 것두 아니면 나가서 먹든...."
"아, 됐고. 앞으로는 항상 여기서 드세요. 이 시간에요."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유진이 딱 잘라 말한다. 난 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사람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야죠. 그렇게 들쭉날쭉 먹으면 어떡해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 거 같다. 여기다 괜히 아니라고 대답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 대충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마리가 돌아왔다. 마리는 아까처럼 내 옆에 서려다가 유진을 보더니 살짝 놀라며 내게 묻는다.
"야는 누구라예? 선배님 아는 아인교?"
"어, 내가 과외 하는 앤데, 여기 부속고에 다닌다나봐. 저쪽 공대 뒤에 넘어가면 거 왜 학교 있잖아. 고등학교. 거기."
내 설명을 들은 마리는 활짝 웃으며 유진을 이모저모 살핀다.
"아따, 쪼~매한 딸아가 억수로 귀엽네예. 니 참말 고등학생이가?"
그러나 친근하게 구려는 마리에게, 유진은 몹시도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마리의 손을 탁 쳐내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 쪽은 누구신데요?"
"어, 여긴 내 후배인데, 이름은 김마리라고...."
"아저씨가 왜 대답해요? 난 이쪽에 물었는데!"
.......그게 그렇게 버럭 화를 낼 일이냐? 유진은 짜증을 부리더니 몸을 홱 돌려 앞을 향한다. 그런 유진의 등을 보며 마리가 내게 소근거렸다.
"아가 승질이 보통이 아닌갑네예. 얼굴 값을 하닌가 봅니데."
그러나 마리의 목소리는 원래가 좀 큰 편이고 그녀가 소근거린다고 한 것도 일반적 기준에서는 별로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쪽 지방분들이 대개 목소리가 큰 편인데 마리는 좀 더 그랬다.
"다 들리거든요? 그리고 그쪽은 자꾸 누구보고 아가라고 해요? 게다가 딸? 내가 그쪽 딸이에요?"
다시 홱 돌아서 마리에게 따져 묻는 유진에게 마리는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니가 딸아지, 머스마가? 그리고 내 이름은 그쪽이 아니라 마리다. 김마리."
"말인지 소인지 내가 알바 아니네요."
"하, 고 녀석, 발끈하는 게 음청 귀엽네예. 꼭 우리 언니 맨치로."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건데 마리는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에 대해 굉장히 둔한 것 같다. 예전에 리사가 펼쳤던 폭풍방언 화풀이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게 어쩐지 납득이 간다. 설마 리사가 그랬던 걸 이 녀석은 귀엽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이거 대체 얼마나 둔탱이인거야!
"아저씨! 앞으로는 여기 이 사투리 쓰는 여자랑 다니지 말아요. 알았어요?"
싸움의 불똥이 엉뚱하게도 나에게 튄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배인데 그럴 수는 없어. 수업도 같이 듣고...."
그러자 유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럼 최소한 밥 먹을 때는 혼자 다녀요. 이 아줌마랑 다니지 말구요."
"아지매? 내는 아지매 아닌데?"
"아악! 그쪽한테 말한거 아니라니까요!"
"내 이름은 그쪽이 아니라 김마리라카이!"
......앞으로 나의 평온한 점심시간은 글러먹은 것 같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밥을 먹고 헤어질 때까지도 계속된 데다가 유진이 말하는 폼을 보았을 때, 그 녀석은 점심시간마다 이곳으로 올 요량인 모양이다.
오,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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