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7화 (3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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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수요일은 첫 수업이 1교시에 있어서 서둘러야 한다. 문을 열고 나서자 맞은 편 앞집에서 마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리사와 예린의 배웅을 받는 마리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내 시간표의 첫 수업은 항상 녀석과 내가 같이 듣는 교양이다.

"선배님요. 이따 공대 앞에서 좀 기다려 주실거지예?"

"왜?"

"점심 안 드십니꺼?"

"아아."

1,2교시는 녀석과 내가 같은 교양 수업이었지만 3,4교시는 좀 달랐다. 난 수업이 없고 녀석은 필수교양인가 뭔가가 있었다.

"필교라고 했던가? 과목이 뭐지?"

"영어회화요. 하이구. 웬 코쟁이가 들어와서 뭐라 쏼라쏼라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먹겠시요."

머리를 감싸 쥐고 절레절레 흔든다. 마리는 영어를 어려워했다. 1학년들은 필수적으로 영어 관련 수업을 이수해야 했는데 2학년 이후부터 그 수업이 없다고 하자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든 나는 살짝 과장을 보태 2학년부터는 전공서적들이 죄다 원서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난 가끔 니가 우리 학교에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진짜 궁금하더라."

"보결 두 자리 수 였다고 안 켔심니꺼."

"그래도 그렇지. 정말 학관 앞에 잔디밭 니가 새로 깔아주고 들어온 거 아냐?"

그러자 마리는 우뚝 섰다. 살짝 돌아봤더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진짜 그른가. 설마 아부지가...."

"에엑? 난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인데 정말 그렇단 말야?"

마리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핫. 울 아버지가 그런 데 쓸 돈 있으면 아마 부산역 앞에서 일없이 돈 뿌리고 말낍니다. 애초에 지가 서울 대학에 간다는 것도 안 된다켔서예."

"그러냐...."

이사 하던 날, 짐을 나르던 검은 옷의 남자들도 그렇고, 대체 마리와 리사는 어떤 집안의 영애인걸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급하게 묻고 싶지 않았다. 괜히 알려고 들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차 트렁크에 실린 채로 어디 외딴 곳에 감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빨리 궁금함을 잊기로 했다.

그나저나 필수 교양이면 신입생들 수업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 넌 동기들이랑 별로 안 친하니?"

"동기들요? 와예?"

"아니... 거의 항상 나랑 다니고 그래서 말야."

"선배님예. 제가 귀찮심니꺼."

가끔은.... 이라고 말하려던 걸 얼른 집어 삼킨다.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말야. 나 신입생때 요맘때는 맨날 동기들이랑 다니고 그랬던 거 같아서 말야. 아니면 동아리 들어가던가."

"다들 알고는 지냅니더. 너무 걱정 마시라예."

"그러냐. 그럼 상관없고."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술자리가 지난주에 몇 번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거기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마리는 갔었을까? 하긴 얼마 후면 신입생 MT도 갈 테니 거기서 본격적으로 친해지겠지 싶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까.

1,2 교시 수업을 같이 듣고 마리는 다음 수업을 향해 떠났다. 나는 과사에 들려 다른 후배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진호 선배에게 교생 실습에 대한 걸 좀 물어보았다. 일정이 거의 잡힌 모양이었다. 아마도 보름 내로 신청을 받을 거란다. 나는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새겨두고 공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간이 되어 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가 수업을 받고 있을 종합 강의동이 보이는 쪽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쳐들었다. 전형적인 봄 날씨라 참 좋았다.

"아저씨."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른다. 나를 이런 호칭으로 부르는 녀석은 딱 하나 뿐이다. 책을 덮으며 돌아본다.

"유진이냐?"

그러다 다음 순간, 나는 얼음땡 놀이를 하듯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유진은 혼자 있지 않았다. 같은 모양의 교복을 입은 조그만 여학생이랑 같이 있었는데 그 녀석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다. 어디서 이 녀석을 분명히 보았는데 어디서 봤는지 바로 생각이 안 난다. 뭔가 충격적이며 대단한 인상이었는데 누구더라. 누구더라. 머릿속에서 검색 프로그램이 버벅이고 있는 나보다 그 녀석의 기억력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녀석은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고는,

"어머, 그 때 레인보......."

그래! 그거구나! 녀석의 입에서 선영이 살고 있는 레인보우 빌딩의 이름이 나오기 전에 번개같이 튀어 오른다. 녀석의 입을 확 틀어막고 후다닥 옆으로 끌고 간다. 유진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한데 말이다. 예전에 니가 봤던 건 전부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부탁이다."

입이 틀어 막힌 채,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오피스텔에서 벌거벗고 있는 걸 보았던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고 그 때 봤던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황당하리라는 건 이처럼 둔감한 나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탁하는 거 말고는 도리가 없다. 간곡한 표정으로 몇 마디 더 부탁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듣고 손을 뗀다.

"무슨 일이죠?"

의아스러운 표정을 가득 담은 채, 허리에 손을 올린 유진이 이쪽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차. 너무 급해서 이 녀석을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앞에서 이토록 수상쩍은 행동을 했으니 추궁을 당해도 무리가 아니다.

"아, 그게 말이지.... 에에....."

오오 햇살이 비춰주는데, 오오 분명 내 얼굴은 필사적으로 웃고 있는데, 오오 바람마저 멈췄는데.... 나는 대답도 못하고 붕어 흉내를 내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선영이 다짐했던 비밀 유지 계약 조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여기 이 새로운 녀석이 함부로 입을 놀려 내가 레인보우 빌딩에 있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처음 보는 녀석 ( 물론 내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게 아니지만, 유진이 볼 때는 ) 을 다짜고짜 끌고 가서 입을 틀어막은 행위에 대한 변명이 필요할 터였다. 머릿속이 복잡복잡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는 건 아니다. 좋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자. 굴리는 거니까 마찰계수는 일단 0.2로 잡고 토크는......으아아아아... 지금 여기서 동력전달 공식 같은 건 떠올라 보았자 아무 소용없어!!!

"전에 우리 가게에 옷을 맡기셨거든."

구원군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방금 내게 입을 틀어 막혔던 쬐끄만 녀석이 유진에게 설명했다. 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옷을?"

"응. 내가 이야기했지? 우리 부모님이 세탁소 하신다고. 내가 가게 일을 종종 돕거든. 그때 봤어. 근데 그 옷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말야. 그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어. 그쵸?"

녀석의 눈과 마주친다. 또랑또랑한 녀석 같으니. 확 끌어안고 뽀뽀라도 해줘야 할까보다!

"어엉. 그게 술 먹고 그렇게 된 거라....."

유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뭐라고.... 그런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어요, 아저씨가? 그럼 소란이랑은 처음 보는 게 아니겠네요?"

"엉? 소란이?"

소란이라 불린 녀석을 돌아보자 녀석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양씨 세탁소 맏딸 소란이에요. 이름은 모르셨죠?"

"으응... 그래. 그래. 니가 소란이였구나... 하핫. 그때는 ... 참 실례가 많았구나."

"하하. 뭘요. 일하다 보면 그런 일은 다반사죠."

".......그....그래?"

나는 멋적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세상에나. 문을 열었더니 알몸의 남자가 나와서 옷을 받아가는 일이 다반사라니. 세탁소 일이 그렇게나 힘든 일이었구나. 내 알몸을 녀석에게 보인 적은 있지만 서로 통성명을 할 시간은 없었던 터라 이제야 이름을 알게 되었다. 유진은 나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소란과 함께 걸어가며 말했다.

"오늘 소란이가 도시락을 안 싸와서 같이 먹으러 왔어요."

"그러니? 둘이 같은 반이야?"

"네. 짝이에요."

키를 보니 딱 그럴 것 같았다. 학관으로 들어가려던 유진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들어가요?"

"으응. 난 좀 누구 기다리느라."

내 대답을 들은 유진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뭐야. 나 기다린 거 아니었어요?"

"....내가 널 왜 기다려?"

"난 또.... 쳇."

어째 녀석이 툴툴거리는 모양새는 골이 났다기보단 귀엽게 보인다.

"설마 그 때 그 사투리 쓰는 여자 기다리는 건 아니죠?"

"아니. 맞는데."

".........소란아, 우리 먼저 가자."

유진은 소란의 팔짱을 끼고 휙 하니 먼저 학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침 저쪽에서 마리가 후다닥 뛰어오는 게 보였다.

"선배님요. 많이 기다렸지예?"

"많이랄까. 아니랄까."

"엥? 먼 소린교?"

"아냐.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될 거야."

들어가니 식당 줄의 맨 마지막에 유진과 소란이 서 있었다. 나와 마리가 그쪽에 가 따라 서자 소란은 마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반면 유진은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마리가 유진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또 보네예. 접때 가네요."

".......흥."

"선배님요, 야는 또 눕니까?"

마리가 소란을 가리켰지만 유진이 잠자코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소개해주었다.

"얘는 유진이 친구, 양소란이래."

"안녕하세요."

소란은 다시 한 번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한다. 마리는 그런 소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히야, 야도 억수로 귀엽게 생긋네예. 서울 딸아들은 다 이렇게 이쁜 애들만 있나 보네예."

마리는 귀여운 애를 보면 머리를 쓰다듬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전에 유진에게도 이러려다가 거부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소란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피하거나 쳐내지 않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러자 마리가 아주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착하기까지 하네예! 누처럼 틱틱거리지도 않고 말이지예. 히야~"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마리에게 쏘아붙인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하모. 지 이야기 하는지는 아는 갑네. 닌 언니야한테 인사도 안 하나?"

"누가 내 언니예요?"

"내 말이다. 내."

"핫. 진짜 어이없어. 그쪽이 말인지 소인지 관심없다니깐요?"

"아니, 내 이름 마리 말고, 내라고 내!"

"뭘 내라는 거예요!! 내긴 뭘 내!!"

꾸준히 투닥거리는 유진과 마리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면서 소란이 내 쪽을 향해 입모양으로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원래 이러나요?'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겠다.' 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지칠 줄 모르고 맞서는 두 사람 덕분에 여름철 폭풍과도 같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나와 소란에게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아니하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두 사람 덕분에 나는 소란하고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선영이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양씨 세탁소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자기 아버지가 하는 곳이란다. 개학 전에 아버지를 돕느라 그곳에 왔던 모양... 참 기특한 녀석이다. 어찌어찌 식사를 끝내고 유진과 소란을 보내고 난 뒤, 마리와 난 다음 수업을 위해 같이 이동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슬쩍 물어본다.

"유진이랑 왜 자꾸 싸워?"

"싸우긴예. 저희가 싸우는 걸로 보이나예?"

딱히 새삼스러운 말투도 아닌 말투로 마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녀석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거다. 그렇게 사람을 들쑤셔 놓고도 그게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전혀 모른다고나 할까. 전에는 리사가 폭풍 방언을 펼쳤던 것이 굉장히 신기했는데 이 녀석이랑 형제로서 자라났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됐다. 마."

난 마리에게 배운 말투대로 말해보았다. 그러자 네이티브 스피커인 마리가 지적한다.

"마, 가 아니라예. 마! 이래야 합니데."

".........예, 예."

마리와 내가 들어간 교양 수업은 "법과 사회"였다. 시험이 오픈북이라는 소리에 환호하다가 교재로 쓰이는 책의 두께와 보조 교재로 쓰이는 책의 가짓수를 보고 들은 마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선배님은 대체 와 이런 것만 듣습니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너한테 결코 이 수업을 권한 적이 없거든?"

수업을 마치고 나온 마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듯 걸어갔다.

"난 수업 여기서 끝인데 넌?"

"지는 하나 더 있심더."

"그래? 그럼 수고해."

내가 손을 들어 보이고 돌아서려 하자 마리가 하소연하듯 말한다.

"치사하꾸로 먼저 가깁니꺼!"

"그럼 수업도 없는데 뭐 하라고."

"지 안 기다리구예?"

"내가? 너를?"

나와 마리를 번갈아 가리킨다. 그러자 마리가 볼멘소리로 답한다.

"야."

".........왜?"

그러자 마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선배님예. 알아 봤심더."

"뭘 알아봐?"

"몰라예."

마리는 입을 삐죽 내밀고 혼자서 공대 쪽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다. 사실 기다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과사에 잠깐 들러있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라도 하고 있으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내심 되도록이면 마리가 동기들과 어울리길 바랐다. 아까 과사에서 듣기론 오늘도 신입생들이랑 2학년들이랑 모이는 술자리가 있다고 하는 거 같던데 아마 내가 없어야 그런데도 갈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3월 달의 대학은 해방감에 들뜬 신입생과 처음으로 후배를 맞이한 2학년들의 천국임에 틀림없다. 후배 관리에 신경을 쓰거나 동아리를 하는 3학년이라면 거기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4학년은.... 완연한 노인네 취급이라 끼기도 애매하다. 다음에 있을 과MT에 참석하겠다고 한 것만 해도 진호 선배의 요청이 없었다면 난 갈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4학년이 끼면 아무래도 불청객 대접일 텐데 좀 걱정이다. 동기라도 많다면 모르겠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학기에 복학하는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없다.

멀어져 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집에 돌아가 레포트나 미리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방금 헤어진 녀석과 똑같은 얼굴을 마주친다. 물론 마리는 아니었다.

"리사 씨....."

"후후. 마리랑 잘 지내주고 계시네요?"

"보고 있었어요?"

"마리 목소리가 원체 커야지요. 저쪽에서부터 아주 잘 들렸어요."

리사는 조신하게도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좀 까무잡잡하긴 하지만 마리도 분명 예쁜 얼굴이었지만 말투가 워낙 걸걸하고 하는 짓도 "머스마" 같아서 전혀 여자다운 매력이 풍기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얼굴에 뽀얀 피부, 그리고 여성스러운 몸가짐을 가진 리사는 180도 다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한석 씨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어때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리사가 조용히 되물었다. 나는 한 팔을 들어 우에서 좌로 천천히 저으며 예스러운 서양 인사를 하듯 허리를 숙였다.

"저야 영광이죠."

"어머. 영광까지라니요."

아아.... 입고 있는 스커트를 살짝 쥐고 들어 올리며 옛 방식대로 답인사를 하는 리사의 동작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마리랑 있다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체험 극과 극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원래는 마리랑 점심이라도 같이 할까 하고 온 건데... 아직 수업이 있나 보네요?"

"네. 마리 수업이 다 끝나려면 두 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어머, 그래요? 한석 씨는요?"

"전 이제부터 프리입니다."

"어머~ 그러시구나."

리사는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마주한 채 입가에 대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위로 향하고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못 견디게 귀엽다.

"저... 그러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런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어딘데요?"

리사의 말투는 워낙 조용조용하고 차분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릴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여성스럽고 차분한 모습은 요 근래 내가 주위에서 보아온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난 그녀의 부탁을 쉽사리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여자답고 훌륭한 모습인가! 선영! 유진! 마리! 효진! 쫌 보고 배워라!!! 리사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못내 쑥스럽다는 듯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놀이동산이요."

"네?"

"놀이동산. 바이킹 타는데 말이에요."

.........이건 또 뭔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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