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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난데없는 부탁이긴 하지만 딱히 거절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예쁜 아가씨의 부탁인데다가 무엇보다 난 지금부터 시간이 많다! 없더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의 참된 도리라고 생각하며 리사와 함께 걸었다. 그러다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어야 할 게 하나 없는 듯한 그런 느낌.
"근데 그 누구냐... 수행원 예린 씨는 안 보이네요?"
"아, 부산에서 일이 있어서요. 어제 내려갔어요."
"그런가요."
대체 부산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리사는 늘 웃는 얼굴이지만 그 표정은 뭐랄까. 함부로 말을 걸 수 없게 하는 묘한 힘이 숨어있는 느낌이랄까. 전철역에 도착해서 표를 끊었다. 예전에 동기들과 한번 놀러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놀이동산이라니...."
"좀 뜬금없죠?"
"솔직히 좀 그래요."
"저는 놀이기구 같은 걸 좋아하는데 부산에 있는 것보다 서울에 있는 게 훨씬 더 크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꼭 가보고 싶었죠."
"그러셨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철이 도착해서 그녀와 난 올라탔다. 오후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제법 붐볐다. 나와 리사는 문 옆에 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섰다.
"전부터 서울에 가면 그런데 가고 싶었거든요. 근데 예린 언니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마리는 놀이기구라면 질색을 하거든요."
"마리가요?"
정말 의외였다. 녀석이라면 롤러코스터 맨 앞자리에 타고도 더 빨리 안 달리냐고 성화를 부릴 것 같은데 말이다.
"문득 깨달아보니 예린 언니도 그렇고 마리도 없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더라구요. 그래서 뭐가 좋을까 생각해보니 셋 중에서 저만 좋아하는 놀이동산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예...."
"근데 아무래도 혼자 간다는 건 좀 그렇고 길도 잘 몰라서 누군가랑 같이 갔으면 싶었거든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리사가 그제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아참. 혹시 한석 씨 놀이기구 안 좋아하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제가 괜히 모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 예전에 친구들이랑 돈 모아서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어머, 다행이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리사는 다시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는 창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노라니 머리카락에 풍겨오는 샴푸 냄새가 참으로 그윽하다. 등의 중간까지 내려온 긴 생머리는 몹시 윤기 있었다.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은 디자인의 원피스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허락만 해준다면 가만히 뒤에서 안아주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싶을 지경이다. 나는 신사이므로 그런 짓은 머릿속 상상으로만 하기로 했다. 대신 아까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한다.
"근데 리사 씨."
"예."
내가 부르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아까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여쭙는 건데요.... 마리랑 점심 드시려고 오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랬죠."
마리와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온 시각, 그러니까 마리를 보내고 내가 리사를 만난 시각은 거의 세 시가 다 되는 시각이었다. 그 시간에 점심이라니?
"집에서 열한시 정도에 나왔는데 헤매다보니 그때 도착한 거 있죠? 저도 참...."
".....아.하하...하하아...."
우리 집은 학교랑 가깝다는 이유로 내가 웃돈을 더 주고 계약한 집이었는데.... 내 걸음으로 가면 이십분도 안 되어 현관에서 학관까지 도착할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대체 어떻게 얼마나 헤매면 네 시간 만에 도착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녀를 처음 본 것도 아마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혹시 길을 잘 못 찾으시나봐요?"
"네.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도 잘 안 고쳐지더라구요. 게다가 서울은 복잡하기도 하구요."
"아, 예에..."
서울이 복잡하다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정말 상상 이상의 길치인가 보다. 비록 평일이라 붐비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놀이동산에 가면 결코 그녀를 시야에서 빠트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번 잃어버리고 어디 있나 찾아보면 전라도에 가 있거나 하진 않겠지? 걱정이 많이 되는데 아예 양해를 구하고 줄이라도 하나 매어두는게 안심이려나. 미아방지용 그런 거 있잖은가.
"참, 지난번에 그 아가씨랑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예? 아... 그게 좀....... 잘 안 되었어요."
리사가 말하는 아가씨라면 아마도 명희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 가방에는 아직도 삐삐가 들어있다.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고 있지만 습관처럼 넣어가지고 다닌다. 리사는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 저런.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대며 말했다.
"그러면 말이에요."
"예."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인데 리사는 목소리를 더 낮춘다. 거의 속삭이듯이 말한다.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내 귓가에 그녀의 숨결이 와 닿는다.
"그럼 지금은 솔로시죠? 누군가 애인으로 입후보해도 괜찮은 거죠?"
"옛?"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본다. 싱긋 웃는 게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무슨 뜻으로 한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때마침 환승역에 도달하여 뭔 놈의 인간들이 우르르 들이닥친다. 사람들에게 밀린 리사가 한쪽으로 밀린다.
"꺄~"
"리사 씨! 이쪽으로...."
이번 역에서 열린 문 반대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인간들은 장난이 아니다. 그들에게 리사가 휩쓸려 가려던 것을 재빨리 구해낸다. 실례되긴 하지만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잡아당긴다. 문 옆에 있는 사각의 공간에 그녀가 서 있게 하고는 대각선으로 비껴 서서 그녀를 커버링 한다. 틈틈이 농구하면서 익혀온 맨투맨 마크의 요령대로 등으로 사람들을 버텨낸다. 등 뒤로는 사람들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고 앞으로는 리사와 너무 바짝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뚝에 힘을 주어 버텨낸다. 너무 많은 사람에 기가 질린 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서울엔.... 사람이 많긴 확실히 많네요."
"네, 그렇죠?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팔뚝 힘만으로 버티기에 사람들의 무게는 점점 더해진다. 어쩔 수 없이 리사쪽으로 내 몸이 점점 더 다가선다. 리사와 나와의 간격은 이제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을 지경이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 근육에 쥐가 날 지경인데 리사는 꽤나 태평한 표정이다. 오히려 좋아하는 표정이려나.
"후후. 왠지 득 본 기분인데요?"
"네에?"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왜 웃고 있나요, 이 아가씨야! 몸은 점점 더 밀려 이미 다리 쪽은 그녀에게 바짝 붙은 꼴이 되었다. 내 가슴과 그녀의 얼굴은 이제 5센티미터도 안 될 정도의 간격뿐이다. 그녀가 내뱉는 숨결이 내 가슴에 와 닿고 있고 그녀의 정수리가 내 턱 밑까지 바로 다가왔다.
"리사 씨. 이제 다섯 정거장만 더 가면 내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어머, 겨우 다섯 정거장뿐인가요?"
"예에?"
난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안 닿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리사가 앞으로 다가와 내게 붙는다. 언젠가 딱 한번 아주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듯 보긴 했지만 암튼 그때 확인한 결과 결코 작지 않은 사이즈의 가슴이 내 가슴 바로 아랫부분을 가볍게 누른다. 원피스의 네크라인 너머 옅은 빛의 브래지어가 엿보인다.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살의 윗부분이 눌린 모양이 몹시도 뇌쇄적이다. 리사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내 허리에 가볍게 얹었다. 허거덩. 이렇게 하면 거의 끌어안고 있다시피 하는 모양새잖아. 내 배에 와 닿는 뭉클한 무언가가 저를 몹시도 흥분시키고 있는데 이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리사 씨?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서 있고 난 그 바깥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짝 붙어버리니 내 쥬니어의 바로 앞에 그녀의 허리가 위치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자극, 어쩔 수 없는 혈류의 흐름, 어쩔 수 없는 이놈의 발기!!!
"마리한테는 비밀이에요. 알았죠?"
"예....."
뭘 비밀로 하라는 걸까. 놀이동산에 놀러간 거? 아니면 지하철에서 진상짓 하는 연인들처럼 끌어안고 부비부비하고 있는 거 말입니까. 사람들에게서 리사를 커버하느라, 그리고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 때문에 한창 혼란스러워 아까 했던 소리가 뭔 소리냐고 다시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몇 정거장 더 가서 우리는 내릴 수 있었고 밖으로 나가 놀이공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버스는 좌석버스여서 아까 같은 밀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난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하다.
"와아!!"
자유이용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자 리사는 평소의 조신함을 벗어던지고 활짝 웃으며 만세를 하듯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내 팔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외친다.
"한석 씨! 우리 저거 타요!"
"천천히 가도 돼요."
평일의 놀이공원은 확실히 한산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휴일 때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어지간한 놀이기구는 5분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리사의 모습은 평소의 매력과는 또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어 무척 보기 좋았다.
"역시 자매는 자매인가...."
독수리 요새 다섯 번, 토마호크 일곱 법, 바이킹 여섯 번째 탑승을 하고 나서도 다시 또 독수리 요새를 타러 가자고 나를 이끄는 리사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단지 마리와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달려왔던 일이 떠오른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강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미 아까 전부터 기진맥진한 참이다.
"리....리사 씨. 일단은 저녁부터 먹지 않을래요? 제가 배가 고파요."
"그럴까요?"
"게다가 리사 씨 아까 점심도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노는데 정신이 얼마나 팔리셨으면 배도 안 고프셨습니까....."
자유이용권은 그녀가 샀기에 저녁은 내가 사기로 했다. 각종 인형 탈과 풍선으로 장식되어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함께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의 메뉴는 잘 모르기 때문에 리사에게 주문을 일임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2인분의 요리를 주문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오늘 리사에게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오늘의 리사 씨를 보고 있노라니..... 정말 마리랑 쌍둥이라는 게 실감이 나요."
"후후. 제가 좀 많이 들떴지요? 너무 간만이라서요."
"네. 그 전까지는 그저 얌전하고 조용한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후후후. 전 여전히 얌전하고 조용한걸요?"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늘 그렇듯 얌전하게 앉아있었지만 이미 나에게 보일 건 다 보이고 난 후다. 이제는 얌전한 척을 해도 소용없다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리사는 배시시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퍽 예뻐서 더 이상 추궁하지 못 했다. 내 턴이 마무리 되어서 일까. 이번에는 리사가 내게 묻는다.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한석 씨에게 여쭤봐도 되려나요?"
"뭔데요?"
"유진이가 누구인가요? 또 다른 애인이세요?"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 뻔 했다. 다행히도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은 없기에 뿜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분도 있었고... 효진이라는 분도 있었고..... 한석 씨는 여자가 굉장히 많은가 봐요?"
손으로 꼽아가면서까지 그녀는 내 주변의 여자들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었다.
"켁..... 아니, 대체 그 이름들은 전부....."
"마리가 이야기 하던 걸요?"
"그...그렇군요...."
나는 황급히 유진이는 과외 하는 애고 지혜는 지금 리사네 집에 먼저 살던 입주인 이며 효진은 그녀의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요."
말하면서 살짝 찔렸다. 유진이는 그렇다 쳐도 지혜와 효진이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딱히 그녀들과 어떤 교제를 약속한 적도 없었기에 아무 사이 아니라는 내 대답은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후후, 그래요? 무슨 사이라고 해도.... 뭐 딱히 상관없는데요?"
"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침 음식이 나와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리사는 음식을 먹으며 이 다음에 뭘 탈까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타고도 또 타겠다는 건가 싶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그 이야기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하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직 안 타봤던 것을 위주로 한 바퀴 더 돌고나니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다. 나는 돌아가는 시간을 재보고 리사에게 이제는 가야한다고 말해주었다.
더 놀고 싶지만 밥때 되었다고 놀이터에서 엄마에게 귀 잡혀서 끌려나오는 꼬마 아이와 별 차이 없는 표정을 한 리사를 데리고 나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버스에 올라타자 그녀는 곧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란히 앉아 가는 버스였는데 내 어깨에 기대오는 리사의 머리가 향긋한 냄새를 풍겨온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내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정신 못 차리고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기에 택시를 잡았다. 미터기에서 빠르게 달리는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며 내 지갑을 애도했다. 동네 입구에 도착해서 그녀를 흔들어 깨웠지만 여전히 반쯤 잠들어 있다.
"리사 씨, 리사 씨! 다 왔어요. 일어나세요."
"흠냐... 흠냐....."
"취한 사람도 아니고 .... 하아...."
별 수 없이 그녀를 들쳐 메고 동네 골목을 지나 빌라에 들어선다. 뒤에 두른 손이 엉덩이에 닿지 않게 주의한다고는 했지만 내 등을 부드럽게 압박하는 두 개의 언덕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꾸 흘러내리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빌라에 도착해서 문을 발로 차며 소리 질렀다.
"마리야! 마리야!"
자꾸 흘러내리려는 리사를 추스르며 간신히 마리를 불러낸다. 잠시 후, 나오라는 마리는 나오지 않고 예린이 나온다.
"마리 아가씨는 지금 부재중이...... 이런."
예린은 얼른 나에게서 리사를 받아"들었다." 공주님 안기라니, 힘도 좋군. 이 여자. 난 그 정도 거리 오는데도 땀이 뻘뻘 나는데... 게다가 이 여자는 집에 있으면서도 선글라스에 정장 차림이었다. 대개 저녁이 되면 선글라스는 벗지 않나? 예린은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리사를 내려놓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켓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제게 연락주십시요."
"그래요? 알겠어요. 꼭 그러죠."
예린이 건네준 것은 명함이었다. "경남산업개발"이라는 상호 아래 "기획부장 성예린"이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뭐냐. 나랑 비슷한 나이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부장? 벌써 취업했단 말인가. 부럽군.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은 휴대전화를 늘 켜놓고 있습니다."
예린은 손가락으로 명함 하단에 있는 한 번호를 가리켰다. 017로 시작하는 10자리의 번호가 씌여있었다. 휴대전화라니. 이 여자 돈도 많군. 아니, 리사네가 돈이 많은 건가.
"그럼 이만."
예린은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어제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어서 침대에서 꽤나 미적거렸다. 선영의 과외는 한 시부터 시작이었기에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지냈다. 어제,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저 조신하고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리사였는데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하겠다. 물론 예전에 과사에서 보여주었던 폭발도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예린.... 평상시에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 쓰고 있는 거야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집에 있으면서도 그런 차림이라니. 놀랍다. 나가면서 점심도 먹고 선영이 과외도 가야 해야겠다가 싶어서 침대에서 나와 옷을 꿰어 입기 시작한다.
띠리리리리-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아보니 엄마 목소리였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지금 버스 타러 가니께 이따 오후쯤에 도착할게다."
"에엑?"
방 안을 황급히 돌아본다. 이곳저곳 널려있는 옷가지와 대충 쑤셔 박아 넣은 빨랫감들. 먹다 버린 빵봉지와 우유팩 등이 널려있는 방안의 꼴이 새삼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현기증 정도이니 우리 엄마는 이걸 보면 아마도 졸도를 할 테다.
"갑자기 뭔 일이야?"
"갑자기라니. 이번 주 토요일이 니 생일 아니냐. 올라가서 미역국이라도 끓여줄려 그러지."
"아아. 그러고 보니...."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틀 후가 내 생일이었다. 천리안을 가진 게 분명한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니 또 집안 꼴 엉망으로 해놓고 사는 건 아니지?"
"아...아냐."
엄마는 천리안이라도 있는 걸까. 어떻게 그 먼 곳에서 내 방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는 거지?
"지난번에 이 에미 식겁했었응께 또 그랬다간 당장 방빼라고 할껴."
"알았어. 몇 시 버스야?"
엄마가 불러주는 버스 시간을 보고 역산을 해본다. 으아...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라다. 전화를 끊고 나서 대충 쓸어 담아 정리를 해보았지만 이 방안의 꼴이 몇 분 정리한다고 될 모양새가 결코 아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나는 전화기를 들고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에 미리 받아둔 전화번호가 있었다.
"여보세요?"
"네. 누구시죠?"
"저, 한석인데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과외를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급한 일?"
자다 깼는지 선영의 목소리는 나른나른했다.
"예,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서...."
"알았어요. 사정은 다음에 듣죠."
"감사합니다."
선영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러고서 이젠 유진이네 집으로 전화를 건다. 신호가 한참이나 가고서야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네에....."
"아, 저어, 유진이 어머니?"
"하암.... 누구시죠?"
역시나 이 시각에는 유미가 집에 있었다. 인사를 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자 그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돌아온다.
"어머. 선생님이셨구나.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아, 예... 지금 집에 손님이 오시기로 되어있는데 집이 엉망이라서요."
"저런. 얼른 준비하셔야 겠네요."
"예, 그래서 아무래도 유진이 과외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거든요."
전화를 하면서도 발로는 걸레를 밟아 바닥을 대충 슥슥 닦아보고 있었다. 으으... 걸레로 닦은 부분이 더 더러워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고양이 손이라.... 호호. 그럼 제가 고양이 한 마리 보내드릴까요?"
"네?"
"조크예요, 조크. 농담이라는 뜻이죠."
"아, 예...."
"혹시 선생님 댁이 K대학 뒤에 있는 OO동 맞죠?"
"네? 맞습니다만...."
"음... 여기 주소 적어놓은게 있네요. 알았어요. 유진이에게는 제가 말해두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사방에 있는 쓰레기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를 찾아다가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옷가지는 그러모아 세탁기에 처넣었고 어디 처박혀 있었는지 지난 몇 주간 구경도 못 했던 빗자루를 간신히 찾아다가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자욱한 먼지가 일고 걸레로 닦아내는 부분마다 장판 본래의 색이 살아났다. 물건을 정리한답시고 들쑤시다가 선반도 엎어뜨리고 아주 장난이 아니다.
"흐아......"
이 정도면 대충 되었겠다 싶어서 허리를 펴고 방을 둘러본다. 그런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꾀죄죄한 꼬라지는 여전했다. 일단 쓰레기를 버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현관을 열고 나갔다. 집 근처 버리는 곳에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려는데 리사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한석 씨. 좋은 아침이에요."
"그...그런가요. 전 그닥 좋지 않네요."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게요오...."
뒤통수를 긁적이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가 오기로 했는데, 방 너저분하게 하고 있으면 잔소리만 2박 3일 동안 듣거든요. 그래서 지금 청소하느라 정신없어요."
"어머, 그러시구나."
리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고양이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손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그리고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살짝 놀란 척 했다.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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