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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유진에게 바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학교를 빠져나온다. 4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땡땡이를 쳐보다니, 환장할 노릇이다. 뛰어가려다가 급한 마음에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유진이네 아파트로 향한다. 집으로 가서 벨을 눌러도 유진이가 나오질 않는다. 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아.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이네 집 현관은 넘버락 시스템이었다. 전날 유진이를 데려다주면서 녀석이 누르는 번호를 무심코 봐버리고 말았었다. 외우기도 심플했다. 이 집 전화번호 마지막 네 자리였으니까. 번호를 누르니 경쾌한 비프음과 함께 락이 해제되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유진아."
집 안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유진이를 불러보았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안처럼 황량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가 유진이 방으로 다가간다. 노크를 하고나서 기다렸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전화를 끊은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은 터였다. 집에 없을 리가 없다.
문을 살짝 열었다.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벽에 연예인 브로마이드 한 장도 붙여 놓을 만도 한데 그런 건 전혀 있지 않은 참 담백한 방안이었다. 방의 인상이 참으로 녀석 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일한 장식이라면 장식일까. 어디서 많이 본 눈만 커다란 인형이 창가에 올려져 있다. 예전에 내가 서점에서 나오면서 사준 그 인형이다.
침대로 다가가니 이불을 둘둘 감싼 채 누워있는 유진이가 보였다.
"유진아. 자니?"
침대로 다가가 살펴보니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하나 가져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숨소리가 몹시 거칠다. 자고 있는 건지 깨어있는 건데 아무 말이 없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어깨를 짚고 살짝 흔들어본다. 그제서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아저....씨?"
"알아보겠냐? 어디가 안 좋아? 속 많이 안 좋아?"
"추워요....."
"춥다고? 감기인가?"
손을 이마에 대본다. 불덩이 같다. 어제부터 어쩐지 몸이 뜨겁더라니. 몸살이 분명하다. 이불을 잡아 당겼다. 녀석이 이불을 놓지 않아 잠시 끌려왔다.
"춥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안 돼. 너 몸에 열을 내려야 된다고."
"추운데....."
"허이구.... 집에 혹시 해열제나 뭐 그런 거 있어?"
고개를 젓는다.
"밥은 먹었어?"
다시 한 번 도리도리.
"빈속에 약 먹기는 좀 그렇고... 일단 뭐라도 좀 먹은 다음에 약 먹자. 그 전에 몸에 열 낮추는 게 우선이야."
그제서야 고개를 좀 끄덕인다. 땀에 절은 머리와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온 몸이 땀투성이일 거 같다. 욕실로 가서 수건을 몇 장 더 가져왔다.
"먹을 거 있나 찾아볼 테니까 넌 그 사이에 옷 갈아입고 있어. 새 옷 입기 전에 수건으로 몸 좀 닦고. 땀 난 채로 있으면 더 안 좋아."
유진의 고개가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인다. 부엌으로 가서 뒤져보니 다행히도 밥통에 밥이 좀 있었다. 냄비 하나를 꺼내 밥과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간장을 찾는다. 밥과 물, 간장만 있으면 미음 정도는 쑬 수 있겠지.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는 나지만 어렸을 때 엄마가 이런 식으로 미음을 만드는 걸 가르쳐 준 적이 있다.
"엄마 혼자 니 키워야 허는디 니가 아프다고 드러누워 있으면 암것도 못혀. 그러니 니가 해먹을 줄 알아야 혀."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억쎈 이유로 죽 쑤는 법을 배웠구나 싶었다. 그래도 지금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주스 같은 것도 제법 있다. 주스 하나를 꺼내놓고 다른 걸 살핀다. 식재료도 있는 거 같긴 한데 내가 조리할만한 건 없었다. 밥이 어느 정도 풀어지도록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인다. 한참 저어보니 어느 정도 풀어진 것 같아 가스 불을 끈다. 유진을 불러서 먹여야겠다.
"옷 다 갈아입었어?"
방문을 두드리고 물어보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 들어간다?"
역시 대답이 없다. 다시 잠들었나, 설마? 행여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흐음. 미...미안!"
황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유진은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분홍색 브래지어만 차고 있었다. 아무리 애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작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가슴이 있다? 역시 커가면서 엄마를 닮는 걸까. 그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 너머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에는 나를 책망하거나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저씨.... 좀 도와줘요."
"뭐?"
"등에 손이... 안 닿아요...."
"그래도 내가 어떻게..."
"빨리요,....."
"그럼... 지금 들어간다?"
다시 한 번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젖은 티셔츠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유진이 있었다.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상체가 몹시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애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일단 곁으로 다가간다.
"티....하나.... 벗는데....힘..... 다 썼어....요."
"원래 젖은 거 벗는 건 좀 그렇지. 돌아봐봐."
침대에 나란히 앉아 녀석의 몸을 돌려 등을 대한다. 땀이 흥건한 등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브래지어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등만 닦아내려간다. 그런데 유진이가 팔을 뒤로 돌리더니 후크를 푼다.
"에에....!"
브래지어라도 하고 있다면... 그래, 그 뭐시다냐,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 등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이러면 경우가 완전히 달라진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가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이것도... 다.... ..젖었네요..."
"그...... 그러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애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 아닌가. 앙증맞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 브래지어는 그대로 바닥에 구른다.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유진의 등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앞쪽으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경이 펼쳐져 있겠지. 으으.. 상상은 하지 말자. 상상은. 이 녀석은 지금 아프다고. 수건으로 등 전체를 깨끗이 닦았다. 어깨와 옆구리를 닦을 때는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아래는 파자마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고무줄로 되어 있는 부분이 조금 내려가 있어서 녀석의 분홍색 팬티가 살짝 엿보였다. 그렇군. 브래지어와 같은 색깔이구나.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기에 서둘러 마무리하고 일어난다.
"자, 등은 다 닦았으니까... 앞은 네가 닦으렴."
등을 다 닦고 나서 일어나려는데.... 세상에나.
"잠깐만요."
내게 등을 보이고 있던 유진이가 몸을 돌린다. 이...인마! 너 지금 위에 아무것도 안 입은 상태란 말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그쪽을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유진은 태연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마저.... 닦아주세요......"
"그....그게....."
"왜요? .. 설마... 아픈 사람을 상대로 흥분을 하는 거예요?"
"그럴 리 없잖아. 이 바보야."
이 녀석 정말 아픈거 맞나. 이럴 때만 말투가 아주 또박또박이다. 물론 꾀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몸의 열이나 땀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흠흠. 알았어. 빨리 닦아줄게."
"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아 녀석의 앞부분을 닦기 시작한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여자의 알몸은 남자로 하여금 달아오르게 만드는 묘약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평소보다도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지만 두 뺨만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만히 감고 있는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녀석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뭐해요... 지금 감상하는 거예요?"
"아, 아냐!"
얼굴 아래쪽으로는 안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안 보고 닦으려니 더 이상하다. 제대로 시선을 몸에 두고 수건으로 녀석의 몸 전체를 닦아준다. 작은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둥근 유방도, 그 위에 살짝 얹어놓은 듯한 분홍빛 유륜과 유두도.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따라 들락날락 하고 있는 뽀얀 뱃살 부분도 너무도 뇌쇄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빨리 뇌리에서 지워야만 한다. 오래 보고 있으면 나까지 열이 옮아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수건 너머라고는 하지만 살결을 따라 움직이는 내 손에 와 닿는 그 느낌이....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다.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내 말초감각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여자 알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왜 이럴까.
"다... 다했어. 얼른 옷 입어."
다 닦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수건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난다. 그제서야 유진이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더니 옷장 쪽으로 다가간다.
"잠깐만... 나가 있어 주세요. 아래쪽은 아무리 아저씨라도 맡기긴 무리라고 생각해요."
"알았어. 알았다구."
그럼 위는 지금처럼 계속 맡기겠다는 소리냐. 이런 고마운.... 아, 아니지. 나도 모르게 달아올라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유진 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쓴다. 부엌으로 나가 아까 끓여둔 미음을 그릇에 옮겨 담는다. 간장도 작은 그릇에 따라 담아둔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아까의 장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유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선영이 대체 왜 여기 없는 걸까 싶다. 그녀가 있다면 내가 이렇게 고마운 상황.... 아, 아니지.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내가 진정 선영을 필요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잠시 후, 유진이가 밖으로 나와 식탁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꽤나 흔들거리는 게 몹시도 불안했다. 위아래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 같다. 의자를 당겨 앉게 해주었다. 녀석의 앞에 미음과 간장 그릇을 놓는다.
"있는 거로 끓인 거거든. 일단 먹고 있어. 내가 나가서 해열제 사올게."
"아뇨. 거기 앉아주세요."
"응?"
"혼자 밥 먹는 거 싫어요."
녀석이 중얼거리듯이 꺼낸 말이 너무도 가련하게 느껴졌다. 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진은 느릿느릿하게 숟가락을 움직여 미음을 조금씩 떠먹었다. 녀석이 한 그릇을 비우는 데는 꽤나 오래 걸렸다. 미음을 다 먹게 하고는 주스까지 마시게 한다.
"그럼 이제 나가서 해열제 사올게."
"잠시 만요."
"또 왜?"
"잠시만.... 그냥 기다려주세요."
열기운 때문인지 녀석의 표정은 좀 멍해보였다. 상체를 다소 기우뚱하기에 옆 자리에 옮겨 앉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녀석은 땀으로 젖은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로 조용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근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우리 집에?"
"그...그게 열려있던데?"
"거짓말."
역시 거짓말은 내 체질이 아니다. 그리고 유진이가 내 거짓말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녀석도 아니기에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흐음. 사실 어제 니가 누를 때 봤다. 미안. 나 가고 나면 다른 걸로 바꿔."
"아뇨. 그냥 둘게요."
내 어깨에 기댄 녀석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러면 내가 막 들어오고 그럴 텐데 괜찮아?"
"들어오세요. 저도 아저씨네 막 들어갈 테니까."
"하하하. 그건 좀 곤란한데..."
"근데 말예요."
"응?"
"제 가슴.... 어때요?"
아픈 녀석만 아니라면 확 밀어버린 다음에 한 대 쥐어박았을 테다. 그러나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가볍게 미는 정도로 참기로 했다.
"이제 다 나았나보다. 헛소리 하는 걸 보니."
"그렇게 별로예요?"
".....됐다. 아무래도 해열제나 사러 다녀와야겠다."
"역시 너무 작은 걸까...."
"시끄러, 인마!"
봉긋한 모양새도 나쁘지 않았고 작지만 감촉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색과 모양이 잘 잡힌 유두도 이뻤노라고 말하면, 으아. 내가 너무 변태가 된 거 같잖아!! 유진을 의자에 바로 앉혀두고 일어나려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유진아! 이제 좀 괜찮.....어라?"
선영이었다. 뭔가 손에 들고 들어오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멈칫한다.
"한석 씨가 여기 왜 있죠?"
"어... 그게요...."
대답을 못 하고 버벅이고 있으려니까 유진이가 대신 답한다.
"내가 불렀어. 언니. 약은 사왔어?"
"응.. 그래. 일단 죽 사왔으니까 이거 먼저 먹고 약 먹어."
선영이 들고 온 건 포장되어 있는 죽그릇이었다. 해열제도 꺼내놓는다. 유진은 해열제만 집어 들며 말했다.
"선생님이 먹을 거 챙겨줬어. 나 약 먹고 일단 잘게."
"그래. 얼른 쉬어."
유진은 약을 먹고 나에게 꾸벅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을 따라 방에 들어갔던 선영은 금방 나왔다.
"잠들었나요?"
"자겠죠."
선영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심상치 않았다.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 하겠다.
"유진이가 불렀다구요?"
"예..."
"어디로 연락했는데요?"
"에.... 그게..... 어디였더라."
집요한 여자 같으니. 그냥 그러면 그렇다고 알 것이지 따지냐 따지기는. 대충 집으로 연락이 왔노라고 대답했더니,
"지금 시간이면 학교에 계실 때 아니었나요? 지난번에 저한테 주신 시간표대로라면 그렇게 되어있던데요."
끄윽. 그러고 보니 전에 과외 수업 시간 잡느라고 학교 시간표를 준 적이 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냐.
"휴강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집에 좀 있었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그녀는 유진의 방문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이내 또 나를 쳐다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내게 손짓한다.
"가시죠."
"예? 어딜?"
"일단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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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Q : 유미 씨, 혹시 You mean everything to me라는 노래 아세요?
유미 : 어머나, 박정현 씨가 부른 그 노래 맞죠?
Q : 아니.. 지금 이야기의 배경은 아직 그 노래 나올 연도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유미 : (생글생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