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5화 (4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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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내가 고등학생들 쪽으로 다가가 협상을 벌인다. 3대 3으로 반코트를 하던 녀석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각 팀에서 한 명씩 쉬겠단다. 나는 팔을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가고 예린은 안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갔다. 가위바위보로 선공을 정하고 30점 내기게임을 시작한다. 우리 팀의 선공이었다. 내 손에서 우리의 공격이 시작된다.

"일단 천천히!"

드리블을 유지한 채로 바깥에서부터 안쪽을 살핀다. 원래 있던 고등학생 녀석들끼리는 맨투맨 마크가 붙었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전력을 파악하고 있겠지. 예린이 내 쪽으로 온다. 슛이야 방금 보았는데 수비 실력은 어떨까. 자랑이라면 자랑이겠지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농구를 할 때에 과감한 돌파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름을 날린 이 몸이다. 외곽으로 서서히 돌다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다. 예린을 힐끔 살핀다. 안정적인 낮은 자세에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모범적인 마크. 쉽게 파고들기 어렵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일단 몸으로 밀어붙이고 안으로 도는 척을 하다가 바깥쪽에 있는 팀원에게 패스했다. 예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사이에 돌아들어가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든다.

"여기!"

높게 들어오는 패스. 점프해서 낚아채고 땅에 닿자마자 재차 점프하여 슛을 한다. 백보드를 맞고 들어간다.

"한석 씨! 화이팅!"

내 쪽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며 응원하는 리사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예린 팀의 공격이 시작된다. 내 담당은 역시 예린. 드리블이 나쁘지 않다. 안쪽을 향해 무리하게 돌파하려고 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 파고들다가 외곽으로 공을 돌린다. 한 명이 노마크가 되어서 그쪽에 신경이 팔린 순간 예린에게 공이 돌아갔고 순간적으로 내가 예린을 놓쳤다. 그녀가 가볍게 슛을 던진다. 역시나 클린샷. 게다가 3점 라인 바깥이다.

"언니야! 화이팅!! 이기고 있데이!"

이번에는 마리가 펄쩍펄쩍 뛰며 예린을 응원한다. 호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무래도 내 응원단은 리사이고 예린 응원 담당은 마리로 정해진 것 같다. 여자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불타오른다.

그 이후로 주로 에어리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막으려는 예린의 마크, 외곽에서 기회를 잡아 슛을 던지려는 예린의 찬스 노리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나의 움직임이 번갈아 펼쳐진다. 점수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예린이라고 무조건 3점만 노리는 건 아니었다. 자기편에 볼 돌리는 것도 꽤나 정교했고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레이업도 시도한다. 고등학생들에게 공을 돌리는 동안에도 예린과 나의 몸싸움은 치열했다. 특히나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할 때는 거의 등짝을 비비다시피 하여 뛰어올랐고 에어볼 다툼은 싸움을 방불케 했다. 점프슛을 막으려 들 때는 공중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적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예린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몸을 붙이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게임이 격화되면서 붙어보니 이건 뭐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키는 나보다 좀 작을지 몰라도 점프력이나 몰아붙이는 힘은 남자 그 이상이다. 치열하게 마크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후아...후아...후아...."

가볍게 한 판 뛰려고 했었는데... 이게 어딜 봐서 대체 가볍게인지 모르겠다. 땀이 장난 아니게 흐른다. 등에 달라붙는 셔츠의 느낌이 꽤나 거추장스럽다. 아웃볼이 된 사이에 웃통을 벗어버렸다. 고등학생들 녀석들도 한 놈을 빼고는 다들 이미 웃통을 벗어버린 후다. 봄 날씨치고는 햇살이 꽤나 뜨거웠다. 예린을 힐끔 쳐다본다. 물론 그녀도 재킷은 벗어놓은 터지만 그렇다고 안에 입은 드레스셔츠까지 벗지는 못 하겠지. 예린도 꽤나 땀이 날 텐데 선글라스도 여전하다.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덥다.

"꺄아- 한석 씨! 화이팅!"

리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손을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코트로 향한다. 제법 구경꾼까지 몇 명 있을 정도로 게임이 재미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꽤나 잘 해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예린과 나의 경쟁이 치열했다. 몸싸움에서는 내가 좀 더 낫고 슛 쪽에서는 예린이 앞서고 있었다.

다만 내가 웃통을 까고 나니 예린이 좀 당황하는 눈치다. 몸싸움에서 되도록이면 안 붙으려고 몸을 떨구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 왠지 치트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시합은 시합이다. 손오공도 웃통 까면 전투력이 올라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30점 내기로 했는데 우리 쪽은 아직 4점이 남았고 저기는 3점슛 한번이면 끝날 점수다. 샤프 슈터가 있는 저쪽에서라면 단번에 끝내버릴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골을 무조건 넣고 다음 것을 막은 다음에 또 넣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

바깥쪽에서 날 부르는 녀석에게 볼을 돌리고 링 아래쪽을 향해 돌진한다. 왼쪽으로 주춤하다가 쏜살같이 오른쪽으로 턴해서 파고 들어간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진로 상에는 예린이 서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꺄!"

"으악!"

내 어깨에 그녀 얼굴이 부딪힌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몸을 뒤로 뺀다. 그대로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다. 예린도 마찬가지 였다. 나와 반대방향으로 넘어지는 그녀가 보인다. 바닥에 그녀의 선글라스가 뒹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눈을 의심했다. 뒤로 넘어지던 예린은 그대로 백덤블링 하듯이 바닥에 손을 짚고 한 바퀴 돌아 몸을 세웠고 거기에다가 몸을 곧추 세우기도 전에 바닥의 선글라스를 낚아채어 얼굴에 썼다. 무...무슨 중국 기예단이냐! 변검술이냐!! 농구를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코트에 우뚝 서 있던 예린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는지 손을 털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흥이 깨졌군요."

그러고 나서는 코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라, 아직 시합도 안 끝났는데! 그러나 바로 그 때, 리사가 스포츠 음료가 담긴 페트병을 가지고 오면서 모두에게 권했다.

"다들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우리와 같이 게임을 뛴 고등학생들에게도 일일이 종이컵을 들려주고 음료를 따라주었다. 다들 감사해하며 감로수를 마시는 것 마냥 목을 축인다. 리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음료를 따라주며 물었다.

"저희 아직 갈 곳도 많이 남았는데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때요, 한석 씨?"

"그...그럴까요?"

리사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몸에 흐르던 땀이 식고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고등학생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결말이 흐지부지해졌지만 함께 뛰는 동안은 좋은 전우였고 또한 좋은 상대였다. 남은 음료수를 그들에게 안겨주고 돌아선다. 이미 저 쪽에는 마리와 예린이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는가 싶었다.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리사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저.... 혹시 예린 씨 말인데요. 저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도...."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사가 살짝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한석 씨 겉으로 볼 때는 그냥 말라 보였는데 꽤나 근육질이던데요? 덕분에 좋은 구경 잘 했어요."

"예? 아.... 예....."

이쯤 되면 아무리 둔감쟁이 나라도 눈치를 채고 만다. 그녀는 예린의 선글라스에 대해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게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감히 리사에게는 대들지 못 하겠다. 잠자코 따라간다. 차에 올라탄 우리가 이동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어 리사가 셔츠를, 마리가 바지를, 거기에다 예린까지 나서서 신발을 선물이라고 사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으로 바뀐 채로 백화점을 나섰다. 이거 너무 부담스러운데.... 리사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물었더니 아까 옷이 좀 별루란다. 살짝 물어보았다.

"아까 옷은 .... 그렇게나 별루였나요?"

리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쁘지는 않았는데 너무 노티나 보인다고나 할까요. 옛날식 정장이잖아요."

"그...그랬나요?"

정장에도 옛날식이니 요즘식이니 하는 게 있는 건가. 패션의 길은 참 아리송하다. 그러다 문득 뭔가 꺼리침한 게 있어서 리사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옛날 옷이라고 했죠?"

"네."

"그럼 혹시 얼마나 오래된 옷인지 아세요?"

"모양만 보고는 글쎄요... 근데 남자 정장 모양도 은근히 유행이 있는 법인데, 한석 씨가 입고 있던 옷은 적어도 십 년도 전에 유행이 지나간 옷이에요."

"십 년이나요?"

원래 내가 입고 나간 정장은 유진의 집에서 얻어 입은 옷이었다. 유진이는 그게 원래 자기 집에 있던 옷이라고 했고, 유미는 내 옷이니 그냥 입으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옷은 마치 날 위해 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냐면, 유미가 나 입으라고 최근에 사다놓은 옷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사는 그 옷이 적어도 십 년은 된 옷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러세요? 새로 산 옷이 마음에 안 드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손을 내저으며 웃어보였다.

"아뇨.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생각나서요."

생각해봐야 답도 안 나오니... 빨리 잊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더블데이트 아닌 더블에 더블 제곱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빌라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에 익은 교복. 짤막한 키에 단정한 얼굴.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어라? 니가 여긴 웬일이냐?"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예요. 아저씨 선물이나 줄까 하고."

지나가다가 들른 거 치고는 꽤나 오래 기다린 것처럼 보이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만 했을 텐데 아직까지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여태 집에도 안 가고 나를 기다렸다는 건가. 불현듯 선영의 경고 아닌 경고가 떠오른다.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유진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어머, 유진이구나. 그날 잘 들어갔니?"

뒤따라오던 리사가 유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유진은 리사 얼굴을 힐끔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러나 뒤이어 오던 마리는 본 척도 않는다.

"얼래? 니 오늘도 놀러왔네? 웬일이고?"

".......이거나 받아요."

녀석은 마리의 말에 대답도 않고 나에게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드니 신발상자 절반 정도 크기의 박스가 안에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나 간 다음에 풀어봐요. 저 갈게요."

유진이는 그대로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더니 훌쩍 가버렸다. 내가 어벙벙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민다. 돌아보니 리사였다.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데려다주고 오세요. 여자애 혼자 보내면 안 되죠."

"네? 네...."

리사의 말은 뭐랄까. 강요하는 투도 아니고 명령하는 투도 아닌데 왠지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포스가 느껴진달까. 종이가방을 그녀에게 맡기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다. 유진이가 간 방향으로 달려가 보니 녀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따라붙어서 어깨를 짚었다.

"또 걸어가려고?"

"까....깜짝이야. 왜 따라왔어요?"

"왜냐니? 데려다주려고 그러지."

"쳇."

입을 삐죽 내민다.

"뭐가 쳇이야? 쳇은. 고맙다고 하지 못할 망정."

"고.맙.습.니다.참.으.로."

어쩐지 진심이 담긴, 그러니까 정말 고마워하는 마음 말고 다른 방향으로의 진심이 많이 담긴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나한테 살짝 혀를 내민 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택시 안 탈래?"

"됐어요. 걸어갈래요."

"별로 가깝지도 않은데....."

"그 때 걸어가 보니 갈만하더라구요. 왜요? 저 빨리 들여보내고 돌아가서 아까 그 아줌마들이랑 또 놀려구요?"

"아줌마들 아닌데? 다들 미혼이야."

"미혼이든 뭐든요. 그래봐야 아줌마지. 쳇. 그런 아줌마들이랑 시시덕거리고 놀다오기나 하고...."

10대가 볼 때는 20대가 아줌마로 보이는 구나... 하긴 나만 해도 80년대 학번인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아저씨로밖에 안 보이겠지.

"내가 언제 시시덕거렸다고..."

"아까 보니 딱 그렇던데요. 헤벌쭉~ 해가지고."

"하아... 말을 말자."

이럴 때 보면 이 녀석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나 싶다. 하나하나 트집 잡아 시비 못 걸어 안달복달 하는 모양이 아주 그냥 고양이 쥐 잡듯이 군다. 골목길이 끝나고 큰 길로 나왔다. 한참 말없이 걸어가던 유진이가 다시 묻는다.

"오늘... 뭐 했어요?"

"뭐하다니?"

"아침부터 나가가지고 하루 종일 뭐했냐구요."

"뭐하긴. 남산 갔다가 대학로 갔다가 백화점 갔다가..."

근데 뭔가 이상하다.

"근데 내가 아침에 나갔는지 어떻게 알아?"

대답이 없다.

"너 말야 혹시...."

그러자 유진이 내 말을 끊는다.

"전화했었어요. 아침에."

"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할려구요."

"그랬어? 음... 암튼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다. 니가 기다릴 줄은 몰랐지."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아닌 걸로 치자."

자신은 결코 나를 기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꼬맹이 녀석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오늘은 자기 집에 들어오란 소릴 하지 않는다.......... 다행이긴 한데 왠지 좀 서운하기도 하다면 내가 너무 속보이려나?

돌아와 리사에게서 종이가방을 돌려받았다. 집에 가서 열어보니 예전에 내가 유진에게 사준 적이 있는 눈이 크고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랑 같은 종류의 인형이었다. 뭐냐, 이 녀석. 남자한테 뭐 이런 선물을 하는 거야. 일단 인형을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걸 보고 있자니 좀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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