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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선영과 그녀의 어머니 산소를 다녀오고 약 2주가 지났다. 그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변화가 생겼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아니, 산소를 다녀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 낮 시간에 그녀의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내 아래쪽에서 알몸의 그녀가 열심히 내 물건을 빨고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꾸었을 텐데 말이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목요일이라 오전 일찍 그녀의 집에 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선영의 오피스텔로 돌아와 한 차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행위를 마치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누워 있다가 다시 시동을 걸러 내려간 그녀의 머리를 바라본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내 배를 간지럽힌다.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참, 나 다음 주부터는 과외 못 오는데...."
선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타고 올라온다. 입에서 떼기 전에 물고 있던 것을 한번 쭈욱 훑어주는 맛이 아주 감칠 나다.
"왜? 어디 가?"
"나 다음 주부터 교생실습 나가거든. 여태까지는 화, 목에 낮 수업이 없으니까 너 과외 하러 왔던 건데 실습 중에는 그게 안 되거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수업해야 해."
"흐음. 나야 뭐 알아서 공부하면 되겠지만 자긴 괜찮겠어?"
"뭐가?"
"이 녀석이 안 아쉬워하겠냐고."
배 위에 올라탄 채로 그녀는 손을 뒤로 돌려 내 물건을 잡고 살짝 흔든다. 방금 전까지 입 안에 머물러 있느라 팽창할 대로 팽창한 녀석이다. 그렇게 쥐면 아프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살짝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 자신의 안쪽으로 집어넣는다.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내는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빙긋 웃게 된다.
"듣고 보니 그럴지도...."
"흐음. 그럼 지금 많이 할까?"
"그럴까?"
그 날 이후, 뭐랄까. 선영은 사람이 좀 변했다. 우선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밝은 색의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말수도 많아졌다. 나와의 과외가 끝난 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계를 가졌다. 오늘처럼 과외 시간보다 좀 이르게 와서 그녀랑 점심을 같이 먹기도 하고 그녀가 일을 쉬는 날은 그녀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단, 그녀가 밥을 하지는 않고 같이 나가서 사 먹었다. 집에서는 밥 안 해먹냐고 한번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래 살고 싶으면 자기가 한 밥은 먹지 말란다. 그... 그 정도입니까? 어쩐지 그 때 유진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 때도 직접 죽을 만들지 않고 나가서 사오더라니....
다시 한 번 사정을 마친 후, 그녀에게 팔 하나를 내주고 가만히 누워 있다. 연이은 사정이 나를 몹시도 나른하게 만들었다. 아직 유진이네 가려면 시간이 남아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선영이 묻는다.
"유진이한테도 교생실습 이야기 했어?"
"아니, 아직."
"왜?"
"걔네 학교로 나가는 거라서 말야. 좀 놀래켜 줄려고."
"그런다고 유진이가 놀라려나?"
"......뭐, 워낙 포커페이스긴 한데 그러니까 한번 골려볼려구."
유진이하고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과외를 하면서 혼자만 문제 푸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통에 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가야만 했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슬슬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선영은 내가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주었다. 워낙 드나들다 보니 이 방에는 내 옷이 몇 벌 있었다. 선영이 현관까지 배웅한다. 신발을 신으며 그녀에게 묻는다.
"오늘은 쉬는 날이야?"
"아니."
"그래? 알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응."
그녀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집을 나선다. 유진이네를 향해서 걸어가면서 선영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딱히 사귀거나 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우리의 행위는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그녀와 나는 대체 어떤 사이라고 해야 좋을까.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육체적이다.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감정의 교류가 빈약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친구도 연인도 아닌 묘한 이중의 계약관계. 하나는 성문화 되어있는 금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진이를 두고 얽혀있는 육체적 관계이자 구두계약이다. 어느 것 하나 남에게 쉽게 드러낼 수도, 알릴 수도 없는 지극히 프라이빗한 관계다. 누구에게 상담할 수도 없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든다. 유진이네 도착하니 녀석이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왔네?"
"아저씨가 늦게 온 거죠."
"그런가?"
"전에는 제가 오기 전에 기다리더니 요새는 자꾸 늦네요?"
"그럴 일이 좀.... 있어."
대충 얼버무리면서 내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유진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그 중학생 과외, 지금도 하는 거죠?"
".....그렇지, 뭐."
"그 공부 못 하는 애 말이에요."
"아니, 지금은 곧잘 해."
내가 중학생(?)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하자 유진이는 점점 골이 난 표정이 되었다.
"걔는 아저씨 말 잘 들어요?"
"그럭저럭. 너보다야 잘 듣지."
"혹시 가슴이 크다거나...."
"넌 맨날 생각하는 게 왜 그 모양이냐!"
아아, 슬슬 지겹다. 지겨워.
"예뻐요?"
녀석은 지난번에도 물어본 적 있었던 말을 또 묻는다.
"그래, 이쁘다. 무진장 이뻐. 아주 예뻐 죽겠더라구."
"........."
하도 귀찮게 묻기에 좀 귀찮아서 대충 이렇게 대답했더니 유진이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문제집을 펴더니 혼자 풀기 시작한다. 30분, 1시간..... 암 소리도 안 하고 문제만 푼다. 넌지시 묻는다.
"모르는 문제 없..."
"없어요."
우와.... 아주 단칼에 잘라버리는 대답. 말로 사람을 칠 수 있다면 아주 그냥 대형 교통사고가 날 정도로 살벌한 말투다. 찍소리 하지 않고 내가 보던 책만 들여다본다. 2시간이 그렇게 지나자 그제서야 녀석이 한 마디 한다.
"나보다요?"
"뭐?"
순간적으로 뭔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유진이 성질을 낸다.
"예쁘다면서요. 나보다 예뻐요?"
순간 속으로 심술이 나서 "너보다 이쁘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녁도 안 시켜주고 내쫓을 것 같아서 일단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대답을 선택했다.
"........음... 너보단 안 이뻐."
그러자 유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 마디 한다.
"쳇, 그럼 그렇지."
"하아... 넌 니가 이쁘다고 생각하냐?"
"당연하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니까 딴지를 걸래야 걸 수가 없다.
"예뻐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예, 예."
"지금 놀리는 거예요?"
"하이구, 이렇게 이쁜 분을 어찌 감히 놀립니까. 그럴 리가요."
"이씽~"
유진의 팔이 잠시 내 팔뚝을 투닥였다. 이 녀석이 요즘 이렇게 폭력이 늘었다. 참을 수 있는 정도만 참다가 준비해왔던 말을 꺼낸다.
"그건 그렇고... 나 다음 주부터는 과외 못 할 거 같은데 말야."
날 때리던 손이 우뚝 멈추더니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안 그래도 눈이 큰 녀석이 그렇게 뜨니까 아주 그냥 얼굴 절반이 눈이로다.
"그....만 둘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말야. 한 달 정도 어디 좀 다녀와야 되거든."
"한 달이나....? 어디요?"
"응. 먼 데는 아닌데, 시간은 내기 어려울 거야. 딱 한 달이라서 그 이후에는 과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나 없는 동안 마리에게 좀 부탁해둘까?"
시무룩한 표정의 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됐어요. 그 아줌마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녀석이 하도 침울해버리기에 사실은 니네 학교로 교생 실습 나간다! 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녀석을 성공적으로 놀려먹기 위해서 꾹 참았다. 어디 가는 거냐고 꼬치꼬치 묻는 녀석의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답을 피했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집을 나서는데 유진이 따라와서 내 옷깃을 잡는다.
"한 달 후에는 돌아오는 거죠?"
"야야, 내가 무슨 죽으러 가냐? 나중에 보자."
"알았어요."
풀이 죽어있는 유진이라니. 꽤나 낯선 모습이다.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켕기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기회에 유진이를 놀려먹지 언제 놀려먹나 싶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교생실습에 대해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금요일을 보내고 토요일에는 리사와 외출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리사와 예린과 함께 한 외출이었다. 마리는 친구들이랑 놀러간다며 나가고 없었다. 애초에 리사에게 부탁했던 일이라 그녀만 있어도 되긴 했지만 예린은 거의 항상 리사의 뒤를 지키고 있는 터라 리사의 그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본의 아니게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외출한 모양이 되었다.
"안 그래도 한석 씨에게 토요일 날 시간 좀 내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잘 되었네요."
"그런가요? 암튼, 오늘 조언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너무 캐주얼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또 딱딱하지 않게 코디해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말하자면...."
"한석 씨가 선생님이라니.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예린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에 나란히 타고 가고 있으니 예린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게 당연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리사에게 교생 실습 동안 입을 옷에 대해 조언을 구했더니 주말에 자기가 시간을 내어 같이 사러 가주겠단다. 이렇게 어여쁘고 고마울 데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리사가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근데 요즘 한석 씨가 많이 바쁘신가 봐요? 가끔은 아침에도 들어오시고..."
굉장히 뜨끔했다. 요새 그녀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먹는 생활을 하다 보니 선영이네서 자고 오거나 하는 날은 대번에 표가 났기 때문이다.
"아핫.... 그게요, 그러니까....."
뭐라고 변명해야 되나 횡설수설하고 있으려는데 시트에 올려놓았던 내 손에 와 닿는 리사의 손이 느껴진다. 그녀는 내 손을 살짝 잡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주세요."
"네?"
이건 무슨 또 소리일까.
"분명 좋은 분이니까 한석 씨도 마음을 쏟고 계시겠죠?"
"아, 네에....."
마음이 아니라 정액을 쏟고 있습니다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내 어설픈 대답을 기점으로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리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일부러 손을 빼는 것도 좀 뭣하고 해서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손의 느낌이 나에게 전해진다. 살짝 두근거린다.
리사는 참 이상하다. 아니, 특이하다. 어찌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 나를 항상 챙겨주고 돌봐주고 있다. 나야 외동아들이니 친누나가 없지만 암튼 그런 느낌이 든다.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하고 다니는 모양새에 대해 딱히 탓한다기 보다는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하긴 내가 설령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한들 나랑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닌 리사가 아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대체 이 아가씨의 사고방식은 어떤 식인지 궁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차가 대학로에 도착했다. 리사가 좋아하는 명동에 갈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내 옷을 사자는 목적이 아니라 리사가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릴 위험이 있는 고로 대학로로 타협을 보았다. 남성용 옷을 파는 가게도 제법 있어서 몇 군데를 돌면서 출근용 복장을 맞춰본다. 전체 가게를 돌아본 후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아까 갔던 가게 중에서 어떤 게 괜찮은지에 대한 리사의 조언을 따라 정장바지 몇 개와 컬러풀한 와이셔츠 몇 개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부터 리사가 또 자기 옷과 마리 옷 쇼핑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쇼핑을 도와준 보답으로 저녁을 사기로 했다. 근사한 곳으로 가고는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적당한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양 손 가득한 쇼핑백들은 차에 미리 실어두고 나와 리사, 예린이 가벼운 차림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칼국수 3인분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막 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전자음이 울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예린의 품속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예린은 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가게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가게 유리창 너머 그녀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몸동작으로 보아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 언성을 높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린이 가게 안으로 돌아오더니 리사에게 뭔가 귓속말을 한다. 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거라면 태호 씨에게 일임한 문제 아닌가요?"
라며 예린에게 다소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다. 예린이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그렇긴 한데...."
모르긴 몰라도 일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예린의 표정이 어둡다. 아니, 선글라스로 가린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 리는 없지만 목소리 톤이라든가 태도에서 그런 게 느껴진다는 거다.
"그렇다면 예린 언니가 가보세요. 확인되는 대로 저에게 연락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예린은 내 쪽을 향하더니 어쩐 일로 허리까지 굽히며 인사를 한다. 나도 모르게 같이 일어나 응대를 했다.
"부디 리사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네? 네."
그리고는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무슨 일일까 싶어 궁금하기도 한데 리사는 예린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칼국수 냄비를 가리키며 내게 말한다.
"3인분을 시켰는데 어쩌죠."
"제가 많이 먹죠, 뭐."
뭔지는 모르지만 따로 묻지는 말아야할 문제인 것 같다. 예전에 리사와 마리가 이사올 때도 그렇고 예린의 분위기도 그렇고 .... 그녀들의 집안은 어쩐지 평범한 직종에 관련된 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대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리사가 가보고 싶어했다. 남의 대학에 들어가는 거라 좀 생소했지만 넓은 입구의 캠퍼스는 두 이방인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게다가 아까 칼국수를 많이 먹느라 배도 좀 더부룩하고 말이다. 좀 걸을 필요가 있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내 손을 리사가 잡는다. 왜 그런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앞만 보고 있다. 그대로 말없이 둘이서 나란히 걷는다. 캠퍼스 안에 웬 성당인가 싶은 모양새의 건물을 지나면서 리사가 말했다.
"저는 학교 다닌 적 없다는 거... 말씀 안 드렸죠?"
"그러셨나요? 몰랐는데요."
"후후.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요. 일 년 중에 따뜻한 때를 빼고는 병실에서만 내내 지냈어요."
"아아...."
"일찍 돌아가신 엄마 닮아서 그런 것 같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특별히 병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구요. 그냥 계속 잔병치레하고 몸은 허약하고, 그랬죠."
전혀 몰랐다. 물론 마리와 같은 나이일 텐데도 대학을 안 가는 거는 그냥 진학을 안 했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아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니. 몸이 굉장히 안 좋았나 보다.
"그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지냈는데요, 그것 때문에 바깥에 대한 환상이 정말 많았어요. 나중에 몸 좋아지면 해보고 싶은 걸 목록으로 적어보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도 집에 가면 어딘가에 노트가 있을 거예요. 1번부터 200번까지 번호를 붙여놓은...."
"그렇게나 많나요?"
"후후후. 한석 씨도 만약 침대에만 몇 달 동안 있어야 한다면 좀이 쑤셔서 못 견뎠을 걸요? 지금 못 하는 거, 나중에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막~ 왔다 갔다 할 거예요. 저절로. 저는 그런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군대 갔다 온 선배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거 같다. 어떤 선배는 6주간 훈련소에 있으면서 밖에 나가면 먹고 싶은 것만 적어 내려가는데 종이가 모자를 지경이었다고 했었지, 아마.
"예전 드라마 중에서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혹시 보셨어요?"
"아뇨. 전 TV를 별로 안 좋아해서...."
"저런,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걸 안 보셨단 말이에요?"
리사는 그때부터 홍학표가 멋있다느니 박철이 귀엽다느니 하는 내가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한참동안이나 했다. 딱히 내용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몹시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는 리사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적당히 대답도 해가면서.
"솔직히 최진실 이야기는 좀 별로였어요. 걔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전 그런 내용이 남 같지가 않아서 정말 펑펑 울면서 봤거든요."
최진실이 나온 에피소드는 그녀가 불치병에 걸려있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잦은 병치레를 하던 리사 입장에서는 자기 이야기 같으니 몰입이 되었으리라 싶었다.
"아, 예에...."
"대학 가면 다 저렇게 즐겁게 지낼까 싶어서 대학 공부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안 되겠더라구요. 검정고시도 조금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그랬죠."
"저런."
검정고시라고 하니까 문득 선영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검정고시를 권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시험에 대한 생각보다도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어떤 일정한 단계를 수료했다는 경험을 시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딴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리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그 때 리스트에 하나 추가했었죠. 유호정이 그랬던 것처럼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하고 싶다고요."
"그러셨군요."
"마침 멋진 캠퍼스에 와 있고, 또 제 곁에는 그보다 더 멋진 남자분이 있으니 소원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에. 그러셨구나.... 네엣?"
나란히 걷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의 말에 내 발이 딱 멈추고 만다. 리사가 두어 걸음 앞서 걷더니 뒤돌아본다.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여배우 같다.
"도와주실 수 있죠?"
"리사 씨....."
그러자 리사가 가만히 고개를 흔든다.
"전 좀 불만이에요. 마리한테는 맨날 편하게 말하면서 쌍둥이인 저한테는 왜 그런 어색한 호칭을 붙이세요? 마리와 저는 동갑이라고요."
"그....그거야."
아무리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라고는 하지만 어째 마리는 동생 같으면서도 리사는 누나 같아서 그랬다. 아니, 누나라기보다는..... 엄마?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리사를 쳐다본다. 입을 열어 그녀를 부른다.
"리사야."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빠."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져 가고 있으니 확 달아오른 내 얼굴이 들키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저 평범한 칭호가 이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좀 떨리고 더듬거렸지만 리사가 원할 것이 분명한 대사를 천천히 읊어본다.
"우리, 키....키스할까?"
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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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 전체를 통틀어 글쓴이의 손발이 가장 오그라드는 지점이 여기였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