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9화 (4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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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리사는 이미 없었다. 비어있는 옆자리에서 아직 리사의 체취가 남아있는 것 같다. 잠시 자리에서 뒤척이며 어제의 즐거움에 대해서 복기하고 있노라니 익숙한 밥 냄새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다. 지금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새벽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기지개를 쭈욱 펴고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있는데 문 밖에서 예린이가 식사하러 오라고 날 부른다. 밖으로 나갔더니 늘 한결같은 차림의 예린이가 서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어? 예린 씨는 어제 내려간 거 아니었어요?"

".....오늘 내려갑니다."

뭔 소리지? 어제는 급한 것처럼 가더니만.... 설마 다시 올라왔나? 뭔가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집으로 간다. 늘 그러하듯 리사네 집에 들어가니 평소와는 약간 다른 풍경이 보였다. 거실에 펼쳐진 아침 밥상이나 앞치마를 두른 리사의 모습은 여전했지만 한편에 놓인 커다란 여행용 가방은 분명 못 보던 거다. 리사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어.... 그래."

하마터면 전처럼 존댓말을 쓸 뻔 했다. 말을 놓는 것도 뭔가 좀 기분이 묘하다. 잠시 후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의 마리가 방에서 나와 상 앞에 앉으면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마리는 날 보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시선도 제대로 안 마주치고 고개를 옆으로 까딱여서 인사를 한다. 저 녀석에게는 언젠가 선배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교육이라도 시켜야겠군.

리사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어제의 일이 생각나 화끈거리는데 말이다. 뭐라 말을 못 꺼내겠다. 잠자코 밥만 먹는다. 내가 그래서 그런가.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하다. 예린이야 원래 누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거 외에는 말하는 법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항상 시끄러운 마리도 어째 얌전하고 리사도 생글거리기만 하고 아무런 말이 없다. 평소와는 어째 좀 다른, 그런 아침식사였다.

"오빠. 있잖아요."

"응?"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데 리사가 내게 말했다. 마리와 예린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리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저, 오늘 내려가요."

"부산에?"

"네."

갑자기 이게 뭔 소리지.

"갔다 오는 거지?"

"아뇨. 아예 내려간다고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다.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묻는다.

"그럼....... 언.....제 오는데?"

"당분간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깜짝 놀라 리사를 바라보니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간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원래 마리 자리 잡는 거 볼 양으로 올라온 거 라서요. 처음에는 며칠만 있으려고 했었는데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네요. 오빠 덕분에 재미있게 잘 지내다 가요."

"리사야...."

"이건 제가 따로 준비하거니까요. 꼭 입어주세요."

그녀가 내미는 상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는다.

"갑자기 왜 그래? 어제..... 일 때문이야?"

"그런 게 아니에요. 원래 더 빨리 내려갔어야 하는 거예요. 제가 하던 일이 있어서 저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었지만 계속 미루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어제 일은 오히려 제가 원한 거였어요. 후회하지 않아요."

"왜 미리 이야기 하지 않았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영영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또 볼 건데요, 뭘."

오히려 리사가 날 위로한다. 하아. 뭐랄까. 한숨만 나온다. 지혜도 그렇고... 어째 내가 좋아하게 된 여자들은 다 날 떠나는 걸까. 리사는 또 볼 거라고 이야기 하지만 부산이 대체 어디라고 쉽게쉽게 옆집 드나들 듯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미리 이야기를 해줬으면 내가 더 잘 해주었을텐데.... 너한테는 계속 신세만 졌잖아."

"신세라고 말하면 섭섭하다니까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전부 다 제가 좋아서 한 거라니까요."

리사의 얼굴이 내게 다가온다. 내 입술에 가볍게 와 닿는 감촉이 지극히 부드러운 동시에 몹시도 서글프다.

"또 봐요."

예린의 차가 빌라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리사가 올라탄다. 마리와 내가 나란히 서서 전송한다.

"그리고 오빠."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기 직전, 창문 너머 리사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한다.

"미안해요. 전 그렇게 착한 아이만은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그게?"

"제 선물 열어보시면 알 거예요."

당최 무슨 소리인줄 모르겠다. 리사는 마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마리야. 미안해."

"됐다고마."

"언니, 이해해 줄거지?"

"언니고 나발이고 퍼뜩 가라. 꼴도 뵈기 싫다 안카나. 내 니 말대로 허저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마리의 태도가 이상하다. 녀석이 자기 언니에게 저렇게 골을 내는 광경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리사는 그런 마리의 태도를 굳이 탓하지 않았다. 리사가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차가 출발한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리사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도 않는데 나 혼자 배웅을 계속한다. 멍하니 서있다. 마리가 팔을 잡아끌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를 본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리사와 몸을 섞던 침대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 원래 지혜 꺼였다. 지혜랑 여기서 하고 나서 그녀는 떠났다. 효진이랑도 했었는데 그 후로 녀석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연락도 없다. 내 생일잔치날 오긴 왔는데 뭔 가타부타 이야기도 없이 가버렸으니 종잡을 수 없다. 그리고 리사.

그토록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와 여기서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바로 다음날 아주 멀리 떠나버렸다. 대체 이건 무슨 징크스라고 해야 되냐. 이쯤 되면 이건 은행나무침대보다도 더 흉흉한 침대일런지도 모른다. 아예 내다버릴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침대가 있으니까 편하기는 하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다버리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린다.

"선배님요! 보소!"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힘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두들기다가는 조만간 부서지겠다, 이눔아. 머릿속 상념이 아직 정리도 안 되었는데 저런 쩌렁쩌렁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아주 머리가 복잡복잡하다. 현관에 가서 문을 연다.

"인마, 어차피 잠기지도 않았는데 그냥 들어....."

짙은 회색의 플레어스커트에 옅은 자주 빛의 블라우스.

".......리사?"

순간적으로 사람 이름을 잘못 말하고 말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마리가 인상을 팍 쓴다.

"머라꼬예? 선배님 짐 울 언니야 이름 불러쌌지예?"

"아, 아냐. 마리라고 했어."

"마, 됐심더. 이기나 받아예."

얼마 전 리사가 외출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마리를 보고 순간적으로 착각해버렸다. 평상시 마리가 절대 입지 않을 하늘하늘 거리는 옷차림이다. 웬일로 이런걸 입고 있지? 하긴, 리사가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숨긴 채 마리가 내민 상자를 받아든다. 아까 리사가 내게 주려던 그 상자다. 제법 크다.

"이게 뭔데?"

"지가 우째 압니까."

마리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오늘따라 영 녀석의 태도가 마뜩찮다. 지 언니 옷을 입어도 하는 짓은 원래 자기 하던 그대로다. 아까 생각했던 선배님 예절교육을 빨리 시행해야겠다. 혀를 끌끌 차며 상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포장을 풀고 상자를 연다. 거기에는 남성용 정장 자켓과 바지가 들어있었다. 어제도 샀는데 왜 이런 걸 따로 주는 거지? 옷을 꺼내든다. 그러자 상자 바닥에 깔려있는 작은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집어 든다. 봉투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강원도 춘천시 OO군 OO면 OOO번지

임복례 배상』

청첩장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받는 사람은 적혀있지 않았다. 일단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낸다. "저희 두 사람, 사랑과 믿음으로 새 가정을 이루어...."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문구다. 누구누구 씨의 아들 누구, 누구누구 씨의 장녀 누구.... 죄다 모르는 이름뿐이다. 아, 아니다. 그 중에 하나. 내가 아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임복례의 장녀 김지혜』

그렇다. 이건 지혜의 청첩장이었다. 이걸 왜 리사가.....? 게다가 결혼식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결혼식 장소는 춘천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리야! 마리야!"

앞집 문을 두드리자 인상을 찌푸린 마리가 나온다.

"와예?"

"이거....! 이거 대체 언제 받은 거야? 이걸 왜 리사가 갖고 있지?"

"그....그건...."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던 마리가 내 손에 들린 청첩장을 보더니 점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설명해봐.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일단... 선배님도 나갈 준비 하셔야 하지 않켔습니꺼. 안 그래도 시간됐는데 퍼뜩 준비하이소."

"대체 뭔데?"

"암튼예."

마리가 등을 떠밀어서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준비라니. 설마 지금 바로 결혼식장에 갈 준비를 하라는 거야? 그때, 바닥에 놓인 옷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입어야 하는 옷인가. 그런 건가. 잠시 후, 마리와 난 전철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마리는 며칠 전 리사가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고 난 리사가 선물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가는 길은 아는 거야?"

"중간에 효진이 언니야랑 만나서 가기로 했심더."

"너 효진이 연락처 알아?"

"접때 알려주던데예."

"접때가 언젠데?"

"와 지난번에 저희 집에 안 왔심니꺼?"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언제 물어봤심니꺼?"

"하아."

이 녀석한테는 화내봤자 아무 소용없다. 일전에 리사가 이 녀석에게 버럭버럭 화를 냈을 때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녀석이니 말이다. 그저 속으로 삭혀야 한다. 전철이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 두 사람도 말없이 조용했다. 몇 정거장 지나고 나서 마리가 내리자는 대로 내린다. 전철역 출구로 나와 마리와 함께 서있는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고?"

"야아. 쫌매만 있으면...."

출구에서 조금 벗어나 길가에 놓인 화단 하나에 기대어 선다.

"이제는 말해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게예...."

마리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또 한참을 주저하다가 혼자서 자기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더니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낸다. 녀석의 말은 하도 두서없고 횡설수설에 가까워서 내 머리 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조립하고 갈고 닦아야만 했다. 빠진 조각이 있으면 다시 따져물어야 했고 그렇게 한참을 추궁하고 추론한 끝에야 마리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에게 조별 과제 발표는 맡기면 절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마리의 말에 따르면, 지혜의 청첩장은 그 날, 그러니까 엄마가 와서 난리법석을 벌였던 날 말이다. 우리 집에 오던 효진이가 중간에 마리를 만나서 준 거였다. 효진이는 당연히 그게 나에게 전달될 줄 알고 별 말을 안 했던 모양이다. 근데 마리는 그걸 깜빡하고 있다가 자리가 파하고 내가 유진이를 데려다 준 사이에 기억해내고 청첩장을 꺼내들었다. 내가 돌아오면 주려고 했단다. 그러나, 그 때 그걸 막은 게 리사였다.

"지는예, 참말로 선배 오면 바로 드릴라 켔습니다. 근데 언니야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내보고 가만있으라 카더니...."

마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린다. 녀석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 와 닿는 건 아까 아침에 리사가 남긴 말 뿐이다. "전 그렇게 착한 아이만은 아니에요."

그렇다. 정말 그러네.

일단 리사는 자신이 서울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있는 동안 내가 지혜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최소한 자기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지혜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아. 정말 그 녀석은 날 좋아하긴 한 모양이다. 그런 리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지혜 결혼식에 입고 가라고 준비해놓은 것이 분명한 이 옷도 그렇고 결국은 내게 청첩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녀로서는 최소한의 양보를 한 셈이니까.

쓴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지만도 않다. 근두운을 타고 실컷 날아가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기둥에 이름도 써놓고 오줌도 갈기고 돌아왔더니 그게 부처님 손바닥 안 이었다는 걸 알게 된 손오공의 기분이다. 리사 녀석.... 말로는 다른 여자도 괜찮고 어떻고 하더니 결국은 이런 농간을 부리고 간건가. 이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니 어제 예린이가 한 행동도 이해가 간다. 그 전화가 어떤 전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예린이 부산에 간 것은 아니었다. 리사의 곁에서 잠시 비켜서기 위해서 그랬던 거지. 그 무뚝뚝한 얼굴로 나름의 연기를 한 건가.

"하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이리도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는 건지 모르겠다.

".......선배님요. 제 말 듣고 있는교?"

"듣고 있다니깐."

사실은 하나도 안 듣고 있지만 말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눈을 뜨고 마리를 보게 되면 다시 또 리사가 생각나서 괴롭기 때문이다. 리사. 요 앙큼한 계집 같으니라고. 물론 그렇다고 녀석이 미울 정도는 아니지만.... 고 계획적인 앙큼함에 허탈한 웃음이 자꾸 흘러나올 뿐이다.

"글면 대답을 해보소."

"뭐가아."

"아, 긍까예. 그게...."

마리가 아까부터 자꾸 뭔가를 말할라 하면서도 꽤나 주저주저한다. 오늘 아침도 그렇고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평소와는 다르게 구는 거지?

"하이씨. 마, 딱 묻겠심더. 내 좀 보소."

"그래. 물어라."

"보라니깐요."

내 팔을 잡아끄는 마리 때문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옆에 서 있는 마리를 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마리가 몹시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

"응?"

"간밤에 우리 언니야랑 대체 뭐 했심니꺼?"

녀석의 말이 내 귀를 뚫고 지나간다. 약 3초 정도.... 그 정도의 시간만큼 나는 정지해버렸다. 마리의 목소리가 신호로 변환되고 그게 뇌 속 전달 물질로 바뀌어 대뇌에 전달되었다가 거기서 의미를 파악해내고 그 의미가 가진 거대한 파급력이 커다란 해머로 변해서 내 뒤통수에 작렬할 때까지의 시간 말이다.

"뭐?!"

입이 떡 벌어진다. 이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 마리가 쏘아붙인다.

"뭔가.... 뭔가 이상한 거 했지예? 그렇지예?"

"아....아니, 그건 말야....."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니 언니랑 옷 싹 벗고 둘이서 한바탕 레슬링을 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니 언니가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준 미달의 표현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날 보는 마리의 표정은 꽤나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녀석은 몸을 살짝 비비꼬며 조용히 말했다.

"머, 언니한테는 얼추 듣긴 들었습니다만...."

"듣다니!"

아니, 이 자매는 대체 서로 무슨 이야기까지 하는 거야? 황당함에 말이 안 나와서 입만 벌리고 백치 아다다 흉내를 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때 우리 앞에 웬 커다란 차가 와서 선다. 평소에 잘 못 보던 차종이다. 아무래도 JEEP라는 회사가 우리나라 회사는 아닐 텐데 말이다. 이쪽 창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우릴 부른다.

"내가 좀 늦었지? 얼른 타."

운전석에 앉아있는 건 효진이었다. 마리가 효진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조수석으로 먼저 올라탄다.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에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던 나는 뒷자리로 비척비척 기어 올라간다. 효진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끼고 있던 옅은 갈색 빛이 나는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내게 눈인사를 보낸다.

"오오. 한석 군. 평소 후줄근한 차림하고는 영 딴판인데? 신경 좀 쓰셨나봐?"

아직 제정신이 아닌 내가 답을 못 하고 있으려니까 마리가 대신 답한다.

"저희 언니야가 사준 겁니다."

"아, 그래. 맞다. 리사라고 했던가? 걔는 안 와?"

"언니는 일있어가 집에 갔심더."

"그래?"

대답할 기운도, 정신도 없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앞자리의 두 여자가 재잘재잘 나누는 이야기가 외국어처럼 들린다. 영어도 아니고 스와힐리어 정도? 암튼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온다. 멍하니 창밖만 본다. 도심을 벗어나 산과 들이 점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 리사를 생각한다. 이만큼이나 나를 뒤흔들어 놓고 훌쩍 가버린 그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녀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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