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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죠?"
"아뇨. 괜찮습니다."
"이그, 표정이 바짝 얼었는데 뭘. 편하게 있어요. 여긴 쉬는 데니까."
박 선생이라고 했던가, 이 아줌마가. 나이가 제법 든 그녀는 몹시도 푸근한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리더니 앞에 놓인 떡 좀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양 선생이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박 선생님, 너무 친밀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뭔가 흑심 있어 보이는데?"
"왜요? 흑심 좀 있으면 안 되나? 단신부임이라 나도 지금 당장은 솔로인데 말야."
박 선생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다들 까르르 넘어간다. 난 웃기지도 않았지만 애써 웃으면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얼굴에 경련이 날 지경이다.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건 퍽이나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건 좀 다르다. 아줌마들에게 포위당한 총각의 처지는 꽤나 난감하게 된다는 걸 실감한다. 윽. 누가 날 좀 여기서 구해줘.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별관에 있는 기가연구실이라고, 기술. 가정 담당 선생님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이 학교에 세 명 있다는 기가 담당은 죄다 여선생뿐이라 이곳의 분위기는 숫제 동네 아줌마들의 반상회 같은 분위기다. 박순미 선생, 양효주 선생, 송지애 선생 세 명 말고도 계약직이라는 여자 선생이 두 명 더 있는데다가 빅토리아 뭐시기 하는 이름의 금발 미국인까지 함께 있었다. 도합 여섯 명의 여자들이 마치 포위하듯 나를 둘러싸고 반원을 그리며 앉아있었다. 외국인인 빅토리아는 말이 없었지만 나머지 다섯 여자들의 수다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날 향한 청문회 비스무리 한 게 시작되었다.
"K대생이라고 그랬죠?"
"예."
"공부 잘 했나 보네. 우리 학교에서는 정작 몇 명 못 보내는데 말야."
"하하, 그냥 그럭저럭...."
"그럼 지금 어디 살어?"
"학교 근..."
아직 답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질문.
"애인은 있고?"
이번에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질문.
"이그, 있겠지. 이만한 키에 이만한 얼굴이면 댓명은 있지 않겠어?"
"순진해 보이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네?"
"요새 대학생 애들이 그렇게 잘 논다잖아."
......질문을 하고 지들끼리 답하고 있을 거면 난 여기 없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밖에도 온갖 사생활 침해성 질문이 쏟아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욕스러워 하고 있는 나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송 선생이었다.
"식사 다 했으면 나가봐요. 5교시 시작하기 전에 교무실 제 자리로 오시구요."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벗어났다. 후아. 점심시간은 아직 40여분도 더 남았는데 저기서 계속 있었으면 아마도 수다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에게 눌려서 압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점심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아줌마 선생님들에게 이것저것 얻어먹어서 점심을 때울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말이다. 다음부터는 점심 도시락을 사오든가 나가서 먹든가 해야겠다.
일단 별관 건물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나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일단 아이들은 나만 보면 인사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는 어른은 죄다 선생님 뿐이니 그럴 수밖에... 나 역시 인사를 응해주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렇지만 또 피곤하기도 했다. 사람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운동장 한 켠에 있는 등나무 쉼터로 간다.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차가운 음료수 하나를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놀고 있는 학생들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선선한 바람을 맞아가며 잠시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쉼터로 다가오며 날 불렀다.
"나도 하나 사주라."
"어? 형."
태근이 형이었다. 땀을 좀 흘리고 있기에 스포츠 드링크 한 캔을 뽑아서 던져준다. 형은 그걸 받아들고 원샷으로 들이켜면서 아래쪽에 있는 체육관을 가리켰다.
"저기 체육관에서 니 이쪽에 올라오는 게 보이더라."
"체육관이요?"
"응. 애들이랑 농구 한 판 뛰고 있었지."
무서운 친화력이구나. 난 복도에서 애들이 인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서 당황스러운데 벌써 단 반나절 만에 같이 어울려 놀기까지 한단 말인가. 농구라고 하니까 얼마 전에 대학로에서 예린과 뛰었던 일이 생각난다. 예린과 제대로 못 낸 승부를 언젠가 내야 될 텐데...
"수업은 어때? 할 만하냐? 담당은?"
"담당은 송지애 선생님인데요. 여선생이에요. 수업이야 뭐 그냥 그렇죠. 멀뚱멀뚱 서 있는 거지. 제가 뭘 하나요."
2주간 우리는 수업에 참관하도록 되어있다. 그 다음 주는 수업보조, 마지막 한 주에 직접 수업을 하게 된다.
"이야. 그거 좋겠다. 난 오자마자 애들 데리고 운동장 뛰고 아주 난리도 아닌데."
"아... 체육은 그러겠구나."
어쩐지 벌써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싶었다. 아침에도 예상했지만 정말 무섭도록 잘 어울린다. 태어날 때도 이런 체육복을 입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따 저녁에 회식이라는 거 들었지?"
"예. 횟집 간다던데요."
"아, 난 회 싫은데...."
태근이 형과 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다. 잠시 후, 형은 한 판 더 뛰겠다며 체육관으로 내려갔다. 나도 같이 갈까 했는데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온 것도 아니고 해서 다음에 함께 하기로 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홀짝거리던 캔커피도 다 마셨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교무실로 가도 될 것 같았다. 캔을 휴지통에 던져 넣고 본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지도 모를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대는 통에 곧장 걸어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건물 입구로 막 접어드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선생님?"
아침까지만 해도 누가 저렇게 날 부르면 절대 돌아보지 않았을 테지만 오전 내내 그런 칭호로 불리고 나니 이젠 좀 다르다. 밝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날 부른 쪽을 바라본다. 밝게 웃으며 대답하려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만다. 덕분에 대답이 좀 샜다.
"네.........에?"
날 불러 세운 녀석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늘 보던 교복 차림에 마치 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또, 유진이구나. 무슨 일이야?"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으윽.... 이 녀석....."
"가긴 어딜 멀리 가요! 나 원 참. 괜히 사람 들쑤셔 놓고는, 뭐? 교생? 한 달 동안 못 봐? 참나. 기가 막혀."
기가 막힌 건 니가 아니라 나다. 이것아. 제 아무리 반가움의 표시라지만 뚜벅뚜벅 다가와 냅다 쪼인트를 까는 건 너무 과하지 않냐? 지나가는 녀석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봤다면 남자 망신은 물론이요 교권 추락의 산 현장이었다고 하겠지.
"코앞에서 반갑다고 인사한다고 누가 퍽이나 반가워하겠어요? 아저씨는 진짜 최악이야, 최악!"
"크으.. 그래도 난 진짜 반가웠는데 말야. 너네 학교인줄은 알았지만 니네 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뻥치지 마요."
"진짠데.... 아니면 난 이 학교에서 너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었다고."
반쯤 주저앉아 종아리를 문대고 있노라니 날 가만히 내려다보는 유진의 시선이 느껴진다.
".....정말이죠? 진짜 반가웠어요? 빈 말 아니라?"
"그래, 인마. 좀 놀라기도 했지. 내가 아는 얼굴이 떡 하니 맨 앞자리에 앉아있으니."
"쳇."
유진은 괜스레 바닥을 툭툭 차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나저나 니 반장이었냐? 몰랐는데 말야."
"처음에 임시반장은 성적순으로 뽑잖아요. 거기서 그냥 반장으로 굳은 거죠."
"진짜 공부 잘 하나 보네."
"핫. 제가 공부 잘 하는 거 이제 알았어요?"
"농담인 줄 알았지."
유진이가 내 머리를 잠시 투닥였다. 평소라면 불가능한 높이에 있는 거라 못 때리겠지만 지금은 내가 쭈그리고 앉아있어서 가능했다. 예비종이 울리자 녀석은 교복치마를 나풀대며 계단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1층에 양호실 있어요. 거기서 약 바르세요."
"니가 때려놓고?"
"엄청 쓰라린 약 발라 줄 거예요."
녀석은 혀까지 내밀어 보이고는 이내 사라졌다. 아유, 저 메롱쟁이 녀석.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움직여보니 약 바를 정도는 아니었다. 교무실로 가자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송 선생이 예비 종 치기 전까지 여기에 오란다. 예, 아주아주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회식까지 참여한다. 야자감독 하는 분과 사정이 있어 빠진 몇 분을 빼고 1,2,3학년 담임 및 과목 선생님들까지 도합 마흔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원이 다닥다닥 이어붙인 테이블에 빼곡히 들어앉았다. 교장의 선창에 다 같이 위하여를 외치고 들이킨다. 이런 자리가 있으면 어떻게 행동하라는 선배들의 귀띔을 잘 들어놓은 터라 그 이후부터는 잔과 술을 들고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하며 술을 따르고 또 받는다. 그러다보니 최하 40잔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술에 어지간히 강한 나도 아찔할 지경이니 다른 교생들은 말도 아니었다. 그나마 태근이 형은 등빨이 있어서 그런지 버티고 있었지만 여자애들은 진작에 뻗었다.
"이촤! 이촤 가야지! 최 선생~~!!!"
누구랬더라. 암튼 어떤 남자 선생님 하나가 내 목을 감아 걸고 호기롭게 외치고 있다. 난 다른 여자 선생님들에게 부축 받고 있는 현아를 힐끔거렸다. 은애는 이미 태근이 형에게 업혀서 축 늘어져 있었다.
"안 과아? 안 과면~ 난 따른 사람이랑~ 오! 박 선생!!!"
잔뜩 꼬인 혀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내게 들러붙어 있던 이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심호흡을 하고 있노라니 잔뜩 얼굴이 붉어진 송 선생이 내게 다가왔다.
"내일, 늦지, 않도록, 하십, 시요."
트림이 나올 것 같으면 하면 될 텐데, 이 아줌마 애쓰시네.
"걱정 마세요."
"좋아, 요."
송 선생은 숨을 가다듬으며 다른 여선생들이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2차를 외치는 술꾼들이 사라지고 높으신 분들이 가는 곳까지 인사를 다 마친 후에 횟집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태근이 형은 은애를 엎은 채로 계단에 앉아 졸고 있었고 현아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붙잡고 웩웩 거리고 있었다. 참....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장면들이다.
"형! 일어나요! 형! 여기서 잠들면 어떻게 해요!"
미안하지만 그래도 형 체질이라면 살짝 때려서는 안 일어날 것 같아 좀 세게 뺨을 두드린다. 너무 아프게 때린 게 아닐까 싶은데도 이 인간은 게슴츠레 눈을 한번 떴다가 다시 감을 뿐이다. 여긴 포기. 이따 신문이나 덮어줘야겠다. 이번에는 형에게 업혀 있는 은애라는 여자애를 깨운다.
"저기, 은애 씨! 은애 양?"
원피스가 말려 올라간데다가 얘가 업혀있는 태근이 형이 주저앉아 있는 상태라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나름 잘 빠진데다가 적당히 살이 잘 붙어있는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아악. 이거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기요! 은애 씨? 이봐요!"
어깨를 흔들어 보지만 요지부동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태근이 형한테는 잘 매달려 있는지 미스테리다. 얘도 포기해야 되나. 여자애니까 신문지는 두 장으로 해야겠다. 이제 남은 건 현아라는 애인데.....
"야! 너 죽고 싶어!!!"
등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욕설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뒤척거리며 도로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로 걸어 들어온 그녀 때문에 급정거를 하게 된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그녀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황급히 도로로 달려가 현아를 잡아 끌어오고 운전자에게 사과했다. 현아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집에 가야 되는데....."
이 녀석은 무슨 좀비도 아니고 가만 내버려두면 도로고 벽이고 전봇대고 간에 아무 방향으로나 비척비척 걸어간다. 환장하겠네. 별 수 없이 손을 잡고 끌고 가 횟집 계단 앞에 앉혔다.
"현아 씨! 집이 어디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집에 가야 되는데....에..... 우욱!!"
내가 대학생활 하면서 딱 하나 내 몸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술에 대한 내성이었다. 어린 시절, 삼촌은 물론 엄마까지 내게 술을 권했으니 말 다했다. 물론 급히 먹거나 아주 많이 먹으면 취하긴 하지만 다들 곯아떨어지거나 쓰러지는 신입생 환영회나 OT 등에서 내가 뻗은 적은 손에 꼽는다. 그러니 자연히 술에 꼴은 녀석들을 챙기는 게 내 담당이 되어버린다.
다시 쓰레기통을 붙들고 꽥꽥거리는 현아의 등을 두드리면서 방법을 떠올려 본다. 집이 어딘지라도 알면 택시라도 태워서 보낼 텐데 그것도 곤란하다. 솔직히 세 명을 각각 태워보낼 돈도 없었다. 한 명이면 내가 그냥 업고서 우리 집에라도 갈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횟집 사장님이 나오더니 계단 좀 비워달란다. 아직 장사한다나 어쨌다나.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는 현아, 한 손에는 태근이 형을 이끌고 걸어간다. 좀비 같은 현아는 그렇다치더라도 태근이 형도 신기하다. 눈은 감고 있고 등에는 은애가 매달려 있는데도 잘만 걸어간다. 이 인간 이거 정신 차린 거 아냐? 싶은 의심도 든다.
몇 미터 안 가 셔터를 내린 가게가 있기에 그 앞에 다시 멈춘다. 그냥 콱 놔두고 혼자 집에 가버릴까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햇님달님 동화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에서 동아줄도 내려오고 그러는데 난 왜 그런 게 없을까. 교회를 안 다녀서 그런가. 아니지. 햇님달님 거기 나오는 애들은 분명히 절에 다녔을 거야. 아직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선교가 들어오기 전이니까 말이야. 음. 아닌가. 절에 다니는 애들이라면 동아줄로 호랑이를 피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운 설법을 들어 호랑이를 감읍시켰겠지. 끄아아아아. 사람이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니 별 쓸데없는 생각이 무궁무진하게 든다.
그러나 내 동아줄은 차를 몰고 나타났다
"거기 한석이 아냐? 거기서 뭐 해?"
오, 만세. 니가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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