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56화 (5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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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엣?! 에... 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속 담당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없을 시간이 있을 쏘냐!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손 선생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오늘 연구실 분들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이따 끝나고 주차장으로 와요."

"예."

"일단 이 서류는 행정실에 내주시구요."

"옙."

첫 출근 날, 날 몰아넣고 질문 세례를 퍼붓던 아줌마들을 떠올린다. 그 날 이후로는 점심식사를 다른 선생님들 나가서 먹을 때 같이 묻어가서 먹느라 연구실에 간 적이 없었다. 아줌마 선생님들의 얼굴이 희미해질 지경이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마셔대려나. 제아무리 최한석이라도 물량 공세 술 세례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마시는 술이 누적되는 양만 따져도 한 트럭은 될 것 같다. 내 간장과 위장에게 조금 더 버텨 달라는 당부의 말을 속으로 하며 행정실에 서류를 제출하고 교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러 세운다. 돌아보니 유진이였다. 표정이 상당히 딱딱한 게 몹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 넌 기분이 안 좋구나. 난 속이 안 좋단다, 얘야.

"요새 집에 안 들어가요?"

"뭔 소리야, 다짜고짜."

난데없이 던지는 질문이 무슨 그 모양이냐. 유진은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한 발 더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들어가긴 하냐구요."

"들어가지, 그럼 어디 가?"

"그럼 왜 맨날 전화 안 받아요?"

"전화?"

뭐냐, 이 녀석. 그럼 맨날 전화를 했다는 소리인가.

"열두시 넘어서 들어간 적이 많아서 말이야. 너 몇 시에 전화했는데?"

"........쳇. 알거 없어요."

그러고 보니 리사에게서 전화가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리사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게다가 마리조차 요 며칠 통 얼굴을 못 보았다. 하긴 아침에는 내가 의도적으로 녀석과 마주치지 않게 일찍 나오고 밤에는 아주 늦게 들어가다 보니까.... 오랜만에 리사에게 전화를 해볼까.

".......래서 그 날은..... 잠깐,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엉? 뭐? 뭐가."

요새 체내에 알콜이 너무 축적되어 그런가 때론 이렇게 멍해진다. 내 대답을 보고 상태를 짐작했는지 유진이가 내 팔뚝을 꼬집으며 말했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아야야.... 알았다, 알았어. 말해봐. 뭔데?"

유진이가 다소 우물쭈물하면서 말한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영화?"

"해리슨 포드랑 브레드 피트 나오는 건데... 재미있대요."

"그래, 그럼 가서 재미있게 봐라. 난 이만 가볼.... 아얏!!!"

손등이 다시 얼얼해진다. 벌게진 손등을 비비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발을 구르며 낮게 소리친다.

"아저씨한테 보여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니가 언제 그랬어!"

"방금요!"

이런 어이없는 녀석을 보았나. 니는 영화 보여 달라고 타인에게 부탁하는 태도가 꼬집는 거냐!

"내가 왜 보여줘야 되는데?"

"저한테 거짓말 했잖아요."

"내가 언제?"

"뭐 멀리 간다, 한 달 동안 못 본다 이래 놓고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구요?"

"으으.... 그래 알았다, 알았어."

거짓말 하면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명제가 대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고 대체 어느 나라에서 통하는 관습법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유진이와 난 일요일 아침 9시에 종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으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으니까 걱정 마."

"늦으면 진짜 진짜 안 돼요. 5분이라도 늦으면 전 그냥 가버릴 거예요."

"알았다니깐."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안 나오거나 그러면 진짜 진짜 진~짜 가만 안 둬요."

"예, 예. 삼가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유진이는 과도하게 굽실거리는 내 태도를 보고 잠시 피식 웃더니 한 번 더 다짐을 하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아오. 저 녀석은 나이도 어린 게 아주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해서 큰일이다. 거참. 저거 데려가는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생 꽤나 하겠군.

퇴근 후, 난 주차장에서 송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선생은 물론 전에 기가연구실에서 보았던 다른 선생들까지 우루루 몰려왔다.

"어머나, 최 선생. 오랜만이에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송 선생이 안 놔주나 보지."

"난 또 내가 들러붙어서 도망간 줄 알았지. 호호호."

"박 선생이 들러붙으면 총각이 아니라 총각 할애비라도 도망가겠어요."

"어머나, 연상도 나쁘진 않은데 할아버지는 좀 심하잖아."

나에게 질문 던지고 자기들끼리 대답하는 건 여전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따라 웃는다. 우리는 송 선생 차와 양 선생 차에 나누어 타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일식집으로 갔다. 산 중턱에 있는 꽤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요새 다른 선생들이 술 많이 먹이지?"

"아, 예."

"원래 그래. 술 잘 먹어야 직장 생활 잘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신념을 가진 아저씨들이 꽤 많아서 말이야. 아마 다음 주부터는 좀 괜찮을 거야."

"그런가요."

확실히 여자들의 회식은 남자들의 회식과는 많이 달랐다. 술이라고는 청주 딱 한 병을 시켜놓고 다들 한 잔씩 하더니 그게 다였다. 나에게 필요하면 술을 더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음식은 코스로 나오는 거라 이것저것 쉬지 않고 나왔고 여자들은 쉬지 않는 수다와 함께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여자들이 밥 조금 먹는다는 건 죄다 거짓말이다. 저렇게 잘 먹다니. 아무래도 먹으면서 하는 수다로 에너지를 다 소비해서 계속 먹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다만 끝에 앉아있는 빅토리아는 젓가락으로 음식만 집어먹을 뿐 통 말이 없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걸까. 처음에는 같은 자리에 외국인이 끼어 있다고 상당히 긴장했는데 그 과묵한 예린보다도 말이 없으니 외국인이라는 부담감이 많이 없어졌다.

"많이 먹어요."

"아, 예."

옆에 앉은 송 선생이 자기 몫으로 나온 초밥 몇 개를 내 접시에 덜어주었다.

"일주일 해보니까, 어때요? 할 만해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모르면 어떻게 해? 평가 점수 깎을까요?"

"넷? 아, 저... 그게....."

송 선생의 무심하고 진지한 말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니 다들 까르르 웃는다.

"최 선생. 송 선생이 농담한 거야. 송 선생은 농담하는 말투가 저렇게 진지하다니까?"

"아, 예에....."

아무래도 이 아줌마들은 단체로 날 놀리는 거에 취미가 들린 모양이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하나 나를 안주거리 삼아 끊임없이 입을 놀려대는 아줌마들의 틈바구니에서 심신이 지쳐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 애들 엄마라서 일찍 들어가니까요. 2차는 따로 없어요."

"아, 예.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중간에 한 명씩 내려주고 나니 이제 차에는 송 선생과 나만 타고 있었다.

"최 선생은 어디서 내려줄까요?"

"아, 전 가까운 지하철 역 아무 데나 내려주셔도 되요."

"그래요, 그럼. 내일은 출근 안 하죠?"

"예. 학교에 실습 보고 하러 가야 되거든요."

"대학생은 좋겠네요. 토요일은 쉬고. 우리는 언제 토요일에 쉬려나."

"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왜요?"

"밀린 리포트도 써야 되고 교안도 써야 되고..... 이번 주 내내 술만 마시느라 집에 가면 뻗기 바빴거든요."

술 많이 마신다고 평가점수를 깎지는 않겠지. 자기들이 사준 술인데 말이다. 그러자 송 선생은 꽤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착실하네? 대개 막판에 닥치면 하곤 하던데."

"제가 손이 좀 느려서요. 미리미리 안 해두면 나중에 곤란해지거든요."

학교생활과 교생실습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두둑 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송 선생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봄비치고는 꽤 오네?"

"그러네요."

"우산 있어요?"

"아뇨."

송 선생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비도 오고 그런데, 한 잔 더 할래요?"

어느 분 말씀이라고 감히 거절하겠는가. 송 선생과 함께 간 곳은 작은 수입맥주 전문점이었다. 가게 앞에 딸린 지붕 있는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비가 오고 있는 터라 가게는 한산했다.

"집 근처라서 자주 와요."

"네에."

그녀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익숙하게 두 병의 맥주를 시켰다. 처음 들어보는 맥주였다. 우리나라 맥주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여긴 수입맥주 전문점이지?

"안주는 뭐 좋아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배가 부르거든요."

"그래도 뭐 하나 있는 게.... 음."

송 선생은 나쵸인가 뭐시기 하는 것을 주문했다. 맥주는 금방 나왔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표의 병맥주였다. 컵도 하나같이 나왔는데 생맥주 잔은 아니었다. 병맥주면 병맥주지 잔은 왜 따로 나오는 거지? 내 표정을 보고 있던 송 선생은 내 앞에 놓인 병을 가져가며 묻는다.

"처음 마셔봐요?"

"네."

괜히 아는 척하다가 망신당하기보단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다. 송 선생은 웃으며 내 병을 따주더니 컵에 반쯤 따랐다. 그리고 병을 내게 준다.

"흔들어봐요."

시킨 대로 했더니 이젠 그걸 컵에 마저 따르란다. 그렇게 했더니 뽀얗게 거품이 쌓이며 맥주잔에 아주 먹음직스럽게 담긴다. 송 선생도 자신의 잔을 같은 방법으로 채웠다.

"코로나도 좋긴 한데 난 이게 더 좋더군요. 최 선생도 한 번 마셔보세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마셔본다. 생맥주랑은 다른 느낌이면서 일반 병맥주랑도 약간은 다른 느낌이 난다. 그래봤자 맥주지, 지가 어쩔 건데. 그래도 사주는 사람 체면을 생각해서 겉치레한다.

"맛있네요."

"그렇죠?"

마침 안주가 나와서 바삭거리며 그것을 먹는다. 우리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비가 내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참 만에 송 선생이 묻는다.

"여자친구 있다고 했던가요?"

"에.... 그게 미묘한데요.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거라...."

"후후. 뭐예요. 그게. 완전히 작업 멘트 분위기인데?"

송 선생과 밖에서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학교에서의 딱딱한 이미지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저도 설명을 잘 못 하겠는데요. 친하게 지내고 있는 애는 분명 있지만 딱히 고백을 했다거나 사귀고 있는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게 그러니까......"

선영과 리사의 얼굴이 머릿속을 번갈아 스쳐 지나간다. 둘 다 나에게 깊은 호감을 보임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허락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연인 사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대답이 곤란하다. 내심 연인으로 발전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선영에게는 어쩐지 그런 말을 꺼내기가 좀 난감했고 리사는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와 함께 했던 여자들은 어째 다들 내 곁에 머무르질 않는다. 지혜는 이미 유부녀고 명희는 그 날 밤 이후 본 적도 없다. 효진이도 잠깐 생각이 났지만 이 녀석은 지가 무슨 마도로스라도 되는지 한 번 나갔다 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녀석이라 논외다. 관계를 맺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쪽 팔리는 상황을 직면했던 마리는 지난번의 그 사건 이후로 얼굴도 보지 못했고....

"생각이 길어지네요? 생각을 오래 하면서 정리할 만큼 여자가 많은가 봐요? 최 선생, 아니, 한석 씨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송 선생님. 제 말은..."

"밖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남들이 들으면 그닥 좋지 않으니까요."

"네? 아, 네...."

송 선생, 아니 지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올해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물세 살입니다."

"똑같네. 그럼 밖에서는 그냥 누나라고 불러요."

"네?"

뭐가 뭐랑 똑같다는 소리일까.

"왜 그렇게 놀래요. 난 아직 서른 셋 밖에 안 된 미스인데 누나라고 부르는 게 싫어요?"

"아뇨, 부르겠습니다."

졸지에 누나가 생겨버렸다. 근데 미스라고?

"결혼... 아직 안 하셨어요?"

"왜요? 이 나이면 꼭 해야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의외였다. 기가연구실에 있던 그 외국인 교사를 제외하고 아줌마들은 다 기혼이었던 터라 당연히 이 사람도 기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 나는 말 놔도 되겠죠?"

"그러세요. 누나."

입에 아직 잘 붙지는 않지만 그녀가 원하는 칭호대로 불러준다. 그러자 지애는 살짝 웃었다.

"후후. 그래. 고마워."

난데없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창밖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저기, 누나."

"응?"

"누나는 남자 친구 없어요?"

"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피식 웃는다. 대답은 않고 창밖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날 돌아보며 말한다.

"왜? 없다고 하면 누구 소개라도 시켜주게?"

"아... 아뇨.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없으면 한석이가 한 번 해봐도 괜찮고."

꽤 진지한 말투로 이쪽을 돌아보며 말을 건네는 통에 좀 놀랐다.

"에엑?"

깜짝 놀랐더니 지애가 풋 하고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진짜 똑같네. 하하."

대체 아까부터 뭐가 똑같다는 거냐. 그러나 지애는 그 후로 별다른 소리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특별히 할 이야기도 없어 그냥 앉아있었다. 술집답지 않게 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어느 순간 지애는 그걸 따라 가볍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렀고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어났다. 별다른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무언가 한 것도 아닌데 꽤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는 다음 주에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토요일, 학교에 나가 행정동 앞에서 태근이 형을 만났다. 보고서를 아직 덜 썼다는 형에게 내 보고서를 보여준다. 형은 엄청 신나하더니 내 보고서를 베끼기 시작한다.

"아, 형. 아무리 그래도 수업 내용까지는 베끼지 마요. 형은 체육이고 전 기술 가정인데."

"아, 그런가?"

체육 선생이 현대의 기술발달을 가르쳐서 뭐 할 건데. 형은 대수롭지 않게 볼펜으로 두 줄을 찍찍 긋고 그 위에 농구라고 썼다.

"으으.. 아무리 형식적이라 그래도 명색이 보고서인데 그렇게 막 써도 되요?"

"뭐, 어때. 이딴 건 그냥 대충하면 된다니깐."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굳이 곤란할 필요는 없으려나. 그런데 어느샌가 다가온 은애가 형의 보고서를 슬쩍 넘겨보고는 혀를 찼다.

"참나. 진짜 생긴 대로 무식하시네요."

"내가 뭘?"

"체대생들은 진짜 다 그래요? 뇌까지 근육이라는 게 사실인가 봐요?"

"뇌가 근육이면 튼튼하고 좋지 뭘 그래."

지난 일주일간 이래저래 마주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는 했지만 난 아직 은애나 현아와 말을 트지 못했다. 그러나 형은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에게 굉장히 편하게 말을 한다. 물론 은애는 형이 건네는 말에 곱게 대답하는 법이 없고 현아는 거의 말을 잘 안 하니까 별 상관없으려나. 비아냥거리는 은애 뒤로 현아도 보였다. 형과 티격태격하는 은애는 무시하고 현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전에 이야기할 때 보고서 쓰는 거 가지고 걱정을 하기에 조언을 해줬었다.

"보고서 잘 썼어요?"

"그냥저냥 이요. 사실은 어떻게 쓰는지 잘 몰라서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그랬어요. 결국 한석 씨가 하라는 대로 일단 쓰긴 했는데..."

"그러셨구나. 저도 뭐 크게 다르진 않아요."

현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형이 다 썼다고 하기에 모두 다 같이 행정사무실로 가서 보고서를 제출했다. 접수를 하면 뭔가 내용을 보거나 이럴 줄 알았는데 그냥 대충 사람 수와 표지의 이름만 확인하더니 결재 도장을 찍는다. 내용을 어떻게 쓰나 고민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허무해질 지경이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형이 내 옆구리를 찌른다.

"것 봐라. 내 말 맞지?"

"그러네요. 거참."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형이 여자애들에게 다가가더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권한다. 점심 먹기는 좀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못 먹을 시간도 아니었다. 은애가 노골적으로 싫다는 투로 거절했지만 태근이 형의 설득 대상은 현아였고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는 형의 권유를 수락하고 만다. 그러자 은애가 나선다.

"좋아요. 대신 메뉴는 제가 정할 거예요."

혼자만 돌아가는 게 싫었는지 은애는 투덜거리면서도 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한다.

"스파게티 먹으러 가죠. 저희."

아오. 저 것은 왜 싫다면서 지가 메뉴를 정하고 있냐. 그러면서 학교 근처에 스파게티 전문점이 어디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태근이 형은 은애 쪽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현아를 돌아보며 재차 묻고 있었다.

"현아는 뭐 먹을래?"

"네? 저는 그냥 아무거나...."

목소리도 조용조용하고 그닥 자기주장을 내세우지도 않는 현아는 꽤 어려 보였다. 형은 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그래? 음... 그럼 내가 자주 가는 데로 가자."

하면서 결정해버렸다. 자기 의견이 철저히 무시당한 은애가 짜증을 부렸지만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형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다며 차를 가지러 공대 뒤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우리는 학관 앞에서 형이 오길 기다렸다. 그냥 학교 앞이나 가고 말지 무슨 차를 끌고 오겠냐며 똥차라면 차라리 타지 말고 그냥 걸어가자고 투덜거리고 있는 은애의 군소리를 못 들은 척하면서 말이다.

잠시 후, 은빛의 커다란 차가 우리 앞에 와서 선다. 운전석에 탄 태근이 형이 창문을 열고 우리에게 얼른 타라고 한다. 대형차가 내는 그르렁 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숙하다. 모양도 그렇고... 혹시나 싶어서 차 전면에 붙어 있는 로고를 확인해보고 잠깐 놀랐다. 저 로고를 분명히 얼마 전에 봤는데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차들이 참 많이 있으니 같은 모델에 같은 색의 차도 많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제차가 그리 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자들이 뒷자리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탄다. 조수석에 타서 대쉬보드를 보니 실내장식도 꽤나 익숙하다. 그제야 확신이 선다. 차가 학교를 벗어나 시내 쪽으로 향하는 동안 형에게 물어본다.

"저기, 형. 뭣 좀 하나 물어봐도 되요?"

"물어뜯는 게 아니라면 뭐든지."

여전히 썰렁한 사람이다.

"혹시 동생 있지 않아요? 여동생?"

"엥?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나 뒷조사 하러 다니냐?"

그제야 확신이 든다. 그러고 보니 즐겨하는 썰렁한 농담도 그렇고 가벼운 말투도 그렇고 어쩐지 내가 어떤 녀석이랑 많이 닮았다.

"그럼 형이 효진이 오빠였어요?"

"어라? 너 효진이 알아? 이야. 세상 좁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

"지난주에 효진이가 이걸 몰고 오더라구요. 외제차라 좀 뜨악했는데 자기 오빠 차라고....."

내 설명을 들은 형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핸들에 얹은 손을 두드렸다.

"푸하하. 그럼 그때 지혜 결혼식에 같이 갔다는 얼빵이가 너냐?"

지혜랑도 아는 사이인가 보다. 하긴 효진이랑 지혜랑 오랜 친구 사이라고 했으니 효진이 오빠가 지혜를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효진이 고것은 나를 그렇게 밖에 표현 못 하나.

"이야. 암튼 신기하다야. 안 그래도 효진이가 가끔 그런 이야기했거든. 지혜 좋아하다가 이번에 닭 쫓던 개 신세 된 웃긴 녀석이 하나 있는데 하는 짓 보면 진짜 웃기다고 말이야. 근데 그게 너였을 줄이야. 얌마. 그렇다고 진짜 결혼식까지 가냐? 대단하다, 대단해. 영화를 찍어라. 짜샤."

"........지혜 이야기는 그만 좀 하시면 안 될까요?"

나중에 효진을 만나면 헤드락이라도 걸어 주리라 다짐한다. 그러고 보니 뒷자리의 두 여자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운전석에 앉은 지상 최대의 무신경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뭐, 어때. 좋아하던 여자가 유부녀 된다면 더 불타올라야지. 처녀보단 유부녀가 자빠트리기는 더 쉬울 거 아냐. 처녀는 좀 그렇지만 유부녀야 뭐 티도 안 날 테고 말이야. 안 그래? 으하하하."

하아. 좋아하던 여자 결혼식에 갔다는 나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이 형은 "저질"소리 한 번 더 듣겠구먼. 지난번에는 다 같이 있는데서 룸에 가자 어쩌자 하더니 이번에도 역시나 여자들 있는데서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살짝 빗나갔다.

"오호호호. 태근이 오빠 진짜 재미있으시다.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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