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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58화 (5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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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

현아는 한참이나 부끄러워했다. 몇 번 더 재촉했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햄스....터요."

작게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과 별명이 너무도 싱크로율이 좋아 순간적으로 대폭소할 뻔했지만 방금도 실례를 저지른 터라 간신히 참아냈다.

"귀...귀엽네요. 잘 어울리세요....."

"지금 필사적으로 웃음 참고 있죠?"

"푸훕....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현아는 잠시 샐쭉해 졌지만 이내 자신의 신입생 때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환영회에서 도저히 술을 못 마시겠다는 그녀에게 누군가 빨대를 권했다고 했다. "빨대로 마시면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잘 마실 수 있대!" 물론 장난이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대로 빨대로 소주를 빨아먹고 있는 그녀 모습은 모두를 웃다 나자빠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누가 그걸 보고 햄스터 같다고 딱 한 마디 했는데 그게 대학 생활 내내 따라붙는 별명이 되어버렸지 뭐예요."

지금도 그녀의 과에서는 그녀를 현아가 아니라 햄아라고 부른다고 한단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껄껄 웃어버렸고 나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기는 햄아, 아니, 현아의 뾰로퉁한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다시 정중히 사과했다. 현아는 사과를 받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사과하는 의미로 저녁 쏘세요."

"그...그래야 되나요?"

"안 쏘면 사과 안 받아드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과 대 저녁이라는 협상이 완료되자 현아는 활짝 웃더니 떡볶이나 먹으러 가잔다. 그러고 보니 배도 출출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긴 했다. 동네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린다. 현아는 근처 시장에 떡볶이 맵게 잘 하는 집이 있다며 앞장 서서 나를 이끌었다. 둘이 나란히 걷고 있는데 현아가 이야기를 꺼낸다.

"저기요."

"네?"

"우리 동갑 아닌가요? 맞죠?"

"아마 그럴 껄요."

그러자 현아가 환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그럼 우리 말 놓는게 어때요?"

"그럴까요? 아니... 그럴까?"

하긴 동갑인데 항상 존칭 쓰는 것도 좀 웃기긴 했다. 말을 놓기로 하자 현아가 두 손을 위로 쭉 뻗으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 대뜸 존대말을 해서 좀 놀랬어.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처음 보는 게 아니라고? 전에 만난 적이 있어? 우리가?"

현아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그녀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 못 하는 거야?"

"뭘 기억 못 해? 나 대학와서 너 본 게 교생 모집 때 처음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현아는 한숨을 푹 쉬더니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냐고 거듭 물어보아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교 때 그녀를 본 건 이번 교생 때가 처음인데... 그 전에 어디서 날 본 적 있는 건가 싶었다.

"근데 왠지 억울하다. 내가 다 쏘는 건."

"왜?"

"햄아, 니가 먹으러 가자고 했잖아."

아까 배운 별명을 얼른 써먹는다. 현아는 자기 별명을 듣고 눈썹을 살짝 씰룩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알았어. 알았어. 여고생한테 비싼 인형 사줄 돈은 있어도 동기한테 떡볶이 사줄 돈은 없다 이거지?"

".......여고생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야기 했던가?"

"그럼 남자애한테 그런 걸 사다 주겠어?"

"것두 그렇네."

다소 옥신각신한 끝에 떡볶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내가 사기로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우리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장 내에 있는 분식집이었다. 현아가 자리에 앉으며 주문을 했다.

"이모, 저희 오떡순으로 주세요. 순대는 간만 주시구요."

"오떡순이 뭔데?"

"오뎅, 떡볶이, 순대."

"아하."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명확한 네이밍 센스다. 순대가 먼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보니 입맛이 돌았다. 젓가락을 들어올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많이 시켜."

그러자 현아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럼 떡볶이는 1인분만 시키고 오뎅이랑 순대 많이 시킬까?"

"윽. 얼마나 먹을라고? 그게 니 쪼끄만 몸에 다 들어가?"

"너 햄스터가 자기 체중에 비해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르지?"

우리 둘은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곧 떡볶이도 나오고 그릇에 국물과 함께 담긴 오뎅도 나왔다. 4월이라고는 하나 아직 따끈한 오뎅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떡볶이는 현아의 장담대로 상당히 매웠다. 오뎅 국물 리필을 몇 번이나 시켰는지 모른다. 떡 하나에 오뎅 국물 하나를 마셔대는 나를 보며 현아가 물었다.

"매운거 잘 못 먹나 보네?"

"응. 우리 엄마는 무지 잘 먹는데 난 전혀..."

"저런. 매운게 얼마나 맛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현아는 그 매운 떡볶이를 엄청 잘 먹었다. 진짜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미스테리였다. 문득 낮에 있었던 점심식사가 생각난다. 계산서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일인당 순대 50인분 가격은 너끈히 나온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거기서 현아는 상당히 깨작거리며 먹었다. 그때는 작은 녀석이라 별로 안 먹는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적게 먹는 녀석은 절대로 아니었다.

"혹시 말이야. 낮에 레스토랑은 별로였어?"

"아? 거기... 신기하긴 했는데 막 입에 맞거나 하진 않더라고. 옆에 누가 계속 서서 왔다갔다 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랬구나."

태근이 형에게 귀띔 해줘야 하는 항목이 늘어났다. 다음에는 무지 매운 쫄면이라도 먹으러 가라고 권해야겠다. 물론 난 빠질테다. 그런 건 대체 무슨 정신으로 먹는지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난 아줌마에게 튀김과 순대를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이 떡볶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덕분에 떡볶이는 전부 현아 차지가 되었다.

"저기 말야."

"응?"

오뎅 하나를 간장도 아니고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고 있는 현아에게 물어본다.

"태근이 형 어때?"

"어떻냐니."

"사람 괜찮지 않아?"

"그건 왜 묻는데?"

"아니, 뭐, 그냥."

형이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아직 시기상조다 싶었다. 현아는 좀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너무 커."

"윽...... 그래서 별루야?"

그녀는 날 빤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응. 나 키 큰 남자는 좋지만 그렇게 무섭게 커다란 사람은 싫더라. 무섭잖아."

"그...그러냐."

형한테는 다이어트를 권해야 하나. 그 몸이 다이어트로 날씬해지기는 좀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그 커다란 덩치는 좀 어떻게 해보려는 노력을 해보라고 말 해줘야겠다. 식사를 마치고 분식집을 나왔다. 계산은 내가 했다. 현아는 다음에 자기가 떡볶이를 사주겠노라고 말했다. 난 부디 안 매운 걸로 먹으러 가자고 부탁했지만 현아는 그러면 맛이 없어서 안된단다.

현아의 집은 우리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현아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한다. 저녁도 먹었겠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니 아무래도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빌라에 금방 도착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빌라 계단을 오르다가 마침 내려오던 이와 딱 마주한다.

"어, 마리야."

".........선배님예."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데 마리와 내가 원수는 아니고... 암튼 껄끄러운 사람끼리 피할 도리도 없는 좁은 계단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약 5초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복장을 보니 라이더 슈트 차림이었다.

"자전거 타러 가니?"

"야아. 잠이 안 와가...."

마리는 내 시선을 피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주에 이 녀석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나를 대하기 상당히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 또한 상당히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다보니 말을 버벅거리고 말았다.

"그...그래, 그럼. 조심해서 타."

"야아."

마리가 고개를 꾸벅하고 지나가는데 생각나는게 있어서 마리를 불러 세웠다.

"마리야."

"와예?"

계단 아래쪽에서 자전거를 준비하던 마리가 고개를 들고 여상스럽게 대꾸한다.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언니나 예린 씨한테 연락 온 거 없었어? 아니면 나한테 전할 이야기나...."

그러자 여태 무표정하게 있던 마리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녀석은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나를 빤히 보고 있다가 이내 눈가를 훔쳐내더니 나한테 소리쳤다.

"내를 봐도 선배님은 내는 안 보이고 그저 언니야만 생각난다 이거지예?! 그래, 봤심더!!!"

"마리야!"

"내는 몰라예! 연락 같은 건, 마, 쌩판 없었심더!"

"없으면 없지 왜 화를 내."

"선배는 지가 와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화를 내는 깁니다. 천지 디비봐도 선배처럼 무심한 사람도 없을낀데 왜 내가 화를 내고 맘 졸여야 허는지도 모르겠네예. 이만 보지 마입시더."

녀석은 자전거에 훌쩍 오르더니 급하게 달려나갔다. 페달을 얼마나 세차게 밟는지 자전거는 금세 시야에서 멀어지고 만다. 빌라 앞까지 따라 나갔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난 그저 지 언니에게서 연락 온 게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을 뿐이었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화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서 녀석이 돌아오면 달래주려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12시가 넘도록 마리가 돌아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녀석을 기다리던 나는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벨이 울린다. 내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벨 소리가 꿈속에서 울린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침대에서 비척비척 기어 나와 전화기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대답은 없었다. 장난전화인가? 잠이 덜 깬 눈을 들어 시계를 본다. 야광이라고 사다 놨는데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사천원 짜리 시계의 시침은 4에서 5사이에 있었다. 이 시간에 장난전화라니. 너무한데?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자기야. 나야."

이런 호칭으로 날 부르는 사람을 알고 있다.

"선영이?"

"응. 잤어?"

"그럼. 이 시간에 자지... 안 자?"

"그래. 그렇겠지."

선영이 전화를, 게다가 이 시간에.... 뭔가 대단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들고 말이 없는 그녀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예전처럼, 그러니까 아직 나와 한강에 가기 전의 목소리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 것도.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거짓말."

내가 아는 선영이 할만한 대사는 아니었기에 거짓말이라고 쏘아붙여 주었다. 아무래도 말이 곱게 나오질 않는다. 뭐든 간에 자다 깬 사람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하아. 미안. 정말 그냥 해 본 거야. 깨워서 미안."

"뭔데, 말해봐."

잠은 이미 예전에 달아나 있었다. 잘 자고 있는 사람을 난데없이 전화로 깨운 그녀가 괘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꺼림칙한 기분을 남긴 채로 그냥 전화를 끊으면 너무 궁금해서 오던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한참 주저하던 선영은 몹시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내일... 내일 말야."

"응."

"나랑 어디 좀 가줄 수 있어?"

"어디? 멀어?"

"좀."

내일은 유진이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선영에게 선약이 있다고 말하고 거절하는 건 간단한 일이겠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렇게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건..... 굳이 알 거 없고, 내일 같이 갈 수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줘."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운 건 자기면서 되려 나에게 닥달이다. 유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녀석의 얼굴. 그리고 동시에 선영의 얼굴도 떠오른다. 지금 전화기 너머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근래에 그녀의 표정이 많이 밝아지고 좋은 표정도 간혹 지어서 잊고 있었지만 예전 검은 옷의 선영은 늘 화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지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내 대답이 늦어지자 선영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 그럼....."

"자, 잠깐. 생각중이란 말야. 잠깐만."

달력을 한 번 본다. 시계를 다시 본다. 이제 다섯시가 되어가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저, 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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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플레이에서는 선택지가 하나만 제공됩니다.

1회차 엔딩을 감상한 후 또 다른 선택지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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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A. 선영의 부탁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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