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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62화 (6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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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 말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 또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빅토리아 말고는 아무도 안 보였다. 내가 말한 건 아닌데? 단 둘이 있는데 내가 말한 게 아니라면 상대가 말한 걸 텐데 방금 그건 유창한 우리말이었잖아. 놀란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으려니 예의 그 한국말이 또 들려온다.

"최한석이라고 했던가?"

이번엔 빅토리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도톰한 입술을 벌려 말을 했고, 그와 동시에 내 귀에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의심할 여지없이 방금 그 소리는 이 여자가 한 말이었다.

"맞는데요.......어라?"

이 금발의 아가씨가 시방 뭐라는겨. 우리말이잖아!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야, 니는 내가 니 모른 체하고 지나가면 그냥 사정이 있다 생각하면 되지 거기다 대고 초를 치니?"

"초....를 쳐요?"

"그래. 저기 떡볶이가 맛있고 아줌마도 착해서 내가 단골로 애용하고 있었는데 니가 그렇게 초를 쳐버리면 결국 돈을 내야 하는 거잖아."

"다....단골?"

"아직 감이 안 와?"

"감이라니....."

"하아.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또라이라니...."

바로 저기 저 분식집에서는 무지막지하게 쏟아낸 영어로 나를 혼란에 빠트렸던 빅토리아가 다시 나타난 이후에는 무지하게 유창한 한국말로 나를 다시 한 번 혼란에 밀어 넣고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 아냐, 이거? 그게 아니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몰래카메라라던가. 그러나 틀림없이 그녀는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째 이경규 씨가 카메라 메고 뛰어올 기미도 안 보인다. 난 일단 옆에 있는 금발녀를 제지했다.

"자....잠깐만요. 빅토리아 씨. 한국말 할 줄 알았어요?"

"당근이지."

엄마야, 당근이래...... 그녀의 지나치게 풍부한 어휘에 당황하고 있으려니까, 그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나왔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등신이지. 안 그러냐."

"그..그러셨군요."

"야, 한국말 못 하는데 한국학교에서 어떻게 선생질 하고 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상식적으로."

"그렇겠네요."

그렇군.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금발의 아가씨가 나한테 막말하는 건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런데 아까의 그 비상식은 대체 뭐냐.

"자.....잠깐만요. 그럼 아까는 왜 한국말 하나도 못 하는 척하면서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아줌마가 돈 모자라다고 한 소리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몹시 따지고 드는데도 그녀는 몹시 태평했다.

"그거야 외국인이면 디씨해주잖아."

".........외국인? 디씨?"

"오, 난 한쿡말 몰라요. 한쿡말 어려워요. 이러고 있으면 대충 사람들이 편의 봐준다고. 그런 것도 모르니? 이 등신아?"

참 친절한 설명이긴 한데 끝에 따라 붙는 호칭은 상당히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성질이 나기 시작한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게 어딨어요! 자기가 먹었으면 먹은 만큼 돈을 내야죠!"

"아, 그 쪽에서 알아서 싸게 해 주겠다는 데 뭐 하러 돈을 더 내? 니 돈 많아?"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물어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텅 비어버린 지갑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라고 대답할 계제가 못 된다.

"아...아뇨."

"왜, 아까 보니까 만 원짜리도 척척 내고 돈 잘 쓰더만."

"그게 마지막 재산이었다구요."

울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기꾼 같은, 아니지, 같은 게 아니라 사기꾼 맞잖아! 분명 지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암튼 이 금발녀한테 나도 모르게 돈 떼인 꼴이 되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당당하게 나오는 여자한테 아까 대납한 돈을 달라고 하면... 아마 절대 안 주겠지? 또 다른 등신 취급을 하게 되는 덜미가 되고 말 것이다. 평생가도 돈을 받아내기란 아마도 불가능 하겠지. 우울한 내 기분과는 달리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봉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튀김도 샀어?"

"샀는데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먹자."

이 여자가 뭔 헛소리를 또 시작하는 거야. 아까도 엄청 많이 먹는 것 같더니만.

"방금까지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돈이 모자라서 튀김은 못 먹었단 말야. 오늘따라 고추튀김이 땡기는데. 고추튀김도 있지?"

식성도 독특하군. 난 또 매운 고추 써서 할까 아줌마한테 꼭 물어보고 사는구먼.

"있기는 한데...... 암튼 왜 내가 빅토리아 씨한테 튀김을 줘야 되냐구요!"

화를 내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아까 돈은 대신 왜 내준 건데?"

"으아아아악!!"

미치고 팔짝 뛰겠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내가 가는 길을 끈덕지게 따라왔고 결국 집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사는 빌라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여기 살아? 전세야, 월세야?"

"월세...인 거 알아서 뭐하시게요!"

"학교 가까우니 보증금 좀 쎄겠는데?"

"그렇긴 하죠."

"한 달에 얼마야?"

"알아서 뭐하게요!"

마이 페이스 그 자체다. 도무지 말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 월세를 말해준 다음 반쯤 포기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나오다가 따라 들어오려던 빅토리아와 딱 마주친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해? 튀김 안 먹어?"

"전 그 쪽이랑 먹으려고 사온 거 아니거든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튀김이나 먹자고 일면식도 없는 남자 집에 성큼성큼 들어간단 말야? 아니, 일면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것도 아니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지도.... 내 복잡한 머리와는 별개로 그녀의 조잘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어쩐지 일인분 치고는 좀 많이 산다 싶던데. 누구 또 있어?"

난 한숨을 푹푹 쉬며 앞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마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나와 비슷한 눈높이.

"예린 씨? 언제 올라온 거예요?"

"낮에 올라왔습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그래요. 일주일만인가요?"

꽤 반가웠다. 그녀가 와있다는 건 그렇다면..... 근데 예린이 턱짓으로 내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하아. 이 여자.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예린의 분위기를 보면 다들 예의상 혹은 본능적으로 일단 한 수 접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든가 할 텐데 이 여자는 빨리 안 들어가냐고 내 등을 계속 찌르고 있다. 난 딱 잘라 말하기로 결심했다.

"모르는 사람...."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I'm his wife!"

내가 아무리 리스닝이 딸려도 방금 그 헛소리까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돌아보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요! 뭐래는 거야, 진짜."

그러나 눈을 부라리는 나를 보면서도 빅토리아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입을 열어 아까처럼 영어를 줄줄이 쏟아냈다.

"Hey, relax. Accept the reality. Prime Minister David Cameron will address an emergency session of Parliament Thursday morning on the riots, after hosting a meeting of the government's emergency committee. Lawmakers have been called back from their summer break to respond to the crisis....."

방금 전까지 한국말을 누구보다 잘 구사하고 있던 이 금발 여편네가 다시 한 번 영어의 폭포를 쏟아내는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의외인 건,

"What the hell did you say? Stop the meaningless bullshit."

이라고 예린이 몹시 유창하게 말해버린 거다. 난 입을 딱 벌리고 양쪽의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빅토리아도 놀리던 입을 딱 멈추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예린을 쳐다보았다.

"영어 잘 하네? 와우."

"그러는 그 쪽은 한국말 잘 하시는 군요. 영어로 쓸데없는 소리는 잘도 지껄이기도 하고.."

"남이사."

생긋 웃는 빅토리아와 선글라스를 낀 무표정의 예린 사이에서 스파크 같은 게 번쩍이고 있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렇겠지? 이 상황을 구제해주는 것은 역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머, 오빠! 지금 오시는 거예요?"

"리사야...."

집 안에서 리사가 나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보는데다가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라는 게 이런 거겠지? 일단 리사의 권유에 따라 나는 물론이고 빅토리아까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지고 온 분식 꾸러미를 푸는 동안 어떻게 된 건지 묻는다.

"그동안 연락도 없이... 그리고 오늘은 갑자기 올라온 거야?"

그러자 리사가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음, 어쩐지 오늘 아침에 말이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서울에 막 올라오고 싶더라구요. 급한 일은 후다닥 처리하고 언니랑 같이 올라왔죠."

이상한 기분도 아니고, 이~상한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거실 소파 한편에 냉랭한 표정으로 있는 마리가 앉아있었다. 녀석과 눈을 마주치기 미안할 지경이다. 마리의 그 신기한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마리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을 때 마리가 느낀 기분은 분명 리사에게도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그걸 느낀 리사는 일부러 여기 이렇게 와있고 덕분에 나와 마리의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완전히 빠이빠이다.

"리... 리사야, 그건 말이지."

"어머. 이거 떡볶이네요. 맛있겠다. 제가 그릇이랑 젓가락 준비할게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리사는 환히 웃으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마리 쪽을 다시 쳐다보니 녀석은 굉장히 불만인 기색을 푹푹 뿜어대고 있었다. 마리에게서 검은 빛의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마리가 쿠션을 끌어안으며 부엌 쪽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날린다.

"저 여시가 끝내 훼방을 놓을라고...."

"으음."

여기서 괜히 입 열어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뒤통수만 북북 긁으면서 가만있으려니 마리가 새로 나타난 사람을 보고 내게 묻는다.

"근데 저 양키는 뭔데예?"

양키라.... 그런 표현을 쓸 거면 목소리를 좀 낮추던가. 듣는 양키 기분 나쁘잖아!

"응? 난 양키 아닌데? 호주 출신이야. 오스트레일리아. 양키는 미국 애들이 양키지."

처음 오는 남의 집 거실에 앉아있는 것 치고는 굉장히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던 빅토리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금발 여자라고 다 미국인은 아니었구나.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사상에 수정을 조금 가했다. 그런데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예린이 빅토리아 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게 보였다. 뭐지.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경계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라고 경계하던 마리도 그녀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자 놀란 모양이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날 보고 묻는다.

"선배랑은 대체 뭔 사이라예? 와 달고 들어옵니까?"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빅토리아가 먼저 대답했다.

"쟤가 날 샀어. 3만원에."

쿵- 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 속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인가 생각했더니 다들 놀라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닌 모양이다. 소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리사였다. 그대로 부셔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박력을 선보이며 거실 탁자에다 들고 온 그릇을 메다꽂은 그녀는 내게 시선을 던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이게 무슨 소리죠?"

리사야, 앞으로 그런 추궁을 할 때는.... 차라리 화를 내라! 웃으면서 따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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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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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베일리(Victoria Bailey. 24세. 171cm. 65kg. D컵. 멜버른 출생. 금발에 푸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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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저 이름은 대충 지어놓고

( 이름은 예전에 좋아하던 만화 주인공 이름. 성은 회사에서 쓰는 제품 이름. )

혹시나 싶어서 구글링 해보니 완전 똑같은 이름의 금발머리 여성분이 있더군요;; 페이스북도 있어;; 엄마야....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비슷하거나 겹치는 것이 있어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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