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63화 (6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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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웃는 얼굴"로 화를 내고 있는 리사를 달래기란 참 쉽지 않았다. 그 경직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튀김과 떡볶이를 다 먹어치운 빅토리아가 내게 인사랍시고 뺨에 입맞춤까지 남기고 돌아갔다. 상황은 더욱더 안 좋아졌다. 그 후에 난 무릎까지 꿇고 앉아 바른 몸가짐에 대한 훈계를 리사로부터 한참이나 들어야만 했다. 발바닥에 쥐가 났다.

다음 날, 모처럼 리사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지애를 따라 학급 조회에 참석했는데, 어라? 유진이 옆 자리가 비어있었다. 지애에게 물어보니 소란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일까 싶었다. 문득 어제 유진이가 말한 게 생각났다. 이상한 이름이 붙은 교회에 들어가던 소란이....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싶어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택용이와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지금 보니 녀석도 꽤 키가 크다. 하긴 맨 뒤에 앉아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싶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등나무 쉼터에 앉아있으려는데 유진이가 다가왔다. 내 옆에 앉은 유진이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유진이가 아까 쉬는 시간에 소란이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지가 전화를 받더니 굉장히 귀찮다는 투로 모르겠다면 화를 내더란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하려던 유진은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는 걸 보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나한테 평소처럼 대하질 않는다. 그러니까 뭐랄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정말 귀찮고 얄밉게 구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정말 점잖고 예의 바르게 군다. 어제만 해도 택용이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내게 말도 잘 건네지 않고 부를 일이 있어도 평소처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했다. 유진이 고개를 꾸벅하고 가버린 다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나도 교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가늠한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Hi, Mr. Choi!"

"최"라는 발음이 안 되는 것도 아니면 일부러 초-이 라는 식으로 발음하는 가증스러운 양키... 아, 아니, 호주 여자 같으니라구. 순간, 호주 사람을 부르는 말은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한국 땅에서는 한국말 써. 빅토리아."

"No, no. I asked call me Vicky. Don't say so sticky. Bring our last fantastic night on. You are so cool - don't know what to do. Oh babe, I can't come close to you. I want you to just feel good And can't you see I'm in the mood. Want you touchin' mine. I'm just waiting for a sign. I wanna makes you feel so hot. I wanna find your tender spot. Turn me on........."

"아오, 진짜 못 알아들을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비키! 샷 업 마우스 플리즈!"

성질을 버럭 냈더니 빅토리아, 아니 비키가 씨익 웃으면서 허리에 손을 턱 얹는다. 그녀는 어제 자신을 비키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다.

"이러니까 대한민국 영어교육은 실패라니까. 어떻게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이 이런 간단한 회화도 못 알아듣고 말이야."

"그게 어딜 봐서 간단한 회화야."

"간단한데?"

"너랑 간단한 회화라도 하기 싫으니까 그러지!'

"날 왜 이렇게 싫어해?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했어?"

나는 안 잡아먹었어도 내 지갑의 돈은 잡아먹었지. 비키는 손가락을 턱에 대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흐음. 이렇게 핫 스타일의 나이스 바디 금발녀가 말을 거는데도 마다한다 말이지."

자기 자신을 핫 스타일의 나이스 바디라고 말하다니 낯짝도 두껍다. 뭐... 그녀의 늘씬한 키와 훌륭한 흉부를 보고 있노라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인정하기 싫다. 녀석은 뭔가 궁리하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취향이 이쪽이 아니라... 아주 영~ 아니, 어리다 못해 좀 더 나가서 페도필리아, 그 쪽이라서 나 같은 성숙한 성인 여성에는 취미가 없는 건가?"

"페.... 뭐시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단어인걸. 나한테 갖다 붙이지 마."

"아까 저쪽에서부터 오면서 보니까 쪼끄만 여고생이랑 굉장히 사이좋게 이야기 나누고 있기에 그런 줄 알았지. 정말 아냐?"

"아니라니깐!"

페도... 뭐시기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 입에서 나온 이상 결코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불길한 기분이 든다. 녀석은 내 불길한 기분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친절도 하셔라.

"아, 페도필리아가 뭐냐면... 아직 미성숙한 육체를 가진 여성에게 성적 흥분을 갖는 일종의 도착 증세를 이르는 건데 대개 영유아나 저연령의 소년, 소녀를 상대로 욕정을 하는 그런 종류의..."

미치겠다. 누굴 정신병자로 모는 거야, 이 여자가! 난 폭발하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 질렀다.

"아오, 진짜! 난 그런 거 아니라니깐! 난 쭉쭉빵빵하고 가슴 큰 여자가 좋아!"

"얼마나? 나 정도로는 부족한 거야?"

"너보다 훨씬! 엄청 큰 여자가 좋아! 수박만 한!"

"헤에."

"뭐가 헤에야!"

남은 열 받아 죽겠는데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니, 난 그냥 너보고 뒤를 보라고 권하고 싶어."

"뒤?"

뒤를 돌아보니 아연실색한 표정의 현아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은애, 웃음을 꾹 참고 있는 표정의 태근이 형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야, 이 사람들은.... 현아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석이 취향이.... 그랬구나. 미안..."

니가 왜 미안한데! 반면에 태근이 형은 참았던 웃음을 빵 터트렸다.

"역시 남자다! 우리의 호프, 최한석!"

은애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몹시 경멸하는 눈빛만으로도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해머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내가 입만 벌리고 뻐끔 거리고 있노라니 비키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솔직하다는 점에서 플러스 1점. 사회적 품위에서는 마이너스 십 점. Congratulation, Mr Choi."

그렇게 나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나치고는 실습 동기들이랑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저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주는 분노라니!! 비키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외쳤다.

'신이여! 제가 기필코 저 녀석 잡아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내 마음에 비장미를 더하듯이 예비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오. 또 지애한테 혼날까 싶어 서둘러 교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오후 업무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모처럼 정상 퇴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의 소박한 기대는 오래 가질 못 했다.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딱 마주친 태근이 형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덩치에 안 어울리게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왜 그래요. 사람 불안하게 실실 웃고."

그러자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를 지극히 환대했다.

"오오. 확고한 여성관을 가진 우리 한석 군. 지금 퇴근하는가?"

"다 끝났는데 퇴근해야죠."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가볍게 한 잔 하러 가자."

"지난주에 그렇게 마셔놓고 또 술 먹자는 소리가 나와요?"

"그렇게 무식하게 마시는 거 말고 우아하게 먹자고, 우아하게."

곰 같이 생긴 사내가 동작으로 말하는 "우아하게"는 몹시 닭살 돋는 광경이었다. 내가 손 사레를 치며 빠져나가려고 하자 형은 그 우악스러운 팔로 전혀 우아하지 않게 내 목을 감아버렸다.

"동기들끼리 한 잔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래. 가자, 가."

"켁켁.. 이렇게 납치할 거면 애초부터 의견을 묻지 말던가요...."

형이 날 끌고 간 곳은 공대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 입구였다. 거기에는 현아와 은애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인마, 현아가 너 안 오면 안 간다고 그랬단 말야. 나 좀 도와주는 셈치고 가자. 응?"

"켁... 차라리 목을 계속 조르세요. 남자 귀에 대고 귓속말 하지 말고."

별 수 없이 난 형의 차에 올라타고 함께 가야만 했다. 학교를 벗어나 30분 정도를 달려 남산 중턱에 있는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라는 걸 확인한 난 조수석에서 형을 돌아보며,

"설마, 형이랑 나랑? .... 아까도 말했지만 전 여자가 좋은데요. 남자는 그다지..."

이라는 헛소리를 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 다행스럽게도 호텔로 가는 건 아니었다. 호텔을 돌아 뒤쪽으로 갔더니 으리으리한 대궐처럼 생긴 한식집이 있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우리 자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흐음. 지난번에 형에게 지나가는 투로 현아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이런 데로 와버렸구나. 하아.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해줄 걸 그랬나.

"현아는 뭐로 할래?"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현아는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이 내려놓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에게 파는 식사인데 왜 이렇게 우리 말 밑에 영어와 일어, 한자까지 붙어 있는 줄 모르겠다. 게다가 가격은 왜 또 안 쓰여 있어? 대체 뭘 보고 주문하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거기다 퍽 부담스럽게도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의 태도는 마치 귀한 손님을 모시는 기생처럼 사근사근하기 그지없었고 그녀가 입고 있는 한복은 퍽 곱고 비싸보였다. 메뉴판을 신나게 보고 있는 건 은애뿐이었다.

"오빠, 저는 이거랑 이 코스도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오빠는 드셔보셨어요?"

형, 은애, 나, 현아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앉았는데 은애가 과도하게 형에게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맞은편에 앉은 나로서는 형의 표정이 점점 곤란해지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뭐, 그게 마음에 든다면.... 솔직히 나도 이런데 뭐 보고 시키는지 몰라."

형은 종업원에게 물어 주방장의 추천 코스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줄줄 나오자 형은 그걸로 3인분을 달라고 했고 은애 보고는 아까 먹고 싶다고 한걸 시키라고 했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나서 내가 물어보았다.

"여긴 자주 오던 데가 아닌가 봐요?"

그러자 형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동생한테 물어보니까 자기가 자주 가 본 곳 중에서 여기가 분위기 젤 좋았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한 번 와봤어. 난 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종로 쪽에서만 있어가지고 다른 데는 잘 몰라."

형의 시선은 현아 쪽에 머물렀지만 그녀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장지문 너머의 풍경만 구경하고 있었다. 정원이 좋기는 확실히 좋았다. 마치 나무 하나하나, 꽃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가꾸어진 것처럼 정갈한 정원은 그림으로 그린 듯 했고 이리저리 오가는 종업원들도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게 생긴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런 곳에 내가 있는 것이 참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효진이가 이런 데를 자주 온단 말이지? 하아. 녀석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니 전혀 상상이 안 간다. 방에 들어와 있기에 다른 손님들이 보이지 않지만 아까 주차장에서 언뜻 본 차들은 죄다 수입차에 대형차 뿐이었다. 이런 고급 한식당에 효진이가 어쩐 일일까?

"여기 참 분위기 좋네요. 단 둘이 와도 참 좋을 것 같아요. 오빠."

"그....그러니? 으음. 저기, 현아는 어때? 괜찮니?"

"네."

은애의 형을 향한 이런저런 사탕발림에도 불구하고 형은 꾸준하게 현아에게 말을 걸었고 현아는 주로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다. 곧 이어 종지만 한 그릇에 담겨 나온 죽부터 코스가 시작되었다. 현아를 힐끔 보니 녀석은 식사도 깨작깨작거리고 있었다. 인마! 너 떡볶이 먹을 때처럼 먹어보란 말야. 이건 떡볶이 몇 십, 몇 백 그릇 어치 가격의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는 코스라고! 보고 있는 내가 다 답답했다. 이름도 모를 무언가 쬐깐한 것들이 잔뜩 이어 나오는 동안 향이 엄청 강렬한 인삼주도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그 이후로는 전복요리, 유황오리, 랍스터 등등이 계속 나왔다. 랍스터가 한식이었다니. 몰랐다. 덕분에 잘 얻어먹기는 했지만 형의 방향이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 헤어지기 전에 조언을 해줬다.

"형, 사실 현아는 이런 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형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딱히 돈이 아깝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현아의 눈치를 살필 뿐.

"그러면?"

"전에 살짝 들어보니까 매운 거 좋아하더라구요. 좀 토속적인 거 있잖아요. 떡볶이나 아구찜, 그런 거."

"아아, 그랬어? 통 말이 없어서 말이야. 인마, 넌 그런 고급 정보를 좀 진작 알려주지, 그랬어."

"한식이라고 말하면 대충 알아들을 줄 알았죠."

저 쪼끄만 녀석이 너무 커다란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말해주려다가 그건 너무 잔혹한 일인 것 같아 참았다.

"그리고 펀치 브라이스라는 인형 한 번 찾아보세요."

"펀...뭐?"

"펀치 브라이스. 전에 보니까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난 형에게 인형 이름을 다시 한 번 일러주었다. 형은 자신이 직접 현아를 데려다 주고자 하였으나 한 잔 더하자는 은애를 떼어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현아는 인사를 마치고 총총 가버렸다.  나 역시 같은 방향인지라 형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고 헤어졌다. 한식당을 벗어나 호텔을 지나 앞으로 가다보니 먼저 가고 있는 현아가 보였다. 그녀를 불러서 동행한다.

"형이 한 잔 더 산다는 데 따라가지 그랬어?"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었다.

"아직 무서워?"

"아니, 뭐 그렇다고 아주 막 무서운 건 아닌데... 좀 거부감이 있달까. 저런 덩치를 가진 사람 중에... 으음. 뭐, 좀 그래."

뭔가 이상했다. 말을 들어보면 현아도 형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태도일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가?

"형도 딱하네. 너한테 잘 해주려고 애쓰는데 말이야."

"나한테 왜 잘해줘?"

"그야 형이 널...."

여기까지 얘기하다가 입을 딱 닫았다. 아직 본인이 직접 밝히지도 않았는데 미리 말해버리면 좀 그러니까. 나란히 걷고 있던 현아가 날 올려다본다.

"오빠가 날 왜?"

"어...어...니가 쫌 많이 작아서 많이 멕이고 싶었는가 봐. 다음에는 햄스터 사료라도 사오라고 해볼까?"

놀리는 말인데도 현아는 그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했을 뿐이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제법 걸렸다. 꽤 오래 동안 같이 걸어가며 드문드문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는 집에 잘 안 붙어 계시고, 나머지 가족이라고 해보아야 어머니, 여동생 하나에 언니만 둘 있는 딸부자집의 셋째로서 남자 대하는 데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여중, 여고를 나온데다가 그녀가 있는 과도 남자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래도 늘 여성적인 분위기에서만 지내온 모양이다.

"남자 사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기회가 별로..."

"그래도 대학교에서는 다들 한 번씩 사귀고 하잖아. 현아 정도면 좋다고 쫓아다닐 남자도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현아는 두 손을 흔들며 맹렬하게 부정했다.

"그...그런 사람 전혀 없어. 진짜루."

"그래?"

강한 부정이 뭔가 심상치 않다. 그저 사귀어 본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엄청나게 싫어한다.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나랑 완전 반대네. 난 남중, 남고에다가 공대... 좀 있으면 군대까지 갈 테니 아주 그냥 남자들 냄새에 찌들어 살아."

"그래? 그래도 국민학교는 남녀공학이었을 거 아냐?"

"그랬겠지? 그때는 여자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냈는데,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도 안 난다."

그러자 현아의 발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기억.... 안 나? 하나도?"

"그렇지. 뭐."

"반장까지 했으면서?"

"안 그래도 4학년인가 5학년 때 반장 했었어. 근데 몇 학년 때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

"정말 기억력 안 좋네. 한석이."

어라? 뭔가 이상하다.

"근데 내가 반장 했던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전에 들은 것 같아. 왜 있잖아, 전에 떡볶이 먹을 때 그 때 네가 말했어."

"그랬던가?"

뒤통수를 긁적여보지만 그랬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 이야기도 했었던가. 그때에. 내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현아가 재차 물어본다.

"암튼 넌 지금 여자친구 있을 거 아냐?"

"나? 내가 여자친구 있는 것처럼 보여?"

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여자한테 대하는 게 익숙한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당연히 여자친구 있는 줄 알았지. 아까 낮에 보니까 그 빅토리아라는 분 이랑도 친근하게 이야기 잘 하고 있었고."

오오. 신이시여. 나 최한석. 드디어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는 여자라고는 엄마와 사촌누나들, 과에 몇 명 있지도 않은 선후배가 다였던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지혜, 명희, 효진, 리사, 마리, 예린, 소란, 유진, 선영... 이 모든 게 그대들의 은공이다. 그나저나 비키랑 내가 그러고 있는 게 이야기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니 눈에는.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잘라 거절할 필요가 있었다.

"비키랑은 친근한 게 아냐. 그냥 그 녀석이 들러붙는 거지."

"그래? 흐음.... 한석이 취향도 쭉쭉빵...뭐, 그런 거라면서. 빅토리아 씨 정도면 좋겠네?"

"아오. 너까지 그 이야기 자꾸 할래! 그만 좀 하셔요들."

현아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나 안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그 영어 선생님 몇 번 본 적 있는데."

"어, 그래?"

"응. 일부러 본 건 아니지만 머리색이 눈에 띄잖아. 최근에 자주 봤어. 우리 동네 근처에 사나봐."

"그랬구나.... 암튼 그 녀석 이야기는 좀 빼자. 내가 다 귀찮다."

"귀찮을 정도로 여자가 많은 거야, 한석이는?"

이런 오해까지 사다니. 나란 남자. 훗.

"어쩌다보니 여자들이랑 친하게 지낼 기회가 늘어나서 그래 보이는 거지... 근데 지금은 사귀는 사람은 딱히 없어."

순간 선영과 리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그녀들과 내가 딱히 사귀는 사이라거나 미래를 약속한 적은 없었다. 조금 찔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응."

"그래? 난 지레 짐작으로 넌 당연히 여친 있을 줄 알고 그래서..."

무언가 더 말하려던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녀는 고개까지 돌리더니 딴청을 피운다.

"저기 버스 온다."

이상하다. 뭔가 더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동네로 향했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기까지 하고 우리 동네로 도착하고 나니 시간이 꽤 늦어있었다. 길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어 그냥 보내기가 뭣해서 현아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의 집은 시장을 중심으로 우리 집에서 조금 반대편에 있는 주택지역에 있었다. 어떤 이층 양옥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발을 멈췄다.

"여기야. 바래다 줘서 고마워."

"아니,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얼른 들어가 봐."

"응. 내일 보자."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이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돌려 골목을 빠져 나왔다. 큰 길 쪽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Hey, Gentleman!"

......어쩐지 뒤돌아보기 싫어서 그냥 무시하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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