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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내 어깨를 짚는 손이 느껴졌다.
"야, 부르는 데 씹냐?"
".......누구세요."
"아, 진짜. 이러기야? 아니면 젠틀맨이라고 부르니까 본인이 신사가 아니라서 찔려서 대답 못 한겨? You brute!"
"아니거든."
화를 버럭 낼까 하다가 그래보았자 또 말려들겠다 싶어서 그냥 낮게 대답했다. 비키는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힐끔 보았는데... 어라? 녀석은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매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살짝 얼룩도 있고.... 애써 일부러 웃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본인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냥 가만있었다. 근데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날 미행이라도 한 건가?
"이야, 근데 정말 신사적인데? 대개 그렇게 바래다주면 찐하게 굿나잇 키스라도 해서 들여보내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좀 더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밀어붙여서....."
"비키미행설"에 확증이 더 붙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미행 했기에 그걸 다 보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요즘 누군가 날 따라붙는 것 같은 느낌을 가끔 느낄 때도 있는데, 그게 설마 이 녀석인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너 무슨 ... 미행 같은 거 하냐? 나를?"
"내가? 너를? 푸하하하하."
녀석은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다가 골목 한 쪽을 가리켰다.
"내 친구가 저기 자취하는데 말이야. 거기서 나오다보니 너랑 그 현아라고 했던가? 둘이 오는 게 보이더라구."
아, 현아가 이 녀석을 동네에서 봤다고 했었지. 지나가다가 날 본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은 들러붙어서 괴롭히고 있고.... 이래저래 녀석이 귀찮은 내가 잠자코 있으니 녀석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래서 인사라도 할까 했는데 둘이 분위기나 시추에이션이 묘해서 그냥 조용히 있었지."
"묘하긴 뭐가 묘해! 그냥 바래다줬구먼!"
"그래? 너는 아니라도 현아는 안 그런 것 같던데? Isn't she lovely?"
녀석은 주로 헛소리를 할 때 말미에 영어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헛소리 좀 그만 하셔요."
"으음. 이렇게 좋은 힌트 서비스는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받는다고."
"필요 없거든요."
가만 냅두면 헛소리 레벨이 점점 올라가는 신기한 녀석이다. 비키는 놀란 듯한 제스처를 과도하게 취하며 말했다.
"이야. 이미 배가 부른 모양이네. 가만 있어보자. 어라 혹시 벌써 둘이서.....?"
"아, 쫌!"
점점 듣고 있자니 못 하는 소리가 없다. 화를 버럭 내고 발걸음 속도를 더 올려 떨쳐버리려고 하는데 이 녀석도 기럭지가 되는지라 뒤쳐지지 않고 따라온다.
"왜 화를 내? 난 둘이서 벌써 저녁 먹었냐고 물어본 건데. 대체 뭘 생각한 거야? Something erotic?"
"........예, 예.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리 가주세요. 전 집에 가야되니까요."
"너 정말 현아랑 아무 사이 아냐?"
"그렇대도!"
"흐음. 그렇다면 뭐. 내가 잘못 봤나....?"
시장에 도착했을 쯤 비키는 손을 흔들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마주 손 흔들어줄 의리도 없는지라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저 녀석은 대체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기에 나한테 들러붙는 건지 통 알 수가 없다. 지난주에는 얼굴 마주쳐도 입 꾹 다물고 있었기에 대화조차 없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주 입에 모터를 달았다. 한숨을 푹푹 쉬며 집까지의 걸음을 재촉한다.
집 근처 골목을 들어서는데 빌라 근처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키와 몸매를 가늠해 볼 때 리사와 예린이 틀림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어쩐지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골목 전체에 냉기가 서리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예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리사는 다소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칠성 애새끼들이나 태무 떨거지들 설치는 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그런 거 저한테 일일이 다 보고 하고 그래야 돼요? 나 지금 서울에 와 있는 거 안보여요?"
"아가씨. 다들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화로 다 알려줬잖아요. 형제들은 뭐하고 계신 거죠? 다들 날로 놀고먹으라고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지금? 더군다나 송 부장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구요?"
날이 바짝 선 리사의 말투는 종이를 베는 칼처럼 예리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예린의 말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침착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형제들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아가씨가 요즘 들어...."
"요즘 들어, 뭐요? 해이해졌다고요? 지금 그 말 하려고 하는 거예요?"
"예."
"나 이번에 부산 내려가서 그 헛소리 지겨울 만큼 들었어요. 언니까지 그래야겠어요?"
예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리사의 화를 더 돋우는 모양이다.
"병실과 집에만 갇혀서 살던 제가 이제 조금 사제 공기 좀 맛보고 일반인 흉내 좀 내봤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무슨 큰 문제라도 있어요? 나 하나 없다고 조직이 무너지기라도 해요?"
그러나 예린의 말투는 여전할 따름이다.
"그런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리사가 예린을 똑바로 쳐다본다. 키 차이가 있어서 조금 올려다보긴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위압감이 조금이라도 감쇄되진 않는다.
"그래서요. 설마 감히 내게 지금 불만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래요?"
"......."
"하!"
리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예린은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잘 들어요. 언니. 제가 요새 표정이 조금 좋아졌다고 다들 넋을 놓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들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김리사, 제가 합니다. 그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평범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말의 분위기가 어째 살벌해서 감히 앞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난다. 내가 알던 리사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쩐지.... 조금 무섭달까. 앞으로 나가기도 묘하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자니 내가 내 집으로 향하는 길을 뒤로 물러난다는 점에서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지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배님요. 예서 뭐하세여?"
"어? 어...."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방을 둘러멘 것으로 보아 학교에서 지금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마리를 돌아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이 느껴진다.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최대한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리사 쪽으로 돌아보았다.
"어... 어. 리사야, 안녕?"
작정하고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뜻하지 않게 날 발견한 리사의 표정은 뭐랄까. 화났다고 해야 하나 슬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게 사뿐사뿐 다가와 팔을 잡았다. 방금 전의 무서운 기세는 봄철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저녁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는데 계속 안 오시기에 나와서 기다리던 중이에요."
"그, 그래? 같이 실습하는 분들이랑 저녁을 먹었는데...."
"저런. 미리 연락을 좀 주시죠."
"그럴 걸 그랬네. 미안. 기다릴 거라고 생각은 못 했어."
내 왼편에는 마리가 나란히 서고, 오른 편에는 리사가 팔짱을 낀 채로 빌라까지 걸어갔다. 마리는 리사 쪽을 힐끔 보더니 약간 볼 멘 소리로 말했다.
"언니야는 왜 선배님한티 그리 사분사분하게 대하노? 오빠야가 다 뭐꼬? 낯 간지럽게꾸루."
"응? 몰라서 물어? 정말?"
내가 들어도 쫌 얄미운 말투다. 아니나 다를까. 마리가 금세 씩씩거린다.
"니 진짜 그릴끼가! 참말 보자보자 하니까...."
"억울하면 너도 오빠라고 부르던가."
붉으락푸르락 하던 마리는 나와 리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소리를 빽 질렀다.
"내는 싫타!"
나란히 걷던 마리가 발걸음에 힘을 주어 먼저 앞으로 쭉 나간다. 빌라로 먼저 들어가더니 이내 쿵! 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아따, 문 뽀사지겠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리사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한 걸까요?"
"응? 뭐가....?"
"아뇨. 아무 것도.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리사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곤 예린과 함께 앞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문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한숨을 잠깐 쉬고 나 역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마리의 분위기는 뭐랄까. 리사가 돌아온 시점을 기해 급속히 냉랭해 졌다고나 할까. 녀석이 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리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알고 있을 터다. 안다기보단 느꼈다고 해야 하나. 물론 마리와 난 그 이야기를 계기로 진도를 더 나갈 뻔 했다. 그러나 리사가 갑작스럽게 돌아오고 나니 마리는 나에 대해서 급격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자기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나를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그리고 리사.
하아. 리사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상냥하고 착하며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의 그녀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의문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혜의 청첩장 사건도 그렇고 그녀와 내가 관계를 갖게 된 일도 어찌 보면 그녀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계획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는 그녀가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까 오고 간 대화, 조직이 어떻고 죽이네 살리네 하는 대화는 결코 꾸미거나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그게 그녀가 몸담고 있는 집단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말로만 하는 엄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임이 틀림없다. 그런 그녀를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앞집 아가씨들은 나랑 어떻게 그냥 편하게 얽히는 법이 없네.... 거참...."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일단 샤워를 했다. 밀린 리포트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급한 건 급한 대로 틈틈이 써왔는데 가장 난공불락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문학과 성" 리포트가 남아 있었다. 노골적인 성애 문학을 써오라던, 그러니까 쉽게 말해 야설을 쓰라던 그 리포트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차라리 선형방정식 100문제를 풀어오라든가 소설책 100권을 읽고 요약해오라던가 하는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무려 창작이라니. 그 쪽으로는 영 부족한 재능을 탓해본다. 과사에서 얼핏 듣기로 요새 PC통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설을 담은 텍스트 파일이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그거라도 한 번 구해보아야 하려나. 원고지를 펴놓고도 처음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펜을 갖다 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렇게 시간만 자꾸자꾸 흘러갔다. 내 생각을 방해한 한 건 난데없이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똑똑똑똑-
현관을 쳐다보았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리포트 용지 위에 펜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갔다. 책상에서 일어나기 전에 잠깐 보니 조금 있으면 새벽 2시다. 이 시간에 누구지?
"오빠, 안 자요?"
아는 목소리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잠옷 차림의 리사가 서 있었다. 어깨에는 숄을 두르고 있었다.
"리사구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잠깐 나와 보니 이쪽에도 불이 켜 있기에."
"그래....?"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채 가만히 있었다. 리사가 조금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오라고 말도 안 해주시나요?"
"어? 어.... 들어와."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리사로부터 좋은 향이 풍겼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그 하나하나가 얇은 향초 다발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내 책상 쪽을 보더니 물었다.
"공부하고 계셨어요?"
"공부라기 보단.... 숙제 중이야. 요새 교생 나가느라 리포트가 밀렸거든."
"착실하시네요."
착실하게 야설을 쓰고 있었다....라는 이야기까지는 안 해도 되겠지? 리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고민했다. 침대 옆에 나란히 앉는 건 너무 야리꾸리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책상 의자를 끌어다가 거기에 앉았다. 내가 앉는 걸 보고 있던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렇게 내외하세요?"
"내외...라니?"
"절 어려워 하시냐고요."
"내가? 그랬나?"
리사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난 귀 뒤를 긁적였다. 만약.... 정말 만약에 내가 들어오는 길에 리사를 보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지금 당장 리사의 옆에 앉았을 것이다. 아니, 앉는 걸로 끝나는 게 결코 아니었을지도.... 그러나 지금 바로 앞집에는 마리가 있다. 마리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여기서 리사랑 뭐라도 했다가는.....
"딱히 그런 건...."
내 변명을 듣고 있던 리사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날 쳐다보며 이야기를 천천히 꺼냈다.
"오빠와 가까워지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잠시 못 본 사이에 너무 멀어지니 슬퍼요."
"리사야..."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당황한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어깨를 짚었다.
"그렇다고 울 것 까지는..."
"누가요?"
가렸던 손을 스스로 치운 리사는 말끔한 얼굴을 내게 쑥 내밀었다. 가까이 앉은 데다가 그런 자세까지 취하고 나니 얼굴간의 간격이 갑자기 가까워진다.
"윽.... 날 속였구나."
"속이다뇨. 전 그저 얼굴만 가리고 어깨를 조금 떨었을 뿐인데요. 울었다고 한 적 없잖아요."
이 녀석이라면 수백 명을 속여 놓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어머, 제가 언제요. 하고도 남을 것 같다.
"하아.... 마리가 너보고 여우라고 한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싫어요?"
"아, 아니."
리사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왔다. 짧은 키스가 오고갔다. 리사는 입술을 떼고도 두른 팔을 바로 풀지 않았다. 눈도 감은 채였다.
"리사야."
"잠깐만요. 맛을 음미하고 있어요."
이건 또 무슨 코카콜라 맛의 비밀 발표하는 소리다냐. 영문을 몰라 잠자코 있으려는데 눈도 뜨지 않은 리사가 천천히 말했다.
"맛이 조금 변했어요. 오빠 맛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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