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65화 (6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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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전에는 김리사 라는 애에 대해서 그저 귀엽구나, 이쁘구나, 깜찍하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네요."

자기 입으로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다고 칭한 리사가 눈을 떴다. 키스로 맛을 보면 상대의 생각을 맞출 수 있는 희한한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걸까. 뭐, 전반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뒤에 붙은 말이 마음에 좀 걸렸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과연 정말일까... 싶지만... 리사는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마리한테 이야기 들으셨다면서요?"

"응..?..... 으응.."

'어떤' 이야기인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리사의 추궁은 이어졌다.

"그리고 아까 저랑 예린 언니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보셨고요."

"어? 어.... 그건 결코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알아요.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너무 방심했어요."

리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방심해서 그런 모습을 내게 보였다는 건가. 그럼 방심하지 않았다면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 연기를 계속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리사는 내게서 몸을 돌려 바로 앉더니 팔을 쭉 내 뻗었다.

"방심....? 그리고 속상하다니?"

"뭐랄까요. 제 원래 계획은 오빠가 제게 푹 빠져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야 제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그 길이 어긋난 것 같아요. 마리도 그렇고... 예린 언니도 그렇고... 도움이 안 되네요. 도움이."

자기 입으로 계획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최한석을 자기 것으로 하려던 자신의 음모를 고백하는 이런 당돌한 아가씨를 보았나.

"계획이라니....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러게요. 제가 생각이 너무 많았을까요?"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는 리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혜의 청첩장을 숨기고 그 사이에 날 유혹했던 그녀다. 그와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인상의 아저씨들을 부리며 검은 정장의 여자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그녀다. 동생과 알 수 없는 어떤 '링크'를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그녀. 그런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제가 하는 일은... 굳이 설명하자면 참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 사람들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버릇이 저도 모르게 생겨난 것 같아요. 오빠를 처음 봤을 때 생겨났던 감정이... 제게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그걸 다루는 방법을 잘 몰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또 하고 그랬죠. 그게 결과적으로는 오빠로 하여금 저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한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리사야, 난 그저...."

"알아요. 오빠는 일반인이죠. 그냥 평범하고 좋은 분인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한, 제가 나쁜 아이였어요."

자칭 나쁜 아이 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혹은 앞으로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고백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리더니 아직 침대에 앉아있는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과 마주한다.

"저에겐 마리와는 다른 조금 특별한 '감'이 있어요. 딱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제 안에서는 그것만큼 확실하고 틀림없는 게 없답니다. 어느 정도로 확고하냐면.... 으음....."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제 감에게 물어보아서 안전하다고 생각된다면 눈을 가린 채 건물 옥상에서라도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예요."

"대체 그런 감은 어디서 오는 건데?"

"느낌이랄까요? 가슴이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머리에서 하는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오빠를 처음 봤을 때의 감은 이 사람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감은 오빠가 절 어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네요. 이럴 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리사야, 난 지금도.... 널 좋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알아요. 제가 오빠에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오빠를 나무라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순간,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리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저 잘 웃고 음식 잘 만들고 청소 잘하는 여자애의 눈이 아니었다. 그건 뭐랄까. 굉장히 강인하고 흡입력 있는 눈이었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 그대로 빠져 들어가 버릴 것만 같다. 어딘가 근원 깊숙이 닿아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언젠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보았던 눈 같다.

"그렇지만 전 오빠를 포기하지 않아요. 마리와의 약속 때문에.... 오빠를 독점하면 안 되지만, 그런데도 오빠를 갖고 싶었어요. 이런 제가 이상한가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마음은 참 예쁘고 고마웠다. 그렇지만 마냥 그저 편하게 대하기만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나를 배려해서 먼저 그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제가 조금 어깨에 힘을 뺄 수 있게 되면, 다시 오빠를 찾아올게요."

리사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자세가 자세다 보니 내 얼굴은 그녀의 가슴 사이에 파묻히게 되었다. 뭉클한 두 언덕이 얼굴을 감싸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까지 에로틱한 시추에이션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그때까지는 마리로 만족해주세요. 그 아이는 저와 달리 아무 꾸밈없이 착한 아이니까요."

무슨 의미일까. 마리로 만족하라니. 리사가 말하는 건 대체..... 그러나 이런 나의 궁금증은 전혀 풀어주지 않고 리사는 곧 돌아갔다. 그녀가 남긴 향기가 방 구석구석 남아있는 것 같다. 그녀가 돌아간 후에도 내 얼굴에는 젖가슴의 부드러움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새벽에 바깥에서 차 소리가 들렸지만, 내다보지 않았다.

출근하기 전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에 앞집으로 갔더니 마리가 혼자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말없이 식사했다. 리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날 향한 마리의 태도는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난 그런 마리에게 말 한 마디 더 못하고 돌아왔다. 날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의 마리를 보고 어쩐지 내일부터는 녀석과 같이 밥을 먹는 게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앞집에 가지 않고 바로 출근 했다.

교생 생활은 2주차에 접어들어도 여전히 정신없었다. 1주차처럼 어리바리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매사에 임했지만 지애에게 하루에 한 번 이상의 잔소리는 꼭 듣게 되었다. 지애한테 혼나고 등나무 쉼터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노라면 부르지도 않은 비키가 나타나 속을 긁었다. 이 녀석은 나에게 들러붙는 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면 나와 태근이 형, 현아와 은애가 먹으러 가는 점심대열에도 은근슬쩍 합류했다. 태근이 형과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잘 주고 받았고 현아는 물론 심지어 은애하고도 잘 지내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지나치게 활달한 녀석이 지난주에는 어째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는가는 정말 미스터리다. 그 점에 대해서 물어보면 비키는 입을 꾹 다물고 금방 딴 소리를 해댔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목요일 오후, 지애가 지시한 실습실 대청소를 하고 나서 나온 쓰레기봉투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지애는 확실히 사람을 부리는 게 거칠었다. 소각장에 간신히 도착하여 던져 넣고 돌아서려는데 내 귀에 뭔가 들렸다.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거의 안 들릴 작고 여린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소각장 뒤쪽을 보니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교지만 난 저 뒷모습을 알고 있었다. 월요일 날 무단결석을 하고, 화요일에 나와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던 녀석. 그렇게 한참이나 자기 짝꿍을 걱정시킨 녀석 말이다. 난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울고 있던 소란이 화들짝 놀라며 날 돌아보았다.

"서...선생님..."

"어, 미안. 내가 방해했으려나?"

"아.. 아뇨. 아무 것도."

녀석은 눈가를 슥슥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난 아무 말 없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녀석에게 들려주었다. 지난번에 종로에 있는 노점에서 유진이가 사준 손수건이었다. 녀석은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또 울기 시작했다. 소란이 안정된 건 내가 녀석을 옆에 놓인 폐걸상 하나에 앉히고 나서도 한참동안 더 울고 나서다.

"이제 다 울었어? 후련해?"

"예에. 좀이요."

소란이는 손수건을 내게 돌려주려다가 많이 더렵혀진 걸 알고는 도로 거두어 들였다.

"이거,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헤에. 세탁비는 따로 안 받는 거지? 니네 집은 세탁소잖아."

그제서야 소란은 풋하고 웃었다.

"신속, 정확, 깨끗을 자랑하는 양씨 세탁소에서 손수건은 서비스로 세탁 후 다림질까지 해서 드려요.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배달까지 해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돈 달라고 할까봐 걱정했지."

그제서야 소란은 내가 무얼 말하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입을 가리고 한참을 쿡쿡거리며 웃었다. 작은 손가락을 날 살짝 가리킨다.

"아, 진짜 그 때는 정말 놀랬다구요."

"그게 놀란 거였어? 난 니가 나한테 응원까지 하는 걸 보고 이거 무서운 애구나 싶었는데..."

"에에.. 뭐, 배달 다니다 보면 별 일을 다 보니까요."

별 일....이라. 그럼 내가 그 꼬라지로 있었던 건 별 일 아니라는 뜻인가. 생각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구나, 이 녀석.

"으음... 그랬구나."

"그 분은 유진이 몰래 숨겨둔 애인?"

"에엑..... 애인이라...... 그....그럴까?"

선영을 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지난 번 난데없는 전화 이후 지금까지 만나본 적도 없고 연락도 없다. 그 날 그녀는 대체 어딜 간 걸까. 아직 돌아왔다는 연락을 준적도 없는 그녀다. 딱히 내가 그녀에게 연락해봐야겠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런 그녀와 나의 관계를 남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주 짧게 고민하고 있는데 소란이가 내 고민을 덜어주는 발언을 했다.

"유진이한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정말?"

너무나도 흔쾌히 말하는 소란의 말에 반색을 했다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진이한테 비밀로 한다는 걸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해?"

그러자 소란이가 그 커다란 눈으로 날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말해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대답이 궁해졌다. 쩔쩔 매는 내 모습을 보며 소란이는 다시 쿡쿡거리며 웃었다. 난 조금 난감해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에... 암튼 그렇다는데?"

"아이, 참. 너무 유치한 말씀 마세요."

"그런가? 나 때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런 말 맨날 썼는데."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유진이가 선생님 보고 정말 엉뚱하다던데 정말이네요. 덕분에 제가 왜 울었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 그럼 이제 울지 않을 테니까 내가 따로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겠지?"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침통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가로로 저었다. 그리고 날 다시 쳐다보았다.

"혹시 말이에요."

"응."

"선생님은 종교 있으세요?"

"종교?"

"예, 교회라던가 절이라던가.... 아니면 뭐 어디라도."

종교라. 나는 안 다니지만 우리 엄마는 휴일이면 산에 올라가 뒷산 백당 폭포 근처에 있는 절에 꼭 가곤 했다. 거기가 딱히 영험하다고 소문난 곳도 아니고 대단한 불상이 있는 곳이 아닌 곳인데도 엄마는 꼭 그 절만 다녔다. 어릴 때는 한 번씩 쥐어주는 약과에 혹해 몇 번 따라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산 오르내리는 게 귀찮아서 가지 않고 있다. 몇 달 전에는 명희라는 아가씨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교회에 끌려 다니며 찬송가를 부른 적도 있고 바로 앞집에는 마리와 리사라고 하는 아주아주 종교적인 색채 가득한 이름의 아가씨들도 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나 자체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다. 아주 어처구니 없을 때 소리 드높여 신을 찾기는 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난 신을 안 믿어. 엔지니어로서 증명되지 않고 실험이나 증거로 밝힐 수 없는 건 믿지 않는 주의야."

"그러시구나...."

"왜 그래? 혹시...... 종로의 그 교회랑 상관있는 거야?"

그러자 소란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그걸 어떻게 아세요?"

말까지 더듬는다. 그 교회를 간 게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건가?

"응? 그거야 유진이랑 나랑 너가 그 교회 가는 걸 봤으니까 그렇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소란이는 잠시 후 뭔가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유진이가 종로에는 뭔 일로 갔나 싶었는데 선생님이랑 데이트하러 갔었군요? 그 기집애. 저한텐 선생님 이야기는 쏙 빼놓고 그냥 혼자 영화 보러 종로에 갔다가 절 봤다고 하더라구요. 거짓말까지 하다니... 이거 점점 수상한데?"

"어? 어... 그랬구나."

야단났다. 유진이는 아마도 나와 종로에 있었다는 걸 소란이에게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지난 주 데이트(?)를 자백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소란은 그것에 대해서 더 추궁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유진이 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보셨군요... 하아. 거긴 말이죠. 저희 엄마가 계신 곳이에요."

"어머니가?"

의외의 이야기가 소란에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녀석은 약간 먼 곳을 응시하며 천천히, 드문드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혹시 휴거라고 들어보셨어요?"

"휴가라면 몰라도... 휴거라니? 그게 뭐야?"

"그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데요, 조만간 20세기가 끝나는 때가 되고 사람들이 타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예수가 재림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참된 사람만을 데리고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올라간대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소란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제서야 몇 년 전에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휴거 소동이 떠올랐다. 그 때 막상 날짜가 되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목사라는 놈은 자신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휴거를 막았다며 하늘의 은총이라고 떠들었었지, 아마.

"그런 미친 소리를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 말야?"

"네. 그 때를 위해서 지금 착하게 살고 바르게 기도하고.. 막 그래야 된대요."

"무슨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가 애들 데리고 하늘나라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도 그렇고..."

"아..."

"사이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소란이의 어머니가 몸담고 있다는 곳인데 대놓고 그렇게 말하기도 좀 무엇했다. 애써 좋은 쪽으로 말해본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기도하는 거라면... 뭐, 좋은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말야."

소란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는 일도 다 때려치우고 저기 멀리 어디 기도원 들어가는 게 바르게 기도하는 거고, 가진 재산을 전부 바치는 게 착하게 사는 거라고 해요."

"헙.... 그건 좀...."

사이비의 냄새가 약간 났다. 아니, 아주 지독하게 났다. 소란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또 내뱉었다.

"이미 통장이나 패물 같은... 들고 나가기 편한 건 이미 엄마가 싹싹 긁어가지고 나갔어요. 가게랑 집이 만약 아빠 명의가 아니라 엄마 명의로 되어있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다 팔아넘겼을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 집은 아빠부터 엄마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예요."

소란의 말투는 마치 세상을 아주 달관한 사람처럼 들렸다. 노숙하고 겪을 거 다 겪어본 이의 체념같이 들리기도 했다.

"전 엄마한테 다른 건 몰라도 통장이라도 돌려달라고 찾아간 거였는데 도리어 저까지 잡아두고 입교하라고 난리를 치는 통에 학교까지 빠지고 그랬어요. 나오는 것도 아주 겨우...."

"그랬구나...."

소란의 갑작스러운 결석에 유진은 물론 지애도 꽤 걱정했던 기억이 났다. 난 그저 몸이 어디 안 좋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건 정말 안이하게 생각한 거였다. 이런 문제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좀 있으면 가게 달세도 줘야 되고 세제랑 용매도 다 들어오는데... 우리 아빠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고....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보아온 바로 늘 밝고 환한 표정의 아이였다. 벌거숭이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대금을 받아 챙기려는 악착같은 면이 있기도 한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을 정도면 얼마나 상심했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의 어머니가 그런 답도 없는 곳에 몰두해 있다면.... 나라도 미쳐버릴 테다.

"그랬구나...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줄 전혀 몰랐어."

"아뇨. 선생님이 미안하실 필요 없어요. 유진이도 전혀 모르는 일인 걸요. 전 남에게 폐 끼치는 거 싫단 말이에요."

"폐라니... 친구잖아."

"어차피 유진이가 우리 집 돈 대신 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정 알면 괜히 마음만 아플 거고... 저도 유진이를 좋아하니까 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는 말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그러나 소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해결되지 않는 슬픈 일을 나누면 전염될 뿐이다. 소란의 말투는 지극히 어른스러웠다. 유진이도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그 녀석은 좀 육체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른스러운 녀석이고 이쪽 소란이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어째 열일곱 살 여고생이 아니라 삼사십은 먹고 집안의 살림의 전반을 책임지는 아주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다.

"그...그러니?"

근데 좀 궁금해졌다. 자신의 친한 친구인 유진이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걸까?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소란은 날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네요. 왜 그럴까요?"

"글쎄... 나야 모르지."

"저도 모르겠어요."

서로 마주보고 있던 우리는 조금 멋쩍어 웃어버렸다. 소란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제가 선생님이 애인 만나러 다니신다는 거 비밀로 해드리는 것 처럼요, 선생님도 유진이한테 제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주세요. 약속하실 수 있죠?"

"그래, 알았어."

소란이의 작은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잠시 엉켰다가 떼어졌다. 문득 녀석의 손목에 매직 같은 걸로 뭔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소란은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내게 학생으로서의 인사를 하고 나더니 먼저 가버렸다. 나 역시 교무실로 돌아갔다. 쓰레기 버리러 난지도까지 다녀온 거냐는 지애의 질책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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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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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90년대 후반으로 굳이 배경을 잡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종교 문제입니다.

기억하시는 분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이때만 해도 세기말 분위기를 등쳐먹는 인간들이 넘실대고 있었죠.

저도 생판 모르는 곳에 엉겁결에 끌려가 팔목에 도장 같은 거 한번 받고 그랬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비슷하거나 겹치는 것이 있어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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