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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66화 (6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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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그 날 저녁, 태근이 형과 은애가 담당 사수들에게 붙들려 있느라 현아와 단둘이 퇴근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학 쪽으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가는 선남선녀분. 불청객이 끼어도 되겠습니까?"

"어머, 비키. 어서 와."

현아가 비키를 반겼다. 나를 쭉쭉빵빵 밝히는 색정남으로 만들어 버린 이후 비키는 우리 그룹에 아주 성공적으로 끼어들었다. 현아는 비키의 활달한 성격이 굉장히 부럽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현아도 충분히 수다스럽고 밝은 성격이었지만 그건 나랑 단둘이 있거나 여자들 끼리 있을 때만 발현되는 성격이었다. 자기 앞에 남자가 둘 이상이 되면 현아는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가 둘이었고 현아의 목소리는 밝았다.

"비키도 이쪽으로 가?"

"Of course. This is a shortcut on my way home. often have to use passing road."

아오, 저 녀석 또 시작이군. 난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현아는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비키는 발음 진짜 좋다. 부러워. 원어민이니까 당연하겠지? 나도 그 정도로 영어를 잘 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네이티브 스피커만큼은 어렵겠다."

"헤에. 현아는 수학과잖아. 근데 영어도 해야 돼?"

"응. 요새는 취업할 때 영어도 필요하다고 해서."

"휘유. 한국 대학생들은 힘들겠네."

현아와 비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비키가 못 마땅한 나는 그 두 사람과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비키가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한 마디 했다.

"어이, 한석은 왜 그렇게 따로 오고 있어?'

"내가 뭘."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정답이라 따로 대답하기 싫었다. 대답을 않고 있자니 비키가 내 옆으로 와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현아랑 단둘이 이상한 짓 하려고 했는데 내가 끼어들어서 짜증났구나?"

"아니요."

"그게 아니면.... 사실은 나한테 너무 반해버려서 할 말을 잃었구나? 그치? 응?"

"그건 아니거든!"

전력으로 거부할 필요가 있는 언사였다. 이쪽은 버럭 화를 내는데도 실실 쪼개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둘은 사이가 좋구나."

"응?"

현아는 부럽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비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답했다.

"이게 좋아 보여?"

"응. 내가 보기에는."

"너 시력 굉장히 안 좋구나..."

내가 진심으로 현아의 시력을 걱정하고 있는데 어쩐지 비키의 표정이 이상했다. 황급히 찌르던 손가락을 치우며 물었다.

"어,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찔렀나?"

"아, 아냐. 이런 게 사이가 좋은 거겠지?"

"응? 아마도."

"응."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비키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가버렸다. 현아와 난 서로 마주 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놈이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난리법석을 피우질 않나 갑자기 자기 혼자 기분이 다운이 되어 먼저 휑하니 가버리지 않나. 저 녀석은 데리고 꼭 정신병원에 가봐야 한다. 거기에 쳐 넣겠다는 게 아니라 조울증 진단이라도 받아보게 하려고 말이다. 분명 판정이 나올 게 뻔하다.

남겨진 현아와 나는 원래 계획대로 도서관에 들렸다. 필요한 책과 자료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도 함께 하게 되었다. 예의 그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자는 현아의 제의에 나는 상당히 주저해야만 했다. 그 아줌마에게 비키로부터 돈을 받아다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건 아직도 요원한 꿈이니까. 당장 내 3만원도 못 돌려받았구만. 그래서 내가 매운 걸 못 먹는다는 점을 들어 우리 동네에 있는 단골 기사식당으로 갔다. 조금 허름한 편이긴 하지만 맛은 좋다고 설명하며 가게로 들어가려는데 정말 의외의 인물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녀석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오늘 무슨 마가 낀 날이려나.... 비키에 이어서 이 녀석이라니.'

"오! 한석 군! 이게 얼마만이야?"

다름 아닌 박효진이었다. 난 한숨을 살짝 내쉬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효진아.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지혜 결혼식 때 보고 지금 만나는 거니 거의 이 주 만에 보는 셈이다. 녀석은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슈트 차림에 옆구리에는 헬멧을 끼고 있었다. 문득 전에 태근이 형이 말했던 오토바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너 만나려고 니네 집에 갔는데 없더라구. 그래서 쪽지 붙여놓고 그냥 가려다가 배가 고파서 밥이나 먹고 가려고 여기 왔지. 그 때 너랑 여기서 밥 먹었는데 맛있었잖아."

아아, 그랬지. 이사 간 지혜를 떠나보내고 밤새도록 이 녀석과 엉킨 그 다음 날. 여기에 와서 허기를 채웠다. 원래 맛있게 잘 하는 집이기도 하거니와 체력을 많이 소모하고 나서 먹는 밥이 어찌나 꿀맛이던지. 문득 옆에 있는 현아가 의식되었다. 효진이 이 녀석, 무신경하게 현아 앞에서 또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딱 만나냐? 넌 대체 삐삐도 안 가지고 다녀서 찾아다니기가 힘들어..."

효진은 뭐가 그리 기쁜지 신이 나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착한 짓을 많이 해서 하늘이 상을 주나 보다. 하하."

"......그럼 난 지은 죄가 대체 얼마나 많은 걸까. 널 여기서 다 보고...."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내가 중얼거리는 광경을 현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난 그저 밥이나 빨리 먹고 집에 들어가 쉴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을 만난 이상 또 무슨 사건에 휘말려 들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물론 효진은 그런 내 모습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지 할 말만 한다.

"이번 토요일에 시간 되지?"

윽. 녀석의 말투는 숫제 맡겨놓은 시간 찾으러 온 사람의 말투다.

"오랜만에 만나서는 다짜고짜 데이트 신청이야? 안 돼. 나 바빠."

"내가 너랑 데이트? 푸하하. 얼, 우리 한석 군. 많이 건방져졌는데?"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넘기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숫제 여장한 태근이 형과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건방은 무슨.... 무슨 일인데 그래?"

"응. 별일은 아니고 오랜만에 지혜나 만나러 갈까 하고 말야."

"지혜....?"

요 근래 잊고 있던 이름이 나왔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웃고 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걔 신혼집이 수원 어디라는데 혼자 집들이 가기는 심심해서 그러지. 너라면 같이 가도 지혜가 좋아할 거야."

"남편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번듯하게 생긴 얼굴로 축하를 받고 있던 그의 모습. 감히 내가 마주할 수 있을까.

"뭐, 어때. 친구들이 놀러간다는데... 행여나 남편이 너랑 지혜 사이를 의심하면 니가 내 남친이라고 말하면 되지."

황급히 손을 뻗어 극렬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쿨럭.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뭐야, 이 자식아. 영광으로 알아야지."

간만에 효진의 헤드락을 맛본다. 태근이 형도 그렇고... 이 남매는 집에서 가정교육으로 헤드락 거는 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안 그래도 딱 붙는 가죽슈트 차림인지라 그녀의 몸매는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고 거기에 내 머리가 꾹꾹 눌러 담기고 있었다. 현아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서둘러 녀석을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전력으로 밀어내는 게 좀 이상했는지 효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튼 별 일 없으면 같이 가자."

"별일이야 없기는 한데.... 오전 중에 수업이 있어서 말야."

"아, 맞다. 너 우리 오빠랑 같이 교생 한다면서? 이야기 들었어."

대체 어떤 이야기를 무슨 식으로 들었는지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보진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따졌다.

"오냐. 나도 들었지. 니가 태근이 형한테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말이야."

"내가? 뭐라 그랬는데?"

자기가 한 소리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저 천연 둔탱이를 보았나!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그 호칭을 내 입으로 꺼내야만 했다.

"얼빵이라고 했다면서! 게다가 지혜 일까지도 미주알고주알...."

이쪽은 발끈해서 소리치고 있는데 효진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내가 그랬던가. 오, 확실히 어울린다. 얼빵이 최한석. "

"뭐, 인마?! 아오, 진짜 이게."

지가 했던 말도 안중에 없는 효진은 내가 휘두르는 팔을 과장된 동작으로 피하며 옆에 세워 둔 오토바이로 다가갔다. 오토바이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미끈하게 생긴 게 무척 빠른 속도로 달리는 종류 같았다. 그녀는 거기에 올라타더니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낮으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엔진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바이저를 밀어 올린 효진이 엔진소리에 지지 않게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그럼 토요일 날 니네 고등학교 앞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같이 가자."

"잠깐. 설마 그 오토바이를 둘이 타고 가는 건...."

"설마, 오빠 차 빌려서 가자. 오빠가 차 안 빌려주면 니가 좀 대신 어디서 차 좀 빌려와라."

"내가 왜!"

"아, 그리고 마리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와. 걔도 애가 재미있어서 같이 가면 재밌겠다."

"그러니까 내가 왜 차를 빌리냐고!"

"그 옆에 계신 분은 혹시 새로 생긴 이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효진.

"얌마! 너 진짜..."

"하하. 한석이 좋은 녀석이에요. 잘 해보세요."

내가 대폭발, 빅뱅을 일으키기 전에 효진은 현아에게 덕담 아닌 덕담을 던지고는 그대로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였지만 그저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지른 소리는 거창한 엔진소리에 고스란히 묻히고 말았다.

"어휴, 진짜. 저게...."

막무가내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린 것을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옆에 있던 현아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정신없이 효진에게 휘둘리다보니 현아를 소개할 타이밍도 놓쳐버린 후다.

"누구야, 저 사람은?"

"아. 있어. 아는 녀석이야."

"녀석?"

"응. 보다시피 하는 짓거리가 여자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타입이라서 말야. 내 안에서는 불알친구로 대하고 있지."

"불.....읏흠. 굉장히 친한가 보네?"

그제야 내가 조금 민망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녀석에게는 내 불알을 맡긴 적이 있으니 아예 틀린 표현도 아니다만 그걸 현아에게 내색할 수는 없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아, 어쩌다 보니. 참, 저 녀석이 태근이 형 동생이야."

"아, 그래? 어쩐지 아까 태근이 오빠 이야기도 나오던데."

"응. 가만 보면 말야. 생긴 건 전혀 딴판인데 하는 짓은 똑같지 않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도하게 자신감을 갖는 거 말야."

현아가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후후. 좀 그럴지도?"

"좀이 아니라 진짜 그래. 아까 헤드락 거는 거 봤어? 둘이 어렸을 때는 분명 프로레슬링하면서 놀았을 거야. 아이구, 내 목이야."

뒷목잡고 넘어가는 시늉을 하자 현아가 내 모습을 보며 깔깔 웃었다. 우리 둘은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함께 하고는 다시 현아 집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요새 현아를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건 태근이 형한테 맡겨야 되는데....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주로 이야기했고 현아는 듣고 있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쯤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참 망설이던 현아가 이내 결심한 듯이 내게 물었다.

"저기 말야, 한석아."

"응?"

"아까 그 효진 씬가... 하는 분이랑 토요일에 어디 가는 거."

"응."

"지혜라는 분 만나러 가는 거 맞지?"

"어. 그런데?"

"네가 예전에 좋아했다던?"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남매 중 오빠께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지혜 결혼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현아는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그랬지."

"아직도 좋아해?"

"그럴 리가. 지금은 시집갔잖아. 효진이가 워낙 친했던 사이라 보러 간다고 하니까 그냥 같이 가는 거지."

"그러니?"

현아는 따로 더 묻지 않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집에 다 도착한 그녀를 들여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현아를 보며 조금 불안한 감이 들었다. 이러다 태근이 형을 도와주려던 내 호의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또 이내 고개를 젓는다. 내가 대체 뭐라고.... 요즘 들어 소위 '자뻑'이 심해진 것 같다. 아는 여자들이 좀 많아졌다고 건방져 졌다.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늘 가던 길에서 조금 벗어나 근처의 공원을 가로지르는 코스로 가기로 했다. 이쪽이 좀 더 빠르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어서 공원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걷고 있는데 앞 쪽에서 뭔가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다투고 있는 게 보였다. 길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기에 둘러 가기도 뭐했다. 발걸음을 좀 늦추었지만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자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너랑 이제 끝났다고 했잖아."

남자는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희승아! 제발...."

이상한 광경이었다. 항상 너무 쾌활하다 못해 그게 지나쳐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게 특기인 아가씨가 저리 서글프게 울고 있는 광경이라니.

"너, 다시는 찾아오지 마. 몇 번을 말해야겠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끝나.... 응?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

남자는 여자를 밀어내고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생각이고 자시고... 내가 다 말했잖아."

"그냥 싫어졌다는 게 말이 돼? 그걸 듣고 그냥 물러나라고?"

"그럼 어쩔래? 너 진짜 나랑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결혼........?"

여자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몰아세운다.

"것봐. 너도 확답을 못 하잖아. 나 이제 복학해서 3학년이니까 학교 아직 2년이나 남았어. 그런 다음에 취직하고 자리 잡고 그러려면 훨씬 더 걸린다고. 너 그때까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그거야.... 못 기다릴 거 없잖아. 니 군대 간 것도 기다렸는데."

"그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부담 돼. 너 보는 게 더 이상, 그러게 누가 기다리라고 했냐고."

"희승아! 나....난... 널 위해서 그런 것 까지 했었는데...."

"누가 하라고 강요라도 했어?"

남자의 착 가라앉은 말투와 대조적으로 여자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쩌지 못 하고 있었다. 여자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계속 애타게 불렀지만 남자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만. 너 이제 이 동네 그만 왔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는 끝났어. 돌아가."

"희승아아.....제발.....흑흑흑...."

우뚝 선 채로 펑펑 울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를 두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성큼성큼 걸어 나를 스쳐 지나갔다. 태근이 형만큼이나 덩치가 커다랗고 머리가 짧은 게 얼핏 보면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인상이었다. 대화를 미루어 보아 저게 그 말로만 듣던 군화 거꾸로 신은 상황이라는 건가 싶었다.

난 갈팡질팡 했다.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반대 반향으로 돌아가기는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저런 상황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꽤나 고역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못하고 발걸음을 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그녀는 날 알아보고 우뚝 멈춰 섰다. 평소에 실없는 웃음으로 가득하던 그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건... 참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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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모르는 분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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