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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67화 (6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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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쭘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 하기도 어려웠다. 이미 눈은 마주친 후다.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해보았다.

"아, 안녕, 비키?"

우뚝 선 채로 날 빤히 보던 비키는 눈가를 빠르게 훔쳐냈다. 날 보고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정말 타이밍 최악이네. Holy shit!"

"뭔지는 모르겠지만.... Holy 가 들어갔으니 뭐 좋은 거겠지?"

"그래. 니들 표현대로 졸라 좋은 거야. 졸라게."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하아. 어째 넌 이렇게 눈치가 없냐? 전에 분식집에서도 대충 그냥 넘어갔으면 됐을 테고.. 지금도 그냥 날 모른 척 하고 지나갔으면 이렇게 서로 뻘쭘하지도 않을 거 아냐."

"그..그런가?"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젠장. 나도 알았으면 진작 그냥 다 무시하고 가는 건데....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을려나. 비키는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흉한 모습을 본 죄로 술을 사라."

"뭐? 내가 왜."

"넌 여자가 울고 있으면 따뜻하게 안아서 위로해 줄지도 몰라? 이런 매너 없는 녀석 같으니..."

"다른 건 모르겠고 니 입에서 매너라는 소리가 나오니까 왜 이렇게 반대를 하고 싶을까."

"됐고, 얼른 가자. 저쪽에 가면 닭 맛있게 튀기는 데 있어."

"......벌써 결정 난 거냐."

원래의 표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그녀를 두고 그대로 가버리기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옆 동네의 한 치킨 집으로 들어간다. 닭 한 마리를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시켜놓고 500CC 두 잔을 시켰다.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우선 맥주부터 가져다주었다. 비키와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는 걸로 보아 이 집은 단골이긴 하지만 그 뭐다냐, 소위 "외국인 디씨"는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긴 후 케첩과 마요네즈가 뿌려진 양배추를 포크로 뒤적거렸다. 비키는 내게 물었다.

"다 봤냐?"

"얼추."

비키의 깊은 한숨....

"하아.... 보다시피 차였다. 그러니 이 누나 위로 좀 해줘봐."

"누나는 무슨 놈의...."

"누나가 싫어? 그럼 언니?"

"됐거든."

"형은 사양할게."

"안 한다고!"

실없는 소리를 다시 지껄이기 시작하는 걸로 봐서 다소 괜찮아진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한편에 자리한 수심은 여전했다.

"후우. 이제 정말 끝인가..."

"......."

"대놓고 끝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더 매달리면 나만 비참해지겠지?"

내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니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전역했어. 그런데 전역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헤어지자 그러더라. 충격 먹고 일주일동안 제대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데도.... 이미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더라. 사실 뭐... 나랑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니긴 했고. 나만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던 거지만 뭐."

금발 아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그 산적 같이 생긴 놈이 어디가 좋다고 비키가 쫓아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 그건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전형적인 것과는 달리 내가 아는 비키의 성격과는 좀 매치가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 성격이라면 누굴 좋아서 쫓아다니거나 하는 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하기야, 내가 그녀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이제 얼굴 알게 된지 2주 정도 되었을 뿐이다. 대화를 나누게 된지는 일주일이 조금 되었고... 워낙 스스럼없이 구는 그녀이기에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녀와 내가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비록 상당히 귀찮고 짜증나는 타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남자들은 작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하려나?"

"글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

"넌 어때?"

"나?"

"응. 너. 최한석."

"나야 뭐......."

갑작스러운 취향 질문에 바로 대답을 못 했다. 나와 밤을 보냈던 여자들을 떠올려 본다. 풍만하고 글래머한 지혜. 고양이 같고 날카로웠던 명희. 몇 번 몸을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효진. 검은 옷으로 자신의 본심을 가리고 있던 선영.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어쩐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리사까지... 모두가 각자의 개성과 외형이 뚜렷한 편이라 어느 누가 내 취향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비키가 먼저 선수를 친다.

"아, 맞다. 너는 가슴 크고 빵빵한 여자 좋아한다 그랬지? 영계는 별로라고 그랬고?"

".....좀 작게 말해주면 안 될까? 이렇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는?"

"뭐, 어때. 남자가 가슴 좋아하는 게 무슨 흉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안 그래도 니는 가만있기만 해도 튄다고."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가다 금발의 비키를 향해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지만 잠깐 뿐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까지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안 비키가 내게 잔을 들어 올려 보이곤 남은 맥주를 싹 비워냈다.

"넌 무슨 선생님이 되어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고 다녀?"

은근한 말투로 타박을 해보지만 전혀 먹히질 않는다.

"선생은 개뿔. 내 전공은 미디어영상이라고. 근데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덜컥 제의 받고 계약직으로 회화 선생 하고 있는 거야. 계약 연장 안 되면 바로 짤리는 거고."

"그...그러냐."

"나에 비한다면 차라리 니들처럼 교생 와 있는 애들이 더 비전 있어. 최소한 니들은 나중에 임용고시라도 볼 거 아냐? 우린 그런 거 일절 없어. 귀화라도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다른 건 모르겠는데 니가 귀화시험 치면 바로 붙겠구나. 최소한 언어의 장벽은 없을 듯 싶어."

비키는 피식 웃고는 점원을 불러 맥주를 더 시켰다.

"암튼 니 취향이나 빨리 말해봐."

"알아서 뭐하게?"

"국 끓여 먹으려나?"

"........최소한 스프라고 해라. 위화감이 없게."

거듭 놀라는 거지만 이 녀석의 말투는 진짜 한국사람 이상으로 속어나 관용어에 강했다. 한국에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고 하니 당연할 걸까. 그러나 취향 타령을 하던 그녀는 날 향해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현아는 어때?"

"갑자기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현아는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늘 현아에 대해서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 현아에 대해 묻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그냥 동기 사이인데."

"어라. 정말 아무 생각 없어? 여자로서 말야."

어째 질문이 집요하다.

"왜 꼭 남자 여자랑 있으면 엮어야 되냐?"

"아, 진짜 말야. 아무 생각 없다고? 정말? 요만큼도?"

마치 취조라도 하는 것처럼 비키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가며 나에게 바짝 들이대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기세에 놀라 몸을 조금 뒤로 물리고 생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 V자로 파인 상의 가운데서 언뜻 보였던 깊은 계곡은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날 향한 취조에 반문으로 답한다.

"왜 그렇게 현아한테 신경 쓰는 건데?"

"........흐음. 내가 이유를 말해주면 말이야. 내 부탁대로 해줄래?"

어라, 이런 대화를 전에도 어디서 해본 거 같은데.

"니 이유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내가 부탁까지 들어줘 가며 들어야 되냐? 언제 내가 물어보기나 했어?"

"방금 물어봤잖아. 내가 왜 그렇게 현아한테 신경 쓰냐고."

"......그렇긴 하지."

아오. 이 녀석.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파고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다른 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난 결국 한 발 물러섰다.

"부탁이 뭔지는 일단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까 말야, 이유나 먼저 말해봐."

그러나 비키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아니면 일찌감치 나의 성향을 파악했거나.

"부탁을 들어준다고 먼저 말해. You first go."

그래. 이런 실랑이를 예전에 선영이랑도 했었다. 하긴 그때도 난 이기질 못 했다.

"아, 알았어. 대신 너무 무리한 부탁이면 거절 할 거야. 빨리 이유를 말해봐."

"휴우. 알았어. 아까 내가 희승이... 그러니까 이제는 내 전 남친이 말야.... 걔가 날 찬 이유가 사실은 따로 있어."

"그랬던가? 그런데 걔 이야기는 왜..."

"희승이가 좋아하는 애가 바로 현아야."

"뭐?"

시큰둥한 말투로 현아 이름을 내어놓는 비키를 보며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비키는 찬찬히 설명했다.

"희승이도 수학과거든. 아마 현아랑 동기일 걸? 군대 다녀오느라 학년은 좀 다르겠지만."

"그랬냐...."

"내가 2학년 때 연합동아리에서 희승이를 만났는데 그 때 걔는 신입생 때부터 현아한테 완전 꽂혀서 맨날 쫓아다니고 그러고 있었어. 현아가 받아주지 않아서 다들 포기한 줄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내가 고백을 할 때도 아직 마음이 있었어."

모르긴 몰라도 희승이라는 녀석이 그냥 평범하고 단순하게 "쫓아다닌" 것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현아가 덩치 큰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걸 떠올렸다. 희승이라는 놈은 덩치가 태근이 형처럼 컸다. 상대가 무서워할 정도로 쫓아다닌다는 건 대체 뭘까.

"이번에도 봐봐. 전역하고 나서 다시 학교 복학해야 되는데 전역하고 나서 자취방을 하필 그 동네에 잡은 걸 보라고. 거긴 현아가 사는 동네잖아. 누가 그걸 모를 줄 알고?"

목소리가 점차 격해진 비키는 살짝 눈물이 고인 눈을 질끈 감았다. 먼저 좋아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 손해 보고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몫을 감당해야 한다. 나도 지혜에게 성급히 고백하고 그랬었다.

"난 내내 현아가 대체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어. 그래, 솔직히 가끔 현아 뒤를 밟을 때도 있었어. 희승이한테 무슨 소리 들을지 몰라 대놓고 말을 걸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현아가 자주 가는 분식집에 단골로 가기도 하고 수학과가 있는 이과대 건물 근처도 가보고 그랬어. 근데 마침 우리 학교에 교생으로 오기에 정말 깜짝 놀랐지."

"그럼 그 때 현아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비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먼저 들이대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과목이 겹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말없이 눈여겨보고 있었어. 그러다 네가 현아랑 친한 거 보고 너랑 엮이면 현아랑도 친해지리라 생각했지. 그 때 분식집에서 너랑 마주치고 나서 정말 잘 됐구나 하고 따라간 거야. 니가 하도 얼빵하게 굴어서 들러붙기도 수월하더라."

이제야 비밀이 풀렸다. 이 싹퉁머리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금발 민폐녀가 나한테 굳이 들러붙은 이유 말이다.

"하아...... 그런 이유라면, 그리고 니 성격이라면 나를 빼고 현아한테 바로 들러붙지 그랬냐. 뭐 하러 그렇게 번거롭게...."

그러자 비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들어 날 척 가리켰다.

"재미있잖아?"

"뭐, 재미?"

어이가 없었다. 지 남친이 좋아하는 여자와 가까워지려고 그 여자랑 친한 남자를 골려 먹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저게 아메리칸 스타일.... 아니, 호주 스타일이냐. 단단히 따지며 그동안 녀석에게 휘둘린 나 자신에 대한 피해보상을 하라고 주장할 참이었는데 마침 치킨이 나왔다. 내가 포크를 들고 뒤적거리고 있으려니까 비키가 팔을 걷어붙이더니 다리 하나를 쥐어 내게 내민다.

"쪼잔 하게 뭔 놈의 포크야, 포크는. 그냥 손에 들고 팍팍 먹어."

조금 뜨겁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치킨 조각을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맥주잔은 이미 비었다. 비키가 맥주를 추가했다. 맥주가 새로 날아오자 그녀는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니가 너무 심한 부탁은 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니 내가 잘 생각해보고 나중에 이야기할게."

"어째 불안한데....?"

"자자, 실연당한 빅토리아 베일리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 치킨과 맥주를 사주신 한석 님을 위하여. Cheers!"

"Cheers...... 근데 내가 언제 지갑을 연다고 했던가? 여기 오자고 한 건 너잖아!"

"Whatever."

"하아...."

맥주잔이 부딪히고 이내 비운다. 닭의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는다. 저녁을 안 먹은 것도 아닌데 비키 말마따나 여기 치킨은 굉장히 맛이 좋아 쑥쑥 넘어갔다. 실연의 아픔을 닭고기로 풀려는 듯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어대는 비키에 지지 않게 나 역시 체면 차리지 않고 먹어대었다. 곧 한 마리를 더 시켜야만 했다. 맥주도 더 시켰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얼굴이 빨개진 비키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언어학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자료 중에서 동양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걸 보고 자란 그녀는 아시아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공부도 꽤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에 해당하는 High school 저학년 때 이미 삼국지 영역판을 다 읽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전위라고 하니 말 다했다. 때마침 그녀의 아버지가 연구를 위해 가족 전부가 한국에 오게 되었고 그녀도 기꺼이 따라왔다고 한다. 다들 원래부터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가족은 한국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정착 3년차부터는 집에서 김치까지 담가 먹을 정도라고 했다.

그렇게 적응을 잘 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외모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조금 지내보면 너무도 한국적인 그녀의 호쾌한 성격에 다들 좋아라 하기 때문에 - 자기 입으로 다들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아 -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신희승을 만나 처음으로 마음이 설렜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가 군대를 가기 몇 달 전에 전격적으로 고백을 했다. 그러나 희승의 대답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그렇지만 네가 그걸 인정해주고 내가 네게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사귈게."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다고 했다. 그녀도 원래 희승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연애라는 싸움에서 먼저 반한 사람은 손해다.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 결정은 크나큰 오판이었다. 희승에게 끌려 다닐 만큼 다니고 2년을 넘게 기다렸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빈 맥주잔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테이블에 뺨을 대고 중얼거렸다.

"내 지난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지난 시간 말야. 그건 다 어디 갔을까?"

"모르겠다니깐."

"좀 찾아줘 봐."

"일단 계산서부터 찾은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찾아볼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녀석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테이블 옆에 꽂혀 있는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닭 두 마리를 먹어치운 건 알겠는데 맥주는 얼마나 마셨는지 감이 안 잡혔다.

"오백 호프 열여섯 잔에 반반치킨으로 두 마리 하셨네요."

".....언제 그렇게 먹었죠?"

"아까부터 들어오셔서 저희 지금 마감할 때까지 드셨잖아요."

앞치마를 두른 여자 점원이 씩 웃으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최종 금액을 보여주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했다. 이래저래 이 비키라는 녀석은 내 돈 잡아먹는 양놈 귀신임에 틀림없다. 자리로 돌아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비키를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Love is hurting the people. The pain only God knows where it comes from. When God created human beings, made to feel the pain..."

"인마! 계산 다 했어. 외국인 디씨 안 받아도 돼..."

"It's the bride's time to show her style..... As you wish... makes all the details come together............."

비키는 계속 영어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억지로 일으켜 어깨를 부축하고 거리로 나오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인마, 정신 차려! 너 집이 어디야?"

"I have no place to back.... it's too far.... no place to go..."

길가에 앉히고 뺨을 두드렸다. 그러자 풀린 눈이 조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희승이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난 희승이 아냐! 최한석이다."

"희승아... 날 두고 가지마...."

와락 날 끌어안는 그녀를 떼어내는 일은 참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녀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집을 물어봐도 대답도 않고 전 남친만 찾고 있는 녀석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울음은 다 그쳤지만 녀석은 축 늘어져 있어서 거의 엎다시피 하고 데려왔다. 어쩔까 싶었다. 이대로 우리 집에 데리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를 재운다라..... 남들은 백마 탈 기회라고 좋아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더 큰 아픔을 주기는 싫었다. 내 몸에 바짝 기대오는 비키의 뭉클뭉클한 흉부가 나를 꽤 자극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맞은 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내 마리가 나왔다. 녀석은 나와 비키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기 뭐꼬예."

"저.... 마리야,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오늘 하루만 이 녀석을 부탁하면 안 될까?"

자기가 그랬던 일도 있고 하니 흔쾌히 받아 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마리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이기가 무신 여관이라도 됩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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