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68화 (6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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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

"그렇다고 우리 집에 재울 수는 없잖아."

난처한 사정을 설명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자꾸 흘러내리는 비키를 추슬러 안아 올리다가 무심결에 녀석의 가슴 부위를 만지게 되었다. 상당히 물컹하면서도 촉감이 아주 그냥...... 그러나 그 순간 마리와 눈이 마주쳤고 녀석의 눈은 도끼눈이 되었다.

"와예? 기냥 마 재우시지예? 선배 특기가 그거 아닙니꺼! 여자 델꾸와서 재우는 거!"

"마리야!"

"아, 쫌! 됐습니다, 마! 다 치아뿔소!"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다시 불러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결국 나는 비키를 우리 집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침대에 던져놓고 나는 이불을 가져다가 바닥에 누웠다. 영어로 무어라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중간 중간 전 남친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는 비키의 잠꼬대를 귓등으로 흘려가며 애써 잠을 청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비키의 문제는 어차피 나랑 상관이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마리의 태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리는 날 좋아하던 게 아니었나. 비록 리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후 녀석과 한때 소원해졌기는 했다. 나도 녀석을 보기가 껄끄러워서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날 아침의 일을 계기로 다시 좀 잘 되려나 싶었다. 그러나 유진의 난입으로 진도가 끊기고 리사의 갑작스러운 상경 덕분에 마리와 나는 그 이후로 대화도 거의 없이 지내게 되었다. 아까 그 녀석의 표정은 뭐랄까.... 화가 났다기보단 슬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때까지 마리로 만족하세요."

라던 리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정말 내 미친 가정이 맞는다면 그건 리사가 나에게 마리를 양도... 혹은 마리에게 나를 양도한 것일지도 몰랐다. 으으으. 아무리 리사가 특이한 녀석이고 그녀들이 어떤 "공유감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설마 정말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지. 설령 내 미친 가정이 맞아서 정말로 리사의 말이 마리와의 행위를 허락한 거라고 해도 문제는 있다.  그걸 어떻게 대놓고 마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냐. 마리한테 가서 "리사가 그러는데 너랑 하라고 하더라." 이러겠는가? 으아아아아아아.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침대를 보니 비키는 브래지어가 다 보일 정도로 옷이 말려 올라가 배를 다 드러내고 대자로 뻗어서 코까지 골아가며 자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다가 잘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집들이 불이 꺼져있고 가로등만 외롭게 비추고 있는 밤길을 걸어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캔 커피 하나를 꺼내어 계산대로 가니 반쯤 졸고 있던 점원이 화들짝 놀란다. 캔 커피를 올려놓았는데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바코드 리더기를 못 찾고 버둥거렸다. 군것질 거리라도 하나 살까 싶어서 카운터 맞은편의 매대를 살펴보았다. 쥐포 소포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커피에 쥐포라.... 이건 좀 아니다 싶어 내려놓는다.

바로 옆에 초박형 콘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예전에 지혜라든가 명희... 그리고 선영이 만나러 가기 전에는 혹시나 싶어서 하나 정도는 늘 상비하고 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살 때만해도 편의점 점원이 여자인걸 알고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샀었는데 지금은 뭐.... 그냥 껌 사듯이 무심하게 올려놓는 나를 발견한다. 하긴, 점원도 특별히 부끄러워하거나 그러지 않기도 하다. 혹시나 싶어 하나 손에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무슨 생각이냐, 도대체 나는.

"500원입니다."

바코드 리더기를 드디어 찾았는지 삑- 소리에 이어 점원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천 원짜리를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았다. 그때 편의점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우뚝 멈추고 말았다. 마리였다. 녀석도 나를 보더니 표정이 굳는다.

"어쩐 일이야? 뭐 사러 왔어?"

"야... 뭐, 그냥."

주춤거리는 마리를 보고 있자니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하다. 난 냉장고로 돌아가 내가 샀던 캔커피 하나를 더 가지고 왔다.

"잠깐 커피 한잔 괜찮겠어?"

마리는 꽤 주저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에게 계산을 마치고 커피 두 개를 들고 마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근처 놀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마리는 잠자코 나를 따라왔다. 아까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만... 둘이만 있으려니 무척 또 조용해진다. 아까 화를 내던 것도 그렇고 조용한 지금도 내가 아는 마리가 영 아닌 것 같다.

"앉을래?"

"야."

그네를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 커피를 따서 건네주었다. 캔을 넘겨주면서 손가락이 조금 닿았더니 마리가 손을 움츠렸다. 혼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 그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기만 했다. 서로를 보지 않고 앞만 본다.

"저기..."

"저어...."

동시에 말을 꺼내다가 마주 본다.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내게 먼저 말하라고 재촉했다. 난 귀 뒤를 긁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는 미안했어.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해서... 네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다짜고짜 떠맡기는 게 아닌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앞으로는 조심할게."

"으음.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그리고 내가 여자를 집에 막 재우는 건 아냐. 너도 알겠지만 그때 데리고 온 니도 우리 집에 재우지 않고 지혜 집에 부탁했었잖아. 이번에 비키도 어쩔 수 없이..."

"알고 있어예."

마리답지 않게 차분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돌아본다. 이거 혹시 리사가 머리 자르고 얼굴 썬탠하고 앉아있는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알고 있다면... 아깐 왜...?"

"그야, 뭐....."

마리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며 대답을 미루었다.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심술이 나서리...."

"심술?"

이해가 잘 안 가는 내가 마리를 돌아보자 녀석은 입을 삐죽거리며 내게 따지듯 말했다.

"선배님이 나쁜 거라예. 지는 마, 언니 글케 가고 나믄 당연히 선배가 저한테.... 뭔가 언질이 있을 줄 알았는디 그런 것도 없구.... 머....."

"언.....질?"

어안이 벙벙하다. 설마 내 가정이 맞았던 거야?

"메칠 만에 문 뚜들기가 한다는 소리가 코쟁이 델꾸 와서 재워달라고 하질 않나, 요새는 와 아침 묵으러 안 옵니꺼? 다 채려놓고 기달리는데...."

"그거야 니가 안 부르니까...."

"하!"

녀석이 고개를 홱 돌려 날 쳐다본다. 살짝 밑에서 올려다보는 터라 녀석의 눈매가 어쩐지 무서우면서도 귀엽다.

"그...그런 걸 제가 어째 먼저 말해여. 글면 지가 너무 재촉하는 것 같구...."

"마리야."

"선배님은 진짜 몰라예. 제가 아침마다 무슨 생각으로 문 쳐다보고 있었는지...."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그 눈빛이지만 기어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내고 마는 대견한 녀석. 그런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웃음이 나와예?" 하면서 내게 대들려고 하지만 내 손이 얼굴에 닿자 그대로 우뚝 멈춰 선다. 그렇게 손을 뻗어 녀석의 뺨을 만져보았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피부에 손가락이 닿자 녀석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녀석의 거부 표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을. 그동안 내가 너무 센 여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마리의 부끄러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활달하고 기가 세지만 정작 이런 경험에 있어선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 손해만 보고 있던 녀석. 반성과 후회를 담아 녀석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마셨던 커피 맛이 진하게 났지만 그보다 더한 마리 맛이 났다.

"하아...."

긴 키스 후에 짧은 호흡. 마리는 나와 눈을 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녀석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을 테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는 키스만 세 번째다. 팔을 뻗어 녀석을 끌어당겼다. 내 품 안으로 안으려는데 마리가 내 가슴을 손으로 밀었다. 당연히 안겨 오리라 생각했던 녀석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

"왜.... 그래?"

"모...모르겠어예. 지는 말재주가 없어가..... 그런데.... 그런데....."

녀석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히 횡설수설하면서도 지난 시간 동안 계속 해온 생각이라며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지가 한 이야기 기억하시지예? 언니랑 지랑 연결이 되었다는..."

"응. 그래."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행동으로 미루어 믿을 수밖에 없는 신비한 이야기. 마리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지는 확신이 안 서예."

"확신? 뭐에 대한?"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선배님을 좋아하는 건지, 언니가 선배님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꼬 제가 헷갈리는 건지...."

"뭐라고?"

지금 마리가 한 이야기도 바로 이해가 되진 않는다.

"언니는 윽수로 선배님을 좋아하고 있어예. 그.... 그걸 하고 싶어 할 만큼예."

부끄러워하며 차마 말 못한 단어가 무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마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지가 이런 말 한다꼬.... 글타고 제가 선배님을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예, 근데.... 언니처럼 확 글치는 못 하겠어예."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진짜루, 정말 싫어하는 거 아니라, 그니까.... 언니야랑 내랑 원래 약속도 그리 하기로 했었지만은....그러니까....."

마리는 그 후로 한참 동안 자기가 날 얼마나 좋아하고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본인 말마따나 말재주는 없는 녀석이지만 그런 녀석의 마음은 참 고마웠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데 그걸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녀의 그런 느낌은 딱히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의논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자기 언니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걸 뻔히 아는, 아니 "느낀" 입장에서 녀석은 내심 나를 대하는 게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그녀들의 공감각을 내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처럼, 마리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리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리는 내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잘 자."

집 안에서 인사를 하고 들여보내려 했더니 마리가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굿나잇 키스라도 해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내 방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쟈는 저대로 재우실 랍니까?"

아아, 비키 말이군. 내가 녀석은 침대에서 자고 있고 난 밑에서 자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싫단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그럼 내가 니네 집에서 자면 되겠네."

라고 했더니 마리가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 무리란다.

"그럼 니가 다리를 잡아. 내가 팔을 잡아서 들 테니까 니네 집 거실로 옮겨놓자."

내 제안에 마리가 찬성했다. 현관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나 비키는 보이지 않았다. 이불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로 보아 중간에 깨서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딱히 메모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마리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녀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고 들여보냈다. 마리는 내게 허리까지 꾸벅 굽혀 인사를 하곤 자기 집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비키를 만났을 때 녀석은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헛소리를 하며 쾌활하게 굴고 있었다. 녀석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평소처럼 어울려주었다. 넌지시 지난번 분식집에서의 3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월급날 되면 주겠다고 했다. 돈 많은 한석 아니냐며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나중에라도 주겠다니. 장족의 발전이로다. 뭐, 이게 어디냐.

점심시간에 등나무 쉼터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유진이가 나타났다. 녀석에게도 동전을 주며 마시고 싶은 음료수 하나를 뽑아오라고 했다. 유진은 이온 음료를 뽑아가지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새 소란이가 이상해요."

"응? 소란이가 왜?"

내심 짐작은 갔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뭐랄까. 굉장히 조급해한다고나 할까요. 저한테도 막 이것저것 챙겨주고...."

"글쎄다. 원래 그런 편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 음..... 요새 주변 사람들이 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니 주변 사람?"

순간, 선영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울 엄마 있잖아요. 엄마가 이상해요."

"응? 유미 씨가?"

"네."

"이런 말하기 좀 미안하지만..... 원래 좀 이상한 분 아닌가."

당사자의 딸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민망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의외로 그 딸도 쉽게 수긍을 하는 대목이다.

"그렇긴 한데 요새는 좀 다른 방향으로.."

"어떤 방향?"

"어울리지 않게 장부 같은 걸 붙잡고 끙끙 매고 있더라구요. 가게 일을 집까지 가져오는 건 첨 봤어요."

문득 예전에 ROSE에 갔을 때 보았던 선영이 떠올랐다. 원래 그런 일은 선영의 담당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을 못 본 지도 좀 되었다. 지난번 새벽의 전화 이후 따로 연락이 오거나 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내 의견을 냈다.

"그런 건 선영이가 하던 거 아니었어?"

"요새 선영이 언니가 가게에 안 나온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데요, 아저씨. 뭔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뭔데?"

"전에도 그랬지만.... 선영이 언니를 엄청 친근하게 부르네요?"

속으로 아뿔싸! 라고 외쳤다. 등줄기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어? 어.... 몇 번 보다가 서로 말 놓기로 했었어."

"언제 그렇게 자주 봤다는 거죠?"

"어..으..음.... 그냥 뭐 오다가다."

유진의 눈초리가 가늘게 변하기 전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음료수 더 마실래? 아님?"

"됐어요."

유진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도 일어난다.

"다음 수업은 체육이라 미리 가서 옷 갈아입어야 돼요."

"어? 어.... 그래. 수업 잘 받아라."

녀석을 보내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레 겁 먹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선영과 내 사이를 들키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내걸고 유진을 건드리지 말라는 선영의 이야기도 그렇고 자신의 과외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선영의 프라이버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의 중학생 과외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유진이는 뭔가 알고 있다는 냄새를 풀풀 피우고 있었다. 딱 잘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받은 느낌은 그렇다. 유진이 이 녀석은 어쩐지 고양이과 동물의 느낌이라 설령 쥐를 잡았어도 바로 잡아먹는 게 아니라 툭툭 건드리면서 그 반응을 살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가게도 나오지 않고 있다니...  선영이 전화를 걸어온 날,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공중전화로 가서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만 갈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계약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것이고 하나는 성문화된 계약이었다. 그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순전히 내 감인데, 그 날 새벽, 전화를 끊기 전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 쓸쓸함이 잊히지 않은 까닭이다. 괜한 오지랖일지 모르겠지만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요일은 비록 강권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이미 효진이와 약속을 해 둔 터라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오늘 저녁 아니면 일요일 밖에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일정표를 그려보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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