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69화 (6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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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토요일은 비록 강권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이미 효진이와 약속을 해 둔 터라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오늘 저녁 아니면 일요일 밖에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일정표를 그려보던 나는 일단 효진이와 지혜를 만나고 온 후 일요일에 선영을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교무실로 돌아가자 지애가 서류철 꾸러미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하자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가 제법 밀려있단다. 별 수 없이 나도 그녀 옆에 앉아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학교 선생들은 애들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별의별 서류를 만드느라 꽤 많은 정력을 소비하게끔 되어있었다. 시간이 되어 종례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을 매달려야 했다. 겨우 끝마치고 학교 건물을 빠져나갈 때는 이미 상당히 어두워진 후였다.

"수고했어요. 어때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사주시는 건가요?"

"후후. 그렇게 부려먹고도 더치페이 하자 그러면 사수 면목이 안 살지."

"하하, 잘 먹겠습니다."

지애의 차에 올라타고 이동했다. 어딘가 싶어 창밖을 내다보니 ROSE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유흥가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오니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물든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 같은 거 있어?"

반말을 하는 걸 봐서 이젠 학교에서처럼 딱딱하게 굴지 않을 모양이다.

"아뇨. 전혀요. 다 잘 먹는데요, 음. 아, 매운 건 못 먹습니다만."

"흐음. 여기 이 동네가 좀 복잡하긴 한데 좋은 가게가 많이 있거든. 따라와 봐."

"예."

혹시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조금 불안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지애를 따라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노천에 테이블을 꺼내어 영업하는 카페테리아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가온 점원에게 클럽 샌드위치 2인분과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의외의 조합에 놀란 내가 물어보았다.

"샌드위치랑 맥주요?"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먹어보면 또 의외로 좋거든. 한 번 시도해봐."

"네."

사주는 분이 그렇다는데 어디 감히 토를 달겠는가. 지애와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병맥주가 먼저 나오더니 잠시 후, 커다란 그릇에 담긴 샌드위치가 나왔다.

"안쪽에 고정하느라 이쑤시개 꽂혀 있거든. 먹을 때 조심해서 먹어."

"네, 누나."

학교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 지애의 자상함에 기쁜 마음으로 대답하고 한 조각 집어 들어 보았다. 샌드위치 하나는 식빵을 네 등분한 빵 사이에 이것저것 끼어있어 제법 두툼했다. 전체적인 크기는 좀 작았는데 다양한 야채와 고기, 토마토 같은 걸로 꽉 차있었다. 한 개를 입에 가져가 조심스럽게 먹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일단 한 입 베어 먹은 다음 지애에게 묻는다.

"송 선생님은... 아니, 누나는 왜 안 먹고 계세요?"

"응? 으응.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긴 뭐가 아녀. 방금 전까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봐 놓고는.... 그러나 일단은 배를 채우는 게 급선무였기에 삽시간에 다섯 조각을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서 바닥을 보니 전체 조각 수가 열 개가 안 되는데 너무 무식하게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싶었다. 보아하니 지애는 이제 두 조각도 채 다 안 먹은 터였다. 그녀는 주로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티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너무 무식하게 많이 먹었네요. 배가 고프다 보니...."

"괜찮아. 배 많이 고픈 줄 알았다면 좀 더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데로 갈 걸 그랬나? 저 앞에 매운 아귀찜 잘하는 데 있는데."

손을 내저었다. 매운 아귀찜이라니. 그런 흉악한 음식을 사람에게 먹이려 하다니.

"아뇨. 전 이런 게 더 좋습니다. 매운 건 못 먹어서요."

"그래? 아, 아까 매운 거 못 먹는다 그랬지? 음... 그런 건 좀 다르네...."

중얼거리는 지애의 말에서 묘한 기색을 느꼈다. 예전에 그녀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똑같다"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고.... 대체 누구와 날 비교하고 있는 걸까.

"저, 누나. 혹시 말이에요."

"응?"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쓰리 사이즈와 몸무게 빼고는 다."

정말이지 학교에서의 지애와 바깥에서의 지애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학교에서는 엄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철저한 학생주임 스타일의 교사였지만 밖에서는 그저 잘 웃고 이야기 잘 하는 젊은 아가씨일 따름이었다. 물론 나이야 나보다 많기는 하지만.... 웃는 그녀를 보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럼 일단 키를....."

"풋. 정말 물어보네? 여자한테 키 물어보는 것도 실례야. 작은 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꽤 된다고."

"아, 사이즈랑 몸무게는 안 된다고 하셔서...."

지애는 키득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넘기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석 보다야 작을 테지. 한 이십 센티 정도 차이 나려나? 한석은 키가 어떻게 되는데?"

"180 조금 넘습니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 181인가 182인가 했어요."

"휴우. 그러면 이십 센티도 더 차이 나겠다. 대충 그 정도야."

"예에."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집어 먹었다. 이거 은근히 맛있다.

"혹시 전에 사귀던 분도 키가 컸나 보죠?"

"음?"

지애의 얼굴이 딱 굳어졌다. 학교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반문한다.

"그걸... 어떻게 알아?"

맞구나. 헐. 찍었는데....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뇨, 전에 이야기할 때 다른 누군가랑 저랑 비슷하다고 하시고 오늘은 또 다르다고도 하셔서... 혹시 저랑 비슷한 분이랑 사귀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냥 한 번 어림짐작 해 본 거예요."

"그랬나, 내가?"

"네."

지애는 시선을 길 쪽으로 돌렸다. 지나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 거리에서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내가 남은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고 맥주를 비웠을 때 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한석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있죠."

그러나 그게 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날 좋아해주는 여자들. 난 그녀들이 다 좋은 걸..... 물론 정도의 차이라든가 대하기 어려운 태도의 문제 같은 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게 좋은 감정으로 대해주고 있는 이들이 전혀 싫지만은 않다.

"그러면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있어?"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도 있나? 좋으면 좋은 거지,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니. 지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찍어본다. 예전에 나로 하여금 처음 여자를 알게 한 그녀가 처해있던 상황이 떠올랐다.

"혹시 유부남이라던가...."

그러자 지애가 빙긋 웃었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여기, 맥주 주세요."

지애가 맥주를 추가하는 동안 남은 맥주를 마셨다. 새 맥주가 왔다. 손으로 따는 거라 내가 휴지로 뚜껑을 잡은 다음 열어서 지애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맥주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래, 한석이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았어. 근데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이야.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해 줄게. 더는 묻지 말고."

"네에."

살짝 웃음을 곁들여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더는 묻기 미안했다. 화제를 돌려 요새 유행하는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을 좋아한다고 했고 이번에 앨범을 낸 이승환도 좋아한다고 했다. 난 딱히 좋아하는 가수는 없지만 그저 들리는 대로 흥얼거리는 편이라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가게에서 "오늘도 난"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이거 제목이 오늘도 난 맞죠? 이승환이 부른..."

그러자 지애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휴우. 한석이는 가수 정말 모르는 구나. 제목은 맞았는데 가수는 틀렸어."

"그런가요...."

역시 모르는 분야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이 꼴이 난다.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지려 하는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승철이죠. 세 글자 중에 두 글자는 맞추셨네요, 선생님."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서 있는 유미가 있었다. 유미는 턱으로 나와 지애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물어본다. "애. 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미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으음.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건 왜일까. 바람피우다 걸린 남편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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