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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중후반 정도요?"
"거의 맞추셨어요. 좀 더 자세히 맞추시면 상 드렸을 텐데 아깝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 앞에 놓인 마티니를 다시 마셔본다. 섹시한 연상의 여자와 바에 앉아 즐기는 마티니라....쌉싸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달콤하다.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셨다고 하는 풍미가 느껴진다.
"제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유진이를 낳았어요."
물론 본드걸이 애엄마는 아니었겠지. 어디 보자... 지금 유진이가 열일곱 살이니까 스무 살에 걔를 낳았다면 지금 유미 나이는....
"그렇게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바심 때문이었답니다."
"조바심이요?"
"그래요, 조바심. 난 알고 있었거든요. 내가 언제 끝나게 되리라는 걸. 내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보이지 않게 되는가를 말이에요."
영문 모를 소리가 쏟아진다. 들고 있던 마티니 잔을 내려놓고 유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혹시 선영이가 그런 이야기 안 하던가요? 제가 선생님 앞날을 본 적이 있다고?"
"비슷한 이야기를 .. 한 번 들었습니다. 그냥 덕담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후후. 그래요. 아주 좋네요.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아요. 괜히 그거에 목매다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거든요. 사람의 앞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뭔가 철학적인 이야기가 쏟아진다. 문득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정말 유미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난 이 세상에서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어요. 즐겁게 살고 싶기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죠. 내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걸 다 하려 해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더라구요. 만약 남들 다하듯이 이십대 후반에나 시집가서 애 낳고 그러면 그 애가 채 사춘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내가 떠나버릴 테니까.. 그게 너무 가엽기도 하구요."
난 점점 더 의아해졌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투는 흡사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아니면 날 정해놓고 죽으러 가려는 사람의 말투. 뭐지, 이건 대체?
"자...잠깐만요. 유미 씨 말을 듣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데요? 유미 씨가 유진이를 빨리 낳은 건... 그러면 자신이 죽기 전에 아이가 좀 큰 상태이길 바라서... 그래서 그랬단 말입니까? 지금 말하는 게?"
"역시 대학생이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시네요."
"그런 터무니없는...."
"터무니없다고요? 후후.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이 보는 것이 없는 거라 치부하면 안 되죠.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걸어가고 있는데 눈 멀쩡한 사람이 장님, 당신 10미터 전방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소 라고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장님이 지팡이를 뻗어 고작 1미터 앞을 짚어보고 예끼 이 사람아, 내 앞에 구덩이가 없어 라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웃길지 말이에요."
"....."
"난 그 웃긴 걸 항상 보고 살아왔어요. 난 그저 웃기니까 웃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장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새삼 유미를 다시 쳐다본다. 언제나 웃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웃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 장면은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역시 장님이기에. 그런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눈 뜬 자"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하시는 거죠?"
"이것도 맞춰보세요."
"모르겠는데요."
"에이. 대답이 싱겁다. 그럼 저도 모르는 걸로 할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행동에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말 해봐요. 선생님은 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죠?"
"그야 유미 씨가 마시자고 했으니까..."
"그건 저의 권유이지 마시겠다고 선택한 사람은 선생님이에요. 타인의 권유가 본인 행동의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모든 건 다 본인이 선택한 거라고요. 남의 탓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
유미가 이렇게 논리정연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손가락으로 잔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던 그녀는 조용히 뇌까렸다.
"글쎄요. 왜 일까요. 곧 죽을 사람의 변덕이랄까. 아니면 딸내미에 대한 질투? 후후."
곧 죽을 사람이라니.... 자신의 죽을 날을 안다는 건 어떻게 죽는지도 안다는 거잖아. 만약 병에 걸리는 거면 미리 치료받을 수도 있고 사고가 나는 거라면 그걸 피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자신의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죽음을 피하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는 거지? 이 점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유미는 너무 뻔한 질문은 지겹다며 기지개를 폈다. 바텐더를 불러 마티니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녀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무슨 영화나 소설처럼 몇 날 며칠 어느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다, 뭐,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게 아니에요. 막연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렇지만 막연한 가운데에서도 제가 아는 게 있는 거고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유진이 어머님이라면 구덩이를 피해갈 수 있잖아요."
"제가 구덩이를 가지고 예를 들었더니 너무 거기에 얽매여 계시군요. 그건 좀 현실감 있게 비유를 하느라 그렇게 말한 거구요, 솔직히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은 결코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에요. 빛깔이라고 해야 하나 냄새라고 해야 하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창에 비치는 어릿한 그림자라고 해야 하나. 무엇 하나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살면서 그런 경우 없나요?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를 이상한 냄새. 딱히 나쁜 냄새도 아니고 좋은 냄새도 아니지만 이건 이거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냄새 있잖아요. 그런 냄새 맡아본 적 없어요?"
".....아마도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쩌면.."
"그래요. 제가 느끼는, 아니, 이 경우에는 맡는 거라고 해야 하겠죠? 미래라는 건 아까 말한 그런 어렴풋한 냄새가 적어도 수만 배 정도 희석된 정도의 냄새라고 보시면 되요. 게다가 냄새라는 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실려 다니잖아요?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를 바람에 쓸려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도무지 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감각의 영역이었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유미의 말은 꽤 인상 깊었다.
"선생님. 미래는 결정되어 있기도 하고 결정되어 있지 않기도 해요. 그게 미래예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하는 거예요. 전 가방끈이 짧아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그렇다고 하더군요. 한자로 아닐 미. 오다 래. 합쳐서 미래."
"미래, 미래....라구요."
미래의 한자 뜻을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게 있어 그건 그저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단어였으니까. 그러나 유미가 바라보는 미래란 단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래요. 어감 참 좋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무서워하고 기대하기도 하고 점쳐보기도 하고 그러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피해갈 수도 없이 올 것을, 사람들은 왜 굳이 그걸 알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어요. 아아. 저야. 뭐. 그냥 알지만."
나 역시 마티니를 비웠다. 도저히 술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티니의 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유미는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난 선생님이 좋아요."
".......옛?"
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화제 전환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유미의 말투는 평온했다. 평소처럼 치근덕거리며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젊고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밤일도 잘 할 것 같아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나 같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죠. 아마, 기회가 있었다면 선생님을 쓰러뜨리고 올라탔을지도 모르겠군요."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라 무어라 대답을 못 하겠다. 앞부분의 그 이유는... 크흠. 흠흠. 그나저나 잘 생겼다니... 그런 소리는 난생 첨 들어본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녀 같은 사람이라는 건 방금 전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알았다고 치자. 대체 나 같은 사람들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지....? 그녀는 내 의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길이 있어요. 아까 말한 구덩이를 다시 예로 들자면... 선생님이 걷는 길은 무수한 갈래로 뻗어 있답니다. 어떤 길에는 끝도 없는 무저갱이 기다리고 있지만 또 어떤 길에는 꽃이 가득가득 피어있죠. 어떤 길은 비단이 깔려 있고 또 어떤 길은 가시덩쿨이 무수하게 자라고 있죠. 그 아찔함. 길과 길이 갈리는 그 순간이 선생님에게 놓여 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요?"
"하하. 그렇죠.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누구나 그 정도의 큰 차이가 있진 않아요. 더군다나 선생님의 길에는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특별한 사람이요?"
"그래요. 선생님이 그 사람의 손을 잡는 순간 선생님의 길이 정해지는 거죠. 그런 드라마틱함이 뻔히 보이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에겐 선생님이 아주 못 견디게 재미있는 대상이 되는 거라구요.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그 다음 편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자나요? 드라마도 다음 편 예고가 있고, 영화도 속편을 암시하며 끝날 때가 많죠. 그럼 궁금해지고 관심가고 그러잖아요. 그게 선생님의 매력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선생님 같은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요. 보고 있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으니까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재미있다고요."
문득 선영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유미의 이야기를 전하던 선영은 그렇게 말했다. 나라는 녀석은 휘둘리기 좋은 녀석이라고.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지만 유미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면 딱 그 이야기다.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여자로 한정한다면 더 그렇다. 어떤 여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단 말인가? 상상조차 어렵다. 내가 느끼는 내 인생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유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선생님 원래는 여자들에게 인기 없었죠?"
"네에? 아... 뭐....."
지독히도 정확한 사실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노라니 유미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가슴 근처를 가리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생님의 봉인이 풀렸어요. 옛날이야기 중에 뭐 그런 게 있죠? 판도라의 상자인가 뭔가... 그게 맞나 모르겠는데, 암튼... 어떤 분이 선생님을 오픈해버렸죠. 아주아주 복잡하고 깊은 어둠을 가진 여자분이에요. 그녀가 기폭제이자 오프너였어요. 꾹꾹 눌러 담은 맥주병의 뚜껑을 열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때부터 선생님의 갈림길이 시작되었죠."
오픈? 가능성?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잔뜩 이었다. 만약 유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면 난 전혀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치만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날 오픈한 여자... 복잡하고 깊은 어둠을 가진 여자... 유미는 지금 지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지혜를 본 적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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