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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73화 (7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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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너머 날렵한 눈매를 가진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날카로워 보보였다. 뽀얀 피부 위로 자리 잡은 이목구비도 선명하다. 그러나 표정이 워낙 차가워서 인간미는 별로 없어 보였다.

"그렇습니다만...."

"손하영이라고 합니다. 박효진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표정과 달리 퍽 공손한 태도로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명함이 없기에 그저 받기만 했다. 받아들고 읽어보니 거기에는 국내 유명한 법무법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녀의 직책이 명시되어 있었다.

"팀장 대리... 손하영 변호사님?"

"예. 가사 소송 및 재산분할 소송 전문입니다. 이혼하실 일이 있거든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중지와 엄지를 펼쳐 안경을 고쳐 올리는 그녀의 태도는 딱히 위압적이라거나 무서워 보이진 않지만 함부로 범접 못 할 아우라가 있었다. 그나저나 아직 결혼도 안 한 사람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와 동시에 박효진 씨의 뒤치다꺼리... 아니, 서포터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뒤치다꺼리, 방금 분명히 뒤치다꺼리라고 말했다.

"그런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오늘 원래 효진 씨와 약속이 있으셨다구요? 맞습니까?"

"예, 그랬죠."

오늘 효진과 만나 지혜를 찾아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안 오고 뭐하는 거야, 이 녀석은.

"그런데 효진 씨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함께 가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걸 전하러 일부러 오신 거예요?"

"이딴 사소한 일을 하려고 제가 올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일은 일이니까요. 그리고 덧붙여 한석 씨를 끌고 오...아니, 모셔 오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공손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꽤 야박한 말투를 은근히 섞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무심결에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딜 가는데요?"

"어디라고 말을 하면 한석 씨가 따라오지 않을 테니 그냥 닥치고 따라오라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따라오지 않는다면 지금 다니시는 학교에 사람을 풀어 한석이 물건 사이즈를 불어버리겠다고...."

순간 날 바라보는 유진의 시선이 싸늘해졌다는 걸 곧바로 느껴졌다. 주위 온도가 실제로 내려갔다! 한 순간에 온몸이 얼어붙을 지경이다.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쿨럭! 아, 아니. 그런 이야기를 무슨 길 한복판에서!"

"그럼 차에 타시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유진이를 쳐다보았다. 유진이는 하영의 난입에 꽤 불쾌한 듯 보였다. 게다가 방금 나온 이야기의 내용을 눈치 못 챌 아이도 아니다.

"저기, 유진아... 저기 말야."

"아, 몰라요. 아저씨 마음대로 해요!"

유진은 소리를 꽥 지르고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렸다. 하영이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덧붙여 모양도 꽤 괜찮으시다고...."

"타요! 타면 되잖아요!!"

하영의 차는 검정색 대형 세단이었다. 내가 조수석에 타고 뒤이어 운전석에 탄 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뒤에 안 타시구요?"

"네? 뒤에 타야 돼요?"

"운전 중인 제 다리를 훔쳐보려고 앞에 타신 게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으흠...."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한다. 다리를 쳐다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잖아! 은빛 정장 차림의 그녀는 치마 길이가 무척 짧았다. 무릎 위 20센티미터는 충분히 넘고도 남을 정도의 미니스커트였다. 그런 차림으로 운전석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허벅지가 상당히 드러나게 되었다. 몹시 매끈하니 아주 잘 뻗었다. 잠깐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하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헛기침을 하며 애써 앞을 바라보았다.

"다 보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하영이 모는 차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 가는지 정말 이야기 안 해줘요?"

"도착하면 저절로 알게 되니 애처럼 굴지 말고 기다리세요."

"......네."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별로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신기한 화법이었다. 하영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 고급 한식당이었다. 현아가 한식을 좋아한다는 소리에 터무니없이 비싼 곳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었던 태근이 형 덕분에 가본 적이 있다.

"여기입니다."

"여기서.... 밥이라도 먹자고 절 이렇게 데려온 건가요?"

그러자 하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여기가 한 끼 먹는데 얼마 드는지는 알고 계세요?"

"비싸겠죠. 한 번 와봤습니다. 계산은 직접 안 했지만..."

그러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루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부티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전혀 여기서 밥 먹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

"일단 밥 먹는 건 아니니 따라오세요."

"네."

하영은 날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배인이 나와 그녀를 영접한다. 하영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지배인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하영이 내게 돌아와 말했다.

"매화실이라고 하는군요. 이쪽입니다."

여러 개의 작은 정원과 별채로 이루어진 곳이라 안내 없이 돌아다니면 길 잃기 딱 좋은 곳이다. 그녀는 나를 "梅花室"이라고 적힌 별채 앞에 데려다 주었다.

"그럼 전 나가서 시동을 걸고 있겠습니다."

"시동이라뇨? 바로 가야 돼요? 밥 먹는 것도 아니라면 여긴 왜 오는 건데요?"

"일단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시면 효진 씨가 알아서 응해줄 겁니다."

힘차게? 그나저나 저 안에 효진이가 있다는 이야기로군. 좋았어. 사람하고 약속까지 해놓고 막무가내로 파토를 낸 책임을 단단히 따져 물을 테다. 나는 장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미닫이문만 아니라면 발로 뻥 차면서 들어갔겠지만 문을 옆으로 세게 쾅 여는 것으로 대신한다.

"인마, 저 사람 기다리래놓고 여기서 대체 뭐...."

평소 효진에게 대하듯 거침없이 소리 지르며 들어가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우뚝 멈추었다. 효진이가 앉아 있는 거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 앞에 마주 앉아 있는 허여멀건 한 얼굴의 남자는 전혀 예상치 못 했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

남자와 내가 동시에 서로의 정체에 대해 고민한다. 남자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고급 식당에서 효진이를 만나고 있을까. 게다가 효진이는 평소 입던 빈티지 티셔츠 같은 건 어디다 팽개쳐두고 저렇게까지 나풀나풀 거리는 블라우스를 어여쁘게 차려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걸까. 눈에 보이는 게 의문투성이라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 때였다.

"자기야! 여긴 어쩐 일이야!"

효진은 얼굴 가득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털털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다. 순간 효진이가 아닌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대답이 나와 버렸다.

"어...어쩌기는.... 니가 여기에 있다고...."

그러자 효진이 내게 갑자기 안기며 얼굴을 품에 묻었다.

"미안해. 자기한테 미처 말도 못 하고 여기까지 와버려서..... 결코 내 본심이 아니었어. 난 언제나 자기뿐이라고. 그러니까 용서해 줄 거지?"

"뭐...뭐라는 거지?"

효진은 내게 안긴 채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광 씨!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미 몸도 마음도 이 분에게...."

얼굴이 하얀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노려보는데 기세가 상당히 무섭다. 그가 무서운 말투로 말문을 연다.

"당신인가?"

"나?"

인마, 다짜고짜 당신이라고 하면 내가 뭐라고 답하냐. 내가 너랑 여보 당신 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이 효진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효진 씨를 포기하지 않아."

제법 비장한 각오로 말을 하고 있다만 난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효진은 내려다보니 녀석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껌뻑이고 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이 녀석....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남자를 향해 손을 내저으려고 팔을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효진이 그 팔을 끌어안더니 소리친다.

"자기야!! 안 돼! 또 사람을 치면.... 아직 출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가중처벌 되면 또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어!"

"에엑?"

난 이게 뭔 소리냐 싶어 뜨악해서 효진을 쳐다보고 있었고, 남자는 좀 다른 의미를 담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다 주춤하는 걸 봐서 효진의 공갈이 먹히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좀 무섭게 생긴 건가.

"어서 나가요. 그리고 진광 씨. 그럼 이만.... 죄송해요. 앞으로는 뵐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연한 말투를 남기고 방을 나서는 효진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다. 효진은 내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고 밖에 나가자마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내던져지다시피 한다. 차가 출발하자 옆에 앉은 효진을 닦달했다.

"인마! 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을 하란 말야!"

그때까지 정말 조신한, 약간은 새침한 표정으로 있던 효진은 원래의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한바탕 크게 웃어버렸다. 내 등까지 팡팡 쳐가며.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하라고!"

"푸하하..하하.. 아까 그 남자 표정 봤어?"

"표정?"

자못 비장한 눈으로 나와 효진을 바라보던 그였다. 효진은 한참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나온 모양이었다. 마스카라를 어찌나 진하게 했는지 평소와 눈매가 완전히 달랐다. 녀석은 무언가 꺼내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네. 지가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라고...."

"인마, 혼자만 웃지 말고.... 좀 설명을 해줘."

효진은 잠깐 기다려보라더니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서랍에서 화장수와 솜을 꺼냈다. 조수석 뒤쪽을 당기자 거기에 거울이 나오면서 간단한 화장대가 차려진다. 헤에. 비싼 차에는 저런 옵션도 있는가 보군... 효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얼굴의 화장을 지웠다. 그러자 평소의 얼굴에 한결 가까워졌다. 객관적으로 보면 화장을 한 얼굴이 더 예뻤지만 나에겐 낯선 모습이라 영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녀석은 화장품을 챙겨서 원래 자리로 넣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말야. 내가 한석이 좀 이용해 먹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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