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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응. 이용. 내가 여태까지 선 자리에서 만난 놈 중에서 저 놈이 제일 질겼거든. 아무리해도 떨어져 나가질 않기에 남자가 좀 필요했어.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언니한테 부탁했지. 좀 데려다 달라고."
그러면서 효진은 입고 있던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벗기 시작했다. 녀석의 레이스 가득한 브래지어가 보이기 시작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근데 어째서 브래지어까지 벗는 거냐!
"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언니. 제 티셔츠 있죠?"
"여기 있습니다."
운전 중이던 하영이 조수석 아래 있는 쇼핑 가방을 꺼내어 효진에게 건넸다. 효진은 밋밋한 디자인의 브래지어를 꺼내 착용하고 곧 셔츠 하나를 꺼내어 그 위에 입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과정을 다 아는 이유는 내가 뒤통수에 눈이 달려서가 아니라 썬팅이 워낙 잘 되어있는 유리라 뒷면에서 벌어지는 난데없는 스트립쇼가 거울처럼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사가 잘 되는 유리창이라니.....참 감사합니다.
"휴우. 이제 좀 편하네. 어이, 한석 군. 돌아봐도 돼. 뭘 새삼스럽게 그래."
"인마, 그래도 그렇지....."
우리 둘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이러지 않는다. 효진이랑 나랑 뭐, 더한 것도 서로 본 사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운전석 쪽에 있는 하영을 힐끔거리다가 룸미러를 통해 이쪽을 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안경 너머 몹시 매섭게 생긴 눈이 날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어 앞을 본다. 내가 하영을 신경 쓰는 걸 눈치 챘는지 효진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언니도 다 알아. 걱정 마."
효진은 내 등을 두드리며 연신 괜찮다고 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효진이가 괜찮다고 말하기에 더 불안했다. 게다가 "다 안다"고? 이런.... 안 그래도 아까 하영이 날 끌고 올 때 사이즈니 모양이니 했던 소리를 상기한다면.... 효진이 이것이 대체 어디까지 말했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걸 그냥 두었다가는 더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뭐, 지혜한테 가보자고 안 했냐, 니?"
"아, 그랬지. 근데 지혜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당분간은 좀 곤란하다네. 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서 집도 엉망이라고."
"으음...."
안 그래도 남의 신혼집에 너무 염치없이 찾아가는 건 아닐까 싶어 저어되는 게 없잖아 있었다. 효진에게 여름쯤 가보자고 했다. 교생실습 끝나고 나면 또 바로 시험이고 졸업 준비도 해야 되는 터라 일정이 빠듯했다. 효진은 조금 불만인 듯 했지만 그래도 혼자 가기는 싫은 모양인지 선선히 동의했다.
"언니, 저희 저쪽 마로니에 공원 앞에 내려주시고 먼저 들어가세요. 토요일인데도 불러내서 미안해요."
"니 뒤처리는 항상 내 몫이니 딱히 미안할 건 없어. 어디 너만 그러니."
아까 나한테 대할 때는 꽤 공손하면서도, 물론 그러면서 한 번씩 이상한 말투가 섞여 있었지만... 지금 하영이 효진에게 대하는 말투는 굉장히 친근했다. 효진도 그녀의 말투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러죠. 헤헤헤."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 팀장급 되는 여자와 이 대책 없는 아가씨와 대체 무슨 관계일까 궁금했다. 난 궁금한 걸 못 참는 편이라 차에서 내려 효진과 걸어가며 바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꽤 간략하게 대답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분인데, 나랑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거든, 뭐."
"회사?"
"응. 우리 회사라고 하니깐 좀 이상한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 아버지 회사지."
"너희 아버지 회사가 법무법인이야?"
"아니, 법무법인은 아니고 그냥 땅투기 많이 하는 회사인데 저쪽은 법률자문이고..."
뭔가 효진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너희 아버지 회사에 법률자문으로 일하는 변호사를 네가 불러다가 이런 식의 부탁도 하고 그런단 말이야?"
"언니 말로는 근로계약에 법률서비스 외에도 기타 용역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방금 변호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온 셈이다. 법률서비스야 대체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호사니까 도움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타 용역"이라니. 설마 방금 차에 태워다 주고 날 납치해가고... 그런 게 기타 용역이라는 건가. 거참, 특이한 녀석일세. 효진을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변호사를 불러다 운전기사처럼 쓴단 말이야? 하도 신기해서 효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녀석도 날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돈이 많은 게 아니라 우리 아빠가 돈이 많은 건지. 나나 오빠는 그걸 갖다 쓰는 거고."
"그게 그거지."
"왜? 흥미 있어? 돈이 많다니깐?"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전혀. 너나 태근이 형이나.... 너무 정신 없어서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 더 이상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 흥미 같은 건 사양하겠어."
"헤에~ 괜히 쿨한 척 하려고 하는 거 아냐? 한석이 가난하잖아."
"가난하다니! 인마! 그래도 다 쓸 만큼은 가지고 다니거든?!"
그러자 효진이 펄쩍 뛰어올라 헤드락을 걸며 유쾌하게 외쳤다.
"역시 너란 놈은...."
"이거 놔! 길거리에서 뭐하는 짓이야!"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두 번만 귀엽다가는 코브라 트위스트라도 걸 셈이야?"
간신히 효진을 떼어내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노라니 그녀가 뽀로로 뛰어와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하긴, 한석이가 좋아하는 건 돈보다도 지혜처럼 가슴 큰 애였지...."
"아, 쫌! 여긴 길거리야! 사람들 다니는 데라고!"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은 대학로였다. 주말 저녁이라 사람들이 가득했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딱히 우릴 의식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다. 효진은 전혀 개의치 않고 헛소리를 이어갔다.
"내가 확대수술이라도 받고 오면 좀 다르게 봐줄라나?"
"됐거든."
"요새는 기술이 좋아져서 감촉도 진짜 같다고 하더라. 어때, 나 한번 해볼까? 한석 군에게 사랑 좀 받아보게?"
"야야, 됐어. 됐다구."
그렇게 효진과 옥신각신하며 걸어갔다. 날 부려먹은 대가로 저녁을 쏘겠다기에 굳이 말리진 않았다. 최대한 비싼 것으로 뽑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로 유명 맛집 칼국수 집에서 평소라면 주문 못할 모둠 칼국수를 시켰다. 평소 먹던 해물 칼국수보다 2,000원이나 더 비싸서 그런지 건더기가 훨씬 더 많았다. 효진이는 소주도 한 병 시켰다. 둘이서 나누어 마셨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며 효진이가 기지개를 폈다.
"밥도 다 먹었겠다, 잠이나 자러 갈까?"
"어디서?"
뒤따라 나오던 나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는다. 어째 좀 불안하다.
"오늘 원래 지혜 보러 가기로 했잖아. 지혜는 못 봤으니 대신 지혜 침대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지혜 침대?"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효진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으음. 지혜 냄새가 많이 희석되었는데? 어째 다른 여자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다른 여자라니!"
뜨끔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효진은 드러누운 채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한석이가 저렇게 어벙해 보여도 의외로 여자가 꼬인단 말야... 거참, 미스터리해."
"뭐가 미스터리하냐! 나 정도면 어디가 어때서."
"어디가 어떻다니... 여러 군데가 어쩌고저쩌고.... 그렇잖아?"
뭐라 명확히 표현하는 건 아니었지만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폼이 어째 기분 나빴다.
"참나. 이래봬도 열심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건실히 살아가는 청년이라구."
"음. 그래? 그건 그렇지만 말야, 그게 매력 포인트는 아니잖아. 남자는 자고로..... 음....."
효진은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다시 묻는다.
"너 돈 많아?"
"........아니."
"시골집에 땅 좀 있어?"
"......소작하는데...."
"소작? 소작이 뭐야?"
이래서 서울놈들은....
"남의 땅에 돈 내고 농사짓는 거."
"우와. 그런 거 조선시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너, 죽을래?"
효진은 자신의 생사여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딴 질문하기 시작했다.
"직장이 빵빵해?"
"아직 대학생이잖아."
"아버지가 한 자리 하신다거나...?"
"......나, 아버지 안 계신데...?"
"어, 미안하다."
효진은 고개를 잠깐 꾸벅해 보이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이내 날 쳐다보며 말했다.
"것 봐, 가진 건 몸뚱아리랑 잘 생긴 아랫도리뿐이잖아. 그런데 여자들이 뭘 보고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이게 미스터리지, 아니냐?"
틀린 말은 없었지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잘 생긴... 그거라니.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그럼 넌 대체 나랑 왜 한건데?"
"내가? 너랑?"
"그래, 인마. 솔직히... 처음에 한 것도 니가 유혹하다시피 한 거잖아."
"그랬었나?"
"기억도 안 나는 거냐!"
"아니, 기억이 안 나긴. 잘 나지. 근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니까 궁금한 거야. 딱히 널 비꼬려는 게 아니라."
녀석도 나만큼이나 거짓말을 못 하는 녀석이라 말이 밉게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어서 녀석이랑 말싸움 해보아야 내 입만 아프다고 생각되었다. 그냥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효진은 내 팔 하나를 끌어다가 자기 베개로 사용했다. 그렇게 둘이 드러누운 채로 한참을 있었다. 나중에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효진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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